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7. 제국을 움직이는 자들 (3)
전쟁의 시기라면 어렵지 않게 전쟁 영웅들이 연회장의 주인공 자리를 쉬이 차지했겠지만, 지금처럼 평화로운 시기에 연회장의 주인공을 가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굳이 한 명을 가린다면 단연 고어문트 선제후 골트문트의 딸 울피아나가 될 것이다. 어릴 때부터 신의 미모를 타고났다는 평가를 받은 그녀는 열여덟 살이 된 지금 활짝 만개하여 절정의 미모를 유감없이 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명성을 드높이는 건 미모뿐만이 아니다. 제국의 주신(主神) 호라의 충직한 사도로서 그녀는 수많은 빈자들을 구휼했고, 근래 보기 어려운 독실하고 경건한 참신자로 알려져 있다.
아름다운 미모에 성스러운 광휘까지 덧씌워진 그녀는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눈부신 사람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
하지만 그녀를 보는 루페르트의 시선은 곱지 못했다.
미래의 황후로서 그녀가 루페르트에게 준 것은 고통과 절망밖에 없었다.
뼈에 사무칠 정도로 혹독했던 독설과 함께.
루페르트는 일부러 울피아나를 피해 연회장 여기저기를 옮겨 다녔다. 행여라도 마주치는 걸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인물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루페르트에게 말을 걸었다.
도돌이표처럼 돌돌 말린 수염을 기르고 가발을 쓴 비대한 풍채의 중년 사내였다.
“루페르트 가우저 님이시죠?”
루페르트는 그 사내를 한눈에 알아봤다.
‘이 녀석은……?’
도리안 비하스. 저택에서 쫓겨난 빌헬미나의 부친이다.
“이런 곳에서 뵙게 되다니 우연이군요.”
그 사내를 본 루페르트는 의구심을 느꼈다.
‘어떻게 저런 사내가 이 자리에 초대받을 수 있지?’
도리안 비하스가 위버하임에서 세도를 부린다고 하나 객관적으로 보면 그는 작은 마을의 촌장.
테타우 궁정 모임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제 딸이 당신에게 신세를 졌다고 들었습니다.”
도리안 비하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으르렁거리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루페르트는 도리안 비하스 너머 잘 아는 얼굴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
빌헬미나다. 그녀는 루페르트가 이쪽을 쳐다보자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부채로 얼굴을 가렸다.
곧 도리안 비하스가 끈적거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괜찮다면 잠깐 시간을 내어 주실 수 있습니까? 드릴 말씀이 있어서 말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루페르트는 이 만남이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이라는 걸 한눈에 파악했다.
그는 도리안 비하스를 형형한 눈으로 노려보며 똑똑히 말했다.
“……일개 촌장과 할 이야기는 없다.”
“꼭 들으셔야 하는 이야기입니다. 남작 대우의 안전을 위하셔도 말이죠.”
살집에 파묻힌 눈에서 흉험한 살기가 번득였다.
명백한 위협이다.
그러나 그딴 위협에 넘어갈 루페르트가 아니다.
루페르트는 그를 노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개 촌장 따위가 날 협박하는 건가?”
“협박이 아니라 상식에 의거한 합리적인 조언입니다. 화를 낼 땐 내시더라도 일단 제 이야기를 듣고 결정하는 건 어떠실는지요?”
도리안 비하스는 능구렁이처럼 음흉하게 루페르트의 얼굴을 살폈다.
‘이 녀석…….’
루페르트는 도리안 비하스에게서 확실한 근거에서 비롯된 자신감을 읽어 낼 수 있었다.
갑작스런 도전이 아니다.
아마도 막강한 권력자가 그의 뒤를 봐주고 있으리라.
루페르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두 사내 사이에 차가운 기류가 흐르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 대치는 오래가지 않았다.
“당신이 루페르트 가우저인가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루페르트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이 목소리는?’
도리안 비하스가 건방지게 도전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감정의 격류가 그의 의식 속을 흐르고 지나갔다.
루페르트는 침을 꿀꺽 삼키고 뒤를 돌아봤다.
