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18. 망국의 황제 (1)
한 번 꺾인 마음에서 새어 나오는 광기는 쉬이 가라앉지 않는다.
눈앞에 가시적인 위기가 닥쳐왔음에도 베르크 란의 헛소리는 더욱 심해졌다.
“끝났어! 이건 프라이베르그 전투보다 더 상황이 안 좋아! 최소한 프라이베르그 때는 적어도 포병은 압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무어냐? 우리가 적들보다 나은 게 무엇이냐? 우리에게 상승 무패의 장군이 있기라도 한 건가? 숲속에 숨겨 둔 기병대가 있기라도 한 건가? 있다면 내게 보여다오!”
루페르트는 조용히 베르크 란의 눈을 보았다.
여전히 제대로 마주 보기 어려운 분노로 끊임없이 이글거리는 암녹색 눈동자다.
희미한 공포가 보인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공포만이 아니리라.
손녀와 색채가 같은 그 눈동자 안에선 또 다른 분노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
루페르트가 베르크 란에 대해 아는 건 그다지 많진 않지만, 그는 그 분노의 정체가 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가면을 쓴 남자에게 분노를 느끼는 건가.’
황제의 챔피언이라 불린 최강의 도펠죌트너였다.
영락했다고 하나 그 자존심만큼은 꺾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슈발츠마인 선제후 쟁탈전에서도 나름 저명한 도펠죌트너가 베르크 란을 보는 것만으로 전의를 꺾고 자신의 귀를 스스로 잘라 냈다.
그토록 강한 자가 자기도 모르는 낯선 자와 대등하게 싸웠다.
지겔슈타트의 말이라 걸려들어야겠지만, 그 싸움에서 베르크 란은 밀리는 모양새였다고 한다.
실제로 베르크 란의 주군이었던 루돌프마저도 그의 패배를 점치기도 했고.
최강이었던 자존심마저 희미해진 것이 설인을 만난 공포에 더해 그의 마음을 더 거칠게 흔든 걸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던 중 한스 징펠만이 다가왔다.
“숫자는 열여덟. 대부분 카제인호프 사냥꾼이나 한 명 하얀 로브를 걸친 사내가 있습니다.”
한스 징펠만은 최초의 영혼 동맹이다.
그의 덕을 숱하게 보았지만 루페르트는 지금 이 순간만큼 한스 징펠만이라는 사내의 진가를 느낀 적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저렇게 냉철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적의 숫자와 동향마저 파악하다니.’
의심할 여지 없다.
한스 징펠만은 최고의 정찰 자원이다.
제국의 눈, 아니 황제의 눈이랄까.
그의 강력한 화약 병기도 화약 병기지만 그의 진가는 비상한 기억력과 관찰력, 매의 눈처럼 날카로운 분석력에서 우러나오는 정찰력에 있으리라.
그것은 베르크 란도 지겔슈타트도 갖추지 못한 그만의 힘이다.
“다른 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저를 거의 죽일 뻔했던 배신자 형제도 보이지 않는군요. 어딘가 가까운 곳에 숨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습니다만 현재 우리 시야 안에 없는 건 확실합니다. 아마도 설인의 관심을 끌고 싶지 않은 것이겠지요.”
한스 징펠만의 설명을 듣고 감탄한 건 루페르트만이 아니다.
저 오만한 지겔슈타트마저도 조금은 얕잡아 보던 사냥꾼의 진가를 알아보고 찬탄을 금치 못했다.
“그럼 나머지 하나는 누구인가요?”
찬탄은 적극적인 질문으로 이어졌다.
한스 징펠만은 잘 정돈된 콧수염을 스윽 문지르고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 은 가면을 쓴 자는 카제인호프 사냥꾼보다 상관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확실치는 않지만, 그 은 가면은 아마도 적측의 마법사가 아닐는지…….”
“적의 마법사라고요?”
루페르트가 물었을 때 바깥에서 또 한 번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법사! 우리의 마법사보다 강한 마법사!”
