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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제-44화 (44/225)

44화 12. 성 판텔레온 (4)

일찍이 룸이라는 거대한 제국이 있었다.

알려진 거의 모든 세계를 정복하고 복속시켰으나, 그 제국의 치세는 천 년이 가지 못했다.

그 거인이 죽었을 때 사람들은 입 모아 말했다.

말세가 왔다고, 세상의 종말이 왔다고.

실로 그러했다.

대낮에도 하늘이 병적인 붉은 빛으로 덮인 가운데 기근과 역병이 덮쳤고, 참주와 야만의 군주가 쉬지 않고 전쟁을 벌였다.

하루아침에 한 마을이 송두리째 없어졌고 한 도시가 폐허가 됐다.

인간이 아닌 것들이 인간의 영역에 돌아다녔고 발에 채는 건 그저 널브러진 인골이었다.

그 파멸의 시기에 한 사내가 대륙의 모퉁이에서 분연히 두 주먹을 쥐고 일어섰다.

그의 이름은 티그리트.

그의 출생에 대해 알려진 건 그다지 없다.

한미한 야만 부족의 후계자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모든 것은 불명,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는 룸 제국의 노예 출신이었다는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그의 왼쪽 어깨엔 검투사를 상징하는 사슬에 묶인 검의 문신이 새겨졌다고 한다.

그의 출신은 그러나 그가 이룬 위업에 비하면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그는 오직 자신의 힘만으로 제국이라 불릴 거대한 나라를 만들어 냈으니.

그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기억되는 이름은 단지 여덟 개뿐이다.

여덟 명의 제국 성인.

“그래. 그래서 뭐 때문에 나의 숲에 왔는가?”

지금 여기, 제국 성인을 칭하는 자가 있다.

그는 자신이 판텔레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판텔레온이라니.’

성 판텔레온.

성직자인 그는 티그리트를 위해 훗날 슈발츠마인 선제후가라고 불릴 만족의 우두머리를 찾아가 호라교를 전파하다 새장에 갇혀 굶어 죽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새장에 갇힌 채 작렬하는 태양을 직시하다 두 눈이 멀어 버렸다고 한다.

“어서. 말하라고. 숲속에서 만난 나의 벗들은 그리 인내심이 많지 않은 친구들이니까.”

판텔레온 뒤의 마물들이 창백한 얼굴에 살기를 드러내며 무기와 방패로 땅을 두드리고 있다.

루페르트는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인간만 보면 격노해 산 채로 잡아먹는 저 끔찍한 마물들이 누군가의 명에 저리 복종할 수 있다는 게.

뒤에서 섬세하지만 날 선 숨소리가 들린다.

마를로네가 잔뜩 긴장하고 있다.

제아무리 이능의 힘을 갖고 있다고 해도 저 눈앞의 괴이 앞에선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루페르트가 가까스로 운을 뗐다.

‘나는 제국의 황제다.’

마법의 한마디를 속으로 되뇌며.

“사냥을 하러 왔습니다.”

“사냥?”

판텔레온이 얼굴 근육을 씰룩였다.

‘말은 통하는 모양이군.’

“뭘 사냥하러 왔는가? 루페르트 가우저. 설마 나의 벗들을 사냥하러 온 건 아니겠지?”

판텔레온이 보이지 않을 허연 동공으로 뒤편에 이를 드러낸 마물들을 쳐다본다.

루페르트는 살짝 옆으로 몸을 움직여 보았다.

최대한 소리 없는 움직임이지만 판텔레온의 동공은 정확히 루페르트의 얼굴을 따라왔다.

‘이 인간, 눈이 보이는 건가. 아니. 그건 아니야.’

초점이 맞지 않는다.

하얗게 변색된 동공은 루페르트의 시선과 조금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

‘소리로 판단하는 건가.’

“아닙니다. 짐승을 사냥하러 왔습니다.”

루페르트는 마를로네 쪽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당황한 눈치지만 점차 이 상황에 익숙해졌고, 눈빛으로 그의 뜻을 묻는다.

약하다고 하지만 역시 그 베르크 란의 손녀다운 기백이다.

