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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제-55화 (55/225)

55화 15. 황제의 길 (1)

선거로 황제에 선출된 자가 즉시 황제에 오르는 건 아니다.

먼저 룸왕이라는 직위를 받는다.

말 그대로 이미 멸망해 버린 룸의 왕으로 땅 한 조각, 영민 하나 없는 명예직이다.

하지만 이 작위는 대단히 중요하다.

최초의 황제가 제국 법률에 정하길, 제국의 황제가 될 수 있는 자는 오직 룸인의 왕이라고 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즉, 룸왕은 황제가 되기 위한 사전 절차다.

룸왕이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룸 제국의 옛 수도 룸으로 순례를 떠나 한 가지 의례를 치러야 한다.

이름하여 망조의 알현.

멸망한 룸 제국의 마지막 황제의 시체를 두 눈으로 직접 보고 그 시체에 채찍질을 가하는 것이다.

옛 의식이 그러하듯 불필요하고 장황하며 의미 부여에 치중된 허례허식이지만 천 년 동안 제국의 모든 황제가 치렀던 행사다.

물론 루페르트도 경험해 본 일이다.

“또 그 폐허로 가야 하나.”

루페르트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과거에 보았던 구 제국의 몰락한 정경이 아스라이 떠올랐다.

쇠락 그 자체를 담은 풍경이랄까.

과할 정도로 거대한 건조물이 반파된 채 시간의 풍화작용 속에서 마멸되고 있었고, 그 아래 천박하고 열화된 난잡한 주거지가 곰팡이처럼 자생하고 있었다.

거기서 치렀던 행사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참 무의미했고 잔인하기까지 했던 행사였다.

“참 의미 없는 행사였지.”

루페르트는 말 대신 수레를 끌던 한 사내의 초라한 등을 떠올렸다.

“루페르트 가우저.”

제단 위의 소라고둥이 가볍게 몸을 움직였다.

“여신님.”

“그렇게 리프니에라고 부르라고 했건만 당신의 호칭은 변할 줄을 모르는군요.”

“죄송합니다.”

“뭐, 그때처럼 토끼 사육장 같은 작은 곳이 아니라서 별문제는 안 되겠지만요.”

“위버하임 장원 말이군요.”

“아무튼, 황제가 된 거 축하드려요!”

소라고둥이 제단 위에서 우뚝 서더니 갑자기 덜덜 떨며 껍질과 대리석 상판을 부딪치며 딱딱거리는 소리를 냈다.

딱딱딱.

루페르트는 의아한 눈으로 그 모습을 응시했다.

‘뭐지? 설마 박수를 치시는 건가?’

“와아! 축하해요!”

예상이 맞았다.

진짜로 여신은 박수를 치고 있는 것이다.

루페르트가 겸연쩍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여신님!”

“그보다 그 사람. 안 보이네요?”

소라고둥이 몸을 좌우로 돌렸다.

“루돌프 님 말인가요?”

“그런 이름이었나요?”

“성함을 모르시는 겁니까?”

“뭐, 당신도 대충 그 사람 정체를 알고 있지 않나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저는 사람 이름 같은 걸 잘 기억하지 않아요. 루페르트 가우저. 당신의 이름을 계속 부르는 것도 당신의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함이지요.”

소라고둥이 슬며시 루페르트를 향해 몸을 돌렸다.

“당신은 인간 중에서도 각별한 존재니까요.”

“그, 그렇군요. 황송할 따름입니다.”

“아무튼, 슬슬 룸 제국에 방문하겠네요?”

리프니에의 웃음기 섞인 물음에 루페르트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곳으로 갑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요.”

직립했던 소라고둥이 갑자기 제단 아래로 푹 꺼지듯 누워 버렸다.

“저는 안 갈래요.”

“네?”

“절 놔두고 가라는 말이에요.”

루페르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한 몸과 같던 소라고둥을 놓고 가라니.

그 소라고둥이야말로 루페르트의 모든 것 아니었던가.

리프니에는 마치 루페르트를 보듯 소라고둥의 입구 쪽을 빙글 돌리더니 퉁명스레 말했다.

“저, 그 나라 싫어요.”

“……룸 제국 말입니까?”

“네. 냄새나고 지저분하고 아무튼 보기 싫은 게 너무 많아요.”

“그, 그렇군요.”

순간 루페르트가 느낀 감정은 당혹감 그 자체였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무려 신이라는 존재가 이런 투정을 한다는 게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혼란 속에서 리프니에가 불쑥 물었다.

“전에도 갔다 왔었죠?”

“네. 그렇습니다.”

“문제가 있었나요?”

