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대제-31화 (31/225)

31화 9. 총독 (1)

선발대는 암울한 소식을 가지고 왔다.

-정착지 생존자는 전무.

-본토로 가지고 갈 가치 있는 재보 또한 찾을 수 없음.

때까치호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우울해진 건 당연한 결과였다.

리히트 보덴의 옛 모습을 기억하던 군터 야스펠은 주름진 눈으로 폐허가 된 정착지를 보며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결국 세월의 흐름을 버티지 못하고 전부 죽어 버리고 말았군요.”

예상 범위 내에 있는 일이지만 현실로 이런 결과를 맞이하니 천하의 루페르트도 풀이 죽는다.

그동안의 고생이 수포로 돌아가는 기분이랄까.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직접 상륙해 정착지를 살폈다.

선발대의 보고는 정확했다.

사람 하나 심지어 개미 한 마리 찾을 수 없다.

찾을 수 있는 건 몸서리쳐지는 추위와 정적뿐.

죽음에 색채가 있다면 그건 분명 하얀색이리라.

“이쪽에 주민들의 시체가 있습니다.”

탐사대의 안내를 받아 사람들의 시신이 있다는 구덩이로 향했다.

직사각형으로 깊숙이 판 구덩이 안엔 수백 구에 달하는 시체가 눈 속에 파묻혀 꽁꽁 얼어 있었다.

루페르트의 눈동자가 가볍게 흔들렸다.

못해도 500구는 가볍게 넘어 보였다.

“리히트 보덴의 전성기 시절 인구는 천 명을 넘어섰다고 들었습니다.”

슈미트 헬젠이 침울한 표정으로 시체들의 개수를 헤아리며 한마디 했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리히트 보덴은 멸망했다.

얕은 한숨과 함께 루페르트는 돌아섰다.

“클로버스 주교를 불러 주세요. 간소하게나마 장례를 치르고 싶습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태양은 여전히 그 자리에 떠 있지만, 루페르트의 눈에 보이는 건 짙은 어둠뿐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대황후가 원한 결말은 이런 게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는 루페르트가 여기서 행운을 얻길 바랐을 것이다.

그녀가 투자한 100만 탈러 그 이상의 이득을 능히 뽑아낼 수 있는.

그러나 현실은 냉정했다.

절반의 성공을 이뤄 냈지만, 그게 전부다.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빙상에서 행운을 찾았지만 결국 돌아온 건 얼어붙은 시체뿐이다.

‘빌어먹을.’

얼마 만인가.

이토록 무력감을 느끼는 건.

‘이건 회귀의 힘을 가지고도 어찌할 방도가 없어.’

“저기.”

뜻밖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시선을 돌리자 짙은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몽환적인 안개에 뒤덮인 것 같으면서도 확연히 이쪽을 잡아당기는 듯한 강한 시선.

베르크 란의 손자다.

뭔가 할 이야기가 있는 눈치다.

루페르트는 의아해하며 소년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냐?”

“여기.”

소년이 시체 한 구를 가리켰다.

“뭘 보라는 거냐?”

“상처요.”

“상처?”

“맹수한테 당한 거 같은데.”

“그게 중요한 문제냐?”

“하나가 아니니까 그렇죠.”

소년이 시체를 뒤집었다.

딱딱하게 굳은 시체는 벽돌처럼 쿵 소리를 내며 뒤집혔다.

“이것도 그렇고.”

“…….”

루페르트는 입을 다물었다.

이 소년이 뭘 이야기하려는지 알 수 없었다.

존엄을 가져야 할 시체를 저렇게 물건처럼 함부로 뒤집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의심을 키워 가는 루페르트의 눈빛을 받으며 소년은 턱 매무새를 매만짐과 동시에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최근에 죽은 게 많네요.”

루페르트의 눈빛이 달라졌다.

“최근에?”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구덩이 밖으로 걸어 나갔다.

‘대체 뭘 근거로 저런 소리를 하는 거지?’

[ 어머. ]

갑자기 소라고둥이 가볍게 흔들렸다.

‘여, 여신님?!’

[ 저 여자아이의 말이 맞는 거 같네요. ]

루페르트는 황급히 돌아서서 조용한 곳으로 향했다.

“여자아이?”

[ 아직도 눈치를 못 챘나요? 아니면 관심이 없는 건가요? 제국을 거하게 말아먹은 탕아가 사내아이와 계집아이를 구분 못 한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요? ]

“……타, 탕아라니요.”