베르크 란이다.
지겔슈타트는 분노를 드러냈지만, 곧 체념한 쓴웃음을 머금으며 루페르트에게 고개를 돌렸다.
“왜 우리 마법사들이 도펠죌트너를 싫어하는 줄 아십니까?”
“글쎄요.”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당신 혼자 싫어하는 거 아니야?’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지겔슈타트가 고소를 머금은 채 중얼거리듯이 말을 이었다.
“선제의 치세 때 선제와 대학의 사이가 틀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까?”
금시초문이다.
애당초 마법대학은 제국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제국의 수호자.
제국의 이익과 보존을 위해서 활동한다.
그들은 의식적으로 정치를 멀리하며 구설수가 일어날 일을 철저히 배제한다.
그러므로 황제와 대학이 틀어질 일은 거의 없다.
그런데 지겔슈타트는 루페르트가 알고 있는 상식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클라우데 2세와 대학 사이에 대립이 있었다는 건가.’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이?”
“그건 저로서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지요. 계속해 주세요.”
“네. 전하. 아무튼 모종의 사정으로 우리 대학은 선제에 대한 지원을 일체 거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때 선제께서 만드신 것이…….”
“도펠죌트너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마법사들이 싫어할 수밖에 없겠군. 애당초 그들을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 낸 집단이니…….’
“그런데 도펠죌트너에겐 여러 문제가 있었지요.”
“여러 문제요?”
지겔슈타트가 여전히 손녀의 만류 속에서 오두막 바깥을 짐승처럼 서성이는 초로의 사내를 노려보았다.
“성격적인 문제.”
“……그건 반박의 여지가 없군요.”
루페르트가 쓴웃음을 머금으며 대답했다.
“그 외 여러 문제가 있습니다만, 풍문에 의하면 도펠죌트너 중 일부는 몸에 기괴한 변이가 일어난다고 하더군요.”
“기괴한 변이?”
지겔슈타트가 목소리를 낮췄다.
“일부가 인간이 아닌 무언가로 변했다는 이야기를 대학에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
루페르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 지겔슈타트가 조심스럽게 한 이야기다.
풍문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다.
“애당초 아무 권능도 없고 섭리를 이해할 자질도 없는 자들을 무작위로 뽑아 인위적으로 이능의 힘을 주입한 존재입니다. 불안정성은 처음부터 예정된 대가지요. 선제는 반란을 구실로 도펠죌트너를 말살했지만 어쩌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닐까요?”
루페르트는 루돌프를 생각했다.
그의 전범(典範). 그가 닮고자 했던 우상.
그러나 실제로 만난 루돌프는 루페르트가 상상 이상 이상으로 차가운 강철의 심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분이 도펠죌트너를 허투루 만들어 내진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더 큰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것이겠지.’
생각에 잠긴 루페르트를 향해 지겔슈타트가 말했다.
“전하께서 황제가 되시면, 곧 되시겠지만 도펠죌트너들을 주의하십시오. 그들이 살아 있는 한 문제를 일으키게 될 테니까요.”
지겔슈타트가 가진 충심은 진짜다.
오만하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깔보는 구석이 있지만, 부상을 입고 자존감이 꺾이고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루페르트 옆을 지키고 있다.
루페르트가 지금까지 겪은 배신자들과 결이 다른 사람이라는 이야기다.
허나 그의 모든 말을 귀담아들을 순 없다.
도펠죌트너를 박해하라니.
‘그럴 순 없어. 지금 베르크 란이 이상해졌다고 하나 그들에겐 몇 번이고 목숨을 빚졌다. 오늘만 해도 마리 덕분에 살아남지 않았던가.’
“묘하군요.”
한스 징펠만이 모처럼 입을 열었다.
대화가 끊기는 시점인지라 지겔슈타트와 루페르트의 시선은 자연스레 빙해의 사냥꾼에게 향했다.
