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11. 가문의 시련 (1)
“우왓?!”
테타우로 향하는 가도.
길을 재촉하는 상인마저 고개를 돌려 쳐다볼 정도의 일이 일어났다.
진창에 한쪽 바퀴가 빠져 주저앉은 사륜마차가 번쩍 들렸다.
말이나 다수의 힘을 빌린 게 아니다.
오직 단 한 명의 사내가 순수한 뼈와 힘줄의 힘만으로 수백 킬로그램은 족히 넘는 역마차를 한순간이나마 들어 올린 것이다.
“대단하군요! 엄청난 힘이십니다!”
마차 승객의 칭찬을 한 몸에 받는 건 다름 아닌 루페르트 가우저였다.
‘아서 픽튼의 영혼 동맹 효과는 강력한 완력. 수수하지만 가만히 놓고 보면 지금까지 얻은 그 어떤 능력보다 쓸 만하겠는걸?’
지속시간은 짧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루페르트는 평소의 몇 배나 되는 힘을 한 번에 발휘할 수 있었다.
새로운 능력을 시험하려고 선뜻 나섰는데 이렇게까지 유용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루페르트는 찬탄의 눈으로 바라보는 역마차 승객들의 시선을 한눈에 받으며 모자를 깊숙이 뒤집어쓰며 돌아섰다.
“서, 성함이?”
“변변찮은 사람입니다. 시간이 촉박한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실제로 할 일이 많다.
가장 먼저 한 일은 피리스에 관한 것이었다.
“이 아가씨.”
테타우에 들려 한 사내를 데리고 왔다.
제국 마법대학의 마법사다.
교수까진 아니지만, 오랫동안 입학처에서 일하며 마법의 자질이 있는 학생들의 싹을 판단해 왔다.
움푹 들어간 깊은 눈으로 그는 피리스의 자질을 테스트했다.
“나이가 너무 많긴 한데.”
마법의 재능은 보통 십 대 초반에 발현된다.
스물을 앞둔 피리스는 그 사내의 눈엔 늦깎이 중의 늦깎이다.
피리스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불안한 눈으로 대학 마법사를 바라보며 가슴을 졸였다.
루페르트는 걱정하지 않았다.
‘여신님의 권능이 말해 주고 있어. 너는 썩 훌륭한 마법사가 될 거라는걸.’
루페르트는 불안에 떠는 피리스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주 잠깐 피리스의 얼굴에 붉게 달아올랐다.
“확실히 제국엔 재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재능을 자신조차 모른 채 썩히는 사람들이 많지요.”
대학 마법사가 운을 뗐다.
“이 여성은 매우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입니다. 나이의 벽을 넘을 수 있을 정도로 말이죠.”
피리스의 얼굴에 화색이 떠올랐다.
그러나 아직 대학 마법사의 말을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재능과 별도로 그녀의 지식은 일천하군요. 배움의 깊이도 얕고요. 솔직히 소년부 수준입니다. 아마 입학을 한다고 해도 십 대 초반의 아이들과 같은 교실에서 배워야 할 거 같은데. 그게 쉬운 일이 또 아니거든요.”
루페르트는 피리스를 돌아보며 넌지시 물었다.
“그렇다고 말씀하시는데?”
“저, 괜찮아요!”
피리스가 살짝 흥분된 어조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무시받고 하대받는 건 많이 경험했어요. 화가 안 나는 건 아니지만 기회만 주어진다면 끝까지 참고 견디겠어요.”
피리스가 루페르트를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저를 늘 응원해 주시고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신 남작님을 위해서라도요!”
그렇게 해서 피리스는 저택을 떠났다.
테타우의 제국 마법 대학 소년부로.
“시간 나면 종종 들를게요. 남작님!”
작별의 날, 피리스는 눈물을 감추지 않았다.
루페르트는 그런 피리스를 그저 부드럽게 배웅하며 용기를 북돋을 뿐이었다.
“부디 훌륭한 제국 마법사가 되어 나의 힘이 되어 줬으면 해. 솔직히 말하자면 네가 활약하는 시대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무슨 뜻인가요?”
“전쟁이 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소리야.”