[ 황제 시절, 못된 계집한테 놀아난 건 사실이잖아요? ]

“어떤 못된 계집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 무슨 뜻이죠? ]

“못된 계집이 하나둘이 아니라서요.”

[ 어휴. 불쌍한 루페르트 가우저. 그걸 자랑이라고……. ]

“……면목 없습니다.”

[ 좌우지간, 당신만큼이나 불쌍한 그 아이의 말은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네요. 시체를 자세히 보여 주세요. ]

루페르트는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구덩이에서 내보낸 후 시체 더미에 가까이 다가갔다.

얼어붙고 뒤틀리고 색깔이 변한 주제에 여태 생전의 모습을 간직한 섬뜩한 시체들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멀리 구덩이 입구에서 선원들이 의아한 눈으로 루페르트를 바라본다.

모두가 꺼리는 죽음을 누구보다 진지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선주의 태도를 쉬이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그러나 범인(凡人)의 시선 따윈 루페르트에겐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 흠흠. 역시. ]

그의 여신이 입을 열었다.

[ 루페르트 가우저. ]

“네. 여신님.”

[ 지금 바로 달아나세요. ]

“네?!”

[ 음, 아직 시간이 있긴 한데 선택은 당신의 몫이겠죠? 여차하면 저의 권능을 사용하면 그만이니까요. 그나저나. ]

소라고둥이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 당신을 찾아온 여인이 있네요. ]

그제야 루페르트는 뒤편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을 느꼈다.

베르크 란의 손녀가 어느새 그의 뒤에 다가와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고개를 돌려 발밑에 널브러진 시체를 응시했다.

아기를 안은 아낙의 시체다.

아이도 어머니도 모두 얼린 생선처럼 어떠한 존엄성도 없이 무참하게 얼어 있었다.

“보이는 게 있나요?”

소녀가 얼어붙은 아기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물었다.

루페르트는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최근에 죽었다는 네 말이 맞다.”

소녀가 루페르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조용한 응시.

흐릿해 보이는 눈동자 안에 담긴 생각이 무엇인지 루페르트는 읽어 낼 수 없었지만, 적어도 적대나 혐오는 아닌 것은 분명했다.

“어떻게 알았지?”

침묵을 깨고 루페르트가 물었다.

“냄새가 났어요.”

소녀가 시선을 거두며 시체 사이를 거닐었다.

“평범한 사람은 느낄 수 없는.”

‘죽음의 냄새를 맡기라도 한다는 것인가.’

“어디까지나 추정에 불과하지만…….”

소녀의 발걸음이 한 시체 앞에서 멈췄다.

“한 달 전, 큰 전투가 있었고 패배가 있었고 대부분이 죽임당했어요. 한 사람이 간신히 살아남아 시체들을 이곳에 옮겨 놓았지만…….”

소녀는 자신 옆에 두개골이 드러날 정도로 짐승에게 파먹힌 시체에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목에 걸고 있던 펜던트를 뜯어냈다.

펜던트의 뚜껑을 열자, 누군가의 초상화와 더불어 그의 이름과 직함이 적힌 가죽 명패가 수놓아져 있었다.

[ 제국 기사 아서 픽튼 - 리히트 보덴의 영주 ]

“시체들 위에서 힘이 다해 죽은 거죠.”

소녀가 펜던트를 내밀었다.

루페르트는 펜던트에 적힌 이름을 읽었다.

“아서 픽튼.”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저 북쪽의 섬나라 앙쥬 왕국 출신의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철혈대제에게 인정받고 제국 기사 작위를 받은 전설적인 리히트 보덴 총독의 이름을.

‘이 사람이 그 총독인가.’

전설적인 리히트 보덴의 개척자는 마지막까지 식민지를 지키다가 외로이 죽어 간 것이다.

“거룩한 죽음이군.”

루페르트는 모자를 벗고 묵념을 했다.

그가 묵념하자 소녀 또한 모자를 벗고 묵념을 했다.

모자를 벗자 긴 금발이 실크 커튼처럼 아래로 드리워졌다.

루페르트의 두 눈에 우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하긴, 저 명찰을 달고 여자로 사는 것보다 사내아이 행세를 하는 쪽이 그나마 낫겠지.’

다음 순간, 루페르트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틀림없다.

한스 징펠만의 위기 감지 능력이 발동했다.