“특별한 문제는 없었습니다. 아니, 일어날 소지 자체가 없기도 하고요.”

황위에 오를 룸왕의 행차엔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의전이 따라붙는다.

명성 높은 제국 보병연대 하나, 귀족 자제로 이루어진 기병대대 하나, 제국 마법대학의 고위 마법사 하나.

선제후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화려한 수행원이다.

루페르트도 이들의 호위를 받은 바가 있어 잘 안다.

이 과도할 정도로 화려한 행렬의 목적은 단지 차기 황제를 경호하겠다는 것만이 아닌, 인근 주변국 특히 룸 제국의 후예들에게 새로운 제국의 힘을 과시하려는 것이라는 걸.

‘여신님 말씀대로 별문제는 없을 거야. 누가 감히 룸왕의 행차를 막겠어?’

룸왕은 곧 제위에 오를 자.

수행하는 자는 자신의 이름을 넘어 가문의 이름까지 걸고 수행한다.

어설픈 매수나 모략 같은 것이 들어갈 여지는 없다.

그래도 방심을 늦출 순 없다.

회귀라는 최대의 카드가 리프니에의 변덕으로 가로막힌 이상 이쪽도 최악을 대비할 필요가 있으니.

우선 한스 징펠만을 수배했다.

선제후가 된 이후 만난 적이 없었지만, 그라면 언제든 부르면 달려와 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루페르트는 빙판 위에 우뚝 서 있던 건장한 사내와 몰려드는 스크라엘링을 앞에 둔 채 이쪽을 가만히 응시하던 소녀를 떠올렸다.

‘그들에겐 몇 번이고 도움을 받았지.’

안젤리나가 죽은 현재 그들은 고용주가 없다.

뒤를 봐주던 거물이 사라진 지금 그들은 구걸밖에 할 수 없는 일개 도펠죌트너에 불가하다.

지금 루페르트의 권세와 힘이라면 능히 그들을 찾을 수 있으리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리프니에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저기, 루페르트 가우저.”

“네. 여신님.”

“저, 전에 제가 말했던 퀘스트 기억하고 계시죠?”

“네. 그렇습니다.”

“곧 그걸 주게 될 거 같아요. 아마도 그 시점은 당신이 그 악취 나는 나라에서 돌아온 직후가 되겠지요.”

리프니에는 루페르트가 아닌 다른 방향을 응시하고 있었다.

선제후의 집무실 구석에 덩그러니 놓인 소녀의 조각상이다.

“아까도 말한 거 같지만, 그 사람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요?”

“루돌프 님 말씀입니까?”

“오랜만의 바깥 공기가 퍽이나 마음에 들었나 보네요. 뭐, 언젠간 돌아올 사람이긴 하지만 괜히 신경 쓰이게 하는 게 조금은 짜증이 나네요.”

명백한 투정.

루페르트는 쓴웃음을 머금은 채 리프니에의 투정을 곱씹었다.

‘여신님. 가끔 보면 귀여운 구석도 꽤 많단 말이지.’

“저기, 루페르트 가우저.”

“네. 여신님.”

“혹시 그 사람이 제 욕을 하던가요?”

“아, 아니요!”

‘갑자기 이렇게 들어오시면……!!’

뒤이어 리프니에가 은근히 떠보는 어조로 물어온다.

“그 사람이 못된 짓 가르친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흐음~”

소라고둥이 루페르트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그야말로 들여다보는 듯한 행동.

“흠흠!”

표정 관리에 능하다고 하지만 여신 앞이다.

슬슬 얼굴에 경련이 올 무렵 소라고둥이 몸을 돌렸다.

“뭐, 당신들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냐마는.”

“하하하…….”

천만다행이다.

여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지만 루페르트에겐 철혈대제 또한 선망의 대상.

괜한 구설수로 그에게 진심으로 조력을 아끼지 않는 둘 사이를 나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튼 여신의 볼일은 여기까지인 것으로 보였다.

“그럼 루페르트 가우저. 잘 다녀오세요. 균형의 여신 리프니에의 깜짝 퀘스트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리프니에가 바닥에 누웠다.

‘여신님의 깜작 퀘스트라. 뭔가 불안한 느낌인데?’

의아함과 당혹감, 그리고 약간의 웃음과 함께 루페르트는 소라고둥에게 머리를 숙였다.

그 어떤 사심도 없는 순수한 경배의 마음을 안고서.

소라고둥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리프니에가 소라고둥을 떠난 모양이다.

때마침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성직 선제후 아카이아 대주교가 보낸 사람이다.

“룸왕 전하를 배알합니다.”

대주교만큼은 아니지만 높은 우관을 쓴 성직자가 루페르트에게 예를 갖췄다.

