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15. 황제의 길 (3)
오싹한 설인의 포효 속에서 루페르트 수행단은 붉은 산맥의 고갯길을 따라 산맥을 넘었다.
간간이 마주친 산맥의 주민들은 우호적이었고, 루페르트에게 존경과 경의를 표시했다.
일부는 길잡이를 자청하기도 했는데, 마르틴 후스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최근 산맥 지방엔 기근이 들어 적지 않은 사람이 일자리와 식량을 구하러 제국으로 향했다고 한다.
“산맥 사람들은 훌륭한 병사들이죠. 사투리가 섞여 있긴 하지만 우리와 같은 언어를 쓰는 데다 끈질김과 근성은 제국 어디에 내놔도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분더발트는 산맥 사람들을 병사로서는 높이 평가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자무식인 촌놈들이 제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용병밖에 없다는 냉정한 평가도 함께 내렸다.
산맥의 끝자락은 초원과 설산이 한데 어우러진 동화 속 한 장면 같은 아름다운 풍경이 연이어 펼쳐졌는데, 이 아름다운 땅끝에 제국의 봉신 자부아 공국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미 루페르트가 온다는 걸 알고 있던 자부아 사람들은 먼 곳까지 소수의 기병을 보내 루페르트를 환영했다.
루페르트가 기병 대장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공작님은 부재중이시겠지요?”
기병 대장이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야.’
전에 와 본 적이 있으니까.
루페르트의 지위가 바뀌고, 수행단 구성원도 바뀌었지만, 세상엔 변치 않는 것도 적잖이 있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루페르트의 영향을 받는 게 아니니까.
자부아 공국 이남엔 드넓은 벌판이 펼쳐졌다.
병사들이 웅성거렸다.
“드디어 평지다.”
“코미투스 평야다. 여기서부터가 옛 제국의 땅이지.”
“룸에 도착한 건가.”
“룸이라는 도시는 좀 더 가야겠지.”
잔뼈 굵은 병사들의 말대로 저 평원은 룸 제국의 영역이다.
악의 제국의 백성과 군사를 길러 낸 비옥한 평원은 이제 황무지로 전락했다.
씨앗을 뿌려도 싹이 트지 않고, 혹 싹을 틔운다고 해도 알 수 없는 괴질과 때 이른 서리가 농사를 모조리 망쳐 버렸다.
역병이 수시로 돌았고 마물이 사람 행세를 하며 사람을 죽였다.
옛 룸 제국의 영토는 버려진 자들의 땅이다.
루페르트는 곳곳에서 제국과 비교되는 처참한 궁핍과 후진성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의 신에게 버림받은 땅이군요.”
한스 징펠만이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며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자업자득이지요.”
창밖 너머로 초라한 텃밭을 가꾸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볼이 움푹 들어가고 퀭한 눈에 피부가 까맣게 타들어 간 그들은 생기 없는 눈으로 북쪽에서 온 외국인의 행렬을 말없이 응시했다.
“곧 옛 제국의 수도, 룸입니다.”
마르틴 후스가 말을 마차 가까이 붙여 루페르트에게 목적지가 다가왔음을 알렸다.
루페르트는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점점 가까워지는 거대한 폐허를 두 눈에 담았다.
“멸망한 제국이라…….”
폐허로 이루어진 시내엔 시궁쥐를 닮은 비참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감히 구걸하는 무리도 없었다.
제국인의 행차에 감히 손을 내민다는 것이 어떤 일을 초래할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철혈대제가 이곳에 행차했을 때, 한 룸인이 구걸을 하다 도시 절반이 불에 탔던 건 유명한 이야기.
제국인의 눈에 비친 룸인들은 인간 이하의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
루페르트가 온 목적도 크게 다르지 않다.
“멸망한 제국의 말예가 새로운 황제를 배알합니다.”
다른 룸인들보다는 확연히 구분되는 기품을 머금은 중년 사내가 루페르트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소개한 대로 이 사람은 옛 제국 마지막 황제의 후손이다.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옛 제국의 핏줄은 이제 새로운 제국의 은전에 기대서 살아간다.
