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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제-58화 (58/225)

58화 16. 모독자들 (1)

제국으로 돌아가는 여정이 시작됐다.

예정대로 행군은 쾌속으로.

최소한의 휴식만을 취할 뿐, 어지간한 마을과 도시는 무시하고 빠르게 카르파티움 반도를 벗어나는 여정이었다.

병사 입장에서 욕이 나올 정도의 강행군이지만, 정예 연대는 정예 연대다.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병사들은 묵묵히 그들의 의무를 수행했다.

왜 분더발트 연대가 룸왕의 호위로 인정받았는지 행동으로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이틀간 이어진 행군이 끝난 후 루페르트 일행은 지평선 너머 솟은 산맥을 보았다.

붉은 산맥, 그 아래에 자리 잡은 자부아 공국이 지친 병사들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루페르트 수행단이 도시에 들어오자 화려한 의복을 차려입은 토착 귀족과 가신들이 루페르트를 맞이했다.

“현재 출타 중인 공작을 대신해 제국의 황제가 되실 룸왕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여전히 자부아 공작은 영지를 비운 상태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실제로 자부아 공작이 자신의 영지에 있는 날은 얼마 되지 않으니까.

공작은 부르봉 왕국에서 나고 자란 완벽한 부르봉인으로 말도 다르고 춥고 눈으로 덮인 산간 지역 대신 모친에게 상속받은 온화한 부르봉 남부 영지에서 일 년의 대부분을 지낸다.

공국 측에선 루페르트에게 최상급의 편의를 제공했다.

공작의 저택에서 루페르트는 발코니 아래 펼쳐진 도시와 주변 풍광을 둘러보았다.

도시를 병풍처럼 둘러싼 가파른 산맥과 저 아래 탁 트인 코미투스 평야가 그림처럼 펼쳐졌다.

‘자부아 공국이라.’

루페르트는 오랜만에 회귀 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제국 멸망기 자부아 공국은 제국을 배신했다.

제국의 봉신에서 부르봉 왕국의 봉신으로 주인을 바꾼 것이다.

중신들은 자부아 공국을 규탄하며 엄벌에 처해야 된다고 열변을 토했지만 누가, 어떤 군대가 그들을 벌할 수 있단 말인가.

군대도 조직할 돈도, 운영할 돈도 군대를 거느릴 장군도 없을뿐더러 당장 내전을 벌이는 선제후들을 중재할 힘조차 없는데.

오히려 은근한 오기가 끓어 올랐다.

‘이번 치세에 자부아 공국이 부르봉 왕국에 붙을 일은 없을 것이다.’

하나의 작은 목표가 추가됐다.

그 목표 달성을 위한 본격적인 노력은 곧 시작될 것이다.

저 산맥만 넘으면 제국이다.

길고 지루한 여정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여행 전엔 걱정했지만, 지나고 보니 하품이 나올 정도로 편안하고 안락한 여정이었다.

건너편에 앉은 한스 징펠만에게 미안할 정도로 말이다.

물론 더 미안해야 할 사람들은 따로 있다.

루페르트는 망원경을 들어 도시 밖 빈자들의 천막 지대에서 서성이는 두 사람을 흐릿한 눈으로 응시했다.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 란.

“…….”

그들은 도시에 들어오지도 못했다.

여기만이 아니었다.

곳곳에서 핍박과 무시를 받았다.

루페르트가 푹신한 침대에서 잘 때 그들은 광야에서 별을 보며 잠을 청해야 했고, 루페르트가 부드러운 빵과 고기를 먹을 때 그들은 식은 감자 한 덩이로 주린 배를 채워야 했다.

수시로 지나가는 기병과 병사들이 조롱을 하는 건 덤.

개인적으로 챙겨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선제가 직접 핍박을 지시한 도펠죌트너를 차기 황제가 개인적으로 챙겨 주기라도 한다면 구설수에 오를 것이 뻔하니.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루페르트는 특히 마를로네 쪽에 오래도록 시선을 주었다.

남자아이처럼 꾸미고 있지만, 보면 볼수록 여성스러움이 진하게 느껴진다.

‘마리.’

그녀에겐 빚이 있다.

몇 번이고 목숨을 빚졌다.

그녀가 없었다면 황제가 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

문득 재밌는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지금 통찰의 만화경을 사용해 볼까?’

거리가 제법 멀다.

망원경으로 보아야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못해도 60보는 족히 넘는 거리다.

이 먼 거리 안에서도 통찰의 만화경이 가능할 것인가.

시도해 본 적은 없다.

이단으로 몰리지 않기 위해 늘 자신을 노출하지 않는 곳에서 여신의 권능을 사용했었으니까.

하지만 이 거리에서, 망원경을 사용해 통찰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다면?

어쩌면 루페르트의 약점 하나를 극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건 여신의 당부다.

리프니에가 말했다.

도펠죌트너는 감이 좋다고.

