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11. 가문의 시련 (2)
궁정 모임의 날이 왔다.
같은 꿈을 꾸는 듯한 연회장에서 루페르트는 무미건조한 대화, 만남, 눈과 눈의 마주침, 인사치레를 의무감 속에서 수행했다.
기이한 일이다.
그토록 화려했던 그 모임이 이렇게 무채색일 줄이야.
하지만 단 하나 총천연색으로 보이는 순간도 있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당신이 그 메헨부르그의 야수를 물리치고 거기다 그 잊힌 식민지 리히트 보덴을 개척했다는 루페르트 가우저 님이신가요?”
과거의 황후 울피아나와 다시 만난 때였다.
“……그렇습니다.”
여간한 일엔 단련이 됐다고 자부했지만, 그녀와 눈을 마주치자 심장이 위축된다.
그 숱한 시간과 경험의 벽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루페르트에게 새긴 상흔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울피아나.’
지금 그녀는 여신처럼 아름다우며 눈부시다.
그러나 루페르트는 그녀의 다른 모습을 알고 있다.
보는 것만으로 돌이 된다는 바실리스크 같은 괴물이었다.
시선이 마주칠 때면 날카로운 가시로 안구를 쑤시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고 입만 열면 쏟아지는 독설은 루페르트가 간신히 붙들고 있던 자존심의 밑바닥까지 헤집어 놓았다.
살아 있는 형벌.
과거의 황후는 루페르트에게 있어 그런 존재였다.
테타우가 포위당하기 전 그녀가 시종을 이끌고 떠났기에 망정이지 그녀가 함께 있었다면 어쩌면 루페르트는 리프니에를 만나기도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지도 모른다.
‘진정하자. 현재의 울피아나는 그때의 그녀와는 다른 사람이다. 봐라. 루페르트 가우저. 이렇게 내게 호감을 품고 있지 않은가?’
트라우마는 쉬이 씻겨지지 않는다.
루페르트는 몇 번이고 자기 최면을 걸어 봤지만, 영혼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구역질 같은 거부감에 번번이 직면해야 했다.
“저기, 남작님? 혹시 제가 불편하신가요?”
울피아나는 눈치가 빠른 여자다.
눈치가 빠른 걸 넘어 지레짐작으로 상처를 주는 여자였다.
루페르트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 아닙니다. 갑자기 미열이.”
“그렇군요. 괜찮으시다면 저의 손수건을 써 주세요.”
“…….”
손수건이 보인다.
손이 떨린다.
그녀의 냄새가 밴 물건을 받을 용기가 없다.
“응?”
울피아나가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갸우뚱거릴 때였다.
리프니에 이외에 다른 신을 믿지 않는 루페르트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다른 신들을 찾고 싶은 심정이다.
때마침 구원의 손길이 찾아왔다.
“루페르트 님. 선제후들께서 찾으십니다.”
그제야 기운을 차린 루페르트가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르며 억지로 미소를 꾸몄다.
“죄송합니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다음에 만날 땐 보다 밝은 모습으로 뵈었으면 합니다.”
“저도 기대할게요.”
‘기대는 무슨.’
시종을 따라 선제후들이 기다리는 방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후들후들 떨린다.
이전만 해도 이 정도의 압박을 느끼진 않았다.
그때만 해도 울피아나의 접근은 제한적이었으니.
그러나 이번엔 더 가까이 다가왔다.
보폭도, 눈과 눈 사이의 거리도 심지어 호흡이 닿을 정도의 거리까지 과감하게 접근해 왔고 루페르트를 주눅 들게 하는 특유의 향기를 퍼뜨렸다.
‘그 여자. 정말로 진저리 날 정도로 날 괴롭혔구나.’
루페르트는 심호흡을 하며 흔들리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진정하자. 루페르트 가우저.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하자.’
열주가 늘어선 복도 너머로 크고 화려한 문이 보인다.
제국을 움직이는 자들이 기다리고 있다.
* * *
이 방에 들어오는 건 이번이 세 번째다.
첫 번째는 무지렁이 촌놈이었다.
선제후들은 차갑게 무시하거나 냉소를 머금으며 빈정거렸다.
두 번째는 화려한 광대였다.
이목을 주목하는 발언과 생각은 가장 의욕 없는 선제후마저 관심을 드러낼 정도의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세 번째는 어떤 의미로 원점으로 돌아왔다.
루페르트는 평범한 인간을 연기했다.
물론 전처럼 무시 받을 정도로 어리숙하거나, 바보 같은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메헨부르그의 야수를 토벌한 자이자, 리히트 보덴의 구원자라는 별명답게 여유와 유머라는 세련됨을 가지고 능숙하고 선제후라는 제국 최상위 권력자들을 상대했다.
적당한 발언과 적당한 답변, 그리고 웃음과 미소.
화기애애하게 모임은 흘러갔다.
전처럼 제국을 움직이는 자들의 심장을 울리는 전율은 없었다.
하지만 왜일까.
가슴이 이토록 격동되는 건.
