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18. 망국의 황제 (3)
“루, 룸왕이라고……?”
“우리가 쫓는 게 제국의 황제였다는 말인가?”
“이건 약속이 다르잖아!”
루페르트는 무너지는 사냥꾼들의 얼굴을 보며 담담히 일갈했다.
“너희들은 무엇인데 제국의 황제가 될 나를 위협하고 겁박하는가? 날 죽이겠다는 건가? 나는 곧 제국 전체의 군주이며, 나를 해하는 건 제국을 해하는 것이다. 일곱 개의 창을 적으로 돌리고 싶다면 계속해라.”
그 한마디는 이미 흔들리고 있는 사냥꾼들의 다리를 떨게 하고 물러서게 하기에 충분했다.
괄괄하게 마법사에게 대들던 우두머리마저 손을 덜덜 떨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그때 한 사내가 나섰다.
은 가면을 쓴 마법사다.
‘호오.’
적어도 저 마법사가 당시의 루페르트보다 낫다는 건 자명하리라.
그때 루페르트는 융커스 베샤문트의 기세에 눌려 아무 말도 못 한 채 근위대장의 뒤통수만을 쳐다보고 있었으니.
그 은 가면을 쓴 마법사가 루페르트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이자는 가짜 황제다. 얄팍한 술수로 투표 결과를 조작해 불법적으로 선거에서 이긴 가짜 황제다. 지금쯤 테타우에서는 이 가짜 황제의 선거를 무효로 돌리는 회의가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동요하지 마라. 그대들은 제국을 적으로 돌리는 것이 아닌, 제국의 충신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니.”
그의 말은 흥미롭다.
그 발언은 루돌프가 말했던 음모와 거의 일치하고 있으니.
하지만 그보다 루페르트를 흥미롭게 한 건 내용이 아닌 은 가면의 목소리이리라.
‘이 목소리는……?’
틀림없다.
루페르트는 자신 앞에서 벌거벗은 등을 드러낸 채 수레를 끌던 깡마른 사내의 얼굴을 떠올렸다.
“흥미로운 이야기군. 가면을 쓴 마법사여.”
루페르트가 웃으며 말하자 은 가면은 날이 선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뭘 믿고 혼자 나선 건가? 가짜 황제?”
“나는 네가 누군지 알고 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다고?”
“그래. 마법사. 아니, 멸망한 제국의 말예여.”
쿡쿡 웃는 소리가 은 가면 너머에서 파도처럼 부서졌다.
곧 마법사가 은 가면을 벗었다.
은 가면 너머엔 루페르트가 예측한 것과 같은 얼굴이 고소를 머금고 있었다.
“내 이름을 기억하나? 만족의 황제여.”
옛 제국의 말예가 물었다.
루페르트는 지체없이 답했다.
“파비안 아비투스.”
옛 제국의 말예가 희게 웃었다.
“영광이군. 동시에 치욕스럽군.”
그 순간 루페르트는 느꼈다.
머리 위에서 흔들리는 작은 가지의 움직임을.
마를로네가 머리 위에 있다.
한스 징펠만의 피스톨을 손에 쥔 채.
* * *
파비안 아비투스에게 이 세상은 뒤틀린 액자 안의 그림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태어나기도 전부터 조국은 멸망했다.
남겨진 황실의 후손은 증오스러운 적의 볼거리로 전락했다.
새로운 황제가 즉위할 때마다 멸망한 제국의 후손은 말 대신 수레를 끌어야 했다.
대부분의 황제는 온화하거나 무관심했지만 그렇지 않은 자도 있었다.
어떤 황제는 채찍질을 가했다.
어떤 황제는 조상과 현재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모욕을 쏟아 내며 반응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어떤 황제는 학살했다.
철혈대제라 불리던 제국의 명군은 폐허에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던 옛 제국의 수도를 군홧발로 짓밟았다.
사람이 벽에 산 채로 못 박혔고 아이가 창에 꿰이고 여성은 끌려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의 부친도 그때 사라졌다.