루페르트는 그녀에게 손짓했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지켜보라고.

사전에 수신호를 합의한 적은 없지만, 마를로네는 눈빛과 서툰 손짓만으로 그의 의도를 파악하고 소리 없이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흰 사슴입니다.”

루페르트가 낭랑하게 말했다.

“그 녀석을 잡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말을 하면서 판텔레온의 얼굴을 주시했다.

발작적으로 얼굴을 꿈틀거리는 괴인의 눈동자는 루페르트에게 비스듬히 꽂힌 채 움직이지 않았다.

‘역시, 눈이 안 보이는 건가. 그렇다고밖에 볼 수가 없다.’

그런데.

“내 사슴이다.”

판텔레온의 얼굴이 갑작스럽게 일그러졌다.

“내 사슴이라고!”

천둥이 바로 눈앞에서 울리면 이런 기분일까.

루페르트는 그 호통에 닿는 순간 몸이 부서지는 듯한 감각을 받으며 경직됐다.

순간 호흡이 멈추고 온몸의 털이 쭈뼛 솟아올랐고, 뒤이어 전류와 같은 전율이 온몸을 찌릿하게 울렸다.

‘이, 이게 인간의 몸에서 나올 수 있는 성량인가?’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저 괴인이 화를 내고 있다.

“하얀 사슴은 내 것이야.”

판텔레온이 저편 개울가에 깜짝 놀라 이쪽을 바라보는 흰 사슴들을 흰 동공으로 노려봤다.

‘눈이 안 보이는 게 아닌가? 먼 곳에 있는 것들을 어떻게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거지?’

그 허연 동공이 다시금 루페르트를 바라본다.

“무엇을 위해?”

그가 두 팔을 치켜올렸다.

긴 소매에 가려져 있던 고목 같은 각질이 박힌 삐쩍 마르고 긴 팔이 드러났다.

‘저 팔로 마리의 검을 막았었지…….’

그 팔이 이제 루페르트의 목을 조르려 한다.

“대답해라.”

눈앞의 죽음.

뒷걸음질을 치려 하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마법이나 저주의 힘이 아니다.

감당 못 할 공포와 전율이 사슬처럼 그를 붙들어 매고 있는 것이다.

루페르트는 순간 소라고둥을 불고 싶다는 강한 욕망에 휩싸였다.

그러나.

‘아니, 여기서 포기할 순 없다.’

루페르트는 강렬한 유혹에 저항했다.

‘내가 자초한 상황이 아니던가? 나만의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서.’

어쩌면 이 상황 자체가 여신이 그에게 내리는 시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을 택하려는 어리석은 신도에게 내리는.

‘여신님이 지켜보고 있다.’

가까스로 루페르트는 뒤로 물러나며 입을 열었다.

“이 숲은 슈발츠마인 선제후가의 사냥터입니다.”

광인의 손이 멈췄다.

루페르트는 그 행동에 대한 평가를 보류했다.

대신 뒤쪽을 보았다.

마를로네는 이제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다.

‘설마 도망가진 않았겠지?’

의심.

모든 군주가 앓는 마음의 질병이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하는 거 자체가 내가 어리석다는 증거다. 지금 내가 믿을 건 그녀뿐. 내가 그녀를 선택했다.’

마음을 굳건하게 다지며 루페르트는 광인의 변화를 지켜보았다.

상황은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다.

“그걸 누가 정하지?”

방금처럼 흥분하진 않지만 잦아드는 분노가 그의 하얗게 질린 동공 안에 차오르는 게 보인다.

“그건 여기가 역사와 법률이 보장하는 슈발츠마인 가문의 영토이기 때문입니다.”

“슈발츠마인? 그건 무엇이냐?”

광인이 일그러진 얼굴로 물었다.

‘알고 묻는 건가. 모르고 묻는 건가.’

알고 묻는 것으로 보인다.

루페르트의 침묵 속에서 그는 조롱하는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으니.

“아, 비두킨트! 비두킨트지?”

분노에 이어 광기가 광인의 얼굴에 차오르기 시작한다.

