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9. 총독 (3)
“……이런.”
진짜로 서 있다.
여신의 신전이.
시간을 거슬러 왔건만 여신의 신전은 홀로 시간을 거스른 듯 위버하임 저택 옆에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이 신전의 관리를 맡고 있는 피리스라고 해요.”
피리스의 지위가 변했다.
하녀에서 신전 관리인으로.
회귀 전과 동일한 지위다.
“남작님을 모시게 되어 정말로 영광입니다.”
시선과 행동에서 호의 또한 듬뿍 느껴진다.
피리스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 기묘한 일이지만 오래전부터 남작님을 알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드네요.”
루페르트는 손바닥 안의 카드를 확인했다.
영혼 동맹.
피리스의 카드는 전과 같은 색채를 담고 있었다.
‘이것이 회귀의 진정한 힘인가.’
벅차오르는 가슴을 안고 루페르트는 제단 안 숨겨진 공간을 확인했다.
벽면으로 위장된 공간을 힘껏 열어젖히자 황금빛 광채가 번뜩인다.
“이, 이건?!”
틀림없다.
금괴와 금화.
특히 금괴의 표면엔 하스 상회의 문장이 찍혀 있다.
틀림없다.
다른 미래에서 가지고 온 다른 시간 축의 보물들이다.
[ 어떤가요? 루페르트 가우저. ]
제단 위의 소라고둥이 으쓱거렸다.
“여, 여신님!”
묻고 싶은 게 너무 많다.
루페르트는 여신에게 예를 올리며 숨을 돌린 후 가장 큰 의문점에 대해 물었다.
“정말로 놀랍습니다. 그런데 피리스는 대체 어떻게 한 것인가요?!”
[ 영혼 동맹의 힘을 조금 응용해 봤어요. 영혼 동맹은 시간의 역행 속에서 특별한 작용점을 가지고 움직일 수 있는 존재. 단지 과거의 인연만이 아니라 역사를 지나치게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그 사람의 상태를 바꿀 수도 있죠. ]
“!!”
[ 하지만 하녀이던 사람은 귀족 영애로 바꾼다거나 아예 마법사의 제자 같은 동떨어진 상태로는 바꿀 수가 없어요. 이 저택의 하녀나 신전의 관리인이나 결국 당신이 부리는 사람 아니겠어요? ]
“그렇군요.”
루페르트는 제단 아래 수북이 쌓인 금전으로 시선을 옮겼다.
리프니에가 루페르트의 시선을 눈치채고는 가볍게 웃었다.
[ 더 크고 아름다운 신전을 짓는다면 더 많은 금전을 보관하는 게 가득하겠죠? ]
“그, 그렇습니다!”
루페르트는 심호흡을 하며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여신님은 정말로 대단해. 정말이지, 너무나 대단해.’
눈물이 많은 성격이었지만 황제가 된 이후 눈물을 흘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끝없는 냉대와 무시, 무력감 속에서 루페르트의 눈물샘은 사막처럼 말라붙고 만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아무리 빌어도 갈구하고 애원해도 응답하지 않던 제국의 주신과 다른 그만의 여신님이 있다.
“여신님!”
루페르트는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여신님……!!”
회귀 이후 거의 흘리지 않았던 감동의 눈물이 황제의 뺨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놀랍습니다. 여신님. 정말이지…….”
소라고둥은 그런 황제를 가만히 응시했다.
곧 소라고둥 안에서 소녀의 풋풋함마저 느껴지는 청량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 루페르트 가우저. 당신의 신심이 깊어지는 게 보이네요. ]
“이런 기적을 보고 어찌 신심을 안 가질 수 있겠습니까?”
[ 부디 그 신심을 마지막까지 가지길 기원할게요. ]
“물론입니다!”
[ 그나저나. 또 시작이네요? ]
“그렇습니다.”
[ 지치진 않나요? ]
“그럴 리가요. 멀쩡합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할 수 있습니다!”
[ 훌륭한 기세네요. 하지만 제가 드린 책갈피도 잊지 말아 주세요. ]
“알고 있습니다.”
이번 사안은 책갈피가 활약할 여지는 없었다.
그가 대황후의 시련을 받아들이기 전부터 리히트 보덴은 멸망하고 있었으니.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리프니에가 다시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 아무튼 저와의 약속은 잊지 않았겠죠? ]
소라고둥이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무, 물론입니다.”
[ 저의 새로운 사당을 최대한 화려하게 지어 주셔야 해요. 그리고 저의 동상도! ]
“네. 여신님!”
루페르트는 힘차게 대답했다.
‘이번 일을 성공할 수만 있다면야 당연히 동상을 만들어 드려야지! 내 재산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최상의 동상을 만들 것이다.’
그 이후부터는 아는 흐름이다.
