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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제-56화 (56/225)

56화 15. 황제의 길 (2)

제국 마법사의 위계는 기하학에서 그 개념을 따온 오각, 사각, 삼각, 선, 그리고 점. 다섯 위계로 이루어져 있다.

점이 가장 낮으며 오각이 가장 우수하다.

사각의 마법사는 오각의 마법사, 제국 전쟁 마법사보다 겨우 한 단계 급이 낮은 강력한 마법사다.

제국 전쟁 마법사보다 급이 낮다고 하나 그들을 우습게 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제국에서도 겨우 스무 명 안팎이 이 위계에 머물러 있으니까.

당장 사각의 마법사가 외국에 간다면 능히 대마법사 칭호를 받고도 남는다.

지금 수습 마법사인 피리스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라고 할까.

그 정도로 강력한 존재가 루페르트에게 담담하면서도 힘 있는 어조로 선언했다.

“제가 옆에 있는 이상 그 누구도 전하를 해칠 순 없을 것입니다.”

지겔슈타트는 신비로운 기운이 느껴지는 자줏빛 눈동자와 빨아들이는 소용돌이 같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 존재감은 단지 옆에 서는 것만으로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이들은 인간의 모습을 한 다른 무언가라는 걸.

도펠죌트너가 이능의 힘을 사용한다지만 본격적인 마법사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소모품이고 제국 마법사는 한 명 한 명이 주력 전함급에 해당하는 귀중한 전투자원이니까.

‘기병대장은 같은 사람이지만 마법사는 바뀌었군. 그전엔 엘리사였나? 만사 귀찮아하는 여자 마법사였는데. 위계도 삼각에 불과했고.’

제국 보병대, 제국 기병대, 제국 마법사.

이것만으로 능히 강철의 진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루페르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하.”

알록달록한 화려한 옷을 입은 이각모의 사내가 과할 정도로 허리를 숙이고는 선제후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한스 징펠만 엽사.”

루페르트의 얼굴에 꾸밈없는 순수한 미소가 떠올랐다.

첫 번째 영혼 동맹이 그에게 찾아왔다.

“사냥은 진즉 끝났을 터인데 왜 연락이 없었습니까?”

“아, 그게. 막상 남작님. 아니 룸왕 전하께서 선제후가 되시고 나니, 볼 면목이 없었습니다. 저 같은 일개 사냥꾼이 과거의 친분을 이유로 선제후나 되는 분을 만난다는 것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제가 룸왕이 됐건 황제가 됐건 전 여전한 루페르트입니다. 전혀 어려워하실 필요가 없어요.”

루페르트가 빙그레 웃었다.

“거기다 제가 아니면 누가 당신에게 짜릿한 모험을 선물하겠습니까?”

한스 징펠만이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없는 쪽이 아마도 제국엔 더 좋은 일이 아닐까요?”

“그것도 그렇겠지요.”

한스 징펠만과 감격의 해후가 끝난 후, 마지막 수행원이 방을 찾아왔다.

문 너머에서부터 느껴졌다.

세상 그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타오르는 듯한 분노의 열기가.

문 너머로 건장한 초로의 남성과 모자를 푹 눌러쓴 소년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루페르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오랜만입니다.”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 란.

두 조손이 다시 한번 루페르트의 운명의 실타래 위에 나타났다.

“룸왕 전하께서 우리 같은 자를 찾아 주시다니,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을 정도로 감격하고 있습니다.”

남작 시절과는 다르다.

선제후 시절과도 온도 차가 있다.

당연한 일이다.

왕관만 쓰지 않았다 뿐이지 루페르트는 사실상 제국의 황제니까.

천하의 베르크 란도 고개를 숙인 채, 그가 할 수 있는 최상급의 경의를 보였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루페르트는 그들에게서 지난번 마주했을 때와 또 다른 형태의 섬뜩한 분노가 그들의 마음을 조용히 불사르고 있는 걸 발견했다.