‘이건.’

주위엔 폐허와 시체, 눈밖에 보이지 않지만, 그 언저리에 무언가가 이쪽을 살기 어린 눈으로 보고 있다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동시에 루페르트는 리프니에의 충고를 떠올렸다.

“여기서 나가야 해!”

루페르트는 소녀와 함께 구덩이에서 빠져나왔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루페르트는 알 수 있었다.

개척지를 끝장낸 재앙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압박 속에서 루페르트는 소리쳤다.

“나팔을 불어 모두에게 알려라!”

탐사대원이 나팔을 꺼내 힘껏 불었다.

부우우우우--

청량한 울림이 순백의 대지 위로 퍼져 나감과 동시에 일행은 보았다.

하얀 대지 너머로 하얗고 창백한 거적때기를 걸친 삐쩍 마른 괴인들이 앞다투어 달려오는 것을.

‘저, 저건 대체?’

그것은 일견 인간처럼 보였다.

그러나 인간은 아니다.

시체처럼 창백하게 변색된 거죽, 악귀처럼 일그러진 혐오스러운 입과 상어 같은 이빨은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니.

“스, 스크라엘링!”

슈미트 헬젠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 말을 들은 선원, 특히 노련한 고참 선원들이 경악을 드러냈다.

“스크라엘링?!”

“틀림없습니다! 리히트 보덴 개척민이 입으로 전하던 하얀 대지 저 너머에서 살아가는 마물들입니다!”

‘이, 이것들이 주민들을 죽인 그 재앙의 정체인가?’

겉보기엔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

흉측하긴 하나 체구도 작고 뒤틀렸으며, 강한 힘 또한 느껴지지 않는다.

제도의 성벽을 에워쌌던, 악마에게 영혼을 판 자. 융커스 베샤문트의 광기의 군대와는 비할 바가 아니다.

문제는 숫자.

눈대중으로만 수십 마리가 넘어 보이는 것도 모자라 뒤쪽에서 끔찍한 비명이 메아리치고 있다.

‘숫자가 너무 많아!’

루페르트 일행은 배 쪽으로 달아났다.

신호를 들은 배 위에서 선원이 깃발을 힘차게 움직였고, 함께한 페르난도 선장이 손짓으로 응답했다.

쾅!

때까치 호의 두 문밖에 없는 선회포가 불을 뿜었다.

포탄은 아슬아슬하게 루페르트 일행의 머리 위를 지나가 스크라엘링 무리에게 위협적으로 꽂혀 들어갔다.

사상자는 없었지만, 대포의 충격은 스크라엘링 무리를 잠깐 주춤거리게 했다.

그것도 잠시.

얼어붙은 대지의 마물들은 일제히 끔찍한 고함을 지르며 맹렬히 추격했다.

폐허와 시체에 쌓인 눈들이 떨리고 있지만, 그보다 더 격하게 떨리는 건 인간들의 덧없는 심장이리라.

당장이라도 적들이 뒤를 덮칠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선착장에 도착했다.

루페르트 일행이 타고 온 보트 앞에 선원 둘이 서서 맹렬히 손짓하고 있었고, 그 뒤편에 때까치호가 성채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탕!

한스 징펠만이 건현에 서서 이쪽을 엄호했다.

부정확한 선회포와 달리 한스 징펠만의 장총은 한 번에 두 마리의 스크라엘링을 꿰뚫고 지나갔다.

루페르트가 제일 먼저 보트에 탑승했다.

뒤이어 선장과 고문 등 탐사대가 보트에 올랐다.

마지막 남은 건 베르크 란.

줄곧 선장 옆을 지키던 그는 보트에 타려다 문득 뒤를 돌아보며 당장이라도 따라잡을 듯이 거리를 좁힌 마물의 대군을 무심한 눈으로 보았다.

“이대로는 전부 죽겠군.”

스르릉.

베르크 란이 검을 뽑았다.

평범한 장검이지만 함께 달리는 모든 이가 순간 자기 의사와 관계없이 고개를 돌릴 정도로 섬뜩한 살기가 번져 나왔다.

“내가 막겠소.”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이대로 보트를 출발시킨다고 한들 저 민첩한 마물들이 줄지어 보트 위로 달려들면 끝장이다.

보트가 뒤집히기라도 하면 몰살을 피할 수 없으니.

“괘, 괜찮겠습니까?”

루페르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베르크 란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답했다.

