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7. 제국을 움직이는 자들 (2)
초로의 사내는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데다, 허리까지 꼿꼿이 펼치고 있어 멀리서도 커다란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반백이 된 그의 얼굴은 나이에 비해 늙어 보였으며, 곳곳에 고생과 고단함의 흔적이 흉터처럼 새겨져 있었다.
한편 그의 눈동자는 다른 도펠죌트너와 마찬가지로 세상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흠뻑 머금은 듯한 특유의 적대감을 갈무리하고 있었다.
그 사내는 검이나 총 같은 무장은 일절 하지 않고 있었지만, 신사들이 으레 들고 다니는 짧은 스틱을 손에 쥐고 있었다.
초로의 사내 옆엔 귀까지 덮는 큼지막한 모자를 쓴 아이가 있었다. 엷은 금발에 초록 눈을 지닌 눈에 확 들어올 정도로 귀여운 미소년이었다. 그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산만하게 타일과 타일 사이의 경계를 폴짝폴짝 뛰며 놀고 있었다.
초로의 사내는 루페르트가 다가오자 소년에게 경고하듯 짧게 말했다.
“마리안.”
초로의 사내의 음성은 매섭고 위협적이었지만, 소년은 바로 말을 듣지 않고 몇 번 포도 사이를 폴짝이다가 결국 입을 삐쭉 내밀고는 얌전히 굴었다.
‘대체 무슨 의도로 온 것이지.’
루페르트는 초로의 사내와 거리를 둔 상태에서 세바스티안을 그에게 보냈다.
초로의 사내는 세바스티안에게 뭐라고 몇 마디 했고 세바스티안은 곧 루페르트에게 그 말을 전했다.
“그는 전쟁 노병의 권리를 운운하며 약간의 음식과 노자를 원한다고 하더군요.”
“철혈대제의 은전인가?”
철혈대제는 도펠죌트너에 대해 가혹한 차별 정책을 펼쳤다. 그에 따르면 빨간 명찰을 지닌 자는 어떠한 직업도 가질 수 없고 한 곳에 1년 이상 머물러서도 안 된다. 그리고 다른 행정 구역에 갈 때는 반드시 관청에 신고해야 하며 언제든 제국 경찰대의 조사에 응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 가혹한 차별 대신 철혈대제가 베푼 자비는 하나뿐이었다.
구걸할 수 있는 권리.
원칙적으로 제국의 걸인은 부랑자 수용소로 끌려가 의문의 실종을 당하거나, 연안 갤리선에 끌려가 쇠사슬에 묶인 채 노를 젓다 인생을 마감한다.
하지만 도펠죌트너들은 자유롭게 구걸을 할 수 있었고, 그 상대방은 어떤 형태로든지 그들에게 적선해야 했다.
‘한 끼의 식사와 약간의 노자를 위해 찾아온 것인가.’
이례적인 일이다. 대부분의 도펠죌트너들은 평범한 백성 집이나 들락거리지, 권세가엔 감히 올 생각을 못 한다. 보복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루페르트는 일단 세바스티안에게 명해 낯선 사내와 아이에게 한 끼 식사를 대접할 것을 명했다.
초로의 사내는 멀리서 모자를 벗고 루페르트에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들이 머무는 동안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사내가 데리고 온 금발의 소년 때문에 하녀 사이에서 작은 소요가 인 게 전부였다.
“그 꼬마 말이야. 제법 귀엽지 않아?”
“지저분한 몰골인데도 퍽 귀여웠어.”
“그런데 여자애 같지 않아?”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왜 걔는 나이도 어린데 빨간 명찰을 달고 있는 거지? 걔도 도펠죌트너라는 소리?”
“재수 없어. 우리 고향 옆 마을에서 도펠죌트너가 일가족을 살해한 사건이 떠오르네. 수십 명이나 되는 사람을 단 한 명이 죽였대! 그들은 사람의 모습을 한 맹수들이야. 빨리 나갔으면 좋겠어.”
과연 소년도 빨간 명찰을 달고 있다.
소년이 태어나기도 전에 몰락한 게 도펠죌트너라는 집단인데 같은 명찰을 달고 있는 것이다.
루페르트는 오랜만에 묘한 흥미를 느끼며 한쪽 눈을 가리는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식당의 뒤편에서 초로의 사내를 지그시 응시했다.
안대로 가린 왼쪽 눈 부분에 어딘가 불길한 녹색의 광채가 일렁거렸다.
통찰의 만화경이 오랜만에 가동된 것이다.
그런데 의문의 사내의 능력을 살펴보기도 전에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그를 가로막았다.