안젤리나와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베르크 란 일행과 함께 하는 내내 마를로네는 그녀의 흉을 봤었고, 베르크 란은 그녀에게 내심 기대하는 게 있었기에 따르는 눈치였으니.

‘역시 안젤리나 님과 문제가 있었던 걸까.’

기대는 대체로 배신당하는 법이다.

저 철혈대제, 루돌프도 하급자의 기대를 이용하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루페르트는 시종일관 고개를 숙인 채 아예 눈 맞춤을 예방하고 있는 마를로네를 힐끗 보고는 베르크 란에게 넌지시 물었다.

“안젤리나 님의 근황은 알고 있습니까?”

베르크 란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대황후께서 몸져누우신 이후 단 한 번도 만나 볼 기회는 갖지 못했습니다.”

‘역시.’

안젤리나는 그들을 버렸다.

루페르트에겐 그토록 많은 걸 베풀었건만, 그녀를 위해 일하던 저 조손에겐 아무것도 베풀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렇군요.”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안젤리나가 청산해야 할 부채를 떠안고 싶진 않았다.

안젤리나는 안젤리나고, 루페르트는 루페르트다.

“다시 만나게 되어 정말로 마음이 놓이는군요. 다름이 아니라 이번 여정에서 저의 호위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루페르트는 이제 그들의 고용주로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려 한다.

이미 실력은 검증됐고, 몇 번이고 위험을 함께했다.

“아시다시피 저는 곧 룸왕의 의례를 치러야 하니 말입니다.”

“경호 말씀입니까? 저 같은 비천한 자에게 그런 일을 맡겨 주시는 건 영광이지만.”

베르크 란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처럼 곁에서 호위하는 건 불가능한 일로 보입니다만.”

시종일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마를로네가 루페르트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흐릿한 안개에 잠긴 듯한 눈동자가 뭘 말하려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강의 감정을 눈치챌 수 있다.

“그럼 약간 거리를 두는 형태로 하죠.”

처음부터 신분이 달랐다.

저쪽은 천대받고 기피당하는 제국에 버림받은 자였고, 이쪽은 제국의 귀족이었다.

그 차이는 더욱 커졌다.

그쪽은 여전히 바닥에 머문 반면 루페르트는 이제 제국의 황제를 눈앞에 둔 자다.

시대의 부산물인 도펠죌트너 따위가 옆에서 경호한다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며, 주변에서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어이. 저길 봐. 빨간 명찰이야.”

“왜 따라오는 거지? 황제가 될 분이라 얻어먹을 게 많다고 생각하는 건가?”

“부정 타겠는데?”

단지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 연대 병사들은 아낌없는 적의와 경멸을 드러냈다.

일부는 총까지 만지작거리며 그들을 겨누는 시늉을 할 정도였다.

도시 안에서 이러는데, 몸이 피곤해지는 행군 길에서 그들이 무슨 짓을 할지는 연대장도 모른다.

결국 루페르트는 연대장을 찾아갔다.

“도펠죌트너로 하여금 종군하게 할 생각입니까?”

분더발트는 큰 반감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붉게 그은 얼굴엔 귀찮다는 감정이 가감 없이 드러났다.

“병사들에게 일러 두도록 하겠습니다만 가급적이면 병사 눈에 안 띄는 걸 추천하겠습니다. 신병의 비율이 높아져서 기강 관리가 쉽지 않으니 말입니다.”

마르틴 후스의 경우엔 아무래도 좋다는 느낌이었다.

“부하들에게 통지하겠습니다. 그런데 도펠죌트너라는 게 아직도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었군요.”

멋들어진 콧수염을 기른 그는 난봉꾼 기질이 다분해 보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마를로네의 성별을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 파악했다.

“저건 여자 같네요. 소년처럼 꾸미고 있지만, 여성의 골격은 숨길 수가 없군요. 다만 그다지 매력적인 여성으론 보이지 않는군요.”

마르틴 후스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차피 오래는 못 살겠지만.”

