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18. 망국의 황제 (2)
한스 징펠만이 상황을 정리했다.
오두막 바깥은 노련한 사냥꾼에게 포위되어 있으며 그 우두머리는 아마도 오각의 마법사다.
이쪽은 숫자에서 밀리고 있으며 원거리에서 대응할 수 있는 건 한스 징펠만이 전부.
그런데 그에겐 겨우 세 자루의 피스톨만이 있을 뿐이다.
지겔슈타트는 가장 강력한 전투원이지만 그의 마법은 적의 마법사에 의해 봉인된 상태.
지겔슈타트에 견줄 만한 전투원인 베르크 란은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지금도 오두막 밖에서 분노에 찬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다.
한편 이쪽의 식량은 부족하며 지원군이 올 희망도 없을뿐더러 적에겐 더 강력한 지원군이 아마도 근거리에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상황은 절망적이다.
그런데 한스 징펠만과 마를로네가 적의 균열을 찾아냈다.
그건 가장 강력한 적이어야 할 적의 마법사다.
“반쪽짜리 마법사라는 게 존재할 수 있습니까?”
루페르트가 지겔슈타트에게 물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면 반쪽짜리 마법사라는 건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볼 때 저자는 대학의 마법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외부의 마법사라는 겁니까?”
“어디서 저런 능력을 개화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제가 아는 어떤 전쟁 마법사와도 닮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닮았다는 건 마법의 파동, 혹은 후각이라 불리는 고유의 마법 발현 양식입니다. 그는 명백히 이질적이며 제가 알지 못하는 냄새를 갖고 있습니다.”
“마를로네.”
“네.”
“저자에게 죽음의 냄새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네.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아요.”
마를로네가 지겔슈타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에 비친 지겔슈타트 주변엔 검은 얼룩 것들이 세상 그 자체에 낀 곰팡이처럼 눌어붙어 있었다.
시야에서 검은 곰팡이를 지워 버리며 마를로네가 말했다.
“우리 마법사님에 비하면 말이죠.”
“마법의 권능을 익힌 자는 필연적으로 많은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겔슈타트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맡은 임무도 임무이거니와 사람을 죽인다는 행위가 다른 이에 비해 덜 수고롭기 때문이죠.”
그는 가볍게 지팡이를 흔들어 보였다.
아마 그 행동은 그 정도의 수고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암시로 보였다.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받았다.
“쉬우니까 많이 죽일 수 있다. 일리 있는 말이군요.”
“생각만으로 사람이 죽는다는 세계를 상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 사람이 남아나겠습니까?”
“그렇겠지요.”
“우리 마법사는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그 비슷한 수준만으로 적을 멸할 수 있습니다. 대학과 황궁의 엄격한 통제를 받는 저조차 적지 않은 사람을 해쳤는데, 저 사람은 대학 출신조차 아닙니다. 그 말은…….”
지겔슈타트가 말끝을 흐렸다.
“더 많이 죽일 수도 있다는 말씀이군요.”
“이 도펠죌트너의 말이 맞다면 저 마법사는 확실히 상궤를 벗어난 존재인 게 틀림없습니다.”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스 징펠만을 응시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적의 마법사는 이쪽을 멸할 기회가 있음에도 멸하지 않았고 자신의 부하들이 흥분해 화살을 낭비할 정도의 상황에 이르렀는데도 움직이지 않았다.
“제가 볼 때 능력이 없습니다. 저 마법사는. 우리 마법사님을 막는 재주 이외엔 말이죠. 한 번 더 쏴 보면 확실해질 겁니다.”
탕!
세 발째의 총성이 울렸다.
이번엔 죽이지 못했다.
적들도 바보는 아닌지라 나무 뒤에 엄폐를 확실히 했다.
한스 징펠만은 그럼에도 그중 한 사내의 손을 맞추는 데 성공했다.
“아아아아아악!!!”
찢어지는 비명이 산중에 울려 퍼졌다.
“하하하하하!”
베르크 란의 광소가 지나가듯 울려 퍼지는 가운데 마를로네가 두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뭐 하는 거야! 우리 편이 죽어 나가는데.”
“다 죽거나 다치는 걸 지켜볼 셈인가.”
가장 먼저 들려오는 건 뚜렷한 불만이다.
처음부터 이렇게 노골적이진 않았다.
하나, 둘, 그리고 셋.
한스 징펠만의 총격이 거듭되고 사상자가 생길 때마다 누적되어 이렇게 목소리가 커진 것이다.
“마법을 쓸 줄을 알기나 한 건가? 내가 아는 삼각의 마법사라면 진작 불덩이로 저 오두막째로 놈들을 날려 보냈을 텐데.”