“다름이 아니오라, 룸왕께서 옛 제국을 순방하고 오신 뒤 대주교께서 직접 찾으실 일이 있을 거라고 전해 드렸습니다.”

“대주교께서요?”

“네, 긴히 사적으로 드려야 할 말씀이 있겠다고.”

“그렇군요.”

과거엔 없었던 일이다.

아카이아 대주교는 대관식에 잠깐 얼굴을 비췄을 뿐이고 사적으로 직접 찾은 일은 없었으니.

루페르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만큼 내가 인정받았다는 건가.’

그러나 그 미소는 과거의 기억과 함께 빠르게 희석됐다.

‘그 꽉 막힌 늙은이한테.’

루페르트의 아카이아 대주교에 대한 감정은 썩 좋다고 할 수 없다.

고리타분한 얼굴로 그럴듯한 말만 늘어놓던 그 늙은이는 겉으로는 참된 신앙인으로 불리지만, 실제로는 자기밖에 모르는 늙은이였다.

제국의 위기를 알고 선제후 간의 알력을 알고 있음에도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생의 말년에 그가 한 일이라고는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일이 터지지 않게 조치한 게 전부다.

자신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도록 말이다.

풍문에 따르면 이 복지부동의 늙은이는 마지막 순간 그답지 않은 최후를 맞이했다고 한다.

자살.

호라교에서 가장 금기시하는 방법으로 능동적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다.

“…….”

잠시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혔던 루페르트는 그 감정을 한숨 하나에 담아 날려 보냈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난 변했다. 내가 변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변한 것도 보았다. 그 늙은이 또한 내가 일으킬 변화 안에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겠지.’

루페르트는 조용히 창밖의 들판을 응시했다.

햇살을 받고 자라는 들판 너머로 짙은 먹구름이 모여들고 있었다.

한바탕 비가 올 모양이다.

* * *

“룸왕 전하를 수행하게 되어 정말로 영광입니다.”

호위대의 대장을 맡은 건 제국 백작 에른스트 분더발트다.

그는 백작이라는 작위를 가지고 있지만 대령이라는 계급으로 불리는 걸 더 선호하는데, 실제로 자신의 이름을 딴 제국 보병연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 사내는 그 자체로 약간의 변화를 의미했다.

‘분더발트 연대라. 전에는 로젠샤프트 연대였는데.’

나쁠 건 없는 변화다.

잔뼈 굵은 전쟁 베테랑이라고 하나 술주정뱅이 로젠샤프트가 이끄는 연대는 제국 내에서도 평가가 좋지 못한 2선급의 연대인 반면, 분더발트 연대는 어떤 전투에서도 가장 치열한 국면을 맡길 수 있는 1선급 연대로 평가받고 있으니까.

분더발트 뒤엔 형형색색 화려한 안감을 이어 만들고 장식용 갑옷을 걸친 위풍당당한 병사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있었다.

루페르트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분더발트에게 지휘봉을 건넸다.

“그야말로 제국 보병대의 거울과 같군요. 짧지 않은 여정이겠지만 마음 편안히 갈 수 있겠습니다.”

루페르트는 분더발트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연대를 사열했다.

굳은 얼굴로 보병대를 보던 루페르트의 입가에 점차 흐뭇한 미소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왔다.

‘역시, 제국 보병대다.’

보병이 약한 나라가 제국을 세울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제국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제국 보병대는 대륙에서 으뜸간다.

남쪽의 카스무어 왕국 보병대가 최근 명성을 떨치고 있다지만 제국 동맹국의 군인들은 제국군을 상대해 본 적이 없다.

‘1선급 연대가 호위로 붙다니. 마음 한번 든든한데?’

제국의 보병연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움직이는 성채다.

방패에 비견되는 장창, 검에 비견되는 화승총으로 완전 무장 한 그들의 방진을 뚫어 낼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다.

그들만 해도 든든한데, 룸왕엔 또 다른 수행원이 붙는다.

“제국 남작 마르틴 후스입니다. 룸왕 전하를 옛 제국의 수도까지 안전하게 모실 기병들의 대장을 맡고 있지요.”

약 200여 기에 달하는 기병대.

그들은 루페르트를 가장 가까이서 호위할 친위대다.

금빛과 은빛으로 번들거리는 얇은 흉갑을 입고 기병도와 피스톨로 무장한 그들은 그 아름다움만큼이나 치명적인 칼날이리라.

그들만이 아니다.

“사각(四角)의 마법사. 지겔슈타트라고 합니다.”

제국의 가장 강력한 우군.

제국 마법사가 루페르트의 군기 아래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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