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9. 총독 (2)
안도감과 공포, 수치 속에서 일주일간 항해했다.
익숙한 바다와 해안선이 나타나자 모처럼 선원들의 얼굴이 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잠시뿐, 선원들의 얼굴엔 다시금 걱정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임무가 실패했다.
그 간단한 사실을 모를 정도로 선원들은 멍청하지 않았다.
리히트 보덴은 철저히 파괴됐고,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으며 끔찍한 마물의 둥지가 되었다.
두둑한 급료와 반짝이는 기회를 찾던 선원들은 다시 선술집으로 돌아가 이미 기율이 잡힌 다른 배의 신참으로 들어가는 길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훌륭한 항해였소.”
루페르트가 페르난도를 치하했다.
페르난도의 표정은 선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더 이상 그는 제국에서 일자리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그는 쓸쓸히 모자를 쓰고 북적이는 항구 저편으로 조금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사라져 갔다.
“호라신의 가호가 있기를.”
클로버스도 다시 뒈셀하펜의 종교 공동체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항해인 듯싶습니다.”
군터 야스펠도 선장을 따라 사라졌다.
세 사람이 떠나갔다.
절반의 성공.
잃어버린 식민지를 찾아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식민지에서 얻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리히트 보덴의 부유함은 전설적이었죠. 그곳에 나는 일각고래의 뿔은 남쪽에서 수입한 상아와 맞먹을 정도의 가치를 지녔습니다. 철혈대제의 치세 초기, 불안한 정국에서 철혈대제에게 크나큰 재원이 되었죠. 하지만 그것도 다 옛이야기가 됐군요.”
슈미트 헬젠은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그도 사라졌다.
다음을 기약하지 않고.
“…….”
루페르트도 알고 있다.
대황후가 이곳에 자신을 보낸 이유를.
잃어버린 정착지를 되찾아 그곳의 부를 거머쥐라고 임무를 내린 것이다.
꼭두각시 황제라면 모를까, 자신의 힘으로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금전적인 지원이 필요하니까.
리히트 보덴은 그 텃밭이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안타까운 건 정착민들의 죽음이리라.
겨우 한 달 남짓한 시간의 차이로 구하지 못했다.
한두 명도 아닌 수백 명에 달하는 목숨을.
“회귀의 힘을 가지고도 그 사람들을 구해 낼 수 없었던 것인가.”
뿐만이 아니다.
마물의 대군을 앞에 두고 이쪽을 바라보던 소녀의 눈빛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마리라고 했던가. 그게 너의 진짜 이름이었나.’
“이쯤에서 실례하겠소.”
뒤이어 베르크 란도 루페르트의 곁을 떠났다.
목례도 없었고 시선의 마주침도 없었다.
베르크 란은 거침없이 몸을 돌려 빠르고 위압적인 걸음으로 붉은 명찰을 드러낸 채 사람들에게 공포를 퍼뜨리며 거리 속으로 사라졌다.
마지막까지 그는 어떠한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지만 루페르트는 보았다.
이따금 그 사내가 고물 앞에 서서 멀어지는 빙해를 한참 동안 응시하는 것을.
“오싹한 사람이었습니다.”
한스 징펠만이 멀어지는 베르크 란을 보며 수염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그의 손은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몇 번이고 느꼈죠. 그의 살기를…….”
“…….”
“아마도 몇 번이고 고민했을 겁니다.”
“고민하다니요?”
한스 징펠만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리를 모두 죽일지 살릴지.”
“당신도 그를 막을 수 없나요?”
“아마 어려웠을 겁니다. 이쪽이 먼저 공격한다면 모를까, 불타오르는 제국의 검 상대로는 이쪽도 뾰족한 수가 없으니까요.”
이제 한스 징펠만과도 작별할 시간이다.
그는 베르크 란이 완전히 시야에 사라진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뒤돌아섰다.
이미 저 앞엔 그의 도제들이 무거운 가방을 든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일이 잘 풀릴 수는 없지요. 다음엔 좀 더 남작님의 운이 좋기를 기원하겠습니다.”
“당신에게도 행운이 깃들기를.”
“이번 여름은 바쁠 겁니다. 크라켄의 자식들이 부쩍 늘어났다는 소문이니까요. 형제들이 줄어드니 싸울 사람도 몇 남지 않았죠.”
한스 징펠만이 모자를 고쳐 쓰며 잿빛의 북해를 날카로운 눈으로 주시했다.
잠시 후, 한스 징펠만도 곁을 떠났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
루페르트는 마차를 타고 남쪽으로 향했다.
테타우에 자리 잡은 슈발츠마인 선제후 가문의 저택 안에서 루페르트는 대황후의 접견을 신청했다.
그러나 대황후는 그를 만나 주지 않았다.
“대황후께서는 잃어버린 정착지를 재발견한 남작님의 활약에 인상적이라고 언급하셨습니다. 하지만, 리히트 보덴이 황폐화되고 아무것도 건질 수 없는 불모의 땅이 됐다는 말엔 짧은 유감을 표했습니다.”
