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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제-69화 (69/225)

69화 18. 망국의 황제 (4)

“왜 이런 짓을 한 거지?”

루페르트가 물었다.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다.

단지 한 명의 인간으로 궁금했다.

비슷한, 아니 그보다 못한 처지의 황족이 어떻게 이런 결말에 이르렀는지.

“그건 네가 뛰어나서다. 만족의 황제여. 네가 특출나기 때문에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이다. 네가 멍청하고 무능한 인간이라면 내가 나설 일은 없었겠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너의 제국은 무너질 테니.”

파비안 아비투스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이에 루페르트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특출나지 않아. 평범한 사람이다.”

“헛소리.”

파비안 아비투스의 동공이 수축됐다.

“저 도펠죌트너를 광인으로 꾸며, 내 함정을 파훼한 게 천재의 발상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루페르트는 힘없이 웃었다.

‘역시 그런 건가. 함정에 걸려든 건 나였던 건가.’

루페르트는 마를로네에게 꾸중을 듣고 있는 베르크 란을 응시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거야? 제국에서 목이 매달리면 어쩌려고!”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던 그녀는 눈가에 굵은 눈물방울이 맺힐 정도로 흥분한 상태로 거구의 조부를 올려다보며 꾸지람을 하고 있었다.

“황제 폐하 속이 좁을 줄 어떻게 아냐고!”

‘내 속 그리 안 좁단다…….’

고소와 함께 루페르트는 진한 한숨을 쏟아 냈다.

“내가 생각해서 움직인 게 아니야. 그가 혼자 꾸민 일이다.”

“뭐라고?!”

파비안 아비투스가 부릅뜬 눈으로 루페르트를 응시했다.

죽어 가는 와중에도 곧 그는 루페르트의 진심을 발견했다.

“그, 그런 건가. 너의 지시가 아닌, 독단으로 움직였다는 소린가……?”

낮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파비안 아비투스가 몸을 뒤집었다.

그가 웃을 때마다 활짝 열린 상처에서 핏물과 함께 내장이 흘러나왔다.

“하하하하…….”

기이하게도 파비안 아비투스의 표정은 어린애처럼 해맑았다.

승리감을 느끼는 것일까.

아니면 루페르트의 평범함을 알고 만족하는 걸까.

“제국 성인이다.”

파비안 아비투스가 웃는 얼굴로 루페르트를 돌아보았다.

웃음 너머 죽음의 그림자가 깔리는 게 선명하게 보인다.

“제국 성인이다. 내게 마법의 힘을 준 것은.”

“……제국 성인이라고?”

“그래, 너희 제국을 세운 자들이 그 제국을 끝장내려 하는 거지. 우리의 신 호라가 우리 제국을 버린 것처럼!”

파비안 아비투스의 동공이 풀렸다.

숨이 넘어가려 한다.

“누구냐? 너에게 힘을 준 제국 성인의 이름이?”

루페르트는 그를 붙잡고 흔들었다.

파비안 아비투스의 손이 루페르트의 뺨을 덥석 붙잡았다.

루페르트는 뜨겁고 끈적한 기운을 느꼈다.

피다.

룸 제국 마지막 황제 후손의 피가 그의 뺨을 적셨다.

“루페르트 가우저.”

“대답해라. 파비안 아비투스.”

“나를 황제라고 불러주겠나……?”

“……룸 제국의 황제여. 이러면 만족하나?”

“그대는 상냥하군.”

파비안 아비투스가 소리 없이 웃었다.

“지나칠 정도로 상냥하군.”

죽어 가는 황제의 눈앞에 뒤틀린 액자가 나타났다.

무수히 많은 끔찍한 그림으로 가득 찬.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보랏빛에 가까운 하늘과 하늘 위를 흐르는 하얀 구름, 그리고 그 하늘을 시기할 듯이 솟은 깎아지른 설산이 펼쳐져 있었다.

멸망한 제국의 황제는 혀를 차며 한숨을 내쉬며 죽어 가는 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산뜻한 미소를 머금었다.

미소를 머금은 채 파비안 아비투스가 말했다.

“매독의 아가티아.”

파비안 아비투스가 힘겹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가락엔 반지처럼 생긴가가 무언가가 스러지며 소멸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모래로 만든 밧줄 같다고나 할까.

파비안 아비투스의 고개가 꺾였다.

룸 제국 마지막 계보가 끊어졌다.

* * *

“뭐라고 책망하시든 다 받아들일 생각입니다. 하지만 감히 말씀드리길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다른 방법은 없었습니다.”

베르크 란이 건장한 상체를 숙인 채 사과했다.

루페르트는 쾌활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 염소 가면이 숨어 있는 걸 알고 있었던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바로 복귀할까 생각했지만, 그자를 발견한 이상 평범한 방법으로는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미리 전하께 자초지종을 말할 수도 있었지만, 우리 도펠죌트너들의 귀는 대단히 밟습니다.”