황실에서 파견한 교수들과 레벤호스트를 만났고, 메헨부르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메헨부르그의 야수 사냥은 인쇄기에 찍어낸 것처럼 똑같은 흐름으로 흘러갔다.
야수와 다를 바 없는 악인들, 권력을 지닌 야수, 그리고 사냥꾼과의 연가.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한스 징펠만의 포섭 과정이리라.
단지 주점에서 눈을 마주친 것만으로 한스 징펠만은 루페르트를 따라왔다.
“당신, 어디서 본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요. 꿈에서 보았나. 이유는 모르겠지만 당신과 함께해야 한다는 확신이 듭니다.”
손안에서 반짝거리는 영혼 동맹 카드를 보며 루페르트는 표정을 관리해야 했다.
야수 사냥 또한 같은 흐름으로 전개됐다.
대황후 안젤리나와의 만남이 있었던 후 루페르트는 집 안을 청소했다.
청소의 대상은 역시 빌헬미나.
방식은 전과는 사뭇 달랐다.
한스 징펠만의 총기가 그 탐욕스러운 하녀와 부친을 꿰뚫었고, 한스 징펠만의 도제가 집 안에 불을 질렀다.
명백한 살인이지만 양심의 가책 같은 건 없었다.
그들은 죽어야 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배후를 알지 못했다는 점 정도.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으리라.
대충 배후는 짐작하고 있었으니.
그 이후 루페르트는 문제의 조손을 만난다.
베르크 란과 아마도 마리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아이.
둘에게 한 끼의 식사를 대접한 후 루페르트는 골트문트와 만났다.
“빙해로 간다고?”
아직 루페르트는 진가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골트문트는 루페르트를 적잖이 떠보는 눈치였다.
“위버하임 쪽에 살인사건이 일어난 거 같은데. 알고 있나?”
“지방 판사라는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골트문트는 집요하게 루페르트의 얼굴을 살폈지만, 루페르트가 어떤 사람인가.
이런 종류의 암투는 진저리나도록 했다.
천 년을 바라봐도 그는 루페르트에게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흉흉한 세상이네. 빙해에서 무엇을 찾을지 모르겠지만 행운을 비네.”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빙상에서 반드시 행운을 거머쥐겠습니다.”
골트문트는 이에 야릇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최대의 장벽을 넘어선 한스 징펠만과 함께 뒤셀하펜으로 향했다.
“리히트 보덴 말입니까? 아, 그러고 보니 북서쪽에 그런 이름의 식민지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45만 탈러라는 거금으로 배와 승무원을 구했다.
배는 전과 같은 때까치호.
전처럼 클로버스의 도움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조선소 사람을 설득하는 데 애를 먹었지만, 돈 앞에 안 되는 건 좀처럼 없는 법이다.
고급 선원은 전처럼 구성했다.
페르난도가 선장을 맡고, 군터가 부선장을 맡았으며, 슈미트가 고문을 맡았다.
완벽하게 진용이 구성된 이후 루페르트는 한스 징펠만과 슈미츠 헬젠을 불렀다.
“스크라엘링에 대해 아십니까?”
어떻게 보면 이번 회귀의 목적.
그 빙해의 마물들은 반드시 물리쳐야 한다.
“스크라엘링이라.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군요.”
한스 징펠만은 빙해의 마물들에 대해 알고 있었다.
“개개의 전투력은 별 볼 일 없지만, 속도가 매우 빠르고 떼를 지어 움직인다고 들었습니다.”
슈미트도 나름의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구전에 따르면 스크라엘링에겐 우두머리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 우두머리를 쓰러뜨리면 제아무리 많은 스크라엘링도 왕겨처럼 흩어진다고 들었습니다.”
중요한 건 하나다.
이쪽의 전력으로 그 마물에게 맞설 수 있는가?
“우리만으로는 어렵겠지만 리히트 보덴에 사람들이 있다면, 물론 전투 경험이 있는 사람들 말이죠. 적절한 무기 지원만으로 충분히 해 볼 만한 싸움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그들이 살아 있다면 나름 그 마물에 대처할 방법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답은 그렇다였다.
루페르트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서두릅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제국의 백성들이 애타게 도움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까요.”
다음 작업은 화물의 선정.
철괴 일변도인 과거와 달리 적절한 철괴와 무기를 섞었고 다량의 화약과 목재를 준비했다.
루페르트의 의욕 넘치는 지휘 아래 선적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이제 출발의 시간.
루페르트는 의외의 인물들과 마주쳤다.
“여기에 있었군.”
베르크 란이다.
그 뒤엔 모자를 푹 눌러쓴 그의 손녀가 조금은 경계하는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대황후께서 당신을 지켜보라는 명을 받았소이다.”
상정하지 않은 만남이지만 루페르트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좋은 흐름이다.
‘이때부터 대황후는 날 지켜보고 있었던 건가.’
무엇보다 둘은 강력한 전투원이다.