대리인이 지극히 사무적인 어투로 대황후의 의사를 전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것이 끝이었다.
궁정의 법도를 누구보다 잘 아는 루페르트는 그 짧은 한마디 안에 담긴 대황후의 진의를 읽어 냈다.
‘이것으로 끝이라는 소리군.’
더 이상 대황후는 이쪽을 지원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다시는 만나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시험은 비단 루페르트가 잊힌 정착지를 찾는 것만이 아니다.
그녀는 아마도 루페르트의 운 또한 시험했을 것이다.
루페르트는 운이 없었다.
정확히는 한 달 분의 운이 없었지만, 결과는 정해졌다.
루페르트는 저택의 담장을 가득 채운 장미 덤불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괜찮은 것인가.’
괜찮지 않다.
생애 처음으로 얻은 후원자를 잃어버렸다.
그뿐만 아니다.
지난 10년간 리히트 보덴의 정착민들은 제국의 도움을 애타게 기다렸지만, 겨우 한 달을 남겨 두고 북극의 마물들에게 비참하게 살해당했다.
정착민들의 시체를 땅에 묻고 죽임당한 총독 아서 픽튼의 최후는 또 어떠한가.
‘나와 다르지 않아.’
무엇보다 눈에 밟히는 건 루페르트와 나머지를 위해 죽어 갔던 마리라는 이름의 소녀와 그녀의 죽음을 묵묵히 지켜보던 한 끼 식사를 빚진 사람들이다.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었던 신비로운 눈빛.
그 눈빛이 뭘 요구했는지 알고 싶다.
루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소라고둥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강한 회의가 마치 무형의 손처럼 황제의 팔목을 붙잡았다.
‘회귀를 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지?’
객관적으로 루페르트가 회귀를 한다고 해서 그 역사를 바꿀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소녀의 목숨 정도는 구할 수 있겠지만 정착지는? 정착지에 갈 배와 그 금전은?
누가 그 마물들과 싸울 것이며 대황후의 퀘스트는 또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
“…….”
가슴이 아려 온다.
익숙한 무력감이 그림자처럼 얼굴을 덮어 간다.
‘회귀의 힘을 가지고도 난 여전히 무력한 존재인가?’
그때였다.
운명처럼 온화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면에서 울려 퍼진 것은.
[ 루페르트 가우저. ]
“여, 여신님?!”
실로 오랜만에 리프니에가 말을 걸어 주었다.
[ 회귀를 생각하시나요? ]
“자, 잠깐 했었습니다.”
[ 했었다니요?! ]
루페르트는 선원들의 눈을 피해 자신의 선실로 향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회귀를 한들 뾰족한 수는 없을 거 같아서요. 배와 선원을 마련한 돈도, 함께 싸워 줄 동료도 없으니 말입니다.”
[ 저기, 루페르트 가우저. 당신은 아직 자신의 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네요. ]
“네?!”
[ 당신에겐 영혼 동맹이 있잖아요? ]
“네. 그렇습니다.”
[ 이참에 한번 시험해 보는 게 어떤가요? 영혼 동맹의 진정한 힘을? 아직 사용할 기회가 없었죠? ]
“하오나 여신님. 가장 큰 문제는 돈입니다. 리히트 보덴까지 항해할 배. 배를 다룰 선원들 말이죠.”
[ 돈이라면 대황후에게 받은 금액 일부가 있지 않나요? 은행에 맡긴 것으로 기억하는데. 대황후가 구차하게 돌려 달라고 요구도 안 했잖아요! ]
“그건 현재의 돈인데.”
[ 루페르트 가우저. 그 돈을 모두 제가 좋아하는 황금으로 바꿔서 위버하임에 돌아가요. ]
“위버하임에 말입니까?”
[ 당신이 세웠잖아요? 수레바퀴와 연결된 조촐한 사당을. ]
실의에 젖어 있던 루페르트의 눈이 활짝 뜨였다.
새로운 가능성이 제시됐다.
* * *
하스 상회의 본점.
“이 금액을 전부 현물로 받고 싶은데.”
대황후는 루페르트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투자한 금원을 단 한 푼도 요구하지 않았다.
고로 예비비로 상회에 맡긴 거금은 고스란히 상회의 금고 안에 있다.
“아,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잠시 후 지배인이 웃으며 돌아왔다.
그의 뒤엔 한 사내가 손수레를 몰고 왔다.
그 손수레에 담긴 건 눈이 멀 정도로 반짝이는 금괴와 금화.
“호위를 붙여 드릴까요? 물론 공짜입니다. 남작님 같은 큰손께 드리는 일종의 서비스라고 할까요?”
루페르트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눈으로 반짝이는 재물을 바라보았다.
* * *
“남작님!”
피리스가 웃음기 띤 얼굴로 그를 반긴다.
“무탈하셨어요? 아무 일도 없었죠? 건강한 남작님을 보게 되니 정말이지…….”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니 그간의 모든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의 미소가 주는 힘이란.
루페르트는 빙그레 웃으며 신전으로 향했다.