가문의 시종이 말하길 제국의 병사들이 그를 끌고 갔고 산 채로 우물에 던져 놓고 사람 머리만 한 돌로 우물을 덮어 버렸다고 한다.
그 우물을 발견해 돌을 들어냈을 때, 파비안 아비투스는 뒤틀린 백골의 손가락에 낀 반지를 보고 그가 자신의 부친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그때 그는 강한 의문을 느꼈다.
왜 우리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가.
언제까지 이런 모욕을 당한 채 노예로서 살아야 하는가.
열등하고 한미한 족속도 아닌 그 위대했던 룸 제국의 후예가 말이다.
뒤틀린 액자를 바로 잡고 싶다.
파비안 아비투스의 평생을 망령처럼 따라다닐 목적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루페르트 가우저.”
옛 제국의 후예가 새로운 제국의 황제를 불렀다.
루페르트는 싸늘한 눈으로 파비안 아비투스를 노려보았다.
“복수를 하려는 건가?”
파비안 아비투스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지금 와서? 왜 천년 간 당하기만 하다 왜 하필 내 대에서 복수를 하려는 건가?”
“아직 너희 민족의 제국은 천년 기에 이르지 않았다.”
파비안 아비투스가 정정했다.
“아마 네 치세에서 달성하게 되겠지. 그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루페르트는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마법을 배운 건가? 명색이 호라의 제사장을 자처하는 룸 제국의 후예가?”
“스스로 배워 익힌 게 아니다. 받은 것이지.”
“받았다고?”
어감이 묘하다.
마법에 문외한인 루페르트지만 마법이라는 능력을 양도의 대상이 아니다.
그건 끊임없는 학습과 성찰을 통한 개화의 과정이지, 누군가 선물처럼 던져 주는 게 아니다.
피리스만 해도 갖가지 고생을 하며 마법을 익히지 않았던가.
그런데 저 사내, 파비안 아비투스는 그가 아닌 상식 너머의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누구에게 받았다는 건가?”
등줄기가 서늘해질 정도의 불길함을 느끼며 루페르트가 물었다.
무표정하던 파비안 아비투스의 얼굴에 비릿한 냉소가 떠올랐다.
“제국의 멸망을 바라는 사람으로부터.”
“제국의 멸망을 바라는 사람?”
루페르트의 언성이 높아졌다.
눈동자엔 지금까지 볼 수 없던 사나운 불길이 으르렁거렸다.
“그게 누구인가? 파비안 아비투스.”
루페르트가 싸늘하게 묻자, 파비안 아비투스는 거만하게 답했다.
“황제라고 불러라.”
“그래?”
루페르트는 실소를 머금었다.
‘대답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군. 그렇다면 좋다.’
황제가 손을 들어 올렸다.
“뭘 하는 건가?”
황제를 참칭하는 자가 물어보지만 루페르트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는 상황을 알아차렸다.
저 오두막 너머에서 마력이 감지됐다.
강력한 마법사 특유의 주변의 모든 마력을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강한 인력을.
파비안 아비투스가 조소했다.
“네 마법사는 내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파비안 아비투스가 지팡이의 끝을 바닥에 접지한 채 바닥을 중심으로 지팡이를 빙글빙글 휘저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분명히 느껴지는 소용돌이가 지팡이가 그리는 궤적 속에서 선명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역시, 이자가 지겔슈타트의 마법을 봉인한 당사자군.’
지겔슈타트를 움직이게 한 건 대상을 확실하게 정하기 위함이었다.
기껏 은 가면을 죽였는데 진짜 마법사가 뒤에 숨어 있으면 모든 게 허사니.
그건 루페르트가 가정한 첫 번째 불안 요소였다.
첫 번째 불안 요소가 배제됐다.
두 번째 불안 요소가 남아 있긴 하지만 이 세상에 위험 없는 승리라는 게 얼마나 되던가?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왼손을 내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마리.”