치열한 전투가 예상되는 국면에서 이들만큼 훌륭한 자원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전처럼 둘 중 하나를 허투루 희생하진 않을 것이다.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게 하겠어.’
출항 전날, 루페르트는 손안에 태고의 향기를 머금은 목제 책갈피를 만들어 냈다.
시간의 책갈피.
루페르트는 그것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 현재라는 시간의 페이지에 책갈피를 꽂아 넣겠습니까? ]
루페르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으로 모든 준비는 완료됐다.
* * *
“육지입니다! 온통 눈, 얼어붙은 대지군요. 틀림없습니다! 저곳은 리히트 보덴입니다! 제국의 가장 먼 식민지!”
하얀 안개와 암초, 유빙으로 가득한 위험한 해안선을 따라 깎아지른 듯한 빙벽으로 이루어진 곶을 넘자 때까치호는 마침내 목적지를 발견했다.
루페르트에겐 두 번째 발견이지만 선원 중 몇 명은 신의 이름을 입에 올리면서 눈물을 흘렸다.
루페르트는 선장의 공을 치하했다.
“훌륭한 항해였소.”
선장은 겸손하게 답했다.
“그다지 어려운 항해는 아니었습니다. 숙련된 견시원(見視員)과 용기만 있다면 누구나 가능한 뱃길입니다. 저보다 뛰어난 선원은 많은데 왜들 이런 쉬운 길을 기피했는지 의문이군요.”
견시원의 청량한 목소리가 마스트 위에서 울려 퍼졌다.
“사람입니다!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버려진 폐허에서 검은 점들이 하나둘 개미 떼처럼 비칠거리며 나타났다.
“남작님.”
페르난도가 망원경을 건넸다.
루페르트는 망원경을 통해 오랫동안 격리된 식민지인들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수척하고 왜소한 체구.
피부 또한 누렇게 뜨거나 검게 그을렸고, 주름진 얼굴엔 오지의 거친 삶이 그대로 새겨져 있었다.
가장 심각한 건 옷가지였다. 그들은 마치 걸인처럼 기우고 또 기운 것도 모자라 알 수 없는 동물의 가죽을 덧댄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다.
‘살아 있다. 모두가 살아 있어!’
지난 회귀보다 3개월이라는 시점을 앞당겼다.
아슬아슬하게 가느니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다.
결과는 대성공.
정착지는 건재했다.
정착지를 향해 보트 세 척이 향했다.
주민들은 때까치호에 걸린 제국의 문장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일부는 무릎을 꿇었고, 일부는 기도를 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환희와 충격 속에서 한 무리의 사람이 나타났다.
루페르트는 그 중심에 선 완고한 인상의 중년 사내를 응시했다.
낡고 다 떨어져 기운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지만, 멀리서도 알아볼 정도로 강렬한 원색을 지닌 복장.
틀림없다.
시체구덩이 제일 위에 죽어 있던 식민지 총독 아서 픽튼이다.
“아서 픽튼이오.”
첫인상은 거대했다.
그는 대단히 신장이 컸고 위압적인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노르드마르크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북부인을 연상케 할 정도로.
초로의 나이지만 허리는 꼿꼿했고, 행동거지에는 젊은이의 힘참이 묻어 있었다.
“루페르트 가우저라고 합니다.”
루페르트는 아서 픽튼의 손을 보았다.
손가락 몇 개가 없다.
‘동상으로 잘라 낸 건가.’
그런데 이 총독이라는 사내의 눈빛.
기대한 것과 다르다.
10년 동안 얼음 속에 방치되어 구원만을 애타게 바라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적의가 꿈틀거리고 있다.
“가시오.”
아니나 다를까.
매몰찬 말과 함께 총독은 되돌아섰다.
“그쪽과 할 이야기는 없소. 우리는 필요한 걸 모두 가지고 있고 아무런 도움도 필요하지 않으니.”
총독은 개척민에게 안으로 들어가라고 거칠게 손짓했다.
총독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개척민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총독의 명에 따랐다.
‘아서 픽튼. 다른 건 모르겠지만 이쪽 사람은 꽉 잡고 있군.’
루페르트가 떠나가는 아서 픽튼의 뒤를 따랐다.
“잠깐. 당신은 이곳의 총독이 아닙니까?”
“지금은 아니오.”
아서 픽튼은 돌아보지도, 발걸음을 멈추지도 않고 답했다.
“무슨 뜻입니까?”
아서 픽튼이 멈춰 섰다.
“더 이상 이곳은 제국의 땅이 아니라는 소리지.”
이에 베르크 란이 서늘한 살기를 발했다.
루페르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를 제지한 후 아서 픽튼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잠시 후 무너지는 듯한 한숨과 함께 회한 서린 한마디가 거대한 사내의 등 너머에서 울려 퍼졌다.
“……제국이 먼저 우리를 버렸잖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