“미안한데 잠시 홀로 기도를 드리고 싶은데.”
“네, 물론이죠. 남작님. 그런데 이것들은 다 뭐죠?”
피리스가 깜짝 놀란 눈으로 하인의 손수레에 담긴 막대한 재보를 응시했다.
루페르트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답했다.
“음, 공금이랄까.”
“공금요?”
“뭐, 그런 게 있어.”
피리스를 뒤로하고 루페르트는 홀로 막대한 재화를 리프니에의 제단 위에 올려놓았다.
금괴와 금화, 셀 수 없는 은화 뭉치.
제단을 꽉 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많은 재화의 가치는 그 가치는 자그마치 45만 탈러에 육박한다.
“어머.”
돈 냄새를 맡자 소라고둥이 몸을 흔들었다.
그걸 본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여신님. 기분 좋으신 모양이네.’
“제 신전을 증축할 수 있을 정도의 거금이네요! 지금 당장 황금 기둥 하나 세우는 건 어떨까요?!”
“여, 여신님……!”
“알고 있어요. 루페르트 가우저. 저만 믿으세요.”
리프니에의 온화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루페르트는 모든 의문이 눈 녹듯 사라지는 걸 느꼈다.
‘그래, 여신님이다. 나의 여신님이야. 나만의, 유일하게 나를 위해 주는 여신님이다. 그분을 의심하는 건 그녀의 유일한 사도인 내가 할 일이 아니지!’
다시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의 여신, 리프니에가 또 어떤 기적을 일으킬지.
그런데 여신님은 여전히 깐깐한 구석이 있다.
소라고둥이 홱 이쪽을 향해 돌아서더니 마치 물끄러미 쳐다보는 모양새로 가만히 서 있다.
“혹 이번 일이 성공하면 남는 금액으로 제 동상을 만들어 줄 수 있나요?”
“다, 당연하죠. 여신님!”
“그 약속, 반드시 지키세요.”
“그런데 여신님.”
“네. 루페르트 가우저.”
늘 궁금했었다.
이미 그에겐 둘도 없는 거룩한 여신님이지만 그 여신님이 왜 그토록 사당이나 신전 같은 것에 집착하는지.
내친김에 물어보았다.
왜 그토록 화려한 신전을 고집하는지.
“왜 화려한 신전을 원하냐고요?”
리프니에가 소라고둥을 갸우뚱거리며 되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으음.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지만! 보다 많은 사람의 숭배를 받으려면 화려한 신전이 있는 쪽이 낫지 않을까요?”
“숭배……. 말입니까.”
어불성설이다.
이교의 신이 엄격히 금지되는 호라 교단의 가르침 속에서 리프니에 같은 알려지지 않은 신의 신전이 세워지고 그 교도가 생길 리는 만무하다.
요즘에야 덜하다지만 호라 교단의 이단 사냥은 여전히 살벌하기 짝이 없으니까.
“왜 그런 표정을 짓죠? 루페르트 가우저.”
“그게, 여신님. 현실적으로 좀 어려운 일이 아닌가 싶어서요.”
“뭐가요?”
“아니, 그러니까 제국엔 호라라는 주신이 이미 있지 않습니까.”
“아, 그런 신도 있었죠. 그런 신도.”
리프니에가 살짝 빈정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그런 신이 아니라 여신님. 제국의 주신입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아하!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겠어요! 하지만 루페르트 가우저. 혹시 알아요? 그 잘나신 호라신의 사당에 제 이름이 울려 퍼지게 될지?”
“그건 아무리 여신님이라고 해도 불가능한 일 같습니다만!”
“저도 그렇게 생각한 시절이 있었죠!”
“?”
루페르트의 눈동자에 의문부호가 떠올랐다.
‘뭔 자신감이지?’
제단 위의 소라고둥이 마치 몸을 으쓱거리는 것처럼 들썩거렸다.
“자, 자, 어서 나팔을 부세요. 다시 같은 일을 한다는 게 괴롭긴 하겠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뭐 그런 것도 하다 보면 적응이 될 테니!”
그렇게 여신이 지켜보는 가운데 루페르트는 나팔을 불었다.
소금기 나는 냄새와 함께 밀물처럼 다가온 시간의 파도가 미래의 황제를 감쌌다.
“자주 보는군.”
어두운 복도에 앉은 노인이 루페르트를 지그시 응시한다.
“또 동료를 구하기 위해 왔나?”
“아니오.”
루페르트는 빙그레 웃으며 미지의 노인에게 쾌활하게 답했다.
“제국의 백성을 구하기 위해 돌아왔습니다.”
“백성이라…….”
노인은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알 수 없는 탄식 같은 것이 노인의 폐부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왔다.
그를 지나치려 할 때 노인의 목소리가 추격하는 늑대처럼 루페르트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 마음 잊지 않도록 하게.”
루페르트는 돌아선 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게 노인을 뒤로 루페르트는 활짝 열린 약속된 원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국의 이름으로 왔소!”
세 번째 회귀의 막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