[ 루페르트 가우저. ]
리프니에다.
[ 저 사람은 들여다보지 않는 게 좋겠어요. ]
루페르트는 즉각 여신의 명에 따랐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닭고기가 든 수프를 먹던 초로의 사내가 고개를 들고 루페르트 쪽을 응시했다.
멀리 떨어져 있어 그의 자세한 표정까진 알아볼 수 없었지만 조금이라도 권능의 회수가 늦었다면 안대 쪽에 어른거리는 이단적인 광채를 들켰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
루페르트는 초로의 사내에게 꺼림칙함을 느꼈고 자리를 떠났다.
이제는 도청 걱정이 없는 방 안에서 루페르트는 여신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그런 말씀을 하신 겁니까?”
루페르트의 물음에 리프니에는 한동안 침묵하다 뒤늦게 입을 열었다.
[ 느낌이 안 좋아서요. 당신도 봤다시피 저 도펠죌트너란 불행한 사람들의 감은 날카롭답니다. ]
잠시 후, 세바스티안이 방을 찾아와 낯선 손님이 저택을 떠난 것을 알려 왔다.
소식을 전하면서 세바스티안이 말했다.
“한마디 말을 전해 달라 하더군요.”
루페르트가 그리하라 하자 세바스티안은 초로의 사내가 전한 말을 그대로 전했다.
“그의 이름은 베르크 란이라고 한답니다. 언젠가 한 끼 식사에 대한 은혜를 갚을 기회가 있다면 기꺼이 갚겠다고 하더군요.”
“베르크 란이라…….”
현재의 기억에도 전생의 기억에도 없는 이름이다.
그러나 루페르트는 언젠가 그 사내와 다시 마주치게 될 것 같은 예감을 느꼈다.
* * *
긴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리프니에를 위한 새로운 신전의 완공이 목전에 이르렀을 때 한 통의 편지가 테타우에서 위버하임 장원으로 전달됐다.
올 것이 왔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테타우 궁정 모임을 알리는 안내장이다.
이날을 위해 루페르트는 겨우내 공을 들여 모임에 참석할 만한 명사들의 이름을 외웠고 자리에 어울리는 지식과 교양을 갈고닦았다.
남은 것은 테타우의 궁정에 자신의 등장을 알리는 것뿐.
전생과 달리 이번 생에서는 보다 유리한 지표가 있다. 바로 업적이다. 메헨부르그의 야수를 토벌하면서 루페르트의 이름은 한 차례 제국 전역에 오르내렸다.
그때의 업적에 더해 그간 갈고닦은 교양과 지식으로 제국의 강자들에게 인상적인 모습을 심어 준다면 차후에 루페르트가 제위에 올랐을 때 전생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명성과 위신을 가지고 국정에 임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루페르트는 이번 모임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그의 의관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검은색 톤에 세련되면서도 간소한 정갈한 차림이었다.
검은색은 루페르트의 핏줄이기도 한 슈발츠마인 선제후를 상징하는 색채. 철혈대제도 군기와 군복에 즐겨 쓴 색이다.
“훌륭하네요. 남작님. 이 정도로 세련되게 꾸미시면 내로라하는 선제후들 앞에서도 조금도 꿀리지 않겠어요.”
마르그리트가 거울에 선 루페르트의 모습을 보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빌헬미나가 저택을 떠난 후 그녀는 한결 얼굴이 밝아졌고, 행동 또한 밝음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테타우에서 유명한 재단사를 초빙해 루페르트의 의복을 맞추는 한편, 머리 손질, 장신구 같은 미묘한 복장 코드를 최신 유행에 맞게 맞추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현재의 루페르트에게 처음 위버하임 장원에 왔을 때 풀풀 풍기던 촌티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역시 나도 꾸미면 한 인물 하네.’
루페르트도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고 있었다.
겨우내 빙해에서 야수 사냥을 하고 돌아온 한스 징펠만도 루페르트의 모습을 보고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않았고, 신전 옆 오두막에 근무하는 피리스는 루페르트의 모습을 보고 얼굴을 붉히기까지 했다.
하지만 모든 이가 루페르트의 모습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건 아니었다.
[ 이런 검고 몸에 붙는 옷을 입으면 저의 소라고둥은 어디에 둘 생각인가요? ]
홀로 남은 방안에서 리프니에는 즉각 불만을 토로했다.
리프니에가 선호하는 패션은 야만적인 부족의 귀족들이 즐겨 입을 법한 치렁치렁하고 알록달록한 복식이었다. 확실히 그런 복장이 소라고둥 같은 것과 잘 어울린다. 소라고둥이 아니라 큼지막한 뿔피리를 매고 다녀도 소화할 수 있으니 말이다.