루페르트는 쓴웃음을 참으며 마지막 주요 인물인 지겔슈타트를 응시했다.

“도펠죌트너 말입니까?”

예상은 했었다.

도펠죌트너 이야기를 꺼냈을 때 가장 크게 반감을 드러낼 이가 지겔슈타트라는걸.

“그런 자들이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신비로운 광택을 머금고 있던 지겔슈타트의 눈동자에 불길한 빛이 서렸다.

마법의 기운을 감지하는 루페르트의 눈엔 지겔슈타트 뒤에 시커먼 거인이 서 있는 것으로 보일 정도의 마력이다.

‘다른 건 몰라도 실력 하나만은 확실하구만.’

“전쟁에서 대폿밥으로 쓰던 자들입니다. 약간의 이능을 갖고 있다고 하나 우리 마법사에 비할 바가 아니지요.”

그 대목에서 루페르트는 약간의 불쾌감을 느꼈다.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를 대폿밥에 비유하다니.

실제로 도펠죌트너가 대폿밥이었다고 하더라도 결코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다.

둘과는 많은 인연이 있으니까.

하지만 역정을 낼 필요는 없다.

이 지겔슈타트라는 인물은 마법 대학에서 직접 선택한 인선, 넓은 의미에서 마법대학이 보낸 사자와도 같은 존재다.

사이가 나빠질 이유는 단 하나도 없으며 지겔슈타트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의 불쾌감도 근거가 있다.

도펠죌트너가 사각의 마법사인 그의 영역에 끼어들 여지가 있으니 말이다.

실제로 그게 루페르트가 의도한 바이기도 하고.

“유사시 전령으로 쓰려합니다.”

루페르트가 담담하게 말했다.

“전령요?”

“그렇습니다. 기병대가 있다고 하지만 큰 산맥을 지나치지 않습니까? 산지에선 말보다는 사람 쪽이 좀 더 유연성이 있는 법이지요.”

“확실히, 산지에서 공격받는 사태가 일어나면 그들이 나을 수도 있겠군요. 가능성은 희박합니다만.”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으니까요.”

마지막으로 지겔슈타트의 협조도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의 대접은 처참했다.

둘은 행렬 안에 끼는 것조차 용납받지 못한 채 거의 지평선 끝에서 간신히 보일 정도로 멀찌감치 서서 루페르트 일행을 따라와야 했다.

“……나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만.”

도펠죌트너와 달리 한스 징펠만은 루페르트의 곁에 머물렀다.

특별한 결격 사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불과 철의 형제단은 잔뼈 굵은 군인에겐 높은 명성을 누리는 존재니까.

일부 장교와 하사관이 앞다투어 찾아와 총기를 훔쳐볼 정도였다.

“어쩔 수가 없는 일이겠지요.”

베르크 란의 실력을 잘 아는 한스 징펠만은 못내 그들이 그런 취급을 받는 게 안타까운 모양이다.

“…….”

루페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현재의 불편한 감정을 가슴에 담아 놓았다.

‘언젠가는.’

그들에게 명예와 자유를 돌려주리라.

* * *

제국 수도 테타우.

시민들이 운집한 가운데, 룸왕의 행차가 시작됐다.

하늘에선 꽃잎이 쏟아지고 거리에선 음악이 끊이지 않았다.

그 기대와 흥분은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모두가 새로운 황제의 즉위를 기다리고 있었다.

만인의 축복 속에서 루페르트는 제도를 떠나 남쪽을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슈발츠마인, 디터팔츠, 고어문트. 3개의 선제후령을 차례로 지나가자 제국의 국경이 나타났다.

제국의 남부 국경은 붉은 산맥이라 불리는 대륙 중남부에 우뚝 솟은 험준한 산악지대를 따라 형성되어 있다.

붉은 산맥은 만년설이 쌓일 정도의 태산준령의 집단으로 일찍이 룸 제국 시절부터 함부로 지나가기 어려운 천연 장벽이었다.