겨울이 다가오는 정리된 농경지를 보며 루페르트는 쓸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럼.”
피리스가 떠났다.
또 하나의 젊은 청춘이 어디로 이어질지 모르는 운명의 실타래를 따라 자신의 길을 걸어간 것이다.
마차에 오르기 전 그녀는 몇 번이고 머뭇거리며 루페르트 쪽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숙인 채 마차에 올랐다.
[ 감동적인 이별이군요. ]
“리, 리프니에 님?!”
[ 루페르트 가우저. 당신도 가만 보면 참 매정한 사람이네요. ]
“네?! 제가요?!”
[ 뭐, 황제 된 자의 필수 자질이라면 필수 자질이겠지만. ]
소라고둥이 다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루페르트는 신전으로 향했다.
그녀의 용건은 명확했다.
“루페르트 가우저. 돈이 얼마나 있나요?”
“……꽤 많은 돈이 있습니다.”
“신전 전체에 금칠할 정도로?”
“그 정도까진 아닙니다만…….”
“걱정 마세요. 거기까진 요구할 건 아니니. 돈은 아껴 두세요.”
“저, 정말입니까?!”
루페르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 사치 좋아하는 여신님이 돈을 아껴 놓으라니.
‘설마 다른 신은 아니겠지?!’
“당신이 황제가 되면 황궁 안에 어차피 새로 지어야 하니까요.”
“그, 그렇군요.”
“제국이 기울 정도로 크고 화려한 신전을 지어 줬으면 좋겠네요!”
“진짜 기울면 어떻게 하죠?”
“뭐, 당신이 거칠게 굴러야죠. 저의 권능을 이용해서.”
늘 느끼는 바지만 리프니에는 가차가 없다.
“여, 여신님…….”
“농담이에요. 제 권능은 게다가 허투루 써서도 안 되는 것이고요. 그때가 되면 제 요구사항을 말씀드리죠. 그전에 동상 하나를 만들어 주세요.”
“동상 말입니까?”
의외로 소박하다.
여신님치고는.
“디터팔츠에 카를 빔펠이라는 조각가가 있어요.”
“디터팔츠의 카를 빔펠……?”
“네. 반드시 그 사람을 써서 조각상을 만들어 주세요. 소재는 뭐, 대리석 정도로 타협하죠. 그 사람 전문이 대리석이기도 하니까.”
제단 위의 소라고둥이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지금이 제국이 세워진 지 몇 년이나 지났죠?”
“최초의 황제께서 제국을 선포하신 지 995년입니다.”
“제국력 995년이라……. 그러면 그 사람에게 이렇게 의뢰하세요.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14세. 14세 때의 모습을 조각해 달라고.”
지나칠 정도로 구체적인 주문.
루페르트는 강한 호기심을 느끼며 자기도 모르게 불쑥 질문을 던졌다.
“카를 빔펜을 아시나요?”
“아, 뭐. 그렇죠. 루페르트 가우저. 저도 눈과 귀라는 게 있으니까요.”
“그렇군요. 그런데 왜 하필 14세의 모습을…….”
“글쎄요. 당신이 깜짝 놀랄 만한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루페르트는 그의 여신이 상당히 기분이 좋다고 느꼈다.
‘여신님이 기분이 좋은 건 좋은 일이겠지.’
한 번 겪은, 그러나 여전히 귀찮아 보이는 일이 기다리고 있다.
제국을 움직이는 자들과의 만남이다.
호흡도 템포도 그들의 반응도 모두 아는, 답안지가 있는 상태지만 어째서인지 자신이 없다.
그때처럼 뜨겁게 부딪칠 자신이.
‘이야기를 수정해 볼까. 크로지우스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은데. 하지만 크로지우스만큼 선제후들의 이목을 주목할 만한 소재가 없는 것도 사실이고. 완곡하게 표현해 볼까.’
방식이 좀 바뀌더라도 목적은 전과 같다.
되도록이면 선제후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줘야 한다.
그래도 황궁 내에서 급습당할 걱정은 들었다.
위버하임의 암살자들은 모두 불에 타 죽었으니.
‘인명록이나 외우자.’