미리 준비한 죽음의 덫을 움직일 때가 왔다.
검은 그림자가 나무 위에서 은밀히 모습을 드러냈다.
사냥꾼들은 그제야 암살자의 존재를 눈치챘다.
평상시라면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타고난 생명 그 자체의 강함을 추구하는 그들의 감각은 불과 철의 형제단보다 훨씬 예리하니.
그러나 한스 징펠만이 뿌린 불화의 씨앗과 루페르트라는 존재가 그들의 감각을 마비시켰다.
그 찰나의 틈새를 통해 마를로네가 사각에 숨어들었고, 이제 황제를 참칭하는 자를 처단하려 한다.
총구가 파비안 아비투스의 심장을 정확히 향했다.
루페르트는 승리를 직감했다.
‘여기까지 왔다면 우리의 승리다.’
두 번째 불안 요소.
그것은 오두막에서 관측할 수 없는 지점에 숨어 있을 복병이었다.
특히 한스 징펠만을 죽일 뻔했던 총사와 베르크 란과 대등한 대결을 펼쳤던 도펠죌트너는 가장 위험한 적이다.
그들은 그러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탕!
용서 없는 총성이 머리 위에서 울려 퍼졌다.
찰나 속에서 루페르트는 파비안 아비투스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얼굴에 미세한 경악이 떠올랐다.
그도 발견한 것이다.
자신에게 날아오는 탄환을.
이건 막기 어렵다.
막을 수도 없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팅!
총탄이 허공을 갈랐다.
마를로네의 조준이 어긋난 것이다.
‘이 총, 왜 이렇게 화력이 강해?!’
가장 당황한 건 마를로네 본인이다.
한스 징펠만에게 그의 권총을 넘겨받을 때 짧은 경고를 들었다.
총이 반동이 대단히 강하니 사용하는 데 유의하라고.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화력과 반동이 강할 줄은 몰랐다.
그 계산 착오가 허공을 가르고 눈을 뚫고 땅속 깊이 박혔다.
하지만 그녀는 당황하지 않고 즉각 파비안 아비투스를 향해 비호처럼 쇄도했다.
‘총탄이 안 맞으면 칼로 베어 버리면 그만.’
루페르트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찌 됐든 그는 죽은 목숨이다.’
또 한 번의 승리를 기대하며 루페르트가 파비안 아비투스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으려 할 때였다.
발밑에서 무언가가 유령처럼 튀어나왔다.
찰나의 흐름 속에서 루페르트는 그 유령의 얼굴을 보았다.
“!”
그 유령은 말라비틀어진 염소 가면을 쓰고 있었다.
‘저 인간은?!’
틀림없다.
베르크 란을 저 지경으로 만든 장본인인 적의 도펠죌트너다.
챙강!
그의 검이 허공에서 쇄도하는 마를로네의 검을 가볍게 쳐 냈다.
마를로네는 사색이 된 얼굴로 지면에 처박혔다.
“제법 머리를 굴릴 줄 아는군. 대단히 인상적인 시도였다.”
염소 가면이 등을 보인 채 말했다.
그의 음성은 낮고 음울했으며 높낮이가 비인간적일 정도로 일정했다.
마치 어둠 그 자체를 목소리로 구현한 것처럼.
루페르트는 강렬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이 목소리는……?!’
염소 가면이 돌아섰다.
“허나 운이 나빴군. 황제.”
그때였다.
그와 루페르트 뒤를 검은 그림자가 스쳐 지나간 것은.
푹!
멀리서도 뚜렷이 들리는 살과 뼈가 관통되는 소리가 오싹하게 울려 퍼졌다.
“커억!”
파비안 아비투스의 등을 뚫고 칼날이 튀어나옴과 동시에 그의 몸이 번쩍 들렸다.
“끄으으으으윽!”
황제를 참칭하던 자가 입에서 피를 흘리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떨리는 눈으로 파비안 아비투스는 자신을 꿰뚫은 살인자의 얼굴을 간신히 눈에 담았다.