새로운 제국이 그들에게 부여한 역할은 하나다.
“그럼 의례를 시작하겠습니다.”
루페르트가 승낙하자 그 사내는 모습을 감추었고, 잠시 후 웃통을 벗은 채 마치 자신이 소나 말인 것처럼 빛바랜 청동 수레를 몸소 끌고 왔다.
영원히 반복되는 조롱.
이것이 그와 그의 가문이 대를 이어 가며 해야 할 일이다.
자신의 가문을 욕보이는 대가로 이 사람은 룸이라는 폐허의 주인으로 행세할 수 있다.
짧게는 수년, 길게는 수십 년에 한 번 하는 것으로 제국의 보호를 받을 수 있으니 어찌 보면 수지맞는 장사일지도 모를 일이다.
루페르트는 사내의 이름조차 묻지 않았다.
진정한 황제는 멸망한 제국의 황제 이름까지 알 필요가 없다.
이것이 관례다.
“시작하라.”
루페르트가 그답지 않게 고압적인 어조로 명령했다.
사내가 루페르트가 타기 좋게 수레를 기울였다.
루페르트가 수레에 올라타자, 사내는 수레를 끌기 시작했다.
제국 군인들이 양옆에서 호위하는 가운데 루페르트를 태운 수레는 룸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로를 지났다.
루페르트는 무심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생기 없고 무력한 눈동자들이 보인다.
입고 있는 옷은 지저분하고 낡았고, 소재가 좋지도 않았다. 그 궁상맞음은 나름 고위층이나 평민이나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그들의 땅은 신에게 저주받았고 제국의 군홧발이 주기적으로 그들을 짓밟았으니.
당장 선제 철혈대제만 해도 룸왕 시절에 호위대를 동원해 도시를 불태우고 무수히 많은 사람을 학살했다.
철썩!
가벼운 채찍질이 사내의 등을 후려쳤다.
이것은 새로운 제국의 황제가 구 제국에게 내리는 모욕이다.
저 마차를 끄는 자는 구 제국 황실의 혈족이니.
그러나 구 제국의 시민들 얼굴엔 분노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거의 천 년간 이어진 행사다.
중간중간 반발이 일어나긴 했으나, 그때마다 도시의 시민은 절반 혹은 그 밑으로 줄었다.
조상이 저지른 업보를 그 후예들이 받고 있는 것이다.
구 제국의 말예(末裔)가 끈 마차에서 내린 루페르트는 반쯤 무너진 궁전에 이르렀다.
거기엔 사슬에 묶인 백골이 있다.
앙상한 팔목에 낀 금팔찌와 목걸이, 머리에 쓴 빛바랜 왕관이 그가 생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말해 준다.
룸 제국의 마지막 황제다.
새로운 제국의 건국자 티그리트가 그를 사로잡은 뒤 소감을 물었을 때 그는 아래와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그대라면 더 잘할 것 같은가?”
이에 대한 티그리트의 답은 채찍질이었다.
티그리트 본인이 구 제국의 마지막 황제를 사슬에 매달아 죽을 때까지 매질했다.
그때 그가 보인 분노는 그 어떤 사람도 감히 말릴 수 없을 정도로 맹렬했다고 한다.
룸왕이 옛 제국의 수도에 온 것은 그 채찍질을 재현하기 위함이다.
루페르트가 채찍을 들었다.
이미 생전에 수십 번의 매질을 당했고 죽어서도 끊임없이 채찍질을 당한 백골에 한 번의 채찍질이 추가됐다.
“당연히.”
티그리트와 같은 대답이 루페르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것으로 룸왕의 유일한 임무가 완결됐다.
남은 건 단 하나.
제국으로 돌아가 두 개의 관을 쓰는 것이다.
룸 제국의 녹슨 월계관과 카렐리아의 왕관.
제국의 황제는 두 개의 관을 쓴다
* * *
“날씨는 좋습니다. 공기도 선선하고 쾌적하고 좋은 바람이 불고 있군요. 도시에 하루도 머물지 않겠다는 전하의 의견엔 병사들도 깊이 동감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이런 끔찍한 폐허에서 하루를 보내고 싶지 않을 겁니다.”