그렇게 가을의 끝자락을 붙잡고 루페르트는 다시금 황궁에서의 피로(披露)를 준비했다.
그 앞에 낯익은, 그러나 여전히 낯선 손님들이 나타난 건 계절이 겨울의 초입에 들어선 어느 날이었다.
* * *
“남작님. 한 끼 식사의 은혜를 청하러 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펠죌트너가 나타났다.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 란.
마를로네 란은 여전히 소년처럼 꾸미고 다녔지만 더 이상 그녀는 어린 소년으로 보이지 않았다.
피리스보다 좀 어리거나 어쩌면 같은 나이일지도 모른다.
체구가 작고 앳된 용모라 나이에 비해 어려 보일 수도 있으니.
“그래, 무슨 일입니까?”
루페르트는 기꺼이 그들은 맞이했다.
“대황후께서 남작님을 찾으십니다.”
베르크 란은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이야기했다.
“안젤리나 대황후님께서요?”
“즉시 저희와 함께 오라는 분부십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세상의 끝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한 사이다.
사실 강제로 끌고 가도 저항할 방법이 없다.
영혼 동맹을 통해 일시 괴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하지만 저 베르크 란이라는 진짜 괴물 상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으니.
‘아서 픽튼이 말했지. 이 사람은 철혈대제의 챔피언으로 무수히 많은 전장에서 활약했다고.’
대황후가 준비한 마차를 탔다.
마차는 메헨부르그로 향했다.
죽음, 악마, 유령이 우글거리는 듯한 짙은 삼림.
그 속에 흐드러진 장미로 가득 찬 고색창연한 저택 안에 대황후가 기다리고 있었다.
“대황후님께 인사 올립니다.”
루페르트는 정중하게 대황후에게 예를 표시했다.
“그래. 루페르트 가우저. 그대가 리히트 보덴에서 펼친 인상적인 활약에 관한 이야기는 잘 들었다.”
안젤리나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입을 제외한 나머지 얼굴 전체를 가리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활약이라니요. 저는 그저 다른 분들의 영민함에 묻어갔을 뿐입니다. 진정한 활약은 저기 계신 베르크 란 님이…….”
“루페르트 가우저.”
말을 가로막혔다.
루페르트는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안젤리나 대황후는 베르크 란의 이야기를 별로 듣고 싶지 않아 하는 눈치였다.
어느 쪽이냐 하면 불쾌감이라고 할까.
“이쪽으로.”
대황후는 자신의 집무실로 루페르트를 안내했다.
집무실 안엔 루페르트와 대황후 둘 이외엔 아무도 없었다.
기묘한 일이다.
그녀처럼 여전히 제국 최상위권에 오른 여인이 루페르트 같은 아직 출신이 미천한 사내와 같은 방에 동석하다니.
루페르트가 딴마음을 품고 해하기라도 한다면 막아 낼 방법이 없음에도 그녀는 과감하게 둘만의 자리를 마련했다.
‘신뢰를 받는 건가. 내가.’
대황후의 속마음은 알 수 없지만 짚이는 구석은 있다.
리히트 보덴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그녀가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먼저 가서 멸망할 운명의 정착지를 구해 내고 시장을 흔들 정도의 거대한 부를 거머쥔 것이다.
여전히 노르드마르크의 창고 쪽엔 팔지 못한 일각고래의 뿔이 가득 차 있다.
하스 상회 지배인 말로는 보병 3만, 기병 1만 내외의 군대를 모집하고 수 개월간 굴릴 수 있는 돈이라고 한다.
“곧 궁정 모임이 있다는 건 알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그대는 그 궁정 모임에서 무엇을 꾸미고 있지? 선제후 앞에서 강한 인상을 심어 줄 말? 행동? 생각의 표현?”
“…….”
이쪽은 회귀를 거듭했다.
미래를 안다는 소리다.
그런데 저 여자, 대황후는 회귀의 권능이 없음에도 미래를 꿰뚫어 보고 있다.
‘내가 뭘 하려는지 다 보인다는 건가.’
어차피 속일 생각은 없다.
대황후는 루페르트가 잡을 수 있는 가장 단단한 끈이다.