여진 같은 은은한 울림이 그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기운은 루페르트는 물론이고 뒤편의 마물마저도 웅크리게 할 정도였다.

“겉으로만 호라교로 개종하고 죽을 때까지 다르타니아 신앙을 고수한 이교도 놈. 날 새장에 가둬 굶겨 죽인 그놈! 그놈이 그래. 그랬었지. 선거 제후? 그런 게 됐다고 들었지.”

광인이 눈을 희번덕거리더니 갑자기 두 손으로 루페르트의 목을 조르려 했다.

루페르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건, 죽는다!’

나팔을 불 시간조차 없다.

루페르트는 다급히 두 손으로 육박해 오는 광인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나 그 광인의 힘은 무시무시했다.

한 마리의 곰이 미쳐 날뛰는 듯한 기운.

사람의 힘이 아니었다.

판텔레온의 손은 거침없이 루페르트의 목을 향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육박해 왔다.

속절없이 밀려오는 악력의 소용돌이를 보며 루페르트는 잊고 있던 카드 한 장을 떠올렸다.

‘그래, 내겐 그게 있었지!’

루페르트는 한 사내를 떠올렸다.

아서 픽튼.

버려진 정착지 리히트 보덴을 외로이 지켜가던 총독을.

영혼 동맹 중 하나인 그의 능력은 단순하면서도 강렬하다.

‘나에게 힘을!’

순간 수많은 전사의 함성이 들려오는 듯한 환청과 함께 이루 말할 수 없는 힘이 내면에서 솟아올랐다.

빙해를 누비던 앙쥬 왕국인들의 선조, 북부인의 괴력이 루페르트의 몸에 깃들었다.

힘을 얻은 루페르트는 다가오는 괴인의 팔을 뒤로 물렸다.

“?!”

괴인의 얼굴에 미세한 경악이 떠올랐다.

루페르트의 목젖 앞에서 괴인의 팔이 멈췄다.

빙하 속에서 잉태된 북부인의 괴력이 곰과 같은 괴인의 진격을 드디어 멈춘 것이다.

팔이 멈췄다.

밀어내진 못했지만, 루페르트의 생명은 유예됐다.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 힘이라니.’

그 지속 시간은 순간적이지만 루페르트는 광인의 느닷없는 기습을 막아 냈다.

가장 놀란 건 루페르트가 아닌 판텔레온 본인처럼 보였다.

공세가 완력에 막히자, 그는 과할 정도로 놀라워하는 표정과 겸연쩍은 미소를 머금으며 루페르트의 목을 조르려던 팔을 물렸다.

‘살았다.’

“호오? 꽤 힘이 있군. 비두킨트도 그랬었지. 두 사람을 꿴 창을 휘둘러, 세 사람째를 꿸 정도로 힘이 강했지!”

괴인이 씨익 미소 지으며 묻는다.

“그의 후손인가?”

악의는 없어 보인다.

루페르트는 정직하게 그리고 의연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러자 괴인이 갑자기 코를 가져다 댔다.

루페르트는 다가오는 괴인에게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악취를 느꼈다.

썩어 가는 이끼의 냄새라고 할까.

킁킁.

광인이 냄새를 맡으며 보일 리 없는 눈동자로 루페르트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이 냄새? 사슴 냄새가 아닌데. 멸망한 제국 놈들이 먹던 썩은 비린내 나는 기름 냄새가 나는데.”

지금이 기회다.

루페르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가 가진 유일한 검을 찾았다.

그러나 그의 검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마리, 어디에 간 거냐? 너 때문에 이런 고생을…….’

툭.

조약돌이 루페르트의 어깨 위에 떨어졌다.

반사적으로 위를 보았다.

까마득한 나무 위에 금발의 소녀가 가지에 걸터앉아 손짓하고 있다.

순간 루페르트는 눈물이 핑 돌 정도의 감동을 느꼈다.

‘역시, 이 녀석은…….’

그들과 다르다.

황궁 수호자라고 거들먹거리던 번쩍거리는 옷을 입던 모리배들과.