다만 이름과 달리 산맥은 대체로 눈으로 뒤덮인 흰색을 띠고 있었는데, 그건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룸 제국이 건재하던 시기엔 노상엔 늘 전쟁 포로와 노예가 흘린 피가 끊임없이 쌓이는 눈을 물들일 정도로 흘러넘쳤다고 하니까.

룸 제국은 인간이라는 연료로 돌아가는 거대한 살육 기계였다.

좁게는 룸이라는 도시, 넓게는 그들의 근거지인 카르파티움 반도에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국경 밖에서 무수히 많은 노예를 끌고 왔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룸 제국 안에서 신음하다 죽었는지는 오직 그들의 신만이 알 것이다.

산맥을 지날 때 특별한 일은 없었다.

병사 하나가 넘어져 발목을 삔 게 유일한 사고였다.

다만 이른 새벽 산맥 사잇길을 행군할 때 루페르트는 저 까마득한 설봉 위에서 아스라이 울려 퍼지는 음울한 포효를 듣고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빠져들었다.

루페르트는 옆을 지키는 한스 징펠만에게 저 포효의 주인공이 누군지 물어보았다.

“글쎄요. 익숙지 않은 소리입니다. 제국 방방곡곡을 활동했다지만, 남부 산맥 쪽은 또 저희들과는 인연이 없어서요.”

“그렇군요.”

“그나저나 멀리서 들려옴에도 오싹한 울음이네요. 마치 전설 속의 설인이 내지르는 포효를 연상케 합니다.”

“설인이요?”

루페르트가 흥미를 드러냈다.

‘그런 것도 있었나. 전에 여길 지났을 땐 듣지도 보지도 못했는데 말이야.’

한스 징펠만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울타니아의 설인이라 불리는 괴물입니다.”

“울타니아의 설인이라. 울타니아는 지명처럼 들리는군요.”

“룸 제국 시절에 이 지방은 그들의 언어로 울타니아라고 불렸던 모양입니다.”

“호오, 구 제국 시절부터 알려진 괴물이군요. 어떤 녀석입니까?”

“영원히 얼어붙었고, 얼어붙을 운명의 설봉 위에 산다고 알려진 마물입니다.”

흥미진진해 하는 루페르트와 달리 한스 징펠만의 표정엔 경계심이 잔뜩 묻어 있었다.

루페르트가 생각을 읽고 물었다.

“위험합니까?”

한스 징펠만은 찰나의 망설임조차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사냥이 불가능한 괴물입니다. 우리 불과 철의 형제단이 반드시 피해야 하는, 금지된 다섯 중 하나입니다. 존재 자체가 재앙이자 죽음을 의미한다고 할까요?”

한스 징펠만의 말을 듣고 있던 지겔슈타트가 끼어들었다.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전하. 그 설인은 설봉 아래로 좀처럼 내려오는 일이 없으니까요. 기록에 의하면 딱 한 번, 설봉 아래로 내려온 적이 있습니다.”

“언제입니까?”

“룸 제국이 멸망하던 날, 울타니아의 설인은 수도를 구원하기 위해 산맥을 지나던 제국 최후의 군단을 홀로 찢어발겼다고 하더군요.”

“군단을 홀로…….”

알려지기로 룸 제국의 일개 군단은 6천 명이다.

6천 명이 괴물 하나한테 당했다는 소리다.

상상이 가지 않는다.

대체 어떤 괴물이길래 홀로 그토록 많은 인간을 죽일 수 있는지.

지겔슈타트는 상상에 잠긴 루페르트를 향해 은은한 미소를 머금으며 예의 신비로운 눈동자를 번득였다.

“일종의 은유가 아닐까요? 전설의 괴물마저 룸 제국을 증오한다는.”

“그럴 수도 있겠군요.”

루페르트는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 설봉 쪽을 슬며시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왜 설인이 지금 포효하고 있을까요?”

아무도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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