‘이 느낌은.’
단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마음에 고개를 들고 일어난다.
그것은 아마 자신감이라는 이름의 불꽃일 것이다.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도 자신의 힘만으로 원하는 걸 거머쥘 수 있다는 희망일 것이다.
그 희망은 현실성이라는 또 다른 장작에 옮겨붙어 더욱 가열차게 타올랐다.
‘곧 슈발츠마인 선제후 가문의 후계자를 뽑는 시련이 열리겠지.’
가문의 시련.
루페르트가 넘어야 할 새로운 벽이다.
이미 물밑 작업은 치열하게 진행 중이다.
루페르트가 리히트 보덴에서 벌어들인 수익의 상당 부분을 대황후가 지목하는 슈발츠마인 선제후 가문의 유력자를 구워삶는 데 사용했다.
과거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액이 은밀하게 오갔고, 루페르트의 자격을 문제 삼던 가장 보수적인 이마저 루페르트의 자격을 조금은 못마땅한 어조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안젤리나가 보낸 시종의 말에 의하면 작업은 이제 팔부능선을 넘었다고.
문제는 시련의 내용이다.
‘어떤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까. 정보는 한정적이다. 회귀라는 수단이 있지만, 가급적이면 한 번에 끝내고 싶어. 솔직히 두 번 다시 여기에 오고 싶지 않아.
“위버하임 남작 루페르트 가우저.”
한 사내가 뒤에서 루페르트를 불러 세웠다.
은발의 청수(淸秀)한 외모.
중년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아찔한 미남자의 기운을 풍기는 이 사내는 다름 아닌 고어문트의 선제후 골트문트다.
“루페르트 가우저.”
“네. 고어문트 선제후님.”
그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이제 골트문트는 누구보다 속을 알 수 없는 잠재적인 위험인물이다.
루페르트는 그가 과거의 시간 축에서 암살자를 보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그런 그가 왜 선제후의 방을 나서면서까지 루페르트를 불러 세운 것일까.
진한 의문을 느끼며 루페르트는 선제후를 응시했다.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빙상에서 행운을 찾았다고 들었는데.”
골트문트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내가 알기로 그대는 하켄하임에서 평민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았다고 들었는데, 현재 위버하임의 남작 정도면 과거에 비해 충분히 풍요롭고 안락한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나의 의도를 의심하는 건가.‘
그가 위험한 존재인 건 맞다.
허나 이 사내와 척을 지고 싶진 않다.
적대적이라고 하나, 공공연하게 적으로 돌리기엔 너무나 위험한 존재니.
다행스럽게도 루페르트의 눈에 비친 골트문트의 이미지는 그가 저지른 여러 악행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긍정적이다.
의도야 어찌 됐든 꼭두각시 황제 시절 유일하게 그에게 잘 대해 줬던 좋은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의 딸이 남긴 상처의 깊이만큼 말이다.
덕분에 루페르트는 울피아나 때와는 달리 여유를 가지고 말할 수 있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선제후께서는 가난을 경험하신 바가 없으시죠?”
“가난?”
“정확히는 곤궁함 말입니다.”
“글쎄. 없는 거 같군. 굳이 꼽는다면 아직 내가 철부지일 때 전쟁을 피해 저지로 피난을 갔을 때 거기서 하찮은 음식을 먹었을 때 정도?”
“그 맛을 기억하십니까?”
“음식이라기보다는 진흙 같더군. 도저히 사람이 먹는 음식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지.”
“저는 그런 음식을 꽤 자주 먹었습니다. 귀리 죽에 피를 굳혀 만든 선지 소시지, 다리가 여럿 달린 비늘 없는 생선을 날것으로 먹기도 했죠.”
“흐음.”
골트문트가 한 손으로 턱을 문지르며 루페르트를 얼음처럼 투명한 푸른 눈으로 노려본다.
마치 루페르트 속을 꿰뚫어 보려는 듯한 시선.
‘당신 딸이라면 모를까, 당신은 그다지 무섭지가 않군요.’
루페르트는 위축되지 않고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위버하임의 하인들이 말하길 제 직위는 불안정하다고 하더군요. 빌헬미나였나. 평소 잘 보이지도 않았는데 거기다 갑자기 장원에 나오지 않던 하녀가 그런 말을 했었습니다.”
“…….”
“해서 이 자리에 있을 때 조금이라도 지위를 이용해서 돈을 벌어 보고 싶었습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골트문트가 입을 열었다.
“리히트보덴에 가는 비용은 어떻게 마련했지?”
역시 골트문트다운 날카로운 지적이다.
물론 이에 대한 변명은 준비했다.
“보석을 팔았습니다.”
“보석?”
“조부가 남기신 것이지요. 알다시피 제 조부는 선제의…….”
“알았네.”
골트문트가 돌아섰다.
“내 딸은 어떻던가? 만나 봤겠지?”
갑작스러운 일격.
‘갑자기 그 이야기를 꺼내는 건가?’
“대답은?”
