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11. 가문의 시련 (3)
의외의 손님이 찾아온 건 루페르트가 가문의 저택에 여장을 푼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무렵이었다.
“안녕하세요?”
베르크 란의 손녀, 마를로네가 나타나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녀를 본 순간 루페르트는 흠칫 놀랬다.
그녀가 나타난 것도 놀라지만, 평소와는 복장이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수수한 셔츠와 조끼, 발목까지 닿는 단색의 무명 스커트.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민의 복식이지만 늘 남성의 복식을 입던 마를로네가 처음으로 여성의 옷을 입고 나타났다.
옷이 사람을 만든다고 남장을 하던 시절보다는 분위기도 그렇고 태도도 그렇고 훨씬 어른스러워 보인다.
특히 늘 숨기고 있던 머리를 가지런히 땋아 한쪽 어깨로 내린 부분에 자꾸 시선이 간다.
‘저렇게 긴 머리를 모자에 숨기고 있으면 답답하지 않나?’
“저기. 남작님?”
마를로네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끄러미 쳐다보며 물었다.
“아, 미안. 이런 모습은 처음이라. 그런데 오늘은 평소와 복장이 다르네?”
“대황후께서 절 보냈어요.”
처음부터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바지만 마를로네는 최초에 자신을 소개한 것 외엔 전부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이쪽을 바라보고 있지만, 시선의 끝이 향하는 방향은 비스듬히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벽을 세우고 있다.
루페르트의 입가에 희미한 쓴웃음이 맺혔다.
‘그래, 이 녀석. 어째서인지 날 싫어하는 눈치던데.’
어째 신선하다.
회귀 이후엔 피리스도 그렇고 저 두려운 울피아나도 그렇게 과할 정도로 루페르트에게 호의를 보였는데 모처럼 루페르트에게 익숙한 온도의 시선이 느껴졌으니.
‘솔직히 이쪽이 여전히 편안하긴 하지만.’
그나저나 이쪽이 집중하지 않고 있으니 슬슬 짜증을 느끼는 눈치다.
표정엔 미동도 없지만 냉랭한 기운이 눈에 띄게 진해지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피곤하신 모양이네요. 실례하겠습니다.”
바로 돌아서려 한다.
“괜찮아. 잠깐 딴생각을 했을 뿐이니까.”
루페르트가 자리에 고쳐 앉으며 마를로네를 향해 호의적인 시선을 보냈다.
“그래, 무슨 일이야?”
“…….”
“자리에 앉지?”
“이대로가 좋아요.”
“난 괜찮은데.”
“가문의 시련에 대해 아세요?”
이야기를 거듭할수록 루페르트는 추위를 느꼈다.
한창 겨울이라 추운 시기긴 하지만 이 마를로네라는 녀석, 말 한마디, 태도 하나에 날 선 얼음이 뚝뚝 떨어지니.
하지만 그 모습은 루페르트의 눈엔 그저 귀여워 보였다.
그녀는 모를 것이다.
루페르트가 울피아나가 받은 수모와 모욕의 깊이를. 울피아나가 일상적으로 저지른 인격 폭력이 전쟁 망치로 머리통을 두들기는 느낌이라면 마를로네가 의도적으로 두는 거리감은 깃털로 때리는 느낌이다.
심지어 과거의 피리스와 비교해도 강도는 훨씬 약하다.
‘검은 날카롭지만, 매도는 무디군. 아가씨.’
“집중해 주세요.”
흐릿한 안개를 두른 듯한 초록색 눈동자가 약간의 분노를 떠올린 채 이쪽을 보고 있다.
“미안. 이제 진짜 집중할게.”
루페르트는 미소를 싹 지우고 조금은 진지한 얼굴로 마를로네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짐짓 노려보던 마를로네가 시선을 회피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선, 대황후께서 그쪽의 선조에 대해 아시냐고 물어보라고 하시더군요.”
“나의 선조라.”
루페르트는 메헨부르그에서 보았던 조상의 나무를 떠올렸다.
끝없이 여러 개로 갈라지는 가지를 타고 역으로 수렴해 큰 줄기로, 기둥으로 거기서 가장 아래로 내려가면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고대의 이름이 금박을 입힌 세공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비두킨트.”