“그것이 우리의 의무니까.”

“의무…….”

제국의 병사는 기본적으로 용병들이다.

연대장 혹은 다른 직함의 고용주와 계약을 하고 계약에 따라 싸우고 죽이고 죽는다.

대부분 농민 출신인 그들이 가장 닮기 싫어하는 건 그들의 출신인 농민들이었다.

누구보다 겁이 많고 비열하지만, 생의 의지만은 충만한 놈들.

그 과거를 용병들은 그 무엇보다 혐오하며, 그렇기에 그들은 의무에 집착한다.

그것이 눈앞에 탄환이 빗발쳐도, 동료가 대포나 마법의 불길에 산 채로 짓이겨지거나 불에 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가장 큰 힘이다.

겁이 나서 도망을 친다면 그들이 가장 혐오하던 존재와 다를 바 없는 것으로 전락하니까.

아마 저 사내가 말하는 건 용병의 의무일 것이다.

도펠죌트너도 기본적으로 제국의 병사이며 또한 용병이니.

루페르트는 말없이 멀어지는 사내의 등을 가만히 응시했다.

‘한 끼 식사의 은혜치고는 지나치게 값비싼 대가가 아닐까.’

다음 순간 시커먼 무언가가 루페르트의 눈앞을 지나쳤다.

다름 아닌 그의 손녀다.

“뭐냐? 마리.”

베르크 란이 싸늘하게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살벌하기 짝이 없는 눈빛이지만 소녀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생긋 웃었다.

“내가 할게.”

소녀의 손에 들린 것 또한 한 자루의 검.

그녀는 명랑하게 웃으며 조부를 지나쳤다.

“해야 할 일이 있잖아?”

베르크 란은 잠시 당돌한 소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루페르트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베르크 란이 남을 거라고 생각했다.

죽을 날이 가까운 자가 젊은이에게 생을 양보하는 것은 매우 흔하며 상식에 부합하는 일이니까.

실제로 용병들도 고참병이 앞에 서고 신참을 뒤에 서게 한다.

그러나 잠시 후 벌어진 일은 전혀 뜻밖의 결과였다.

뒤돌아선 건 베르크 란이었다.

그는 자리를 지키고 선 자신의 손녀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사자처럼 싸워라.”

베르크 란이 보트에 올라탔다.

선착장 위엔 이미 수백 마리의 스크라엘링이 가득 찼다.

확정된 죽음을 눈앞에 둔 소녀는 가만히 뒤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향하는 곳은 조부의 얼굴.

베르크 란은 멀어지는 손녀를 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의 눈동자가 살짝 움직였다.

루페르트와 소녀의 눈이 마주쳤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그것을 알 방법은 적어도 이 세계에선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끔찍한 비명을 신호로 스크라엘링 무리가 공격을 시작했으니.

소녀는 검을 수직으로 세운 채 그 손잡이를 가슴 정중앙에 갖다 대며 낮고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우리는 제국의 검이니.”

그 직후 검신이 불타는 것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본 선원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도, 도펠죌트너의 검은 불탄다는 이야기는 정말이었나.”

“진짜 도펠죌트너였어!”

불타는 검은 스크라엘링을 무자비하게 찢고 불태우고 후려쳐 바닥에 눕히며 루페르트 일행에게 귀중한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

보고만 있던 루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 있는 힘을 다해 로프를 소녀 쪽으로 집어 던졌다.

“어서! 어서 이쪽으로!”

탕!

한스 징펠만이 엄호 사격을 가하고 선회포가 쉴 새 없이 불을 뿜었다.

소녀는 잠시 이쪽을 돌아보았다.

다시 눈과 눈이 마주쳤다.

“…….”

그것이 끝이었다.

옆에서 튀어나온 스크라엘링의 발톱이 소녀의 얼굴을 할퀴었다.

소녀는 간발의 차이로 발톱을 피해 냈으나 모자가 발톱에 찢겨 날아갔다.

모자 안에 숨겨져 있던 길고 탐스러운 장발이 햇살처럼 퍼져 나왔다.

루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베르크 란을 응시했다.

소녀의 조부인 그는 시야를 돌리지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갑시다.”

짧은 한마디 안엔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지만, 그의 시선은 결코 손녀를 떠나는 법이 없었다.

그녀가 스크라엘링과 함께 바다에 가라앉아 두 번 다시 떠오르지 않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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