“듣자 하니 드부이에서 제국 마법사의 마법을 봉했다던데.”
“직접 본 건 아니잖아?”
“적에게도 마법사가 있어. 봤잖아? 우리 법사님이 있으니 힘을 못 쓰는 거지.”
“마법사처럼 차려입기만 한 인간 아닐까?”
두 번째로 들려오는 건 아군 마법사에 대한 회의다.
그들은 그들의 마법사를 의심하고 있다.
한스 징펠만이 그러했던 것처럼.
얼치기 농부도 아닌 노련한 사냥꾼인 그들의 눈에도 적을 끝장날 기회가 보이는데도 뜸을 들이는 게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아마 그 불만과 의심은 이쪽보다 수 배는 될 것이다.
“저쪽도 저 은 가면을 의심하고 있는 눈치네요.”
그들의 불평은 루페르트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커졌다.
상관을 믿지 못하는 부하들.
그건 아이러니하게도 루페르트에게 가장 익숙한 것이다.
‘저 마법사, 부하들의 신뢰를 잃고 있군.’
부하들의 신뢰를 잃을 때 상급자가 할 수 있는 건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급자를 처벌해 본보기를 보여 기강을 유지하거나, 아니면 하급자의 불만을 날려 버릴 정도의 결과를 보여 주는 것이다.
루페르트는 둘 다 불가능했다.
과거의 황제 루페르트는 항명하는 장교를 처벌할 힘도 권한도 없었고, 그렇다고 자신이 앞장서서 테타우 성벽 밖에서 일어나는 전란을 다스릴 능력도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황궁 깊숙한 곳에 틀어박혀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건 두 번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경험이다.
루페르트는 시간을 들여 마법사를 지켜보았다.
5분이 지나도 10분이 지나도 마법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불만이 들끓는데도 우두커니 선 채 마치 석상처럼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불만 소리가 잦아들 무렵 루페르트 가우저가 한스 징펠만에게 손짓했다.
한스 징펠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탕!
네 번째.
이제 한스 징펠만에겐 피스톨 하나만이 남았다.
하지만 그 등가교환으로 또 하나의 사냥꾼이 쓰러졌다.
탄환은 유독 크게 불평을 늘어놓던 사냥꾼의 미간을 정통으로 꿰뚫었다.
“프라이헤르! 프라이헤르! 빌어먹을! 프라이헤르가 죽었어!”
카제인호프 수렵 길드는 불과 철의 형제단만큼 인기가 높지 않지만 붉은 산맥은 제국 남부에서 예민한 야수의 추적 및 은밀한 살인의 전문가로 나름의 명성을 떨치는 집단이다.
그들의 몸값은 결코 싸지 않다.
오히려 순이익은 불과 철의 형제단보다 클 것이다.
그들의 무기는 값비싼 화약과 총기를 필요로 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런 그들이 산중에서 양처럼 도륙당했다.
이미 셋이 죽었고, 하나가 상처를 입었다.
그들의 분노가 향하는 곳은 일차적으로는 미지의 저격수겠지만, 최종적으로는 그들의 무능한 고용주이자 책임자를 향했다.
“마법사 양반.”
나이 지긋한 초로의 사내가 등 뒤에 성난 사냥꾼을 거느린 채 마법사 앞에 섰다.
“당신이 뭐 잘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소. 나도 드부이에 있었으니. 그런데 지금은 뭐 하자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구만. 그 잘난 능력을 가지고도 왜 가만히 있는 거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페르트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항명 직전이군.’
루페르트는 석상처럼 서 있는 은 가면을 주시했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건가. 마법사 양반.’
이제는 마냥 입을 꾹 닫고 있을 수만은 없다.
뭐라도 해야 할 것이다.
“설인의 주의를 끌고 싶은가?”
마법사가 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루페르트의 귀까진 닿지 않았지만, 유난히 귀가 밝은 마를로네가 듣고 즉시 전해 주었다.
“라고 하네요.”
그녀의 말을 전해 들은 루페르트는 미소를 머금었다.
“설인! 그놈의 설인! 그래 설인이 무섭긴 하지. 하지만 설인은 이제 없잖소? 놈은 산 위로 진즉에 올라갔지.”
사냥꾼들이 비아냥거린다.
이 또한 루페르트에겐 익숙한 반응이다.
하급자의 신뢰를 완전히 잃었을 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얼마나 많은 비아냥과 비웃음이 루페르트 뒤에서 일어났던가.
“내 동료들이 두렵지 않은가?”
“헨드릭 빌렘 남작과 그 패거리는 확실히 두렵지. 한때 당신도 두려웠어. 하지만 지금처럼 당신이 우리를 이끌 자격을 보이지 않는다면 무시할 수밖에. 안 그렇소?”