고어문트 선제후 특유의 윤기 흐르는 은발에 빨려 들어갈 것 같은 푸른 눈동자를 지닌 소녀가 그의 뒤에 서 있었다.
미래의 황후 울피아나.
그녀가 루페르트 앞에 나타났다.
루페르트의 눈동자가 가볍게 흔들렸다.
그동안 연회장에서 울피아나를 줄곧 피해 다녔는데, 도리안 비하스와 실랑이를 벌이느라 그만 뒤를 잡혀 버리고 만 것이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혹시 결례를 범한 건가요?”
울피아나가 루페르트의 창백한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아닙니다.”
루페르트는 고개를 숙인 채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아직 그는 예기치 못한 재회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침묵하고 있는 루페르트를 향해 울피아나가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제국의 백성들을 함부로 해치던 메헨부르그의 야수를 그쪽에서 토벌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늦은 감이 있지만 제국인으로서 당신에게 감사를 드리려고 합니다.”
“……제국인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루페르트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칭찬에 답했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여기서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다행히 적절한 순간에 구원의 손길이 그에게 뻗쳤다.
“루페르트 가우저 님입니까?”
화려한 예복을 입은 시종이 루페르트 앞에 나타났다. 루페르트는 그 사내의 이름을 알지 못했지만, 그가 왜 자신 앞에 나타났는지는 알고 있다.
“재상께서 루페르트 님을 호출하셨습니다. 저와 함께 소연회장으로 가시지요.”
전생에서도 저 사내가 루페르트를 선제후들 앞으로 안내했다.
루페르트는 울피아나에게 목례를 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울피아나는 고개를 살짝 들어 떠나는 루페르트를 눈에 담았다.
그녀는 떠나가는 루페르트를 보며 시종에게 물었다.
“저분, 날 꺼리는 눈치던데. 너도 그렇게 느꼈어?”
루페르트는 그 답을 듣지 못했다.
그는 곧 별실로 안내됐으니.
별실로 이어지는 복도엔 화려한 제복을 입은 근위병들이 물 샐 틈 없는 삼엄한 경비를 펼치고 있었다.
‘저 문 너머에 제국을 움직이는 자들이 있다.’
길게 이어진 복도는 울피아나를 만나 마음이 흔들렸던 루페르트에게 다시 진정을 찾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제공했다.
“안쪽으로 드시지요.”
루페르트는 처음 황궁에 들어섰을 때, 그때의 마음가짐을 유지한 채 별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발 디딜 틈조차 없이 북적이던 대연회장과 달리 넓은 별실엔 오십여 명 남짓한 참석자밖에 없었다.
선제후는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대영주, 제국 무력의 핵심인 제국 장군, 제국의 수호자인 전쟁 마법사, 신앙의 방패인 대주교 등 하나 같이 제국에서 최상위에 위치한 자들이 모였다.
이 내로라하는 인물 중에서도 한 단계 위의 존재들이 있었다.
바로 선제후들이다.
루페르트 앞엔 여섯 명의 제국 선제후가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아 있었다.
루페르트는 그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당당한 시선으로 눈에 담았다.
가장 왼쪽에 앉은 자는 트라이아의 선제후인 레벤호스트 공작이다.
공작새처럼 화려한 복장과 남자답게 잘생긴 용모, 당당하면서도 활기찬 태도를 지닌 선제후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는 루페르트에게 손을 흔들어 아는 체했다.
그 옆에 앉은 눈에 짙은 그늘이 드리운, 음침한 분위기의 사내는 디터팔츠의 선제후 막스 게오르크다. 뇌르겐틀링 공작이기도 한 그는 메헨부르그에서 루페르트가 만났던 로이겐 뇌르겐틀링의 부친이다. 계산적이고 이해타산적인 그는 어깨를 움츠린 채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선제후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제국의 동북쪽 끝자락, 험난한 빙해와 마주한 노르드마르크 변경백 게오르크 아르님은 거친 지방에서 온 것을 강조라도 하는 듯 선제후 중 유일하게 모피로 만든 옷을 걸쳤고 잔뜩 찌푸린 얼굴로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오른쪽 끝엔 가문 특유의 은발을 지닌 선이 가는 미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고어문트의 선제후 궁중백 골트문트. 그는 루페르트와 눈이 마주치자 서글서글한 눈웃음을 지으며 호의적으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실제로 그는 전생에서 루페르트에게 유일하게 호의적인 선제후였다.