모를 수가 없다.
씨족에 속한 자라면.
가정교사에게서도 몇백 번이고 그 이름을 들었다.
최초의 황제, 노예제 티그리트를 도운 여섯 명의 전사 부족장 중 하나라고.
“선조에 대해 잘 아시나요?”
“알 만큼은 안다고 생각하는데.”
“선조의 신앙에 대해서도요?”
“신앙?”
신앙이라는 말을 듣자 짚이는 구석이 있다.
루페르트는 자신을 흐릿한, 관심 없는 눈동자로 쳐다보는 마를로네의 시선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대황후가 보냈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어쩌면 이번 시련과 관련된 이야기일지도.’
“모든 선제후는 호라교를 믿는다. 하지만.”
“네.”
“전설에 따르면 나의 선조는 호라와 동시에 사냥의 여신 다르타니아를 믿었다는 이야기도 있지.”
“그렇다고 하더군요.”
마를로네가 눈을 깜빡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덕분에 할 이야기가 줄어들었네요.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말할게요.”
“말해 봐.”
“이번 시련은 사냥이에요.”
“왠지 그럴 거 같더니.”
루페르트는 창밖에 펼쳐진 원시의 삼림을 응시했다.
메헨부르그의 숲이 귀기 어린 숲으로 악명이 높다지만 이곳 슈발츠마인 선제후 가문의 사냥터인 휘텐보름 숲도 만만치 않았다.
오히려 우울한, 인간을 부정하는 듯한 오싹한 느낌은 메헨부르그의 삼림보다 한 수 위일 정도.
‘오래된 숲이 다 그렇지. 천 년 전에도, 그전에도 있었으니. 어쩌면 세상이 창조된 날부터 자리 잡고 있었을지도.’
이제 저 소녀의 용건을 들을 차례다.
마를로네의 얼굴엔 여전히 아무런 표정이 없다.
시선을 피하는 것도 여전하지만 그녀의 눈동자가 가볍게 움직여 루페르트를 바라보았다.
다시 한번 눈과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신비로운 느낌이 드는 눈동자.
그 안에 담긴 감정은 호의와 한참 거리가 멀지만, 운명의 방향타는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저랑 같이 사냥에 나가야 할 거 같네요.”
* * *
슈발츠마인 선제후 가문은 하나의 직계에 속한 좁은 의미의 가문이 아닌 여러 씨족 구성원의 연합체다.
비두킨트 씨족 중 가장 쟁쟁하고 순혈에 가까운, 조상의 나무에 이름을 올린 자들이 가문의 상석을 점해 중대사를 의논하고 결정하고 나아갈 방향에 대해 결정한다.
루페르트의 치세 당시 슈발츠마인 선제후 자리는 시종일관 공석이었다.
제국의 멸망이 가시화될 때야 비로소 베른하르트라는 자를 새로운 선제후로 결정했지만, 왜 그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당주의 자리를 비워 놨는지에 대해선 많은 이의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혹자는 루페르트 가우저라는 가문 출신 황제를 배출했기에 암암리에 그를 가문의 당주, 선제후로 인정했다고 떠들어대지만 루페르트가 직접 경험한 것처럼 헛소리로 판명 났다.
슈발츠마인 선제후 가문은 10년이 가까운 시간 동안 선제후 자리를 공석으로 놔둔 것이다.
황제였던 루페르트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고통받고 핍박받는 자들의 방패, 일출 너머를 보는 자, 용을 살해한 자, 신앙의 굳건한 수호자이자 제국을 만든 위대한 전사 부족장이신 우리의 선조 비두킨트의 고귀한 후손들이 그 고귀한 뜻을 이어받고자 선조의 숲에 당도하였나이다.”
선조의 비석 앞에서 설교자처럼 고양된 목소리로 포효하듯 말하는 자는 루페르트도 잘 아는 인물이다.
콘라드 회에.
슈발츠마인의 가장 강력한 가로(家老) 중 하나다.
다른 친척과 달리 작위도 없고 영지도 없지만 젊은 시절 외국의 전쟁터에서 장군으로 활약해 높은 명성을 누렸고 엄청난 부를 손에 쥐고 돌아왔다.