“만나 뵈었습니다.”
“어떻던가?”
울피아나는 자신의 경험을 공유할 것이다.
최적의 변명이 필요하다.
“정직하게 말씀드리자면 너무나 아름다워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모를 정도로 당황했었습니다.”
선제후의 시종일관 냉랭하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내 딸이 그 말을 들으면 기뻐하겠군.”
“실례합니다만 방금 하신 말씀의 의미가?”
“아, 내 딸이 자네의 활약상에 대단히 인상이 깊었던 모양이야.”
“……변변찮은 일이었습니다.”
“그건 자네 생각이고, 메헨부르그의 야수에 이어 리히트 보덴의 탈환까지. 그야말로 신화 속에 제국 성인들이나 할 법한 영웅담의 모음집 아닌가? 자네를 만나고 싶다고 며칠 전부터 떠들어대던데, 과년한 딸을 둔 아비의 입장으로 곤란하더군.”
“…….”
멀리 경비병이 선제후에게 신호를 보냈다.
새로운 황제 후보가 방에 들어온 모양이다.
골트문트가 웃는 얼굴로 돌아서서 루페르트의 어깨를 두드렸다.
“밤이 깊었군. 들어가게. 루페르트 가우저.”
루페르트는 정중하게 예의를 갖췄다.
골트문트는 가벼운 걸음걸이로 선제후들의 방으로 들어갔다.
“…….”
큰 파고를 넘었다.
하지만 뭐라고 표현할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감정의 소용돌이가 루페르트의 뇌 내에서 휘몰아쳤다.
‘같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건만, 어찌 이렇게 새롭단 말인가.’
좋은 기분인지 나쁜 기분인지는 본인도 알 수 없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루페르트는 어둠에 잠긴 정원을 노려보았다.
여기서 암살을 당할 뻔했다.
어느 누구도 감히 황실의 허락 없이는 발을 들일 수 없는 이곳 궁정의 화원에서 말이다.
‘저 골트문트가 사주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방금 보인 그 태도는…….’
루페르트는 조심스럽게 정원을 걸어 나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앞에 누군가가 있다.
루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검의 손잡이에 손을 올려놓으며 가까워지는 인물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 사람은?’
“응?”
그 사내가 루페르트를 발견하고 고개를 돌렸다.
시원하게 뻗은 콧날에 명민하게 빛나는 눈, 시원스러운 미소를 가진 미남자다.
나이는 삼십 대 중반에서 후반 즈음으로 보이는데, 맹세코 처음 보는 얼굴이다.
“안녕하세요?”
그가 인사를 건넸다.
순간 루페르트는 털이 곤두설 것 같은 불안감을 느꼈다.
틀림없다. 이 느낌.
한스 징펠만의 영혼 동맹 능력 위기 감지가 발동한 것이다.
‘또 암살이냐?’
그때 거짓말처럼 위기 감지가 사라졌다.
사내는 휘영청 밝은 달을 보며 휘파람을 한차례 불었다.
맑고 청량한 소리.
그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달이 참 밝군요.”
“그렇네요.”
“저는 어떤 분의 경호를 위해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해 마시길.”
“오해라니요. 저 또한 지나가는 길입니다.”
루페르트는 목례를 하고 그를 지나쳤다.
한 손을 소라고둥에 올린 채 말이다.
[ 루페르트 가우저. ]
리프니에가 갑자기 말을 걸었다.
[ 느껴지나요? ]
루페르트는 사내에게서 멀리 떨어진 뒤에야 비로소 여신의 물음에 답했다.
“어떤 느낌 말입니까?”
[ 방금 저 사람, 도펠죌트너잖아요. 당신에게 꼬리를 치던 그 조그만 계집아이와 같은 악취가 나던데, 정녕 못 맡으셨나요? ]
“마, 마리 말입니까. 그 여자애가 딱히 꼬리를 친 것 같지는 않은 거 같긴 한데. 저 사람도 도펠죌트너였던 모양이군요.”
[ 그렇겠죠. 워낙 많이 만들었으니까. 아무리 많이 죽고 없어져도 남은 것들이 망령처럼 세상을 배회하는 것이지요. ]
소라고둥이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 달이 참 밝군요. ]
“그렇습니다.”
별궁 입구, 경비병들이 지키는 문간에 서서 루페르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대황후가 남긴 기회, 자신은 있겠죠? ]
여신의 물음에 루페르트는 조용히, 그리고 다부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 후.
휘테보름 숲.
슈발츠마인 선제후 가문이 오롯이 관리하는 전용 사냥터이자 가문의 숲의 입구에 여러 대의 화려한 마차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
그 마차 중 한 대에 루페르트가 타고 있다.
제국의 성립 이전부터 뿌리내린 오싹한 거목들의 군집을 눈에 담으며 루페르트 가우저는 목에 건 소라고둥을 매만졌다.
[ 드디어 시작이네요. ]
“그렇습니다.”
진정한 황제가 되기 위한 최대의 시련은 이제 목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