“강적을 속이려면 아군까지 속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실로 그러하군요.”

오판했다.

베르크 란의 정신이 꺾인 적은 없었다.

그가 광인 행세를 한 건 루페르트 일행과 합류하기 전 마법사와 그리고 그 염소 가면을 쓴 도펠죌트너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자가 어딘가 숨어 있으리라는 건 예측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더군요. 그때부터 의심했습니다. 그자가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다는걸.”

아무도 모르게 2차전이 시작됐다.

그리고 그 승리는 베르크 란에 돌아갔다.

그는 최대의 걸림돌인 마법사를 죽였다.

마법사가 죽었을 때 염소 가면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을 친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지겔슈타트가 깨어난 이상, 이제 루페르트 일행을 건드릴 수 있는 존재는 그리 많지 않다.

“고개를 드세요. 베르크 란. 당신은 가장 어려운 시기에 당신의 손녀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냈습니다. 이 공은 두고두고 잊지 않을 겁니다.”

루페르트의 한마디에 지난 모든 무례가 청산됐다.

아무도 그 결정에 토를 다는 이는 없었다.

심지어 도펠죌트너를 혐오하는 지겔슈타트마저도.

지겔슈타트의 관심은 베르크 란의 사면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

“매독의 아가티아? 제국 성인? 이해가 안 가는군요. 마법의 권능이라는 건 누군가 툭 던지듯 선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반역자의 손끝에서 모래시계 안의 모래처럼 흘러내리던 반지엔 분명 기묘한 마법의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어쩌면 그 마도구가 그 반역자에게 그토록 강대한 힘을 줬는지도 모르죠.”

“대학에선 제국 성인에 대한 정보가 없습니까? 최근 제국 곳곳에서 돌아다닌다는.”

한번 가볍게 떠보았다.

마법 대학에선 제국 성인에 대해 얼마나 아는지.

안타깝게도 지겔슈타트는 이 부분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는 듯했다.

“시대를 막론하고 제국 성인을 참칭하는 사기꾼들은 늘 있어 왔죠. 성인 숭배가 금지된 이후에도 곰팡이처럼 주기적으로 창궐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건은 제 생각을 아득히 뛰어넘는군요. 대학에 돌아가면 신중하게 동료와 스승과 더불어 논의할 작정입니다.”

“그렇군요. 힘써 주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전하. 왜 자칭 제국 성인이라는 자는 마법 봉인의 권능만을 준 걸까요? 다른 권능을 줬다면…….”

지겔슈타트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혼잣말을 했다.

“혹시 성격이 더러운 건가?”

그의 눈동자엔 마법사들만이 이해할 수 없는 미묘한 공감의 빛이 흘렀다.

곧 그는 아직 대화가 끝나지 않았다는 걸 알아차리고 황급히 사과했다.

“실례했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강력한 마법사라고 하나 본질은 학구파답게 궁금한 게 있으면 자기만의 세계로 빠지는 모양이었다.

루페르트는 지겔슈타트의 공 또한 치하해 주며 남은 여정을 부탁했다.

“추격자는 더 이상 없습니다. 적어도 가시거리 안엔 단 한 명도 없군요.”

한스 징펠만의 보고대로 추격자들은 종적을 감췄다.

그토록 집요하고 잔인하게 쫓아오던 자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것이다.

‘역시 마법사는 마법사라는 건가. 그 염소 가면이 강하다고 하나 지겔슈타트의 족쇄가 풀리니 가까이 올 생각조차 못 하는 걸 보면.’

남은 여정에 어려움은 없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장비를 점검하고 있자니 마를로네가 갑자기 이쪽으로 불쑥 다가왔다.

그녀가 루페르트에게 뭔가 내밀었다.

식고, 설익은 감자다.

아까 냄비에서 끓이던 걸로 보이는데 당시엔 몰랐지만 감자 곳곳에 변색한 부분이 눈에 띈다.

“뭐냐? 이건?”

“시장하실까 봐요.”

루페르트는 마를로네를 빤히 쳐다봤다.

‘이 녀석 눈치가 없는 건가?’

조금만 더 가면 제국 영내다.

루페르트가 신분을 밝히는 순간 귀빈으로서 최상급의 대접을 받게 될 것이다.

위장 안에 식고 설익은 감자를 위한 자리 따윈 없는 것이다.

“약간의 허기는 있지만 지금 들고 싶진 않군.”

루페르트는 단칼에 거절했지만 마를로네는 물러서지 않았다.

“모처럼 제가 드리는 선물인데.”

“곧 제국 영내에 갈 텐데 굳이 이런걸?”

“그래서 드리는 거예요.”

그제야 루페르트는 마를로네가 장난을 치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제 성의가 마음에 안 드세요?”

상상도 못 했다.

저런 무미건조한 얼굴로 장난을 걸어올 거라고는.

루페르트는 맥없이 웃으며 말했다.