어떻게든 그녀라는 끈으로 자신의 몸을 묶어야 한다.
루페르트는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답했다.
“그렇습니다.”
“말해 보거라. 그들에게 할 이야기를.”
“알겠습니다.”
루페르트는 대황후에게 그가 궁정 모임에서 선제후들에게 한 이야기를 대황후에게 되풀이했다.
같은 이야기의 반복이지만 느낌은 전혀 다르다.
그쪽이 제국을 움직이는 자라고 하지만 대황후는 이미 제국은 물론 세계를 움직였던 자이니.
시대의 거인 앞에서 루페르트는 자신이 그리는 그림은 유감없이 펼쳐 보였다.
이야기가 끝난 후 대황후는 식은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그게 네가 생각하는 제국의 미래냐?”
“그렇습니다.”
“제국의 멸망이라…….”
대황후의 입에서 미세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처음이다.
그녀의 입에서 냉소가 아닌 다른 종류의 웃음이 흘러나오는 건.
놀라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대황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제후 앞에서 그 이야기는 꺼내지 마라.”
“네?!”
루페르트의 눈동자가 일순 거칠게 흔들렸다.
‘이게 무슨.’
선제후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줘야 한다.
이건 루페르트가 꼭두각시 황제가 되지 않기 위한 필요 최소한의 몸부림이다.
그런데 그걸 원천 봉쇄하다니.
‘대체 대황후는 무슨 심산으로…….’
“적당히 인사나 나누며 덕담이나 들어라. 너를 드러낼 필요는 없다.”
대황후는 지팡이를 든 채 발을 질질 끄는 무거운 걸음걸이로 창가 앞에 섰다.
시들어 가는 장미들이 가면 안의 푸른 눈동자의 망막을 뒤덮어 간다.
“재롱은 광대가 부리는 거지, 거인이 행할 행동은 결코 아니니.”
“……?!”
대황후가 돌아서서 가면을 벗었다.
가면 아래 숨겨진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했다.
“대, 대황후님!”
“네가 무슨 생각으로 리히트 보덴에 갔는지는 알지 못한다. 알 수도 없겠지. 하지만 네가 거머쥔 부는 진짜다. 그렇지 않은가?”
“아닙니다. 엄청난 부를 손에 넣었습니다.”
“그 부는 너에게 자격을 줬다.”
“자격이라 함은…….”
“선제후라는 애송이들 앞에서 재롱을 부리지 않아도 되는 무거움.”
대황후의 언성이 마치 이글거리는 불길처럼 열기를 더해 간다.
루페르트는 몸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대황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슈발츠마인 선제후 가문의 후계자를 선발할 것이다.”
“……!!”
“최우선 상속인이 없는 현재, 슈발츠마인 가문의 당주는 가문의 법도에 따라 비두킨트 씨족 전체 구성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자로 정한다. 물론 그 구성원은 가문의 나무에 기재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 한해 가능하다. 그 점에서 루페르트 가우저. 너는 첫 번째 자격이 있다.”
“…….”
다리가 저릴 정도로 떨린다.
위장이 탈출할 정도로 경련한다.
‘이건.’
회귀 전 그녀가 말했다.
슈발츠마인 선제후 자리를 손에 넣고 한 마리 호랑이가 되라고.
그 호랑이가 되기 위해 리히트 보덴에 갔건만, 거기서 아무것도 찾지 못했었다.
이제는 다르다.
그녀는 제시하고 있다.
“두 번째 요건은, 단순하게 돈이다.”
“돈.”
“그래. 돈. 천박하지만 이 세계를 지배하는 어떤 의미로 신적인 존재지. 너에겐 돈이 있다. 나의 부군의 까탈스럽고 탐욕스러운 친척의 탐욕을 만족시킬 정도의.”
“…….”
[ 저기, 루페르트 가우저. ]
갑자기 리프니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 여신님?’
대황후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헤르베르트 가우저의 아들 루페르트여.”
[ 저 늙고 추한 죽어 가는 여자가. ]
“한 마리 호랑이가 될 준비는 되었는가?”
[ 한때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여성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