일전에 그들을 통찰하려고 했을 때 여신이 루페르트는 제지하기도 했으니.

하지만 여신이 없는 지금 루페르트를 말릴 수 있는 건 그의 양심뿐이다.

‘한 번만 해 보자. 혹시 알아?’

두 번이나 목숨을 구해 주고, 몇 번이고 운명에 엮인 여인과 노인의 운명은 어떠할 것인가.

루페르트는 망원경에 마를로네를 고정한 채 통찰의 만화경을 떠올렸다.

잔잔한 파도 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듯한 감각과 함께 그의 눈동자에 불경한 녹색빛이 일렁거리기 시작한다.

‘어? 정말로 가능한 건가?’

가슴이 두근거리며 기대감에 두 눈에 이채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

마를로네가 갑자기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눈과 눈이 마주쳤다.

“헉!!”

루페르트는 황급히 통찰의 권능을 회수했다.

이쪽이 보이기라도 하는 걸까.

망원경을 쓰고 있다지만, 렌즈를 사이에 두고 두 눈동자가 마주친 기분이다.

루페르트가 가슴을 졸인 채 망원경을 내려놓고 딴청을 피우는 동안, 마를로네는 계속해서 루페르트 쪽을 올려다보았다.

흐릿한 안개가 낀 듯한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꽤 오랫동안 루페르트를 응시하다 돌아섰다.

“마리.”

베르크 란이 그녀를 불렀다.

“왜?”

“소시지가 먹고 싶다.”

“아까 훔쳐 왔잖아?”

베르크 란은 고개를 돌려 산맥 쪽을 노려보았다.

구름이 많은 날이었다.

어둠에 잠긴 산맥은 평소보다 훨씬 더 어둡고 괴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고요한 분위기지만 베르크 란은 그 산맥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한 소문을 들었다.

그는 검 한 자루를 손에 쥔 채 산맥을 향해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가?”

“아무래도 불안하군. 너는 룸왕에게 소식을 전해라.”

“가 봐야 문도 안 열어 줄 건데?”

“그렇다면 소시지를 훔쳐야겠지?”

마를로네는 할아버지의 뜻을 알아차리고 쓴웃음을 머금으며 멀리 보이는 저택 쪽을 흐릿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발코니 쪽에 있던 젊은 황제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혀 차는 소리가 미약하게 터져 나왔다.

“……우리 전하도 참. 뭐가 안 맞네.”

* * *

궁정은 루페르트에게 차가운 감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황제의 의자에 앉아 공허한 알현실을 보고 있노라면 활짝 열린 문 너머 열주(列柱)가 들어선 복도 쪽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자격 없는 사람이 그 자리에 앉으니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야.”

“누가 알았겠나? 그 강성하던 단 한 명이 바뀌었다고 멸망의 길을 걷게 될 줄은.”

이름 모를 귀족과 군주의 웅성거림이다.

그들의 말엔 주어가 빠져 있지만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그들은 루페르트를 탓하고 있었다.

치세 초반에만 해도 루페르트도 혈기가 있었고 황제로서의 자존심이 있었기에 버럭 화를 내기도 했고 주의를 주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명백해진 중반기 이후로는 마음대로 지껄이게 내버려 두었다.

화를 내본들 그가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기에.

그렇게 무수히 많은 말로 이루어진 칼날이 루페르트의 마음을 찌르고 토막 냈다.

비난에 익숙해질 즈음 루페르트의 두꺼운 신경을 긁을 수 있는 비난은 몇 되지 않았지만, 유독 한마디가 기억에 남는다.

“평범한 사람이 그 자리에 있으면 안 돼.”

한 신부가 말했다.

“평범한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는 자리라고. 그 황제라는 자리는.”

느릿한 울림이 귓가에 끝없이 메아리치는 걸 느끼며 루페르트는 눈을 떴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시종이 보고했다.

“지겔슈타트 님께서 성내에 잠입하려는 침입자를 포획했다고 합니다.”

“침입자?”

“그 침입자가 전하를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그래?”

“자신의 이름만 대면 바로 달려와 줄 거라고 자신하더군요.”

“이름이 뭐지?”

“마를로네입니다.”

루페르트는 즉시 그녀를 들이라 명했다.

곧 쇠사슬 소리와 함께 익숙한 실루엣이 병사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전하. 이렇게 다시 봬서 정말로 반가워요.”

쇠사슬에 묶인 금발의 소녀가 사슬을 찰랑거리며 부자연스러운 자세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루페르트는 쓴웃음을 머금은 채 마를로네를 살폈다.

다치거나 상한 곳은 없었다.

그저 모자가 벗겨지고 팔다리에 굵직한 수갑과 족쇄가 채워졌을 뿐이다.

시종이 귀띔했다.

“지겔슈타트 님을 만나자마자 바로 항복했다고 하더군요. 너무 빠른 항복에 지겔슈타트 님마저 놀랐다고 합니다.”