“가서 네 조부나 챙겨라.”

“네-.”

얼마 지나지 않아 건너편에서 베르크 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안 먹어. 너나 먹어라. 아니 안 먹는대도?”

마를로네는 집요하게 베르크 란을 따라다니며 감자를 내밀었다.

그 모습을 본 한스 징펠만이 한마디 했다.

“저 아가씨, 오늘 기분이 좋은 모양이네요.”

“그런가요?”

“표정에 별 변화가 없는 대신 행동으로 기쁨을 표현하는 사람이 종종 있죠. 제 지인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스 징펠만이 게슴츠레 눈을 뜨며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저 아가씬 상당히 피곤해 보이는 타입이네요.”

루페르트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그 생각에 동의했다.

적당히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루페르트 일행은 여정을 재개했다.

목적지는 에반하우젠 백작령이다.

선두 그룹에 서 있는 베르크 란이 뒤를 돌아보며 손짓했다.

드디어 제국 국경에 도달했다.

루페르트는 감회에 잠긴 눈으로 점점 가까워지는 성벽에 둘러싸인 소도시의 풍경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처음 국경을 지날 때 이런 고생을 하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루페르트는 가슴 앞 텅 빈 허공을 자기도 모르게 어루만졌다.

‘여신님의 도움 없이 해냈다. 리히트보덴, 메헨부르그, 선조의 숲과 비교해도 조금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크나큰 위기를 극복해 냈어.’

여신의 도움 없는 승리.

이건 그 어떤 보상보다 달콤하리라.

물론 그 승리는 루페르트가 가지고 온 것이 아니다.

그 최대의 공로는 베르크 란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

손녀가 내미는 감자를 한사코 무시하거나 거부하며 베르크 란은 뒤로 물러나 자신 앞에서 걸어가는 루페르트의 뒷모습을 늘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노려보았다.

“뭘 그렇게 노려봐?”

한참 동안 따라다니며 괴롭히던 마를로네가 베르크 란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저분이 약속을 안 지키기라도 할까 봐?”

“권력자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경우는 흔하디흔한 법이지.”

“하긴 저 사람도 슈발츠마인 사람이었지? 그 할망구와 같은.”

“그걸 떠나서.”

베르크 란은 앞서가는 루페르트에게서 시선을 떼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굳은살과 흉터로 가득 찬 거칠고 큰 손.

여간한 인간의 얼굴 정도는 한 손에 들어오는 그 큰 손이 가볍게 경련했다.

“저 황제, 잘할 수 있을까?”

베르크 란은 기억한다.

그가 모시던 선제, 철혈대제의 모습들을.

소름 끼치도록 비정하지만 동시에 소름 끼치도록 효율적인 그의 방식은 옆에서 지켜보는 자들의 오금을 저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어떤 길로 가든 철혈대제는 늘 승리했다.

나중엔 약속된 승리에 대한 믿음이 충성의 발판이 되었다.

그에 비해 저 루페르트 가우저라는 뭐랄까, 기복이 심하다.

리히트보덴과 선조의 숲에서는 마치 미래를 내다보는 것 같은 통찰력을 보인 반면, 황궁과 다른 곳, 특히 붉은 산맥에선 범인과 다를 바 없는 판단과 행동의 연속이었다.

이따금 불안한 듯 가슴 앞에 보이지도 않는 무언가를 쓰다듬는 습관은 베르크 란의 의구심을 부채질했다.

“너는 어떻게 보느냐? 마리.”

베르크 란이 손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마를로네는 눈을 깜빡이며 앞쪽에서 걸어가는 루페르트의 옆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잘 모르겠어. 친한 척하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거 빼면. 아, 그리고 또 하나.”

마를로네가 루페르트와 베르크 란에게 권하던 감자를 덥석 깨물었다.

“재수 하난 지지리도 없는 거 같더라.”

그 말을 들은 베르크 란은 참지 못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그조차 웃음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정곡을 찔렀다.

뒤에서 들려오는 얕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루페르트를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재밌는 일이라도 있는 건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베르크 란의 조손은 루페르트가 쳐다보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무표정과 관심 없는 태도로 싹 돌아섰으니.

루페르트의 시선은 자연스레 앞으로 다시 향했다.

“전하. 이제 이 고생도 끝이군요.”

신비로움을 되찾는 지겔슈타트가 다가와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잠깐만요.”

루페르트가 손을 들었다.

모두의 발걸음이 멈췄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지겔슈타트와 한스 징펠만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루페르트의 시선은 도시, 정확히는 도시 옆에 펼쳐진 수많은 막사를 향하고 있었다.

“저건 군대 아닙니까?”

루페르트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이런 곳에 군대가?’

위기 감지가 발동한 건 아니다.

그건 본능적인 위기의 영역이다.

루페르트가 맡은 위기의 냄새는 그러한 위기와 종류가 다른 것.

음모와 공작의 냄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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