“저쪽이 적의 마법사라면 왜 우리를 공격하지 않는 걸까요?”
한스 징펠만의 푸른 눈동자가 지겔슈타트를 향했다.
“마법사님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가 우세하다면 바로 공격을 했겠지요.”
“흠, 설인을 두려워하는 걸까요? 그런데 설인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데. 그냥 우리가 여기서 소모되기를 기다리는 것일지도?”
철컥.
한스 징펠만이 피스톨을 살폈다.
“전하.”
“네.”
“괜찮다면 이쪽에서 한번 공격을 시도해 봐도 되겠습니까?”
루페르트는 한스 징펠만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의 첫 번째 영혼 동맹은 열의보다는 강한 흥분에 젖어 있었다.
몇 번의 인생을 살아도 쉬이 경험할 수 없는 모험을 그는 한껏 만끽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의 모험은 파멸을 향하는 것이 아니다.
루페르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봅시다. 법사님 생각은 어떤가요?”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적의 마법사가 있는 한 저는 무력합니다. 상대방이 노리는 게 우리가 스스로 약해지는 걸 기다리는 거라면 총사님의 판단이 옳을 걸로 사료됩니다.”
“좋습니다.”
루페르트는 반쯤 박살 난 틈새 사이로 다가갔다.
“마리.”
베르크 란 옆에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던 마를로네가 고개를 돌렸다.
“할아버지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와.”
“네? 그래도 될까요?”
“지금 한스 징펠만 총사가 공격을 시작할 거야.”
“으음.”
마를로네는 우두커니 선 조부를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봤다.
“죄송하지만 안 되겠네요. 저 혼자선 덩치 크고 늙은 아기를 안으로 들일 깜냥이 안 되니까요. 그놈의 소시지라도 있다면 모를까.”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마를로네가 힘없이 웃었다.
“최대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해 볼게요.”
마를로네의 얼굴에 서린 체념을 보고 루페르트는 쉬이 납득했다.
‘저 녀석이 저렇게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
마를로네가 자신한텐 무뚝뚝하고 벽을 치고 있지만, 거짓말도 빈말도 하지 않는 녀석이다.
“죽지 마라.”
“전 안 죽어요.”
‘죽는 거 봤다고. 그것도 수십 번!’
쓴웃음을 머금은 채 루페르트는 한스 징펠만에게 손짓했다.
“해 봅시다.”
한스 징펠만이 고개를 끄덕이고 적을 유심히 노려보았다.
한동안 적을 관찰한 그는 총신은커녕 총구조차 가릴 정도로 작은 구멍에 피스톨의 총구를 들이밀었다.
벽에 가로막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계 제로 상태.
한스 징펠만은 그러나 마치 벽 너머에 보이는 것처럼 부릅뜬 눈으로 적의 위치를 가늠하더니 총구를 당겼다.
탕!
총성과 더불어 하얀 연기가 약실에서 피어나오며 오두막 안을 하얀 연기와 매캐한 냄새로 뒤덮었다.
결과가 나타난 건 그 직후였다.
투두두두둑!
오두막 벽면에 마치 강한 빗줄기가 내려꽂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제인호프 사냥꾼들이 일거에 석궁을 발사한 것이다.
그 목적 없는 일제사격엔 살의보다는 분노가 더 강하게 깃들어 있었다.
“명중인 거 같군요.”
지겔슈타트의 말에 한스 징펠만은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다음 피스톨을 꺼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푸른 눈동자가 강한 경계심이 떠올랐다.
“적의 마법사겠지요. 느껴지십니까?”
“아니오.”
지겔슈타트가 말했다.
“마법의 기운은 털끝만큼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루페르트의 생각도 같다.
‘상대편에서 마법의 기운은 방출되지 않는다.’
“전부터 느꼈습니다.”
한스 징펠만이 입을 열었다.
“적의 마법사가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걸.”
“적의 마법사가요?”