그녀 앞에 마련된 심문자용 책상엔 지겔슈타트가 여느 때처럼 신비로운 눈빛을 과시하며 두꺼운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그는 뒤늦게 루페르트의 기척을 알아차린 시늉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전하.”

그가 자리를 양보했다.

루페르트는 좌석을 사양하며 지겔슈타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사건의 개요는 단순했다.

마를로네가 성벽을 넘어 루페르트의 저택으로 진입했다.

저택 일대에 삼엄한 경계망을 펼치고 있던 지겔슈타트가 그녀의 기척을 눈치챘고, 지붕 위에 있던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다음은 루페르트가 익히 아는 대로다.

“현명하게도 바로 투항하더군요.”

지겔슈타트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이에 마를로네가 지겔슈타트를 빤히 쳐다보며 퉁명스레 입을 열었다.

“상대가 안 되는 게 뻔한걸요. 나쁜 용무로 온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지겔슈타트가 주위의 시종을 손짓으로 물리고는 루페르트에게 돌아서며 목소리를 낮췄다.

“저 도펠죌트너가 이상한 소리를 하더군요.”

“이상한 소리요?”

“정체불명의 군대가 오고 있답니다. 이곳 드부이성으로 말입니다.”

루페르트는 마를로네를 향해 돌아섰다.

“마리. 그게 정말이냐?”

“네.”

“왜 정문으로 오지 않았지?”

“병사들이 무시하던걸요. 들여보내 주지도 않고. 아시잖아요?”

마를로네가 살짝 불편한 심기를 내비치며 사슬을 가볍게 흔들었다.

쇠사슬이 맞물리며 찰랑거리는 소리가 컴컴한 옥중의 공기를 가볍게 떨치고 지나갔다.

루페르트는 좌우에게 일렀다.

“사슬을 풀어라.”

“하오나 전하.”

지겔슈타트가 바로 반대 의견을 표했으나, 루페르트의 결심은 확고했다.

“내가 고용한 사람이오. 대학의 마법사님.”

정중하면서도 강렬한 말에 지겔슈타트는 한발 물러섰다.

“……전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차가운 정적이 뇌옥을 어두운 밀물처럼 채웠으나, 곧 그 정적은 하찮은 생리 작용에 의해 가볍게 부서졌다.

꼬르륵.

마를로네의 배에서 뱃고동이 울렸다.

루페르트는 쓴웃음을 머금었고, 지겔슈타트도 고개를 돌릴 정도의 감정의 변화를 보였다.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걸 집무실에 가지고 와라. 이야기는 집무실에서 듣겠다.”

* * *

집무실에 다섯 사람이 모였다.

주요한 인물은 루페르트와 마를로네였고 제삼자는 지겔슈타트였다. 나머지 두 명은 서기와 자부아 쪽 사람이었다.

분더발트와 마르틴 후스를 부를 수도 있었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을 깨우는 건 이야기를 듣고 난 이후에 해도 늦지 않으니까.

“그래, 마를로네. 네가 보고 들은 이야기를 해 보아라.”

마를로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슬에서 풀려난 그녀는 머리가 약간 헝클어지긴 했지만 다소곳한 자세로 탁자에 앉아 루페르트와 지겔슈타를 번갈아 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할아버지 말로는 농민 폭도로 이루어진 반란군이라고 하더군요. 실제로 그렇게 보였고요.”

마를로네는 한마디 할 때마다 책상에 놓인 과자를 하나씩 집어 먹었다.

“숫자는 5천 정도라고 하더군요. 저는 잘 모르겠지만 할아버지는 전장에 오래 있었으니 보는 눈이 있나 봐요.”

그동안 형편없는 음식만 먹어서 그런지 말을 하면서도 맛에 놀라는 눈치였다.

그래도 과자를 입에 넣은 채 우물거리거나 입 안의 내용물을 튀기는 등의 경박한 행동은 하지 않았고, 과자로 배를 채운 후 꾸깃꾸깃한 손수건을 꺼내 입을 닦을 정도의 매너는 있었다.

시종이 그녀에게 물을 건네자 그녀는 단숨에 한 잔을 비워 내고 또 한 잔을 요구했다.

차분하게 물을 마시는 마를로네의 모습을 보며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번 일도 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사실 농민 반란이 일어났는지조차 알 수 없다.

제국 본토도 아닌 일개 봉신의 영토에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건 말건 루페르트와는 하등 상관없는 일이니까.

지금도 그렇다.

자부아의 농민 반란은 자부아 공작이 직접 해결해야 할 일이다.

일 년 내내 성을 비우고 세금만 쏙 빼먹는 그의 행태가 반란의 씨앗에 가장 큰 지분을 차지했을 테니까.

그런데 하필 운 없게 그 반란군이 루페르트가 머무는 시점에 성을 향해 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어디에 있지?”

“지척에 있어요. 곧 성 앞에 이르러 성을 포위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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