골트문트 옆엔 한스 징펠만처럼 얼굴에 하얗게 분칠을 한 창백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한스 징펠만이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얼굴에 분칠한 거라면 이 사내는 완연한 병색을 가리기 위해 화장을 했다.
렌타이어마르크의 공작인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3년 전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그 또한 서서히 죽어 가고 있었다. 루페르트는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코끝을 강하게 찔러 들어오는 머스크 향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이 다섯 명의 선제후의 중앙엔 높고 하얀 우관(羽冠)을 쓴 늙은 사내가 앉아 있었다.
루페르트는 그를 아주 잘 알고 있다.
아카이아 대주교.
제국의 유일한 성직 선제후이자 제국 재상.
그는 황제가 공석인 현재 사실상 제국을 이끄는 이인자라고 해도 무방했다.
전임 황제인 클라우데 2세가 죽음 직전 반평생에 걸쳐 그에게 충직하게 봉사한 대주교에게 많은 권한을 내려 줬기 때문이다.
‘오랜만이군. 이 고지식한 늙은이.’
느릿하고 굼뜨며 좀처럼 고집을 꺾지 않는 이 노인은 제국을 해치는 늙고 겁많은 좀 벌레로 불리며 많은 사람들의 미움을 샀지만, 역설적이게도 제국의 멸망은 이 노인의 죽음을 기점으로 가파르게 진행됐다.
루페르트는 마음이 차게 가라앉는 걸 느끼며 아카이아 대주교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긴 침묵 속에서 관찰하던 아카이아 대주교는 거친 헛기침과 함께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대가 헤르베르트의 가우저의 아들인 루페르트인가?”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적절한 위엄과 힘찬 젊음이 적절하게 섞인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제가 루페르트 가우저입니다.”
첫인상을 결정하는 요새엔 외관 그리고 목소리가 있다.
루페르트는 선제후들의 미묘한 반응에서 자신이 어느 정도 합격점에 들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그 온도는 차가웠지만, 전생에서 경험했던 노골적인 경멸과 비웃음에 비하면 천지개벽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변화다.
아카이아 대주교는 루페르트의 출신, 특히 조부와의 관계에 대해 느릿하고 끈덕지게 질문했다. 그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몇 번이나 설명을 요구했다.
길고 지루한 핏줄 문제에 대한 질의가 끝난 후, 레벤호스트가 아카이아 대주교에게 걸어가 특유의 당당하면서도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전에 제가 말했다시피 이 젊은 친구의 식견은 흥미로운 구석이 있습니다. 이 기회에 황제가 될지도 모르는 젊은 친구가 제국의 미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 같이 한번 들어 보는 게 어떨까요?”
좌중의 반응은 싸늘했다.
노르드마르크 변경백은 무례할 정도로 코웃음을 치며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애송이의 생각 따위 알아서 뭐 하려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다른 선제후의 생각도 노르드마르크 변경백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레벤호스트는 원래 남의 이목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다. 동료 선제후들의 불편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소를 머금으며 루페르트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전에 내게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해 줄 수 있나. 자네가 생각하는 제국의 미래 이야기를 말이야.”
그 말을 들은 루페르트는 의아함을 느꼈다.
레벤호스트는 전생에서 루페르트를 가장 무시하던 선제후다. 그런데 지금 그는 루페르트에게 기회를 주고 있다.
이것이 함정인지 아니면 순수한 선의에서 비롯된 것인지 루페르트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는 기회라는 것이 쉽게 오는 것이 아니며 다가오는 기회는 반드시 붙잡아야 한다는 사고방식의 소유자다.
여섯 명의 선제후가 지켜보는 가운데 루페르트 가우저는 눈빛과 안색을 바르게 하고 오랫동안 갈고닦은 정중한 태도와 정결한 목소리로 레벤호스트에게 했던 제국의 파멸적인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효과는 확실했다.
가장 비판적이었던 노르드마르크 변경백, 게오르크 아르님마저 술잔을 내려놓고 루페르트를 주시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