‘저, 저놈은?!’
루페르트는 충격에 빠진 얼굴로 자신 앞에 우뚝 선 초로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베르크 란. 당신이 어째서?!”
비호처럼 쇄도해 파비안 아비투스를 일격에 처리한 건 베르크 란이었다.
조금 전만 해도 광소와 폭언을 쏟아 내던 자가 마치 시공 그 자체를 뚫고 나온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등장해 적의 마법사를 끝장낸 것이다.
툭.
파비안 아비투스를 바닥에 내던지며 베르크 란이 루페르트에게 약식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의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루페르트의 눈동자에 갖가지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연기였나.’
베르크 란의 늘 분노에 불타는 눈동자가 염소 가면을 직시했다.
“다시 붙어 보자. 애송이.”
검을 쥔 오른손의 굵은 핏줄이 터질 정도로 불거졌다.
“이번은 전과 다를 것이니!”
염소 가면이 베르크 란을 노려본다.
일촉즉발의 상황.
염소 가면이 갑자기 손을 들었다.
동시에 멀지 않은 곳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
쐐액-
탄환은 루페르트와 베르크 란 사이를 가르며 지나갔다.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느끼는 가운데, 루페르트는 염소 가면이 뒤돌아 달아나는 걸 보았다.
주저 없는 후퇴.
베르크 란이 추격하려 하나 연이은 총성이 그의 발을 붙들어 매었다.
염소 가면의 후퇴는 지극히 합리적인 행위였다.
루페르트는 뒤쪽에서 후각이 마비될 정도로 강렬한 마법의 냄새를 감지했다.
뒤를 돌아보았다.
오두막 쪽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소용돌이를 지팡이 위에 몰고 다니는 사내가 천천히 그리고 오만한 발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지겔슈타트.
봉인이 풀린 사각의 마법사가 마침내 그 진정한 실력을 드러내려 하는 것이다.
“마, 마법사다!”
“히익!”
사냥꾼들이 부리나케 달아났다.
지겔슈타트가 손을 내저었다.
소용돌이치던 무형의 기운이 마치 도깨비불처럼 의지를 가진 것처럼 그의 팔에 모여들더니 그의 팔목에서 마치 탄환처럼 쏘아져 불덩이라는 실체를 갖추며 달아나는 사냥꾼의 뒤를 급습했다.
콰쾅!
숲 전체가 떨게 할 정도의 폭발이 일어났다.
지겔슈타트가 마치 멱살을 잡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무형의 기운이 하늘을 향해 뻗어 나가더니 이윽고 한줄기 벼락의 형태로 치환되어 달아나는 사냥꾼들의 정중앙을 강타했다.
한 명이 직격당해 마치 개구리같이 바닥에 엎어져 검게 그을렸다.
“아아아아악!!!”
사냥꾼의 숫자는 여전히 이쪽을 압도한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여기 있는 사냥꾼 아니 전체가 달려들어도 저 진정한 이능의 소유자를 이길 수 없다는걸.
이 싸움의 결과는 정해졌다.
루페르트는 죽어 가는 마법사, 아니 과거의 황족에게 다가갔다.
“끄으으으으…….”
아직 파비안 아비투스의 목숨을 끊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곧 죽을 것이다.
루페르트는 무심한 눈으로 패배자를 내려다보았다.
파비안 아비투스가 입에서 피를 흘리며 억지로 미소 지었다.
“기쁜가? 응? 만족의 황제여. 짐을 죽여서 승리감을 느끼나?”
이에 루페르트는 쓸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루페르트의 눈은 파비안 아비투스를 바라보고 있지만, 그가 실제로 보고 있는 건 또 다른 시공 속. 불타는 황궁 아래에 방치됐던 또 다른 황제였다.
그것은 바로 루페르트 가우저, 그 자신이다.
그가 파비안 아비투스에게 그토록 싸늘하게 대했던 이유다.
둘은 어떤 의미로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