루페르트의 눈앞에 쓰라린 장면 하나가 스치고 지나갔다.
비슷한 상황이 전에 있었다.
입장은 정반대였다.
루페르트는 그나마 남아 있던 명성을 바닥에 처넣은 사내의 행동을 기억한다.
그때는 단지 용병대장 정도로만 알려졌던, 제국의 파멸자 융커스 베샤문트의 행동을.
루페르트가 돌아서서 모두에게 손짓했다.
“내가 그들을 흔들어 보이겠다.”
황제가 말했다.
모두의 시선이 루페르트에게 향했다.
“내가 시선을 끄는 사이에 누구라도 좋다. 마법사를 죽여라. 마법사가 죽는다면.”
루페르트는 지겔슈타트를 온화하면서도 힘 있는 시선으로 응시했다.
“우리의 마법사가 나머지를 정리할 것이다.”
지겔슈타트의 눈동자에 벅찬 감동이 차올랐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위험합니다. 전하.”
지겔슈타트가 급히 만류하려 들었다.
“알고 있어요. 법사님.”
“하지만…….”
루페르트가 걱정하는 마법사를 향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나만큼 훌륭한 미끼가 따로 있겠습니까?”
불안 요소는 명백히 있다.
용병 집단 모독자들, 특히 베르크 란과 호각으로 싸운 도펠죌트너의 위치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마법사를 죽였을 때, 혹은 죽이는 과정에서 숨어 있는 그들이 갑자기 나타나 역공을 가한다면 루페르트의 반격은 완벽하게 분쇄될 것이고 루페르트의 목숨 또한 거기서 끝날 것이다.
그러나 다른 방법은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루페르트 가우저가 바라보는 세상 속에선.
‘시간을 지체해 봐야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다. 그들이 분열한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행동해야 할 때다.’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대단히 위험하다.
죽을 수도 있다.
그가 좀 더 특출나고 뛰어났다면 이보다 더 좋고 안전한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루페르트는 평범한 사람이다.
그도 알고 있다.
자신이 얼마나 범용한 재능의 소유자인지.
그런데 평범하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게 옳은 것일까?
평범한 자도 선택할 권리는 있다.
루페르트는 선택했다.
여신의 도움이 없어도, 회귀라는 보험이 없어도.
‘……가자. 루페르트 가우저.’
루페르트는 과감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마를로네가 장난기를 담아 말했다.
“황제 폐하의 출진! 황제 폐하의 출진!”
루페르트는 따르는 병사들과 나부끼는 깃발 하나 없지만, 황제는 누구보다 위풍당당하고 명예로운 걸음으로 적을 향해 다가갔다.
‘그때도 그랬었지.’
회귀 전 루페르트는 골트문트가 마련해 준 군대로 융커스 베샤문트의 반도를 포위했다.
누가 봐도 전투는 끝났고 그 승리는 꼭두각시 황제라 불리던 루페르트에게 작지만 확실한 명성을 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때 융커스 베샤문트는 대담하게도 홀로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가면을 쓰고 있기에 얼굴을 알아볼 순 없었지만, 자신을 겨눈 수백 개의 총구를 앞에 두고도 그의 발걸음은 의연했고 망설임이 없었다.
루페르트는 앞에 두고 융커스 베샤문트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 이름은 융커스 베샤문트. 너의 제국은 내 검 아래 파멸할 것이다.”
수백 개의 총구가 흔들렸고 융커스 베샤문트는 루페르트에게 뛰어들었다.
전열이 무너졌고 포위당한 반도들이 역공을 가했다.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반도를 놓쳤다.
황제 루페르트 가우저의 정치적 생명이 끝장나는 순간이었다.
‘융커스 베샤문트. 너에게서 배우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군.’
마법사를 둘러싼 사냥꾼들이 루페르트를 발견했다.
“누군가 온다!”
“뭐 하러 오는 거지?”
“무기는 없어.”
사냥꾼 우두머리가 부하에게 명했다.
“뭐 하러 온 놈인지 물어봐라.”
사냥꾼 하나가 멀리서 경박한 목소리로 물었다.
“뭘 하러 온 거냐? 제국 놈. 정체를 밝혀라!”
이에 루페르트는 기다렸다는 듯 어깨를 펴고 흉중에 오래전부터 머금고 있던 용암의 숨결 같은 말을 한마디 한마디 뚜렷하게 토해 냈다.
“리히트보덴의 자치 총독, 위버하임의 남작, 슈발츠마인의 선제후이자 노예제 티그리트께서 세운 유일하고 적법하며 축복받은 천년 제국의 적법한 후계자 룸왕 루페르트다.”
사냥꾼들의 얼굴에 일제히 경악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