슈발츠마인 영지 한 구역을 차지한 그의 개인 저택의 화려함은 여간한 공작의 궁전을 초라하게 만들 정도라고.
루페르트의 시선은 그러나 그 사내에겐 짧게 머물렀다.
보잘것없는 늙은이다.
내전기 구교파의 장군으로 임명되어 골트문트의 군대를 지휘했지만 연전연패. 군대를 깡그리 날려 버렸다.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콘라드 회에는 궂은 날씨, 부하의 자질, 심지어 있지도 않은 내통자를 거론하며 변명하기 급급했다.
선제후의 대리 장군에서 일개 연대장으로 전락한 후에도 추태는 계속됐고, 결국 오명 속에서 군문을 떠나야 했다.
“저기, 하얀 깃을 꽂은 검은 모자를 쓴 분을 알고 계십니까?”
루페르트 옆엔 콘라드 회에보다 훨씬 중요한 사람이 서 있었다.
제국수렵대의 안투안 쿠르스트다.
그 또한 마를로네처럼 대황후의 임무를 받고 루페르트를 찾아왔다.
그의 임무란.
“카를슈타트-게히펠트 공작 에리히 랑에 님입니다. 아마 여기 있는 모든 참가자 중에 가장 가문 내 지위가 높으신 분이죠. 옆에 있는 수행원의 숫자와 복식을 보십시오. 다른 참가자와 한 단계 격이 다르지 않습니까?”
경쟁자의 정보 제공이다.
그에 따르면 가문의 시련에 도전하는 자는 총 10명이다.
조상의 나무에서 가장 중심에 근접한 최상위 구성원부터 루페르트처럼 나뭇가지의 곁가지 끝에 간신히 이름을 올린 출가인의 후예까지, 슈발츠마인이라는 호랑이가 되려는 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루페르트가 이름을 아는 건 한 명뿐이다.
루페르트는 자신처럼 한 줌의 수행단을 거느린 청년을 응시했다.
연령은 루페르트와 비슷하거나 연하.
앳된 모습이지만 힘차고 절도 있는 몸짓, 뜨겁게 타오르지만 늘 어딘가를 모색하는 눈동자가 강한 인상을 심어 줬다.
‘이자인가? 최후의 순간, 슈발츠마인 선제후 자리에 오른 자가.’
안투안은 요주의 인물로 에리히 랑에, 외스타슈 포겔, 게오르그 브뤼켄 총 세 명을 꼽았다.
하나 같이 에리히 랑에처럼 다른 작위를 가지고 있고 강력한 권력과 부를 거머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도 모르는 사람이다.
적어도 루페르트의 황제 시절엔 약간의 두각도 나타내지 못한 인물이다.
안투안은 베른하르트에 대해선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
언급할 가치가 없는 인물로 본 모양이다.
루페르트는 안투안이 언급한 경쟁자들을 하나씩 뜯어봤다.
외견은 화려하고 얼굴엔 강한 자신감이 넘쳐흐르지만 루페르트의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평범했다.
‘굳이 통찰의 만화경을 쓸 필요가 없는 사람들로 보인다.’
식견이 생겼다고 할까.
만화경을 쓰지 않더라도 그 사람의 행동거지와 됨됨이가 보인다.
특히 세력이 작은 라이벌을 쳐다볼 때 무시하는 눈빛은 오히려 루페르트에게 안도감을 줬다.
한편 콘라드 회에의 이야기는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곳 우리 씨족의 신성한 숲에는 여기서만 서식하는 하얀 사슴이 살고 있습니다. 우리 가문의 문장에 있는 데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선조께서 가장 귀하게 여긴 사냥감이지요. 알다시피 우리의 선조는 호라신의 열렬한 신자이지만 또한 사냥의 여신의 가호를 받으신 분입니다. 그분의 진정한 후계자라면, 마땅히 그분의 자취를 따라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과제는 정해졌다.
선조의 숲, 휘테보름에서 가문의 상징이기도 한 하얀 사슴을 사냥해 올 것.
기한은 사흘.
제약은 크게 두 가지다.
부정한 동물인 사냥개의 사용 금지.
수행원 숫자가 10명을 넘지 않을 것.
그 이외엔 그 어떤 방법도 용인된다.
안투안 쿠르스트가 곁을 떠나기 전, 굳은 얼굴로 경고했다.