루페르트는 검은 천을 구해 소라고둥을 감싸는 주머니를 만들어 이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 이게 인간들이 말하는 눈 가리고 아웅인가요? ]
리프니에는 썩 내키지 않은 눈치지만 더 이상 토는 달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루페르트는 빌린 마차를 타고 테타우의 궁전으로 향했다.
땅거미가 지는 대지 위에 속속 떠오르는 저녁별들 아래 우뚝 선 테타우의 높은 성벽을 넘자 빽빽하게 들어찬 건물과 주택으로 둘러싸인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루페르트는 그 방대한 시가지 중에서 홀연히 높은 곳에 서서 아래를 굽어보는 거대한 궁전을 눈에 담았다.
황궁. 이름하여 황금사자의 궁전.
룸 제국의 뒤를 이은 인류의 수호자이자 대륙 최강국을 상징하는 건조물이다.
황궁를 둘러싼 벽엔 역대 황제의 모습을 새긴 조각상이 부조되어 있었다.
명군이건, 암군이건, 단명한 황제건 누구든 관계없다.
제국의 황제라면 모두 그 모습이 황궁에 벽에 새겨진다.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그것이 천년을 바라보는 제국의 법통이다.
조각상들을 바라보는 루페르트의 눈동자에 우울한 빛이 잠시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는 조각되지 못한 황제였다.
그의 부조가 조각되기도 전에 제국이 멸망해 버렸으니.
‘이번엔 과연 나의 조각을 남길 수 있을 것인가.’
황궁을 바라보는 루페르트의 눈동자에 결연한 빛이 스미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 * *
룸 제국의 양식을 본떠 만든 고색창연하면서 장엄한 대연회장 안에 제국을 대표하는 각계각층의 인사가 모였다.
연회장 안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의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참석자의 숫자만 일천여 명. 이들을 시중드는 이들의 숫자는 그 다섯 배에 이를 정도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대연회장 건너편에 따로 마련된 별실에는 건너편과 달리, 조용하고 화려한 또 다른 연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 연회는 아무나 참석할 수 없다.
자신이 제국에서 힘깨나 쓴다고 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감히 문을 두드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숨겨진 연회의 참석자들은 권력자 위의 권력자이며 이른바, 제국을 움직이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루페르트는 아직 그 모임에 참석할 자격을 얻지 못한다.
전생에서 루페르트는 대연회장 한구석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멍하니 서서 지나가는 어여쁜 귀족 여식의 가슴과 엉덩이만 보고 있다가 갑작스러운 호출을 받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제국을 움직이는 자들 앞에 섰었다.
다시 한번 복기해도 치욕스럽고 황망한 경험이었다.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루페르트는 대연회장에 들어선 직후부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아르켄 헬슈타인 님이시죠? 멀리서 들려오는 활약을 듣고 오래전부터 흠모하고 있었습니다. 만나 봬서 영광입니다. 저는 현재 위버하임의 남작을 맡은 루페르트 가우저라고 합니다.”
그는 얼굴을 아는 사람에게 부드러운 목소리와 공손한 낯빛으로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네고,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이익이 상충 되는 자리라면 모를까, 모두 작은 연줄이나 인연을 만들러 온 열린 모임에서 먼저 다가오는 이를 마다하는 이는 없다.
일부 기억력이 뛰어난 사람은 루페르트 가우저의 이름을 듣고 메헨부르그의 야수를 떠올리기도 했다.
“아니, 설마 그쪽이 그 흉악한 야수를 쓰러뜨렸다는 소문의 그분입니까?”
한 사내가 약간 큰 목소리로 루페르트의 업적에 대해 떠들었다.
호의라는 건 주고받는 것이다.
루페르트 쪽에서 먼저 살갑게 말을 걸었던 자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루페르트의 업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아무도 모르던 이름이 이제는 자연스럽게 제국에서 한다 하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물론 이 작은 반향이 천 명이나 모인 대연회장에 일으킨 영향은 그리 크지 않았다.
“울피아나 님이다!”
“저길 봐, 어떻게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지?”
이미 오래전부터 명성을 떨치는 존재가 나타나자 루페르트의 이름은 금세 잊혔고, 그에 대한 관심도 다른 존재에게 옮겨붙었다.
하지만 루페르트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명성의 본질엔 낯익음이라는 요소가 적잖게 차지하고 있음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는 느긋하게 혼란한 연회장 속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하며 자신을 알렸다.
앞으로 제국의 황제가 될 그 이름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