“제가 볼 때 최소한 세 번은 우리를 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스 징펠만이 손가락 세 개를 폈다.
“한 번은 성벽 위에서.”
손가락 하나가 굽혀졌다.
“한 번은 이전의 오두막에서.”
또 다른 손가락 하나가 굽혀졌다.
“그리고 현재.”
마지막 손가락이 굽혀졌다.
동시에 한스 징펠만의 푸른 눈동자에 강한 이채가 떠올랐다.
“문외한의 황당한 가정일 수도 있겠지만, 적의 마법사는 공격 마법을 쓸 줄 모르는 건 아닐까요?”
“제국 마법 대학의 교육을 생각하면 그건 현실성 없는 이야기입니다.”
지겔슈타트가 딱 잘라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겔슈타트는 오두막의 틈새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은 가면을 쓴 사내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제가 볼 때도 저 마법사의 태도는 묘하군요.”
“그렇다면 한 번 더 시험해 보겠습니다.”
탕!
한스 징펠만의 두 번째 피스톨이 불을 뿜었다.
또 하나의 사냥꾼이 구슬픈 비명을 흘리며 쓰러졌다.
일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사격술은 적을 두렵게 하고 안달 나게 하기에 충분했다.
5분에 걸쳐 분노를 담은 응징의 화살이 오두막에 꽂혔다.
루페르트의 걱정은 하나였다.
화살이 섬뜩하게 박히는 파공음이 집안 전체를 두들기는 가운데서 루페르트는 바깥에 있을 마를로네와 베르크 란 쪽을 걱정스럽게 응시했다.
“작작 좀 쏘라고!”
마를로네가 화살을 피해 민첩하게 동과 서로 회피기동을 하며 숲을 향해 소리쳤다.
베르크 란도 적어도 싸울 때만큼은 정상인지 스틱과 검을 휘둘러 화살을 튕겨 내거나 베어 냈다.
“저쪽은 쌩쌩하군요.”
한스 징펠만이 웃었다.
그의 시선은 전보다 더 큰 자신감을 머금고 있었다.
“저 마법사. 어떻습니까?”
그때 후다닥 하고 누군가 들어왔다.
“저 사람에겐 그다지 많은 죽음의 기운이 보이지 않아요. 사람을 죽인 일이 거의 없다는 소리겠죠.”
마를로네다.
“다 듣고 있었냐?”
루페르트가 묻자 그녀는 눈이 덮인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 올리며 피식 웃었다.
“귀가 밝아서요.”
“할아버지는 어쩌고?”
“몰라요. 알아서 살겠죠. 어휴. 저래서 결혼은 어떻게 했는지. 할머니를 만났다면 꼭 물어보고 싶어요. 아빠를 안 낳았으면 내가 이 고생을 할 일이 없었을 텐데.”
가볍게 푸념하는 마를로네를 향해 지겔슈타트가 딱딱하게 물었다.
“죽음을 맡는 능력인가.”
“하찮은가요?”
“……하찮지는 않은 거 같다.”
작지만 명백한 변화의 기류가 느껴졌다.
저 지겔슈타트가 마를로네를 대하는 태도가 부드러워졌다.
‘그렇게 벌레 보듯 보더니, 이제는 좀 사람처럼 보이는 건가. 하긴 더 크고 흉악한 벌레가 바깥에 있으니 상대적으로 귀여워 보일지도?’
그때였다.
루페르트의 머릿속에 뭔가 번득이고 지나간 것은.
“마를로네의 가정이 맞다고 칩시다.”
전장에서 적을 베어 넘기고 군기를 취하는 건 병사의 일이다.
전장의 판세를 짜고 군을 이끄는 건 장군의 일이다.
황제에겐 황제의 일이 있다.
황제는 판단하고 결정하는 자다.
“모두의 의견을 말씀해 주세요. 내 신중히 듣고 판단하겠습니다.”
루페르트 가우저는 과거와 미래의 황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