계약이라고 하나, 그 계약을 위해 능히 눈앞의 괴이에 맞설 정도의 신의와 용기를 가지고 있다.

약한 게 유일한 문제지만, 이제는 해법을 찾아낼 시간이다.

‘이제 이 괴물을 어떻게 해야 하지? 저 팔도 팔이지만 힘도 심상치 않아. 그보다 눈이 안 보이는데 어떻게 저렇게 행동이 자유로울 수 있지? 초점이 안 맞는 것 말고는 눈이 달린 사람처럼 움직이고 있다.’

판텔레온이 중얼거림을 멈췄다.

그는 가만히 루페르트를 흰 눈으로 응시했다.

시선의 느낌이 다르다.

광인이 불안한 일렁거림은 눈으로 씻고도 찾을 수 없고 대신 단상 위의 법관 같은 준엄함이 전신에서 느껴졌다.

“제국을 누가 만들었다고 생각하나?”

답할 수밖에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으니.

“……최초의 황제이신 위대한 티그리트입니다.”

판텔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괴물도 노예제 티그리트는 인정하는 건가.’

“그리고 또? 또 누가 있지?”

판텔레온의 질문이 추가됐다.

루페르트는 자신이 알고 있고 대학교수들에게서 보충받은 지식을 연상하며 담담하게 답했다.

“일곱 선제후입니다.”

“…….”

“위대한 티그리트께서는 자신의 힘과 군대에 더해 강성한 여섯 부족과 룸 제국의 추기경과 힘을 합쳐 이 제국을 건국했습니다.”

흠잡을 곳 없는 답이다.

이것은 기록된, 모두가 공인하는 사실이니까.

그러나.

“선제후?”

광인은 의심한다.

“선제후라고?”

광인이 나팔을 불었다.

부우우우우우---

기억에 있는 음색.

틀림없다.

이 소리는 마를로네가 죽고 흰 사슴의 목을 가지고 올 때 듣던 바로 그 음색이다.

마치 온 숲을 겁간하려는 듯한 음습하고도 폭력적인 음색.

그 소리는 뒤이어 또 다른 익숙한 소리를 불러들였다.

둥- 둥- 둥-

야만의 북소리가 호응하듯 숲속에서 울려 퍼졌다.

둥- 둥- 둥-

숲이 흔들거린다.

기괴한 구령이 들려온다.

지축이 미약하게 흔들리고 병장기가 부딪치는 전장의 소리가 숲속에 메아리친다.

곧 루페르트는 그 소리의 범인들을 두 눈으로 목도했다.

군대가 있다.

혐오스러운 마물, 오크로 이루어진 살육의 군대가.

어떤 인간에게도 복종하지 않는다는 마물들은 그러나 눈먼 괴인에게 복종한다.

“선제후라고 했나?”

자신의 군대를 뒤에 거느린 채, 판텔레온이 말했다.

“놈들은 오히려 제국의 걸림돌이었다. 특히 비두킨트! 그놈은 세 번이나 그분을 배신한 것도 모자라 석회를 바른 침으로 내 눈을 찌르고 새장에 가뒀지!”

판텔레온이 고개를 들어 소리 높여 웃었다.

광기와 분노에 찬 웃음.

“그런 놈이 선제후?”

마를로네가 신호를 보냈다.

지금 공격하겠다는 신호다.

루페르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신 그녀에게 등을 돌린 채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루페르트의 눈동자에 불경한 초록빛이 일렁거렸다.

여신의 아티팩트, 통찰의 만화경을 사용한 것이다.

불경한 빛 속에서 루페르트는 정중앙에 자리 잡은 눈먼 괴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곧 그의 눈앞에 빛나는 문자가 떠올렸다.

< “성 판텔레온” 판테르쥬토릭스에 관한 보고 >

-괴물.

여신의 평은 짧고 간단했다.

‘괴물.’

실로 그러하다.

눈앞의 저건 제국 성인이고 뭐고 아무것도 아니다.

단지,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괴물이다.

“너!”

괴물이 희게 웃었다.

“방금 그거 뭐였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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