루페르트의 제안에 따라 분더발트는 최대 속도로 귀로 여정을 잡았다.
짐을 가벼이 하고 몸이 아픈 자를 위해 새로운 수레와 마필을 샀다.
마르틴 후스의 기병대는 일부를 선발대로 풀어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했다.
“이 도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 보군요.”
지겔슈타트가 루페르트를 신비로운 눈으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정확한 통찰이다.
루페르트가 길을 서두르는 이유는 비단 빨리 황제가 되고 싶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냥 이 폐허가 싫었다.
망국의 백성들을 보는 것도 싫었고, 도처에 만연한 패배의 공기를 마시는 것도 기분이 나빴다.
왜냐하면 이 도처에 늘린 패배감은 루페르트가 맛보았던 제국의 마지막과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으니까.
이미 멸망한 제국과 곧 멸망 당할 운명의 제국.
둘 사이엔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룸 제국은 그들의 악덕으로 망한 거다. 신조차 버렸다는 이야기지. 하지만 우리 제국은 다르다. 적어도 룸 제국처럼 악독하게 타국와 타민족을 다루진 않았다.’
떠나기 전에 룸 황실의 마지막 후예가 찾아왔다.
루페르트의 수레를 말처럼 끌었던 수척한 중년 사내였다.
상의를 벗고 맨몸을 드러낸 의식 때와 달리 의관을 제대로 차려입은 그의 모습은 이지적이고 기품이 있었다.
“전하께서 일정보다 빠르게 제국으로 돌아가신다는 말씀을 전해 들었습니다.”
어제 이름을 듣긴 했지만 루페르트는 그 이름을 기억하지 않았다.
앞으로 더 이상 볼 일이 없을 터이니.
“무슨 일입니까?”
필경 금전적인 지원을 요구할 거라고 생각했다.
룸 제국의 마지막 후예는 제국의 은전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으니.
손해 볼 건 없는 장사다.
짧게는 수년, 길게는 수십 년 황제가 바뀔 때마다 짧은 연극을 하는 대신 옛 제국의 폐허 안에서 풍요롭게 살 수 있으니 말이다.
“자유민의 제국이 건국된 지도 곧 천 년이 다 되어 가는군요. 제 기억이 맞다면 10년도 채 남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8년 정도 남았지요.”
“특별한 일이 없다면 황제 폐하의 치세 중에 자유민의 제국은 천년기를 맞이하겠군요.”
“아마도 그렇겠지요. 그런데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루페르트가 얕은 한숨을 내쉬며 룸 제국의 후예를 싸늘하게 응시했다.
“원하는 게 있습니까?”
루페르트의 차가운 시선을 받은 룸 제국의 후예는 살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딱히 원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다만?”
사내의 입가에 의미를 알 수 없는 야릇한 미소가 맺혔다.
“곧 제위에 오르실 룸왕 전하께서 대단히 영민하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루페르트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사내를 노려보았다.
이 대화를 더 이상 원치 않는다는 강한 표현이다.
사내는 루페르트의 뜻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숙였다.
루페르트는 지체 없이 뒤돌아섰다.
개인적인 혐오나 감정은 없다.
단지 이 자리가 싫었다.
몰락한 제국.
그리고 그 후예.
그것은 루페르트의 가장 어두운 과거와 맞닿은 영역이니까.
떠나가려는 루페르트를 향해 사내가 고개를 들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거 아십니까?”
‘또 할 말이 남은 건가.’
루페르트는 등을 내보인 채 살짝 고개만을 돌렸다.
어쩌면 화를 낼지도 모른다.
감정이 그렇게 요동치고 있다.
불안한 침묵 속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국 최초의 황제가 우리의 선조에게 채찍질을 가한 이후에 한 말을 알고 계십니까?”
루페르트의 눈동자에 희미한 이채가 떠올랐다.
‘그 뒤가 있었다고?’
발언권을 얻었다는 걸 확신한 몰락 제국의 후예는 루페르트의 등을 잿빛 눈동자로 응시하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천년 제국을 만들겠다.”