“조심하십시오. 시련에 참가했다고 하나 아직 세력이 미약한 당신은 사냥꾼에서 사냥감으로 전락할 수도 있으니까요.”
“경쟁자가 저를 해치기라도 한다는 말씀입니까?”
“맹수끼린 싸우진 않겠죠.”
안투안의 시선은 그가 거론한 3명의 강력한 후보를 향했다.
“하지만 맹수가 아닌 것은 맹수의 먹잇감이 될지도 모릅니다.”
한스 징펠만을 죽인 전적이 있는 자의 말이다.
루페르트는 미소와 함께 안투안에게 감사를 표했다.
“대황후께서는 그 도펠죌트너를 보내셨지만, 혹시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대황후의 안배를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그 도펠죌트너, 여자에다 어리기까지 하니까요.”
“필요한 순간이 오면 언제든 도움을 청하겠습니다.”
“그 도펠죌트너를 불러오겠습니다.”
짧은 대화 속에서 루페르트는 안투안 쿠르스트가 마를로네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어렵지 않게 발견했다.
‘하긴, 안 그래도 도펠죌트너에다 벽을 세우는 성격을 가진 아이를 누가 좋아하겠어. 나처럼 욕먹는 데 이골이 나야 내성이 있겠지.’
안투안 쿠르스트가 마를로네를 데리러 간 동안 주최 측에서 약간의 소란이 일었다.
사냥터지기로 보이는 늙고 추레한 사내가 사색이 된 얼굴로 콘라드 회에 앞에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인사를 하더니 알아듣기 어려운 흐릿한 발음으로 떠들어 대기 시작한 것이다.
어차피 할 일도 없겠다 루페르트는 흥미를 느끼고 그쪽에 다가갔다.
“대단히 외람됩니다만. 나으리. 사냥은 중지해야 합니다. 제가 대위님께 말씀드렸는데. 젠장! 숲에 이상한 인간이 나타났습니다!”
격 낮은 일개 고용인이 비루한 행색과 교양 없는 말투로 말하자 콘라드 회에는 바로 반감을 드러냈다.
“여러분. 이 사람은 누굽니까? 왜 이런 사람이 내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요? 아는 사람?”
그러나 그 냉랭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사냥터지기는 발언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제가요. 20년, 아니 30년을 넘게 이 숲을 돌아다녔는데요, 내 성 에라스뮈스와 호라신께 맹세컨대 그런 괴인은 본 적이 없습니다. 네! 괴인입니다! 아니 악마? 악마일지도.”
콘라드 회에는 주변 사람에게 일러 그를 끌어내게 했다.
끌려가는 와중에도 사냥터지기는 계속해서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에리히 랑에를 비롯한 주요 경쟁자는 그 모습에 비웃음, 냉소를 보였지만 루페르트는 달랐다.
하찮은 사람이라고 하나 그 절박함 속엔 진실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적당히 소란이 가신 후 루페르트는 격한 숨을 몰아 내쉬는 사냥터지기에게 다가갔다.
그는 대위라고 불리는 퇴역 장교에게 호된 꾸지람을 듣고 있었다.
“대체 누구 안전이라고! 당장 쫓겨나고 싶어?”
대위가 당장이라도 휘두를 것처럼 말채찍을 높이 들어 올렸다.
사냥터지기는 고집이 있는 사람이었다.
양손을 올려 채찍을 막으려 드는 와중에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진짜 봤다니까요. 성 판텔레온의 질병에 걸려 양 눈이 크림을 푼 것처럼 뿌연 데다가 삐쩍 마른 인간이 두 눈이 멀쩡한 사람처럼 숲을 거니는걸요. 거기다 그 인간 뒤에는, 호라신이시여! 숲의 마물, 오크들이 따르고 있었다니까요!”
“술 좀 작작 마셔!”
사내의 이야기는 채찍 소리와 함께 비로소 끝이 났다.
하지만 그 이야기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
불길한 예감이 운명처럼 엄습한다.
멀리, 마를로네가 가기 싫은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며 터벅터벅 걸어오는 걸 보며 루페르트는 한 손에 조용히 여신의 아티팩트를 떠올렸다.
시간의 책갈피.
지금의 순간을 기록할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