“천년 제국……?”
“너희들이 이루지 못한 천년의 제국을.”
알지 못한 내용이다.
어떠한 사서도 기록도 이런 대화를 기록하지 않았다.
순간 생각했다.
혹 꾸며 낸 건 아닐까.
룸 제국의 후예가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제 이름은 파비안 아비투스입니다.”
순간 루페르트는 마법의 냄새를 감지했다.
그것도 대단히 강렬한.
‘마법?’
루페르트는 파비안 아비투스를 노려보았다.
‘룸 제국의 후예가 마법을 익혔다는 소린가?’
가능성은 적다.
룸 제국은 마법을 철저히 금지한 나라다.
일개 개인이 고귀한 룸 제국의 귀족보다 강하고 우월하다는 것이 그들의 질서에 도전하는 행위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 옛 제국의 후예가 마법을 익힌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느껴졌던 마법의 냄새는 곧 씻은 듯이 사라졌다.
허나 여전히 의심이 간다.
루페르트의 시선은 파비안 아비투스라는 사내의 손을 무심코 응시했다.
그의 손에 반지가 끼어 있었다.
금도, 은도 아닌 뼈로 만든 음울하고 기괴한 반지였다.
마법의 잔향이 그 반지에서 감돌고 있었다.
“……그 반지는 뭔가?”
루페르트가 날카롭게 묻자, 파비안 아비투스는 선뜻 반지를 빼 루페르트에게 내밀었다.
“선조의 유골로 만든 반지입니다. 조상의 시신 일부분을 취해 장신구를 만드는 건 옛 제국의 오랜 풍습이지요”
루페르트는 반지를 살폈다.
마법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왜일까. 자꾸 불길한 마음이 드는 건.
분명 어디서 경험한 듯한 꺼림칙함이 느껴진다.
‘저주라도 받은 건가. 잘도 이런 불길한 걸 끼고 다니는군.’
루페르트는 반지를 돌려주고 말없이 돌아섰다.
파비안 아비투스는 인사도 없이 사라지는 제국의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황제 폐하의 행운을 빌겠습니다.”
고개 숙인 그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떠올랐다.
* * *
떠나가는 마차 안.
차창 밖엔 정오의 태양이 내리꽂고 있다.
폐허가 된 도시엔 궁상맞은 빈민과 주인 없는 들개 몇 마리만 보일 뿐이었다.
“뭘 그리 심란해하십니까?”
동승한 분더발트가 물었다.
“아니오. 별거 아닙니다.”
루페르트는 파비오 아비투스라는 사내를 생각하고 있었다.
몰락한 제국의 그림자.
제국을 위해 사육되는 연극배우 정도로 생각한 사람이었다.
그가 생각지도 않은 형태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기묘하군.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그 사내는 루페르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묵히 마차를 끌고 채찍을 두 손으로 받쳐 올리며 룸왕이 황제가 되기 위한 연극을 성실하게 수행했을 뿐이다.
그 이후 그 사내가 어떻게 된 건지, 이 룸 제국의 폐허가 어떻게 됐는지는 알지 못한다.
제국 본토가 불타는데 몰락한 폐허의 사정을 어찌 알겠는가.
“이 도시가, 이 제국이.”
루페르트는 턱을 괸 채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분더발트는 물론 함께 탄 지겔슈타트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요?”
루페르트의 물음에 분더발트는 껄껄 웃었고, 지겔슈타트 또한 굳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고 계시겠지만 이 도시는.”
지겔슈타트가 신비로운 눈동자로 차창 밖을 응시했다.
폐허 너머에 나무 없는 작은 동산이 야트막하게 솟아 있었다.
그 동산은 나무 대신 폐허의 돌조각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보는 이에 따라 혐오감을 느낄 정도로 규칙적인 거리와 배열로.
“선제께서 철저하게 짓밟으셨습니다.”
그 무수한 돌조각이 의미하는 건 그 숫자만큼의 죽음이리라.
‘저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것인가.’
하지만 왜일까.
죽은 사람의 숫자보다 비석의 숫자가 더 오싹하게 느껴지는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