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대제-20화 (20/225)

20화 6. 청소 (2)

한스 징펠만이 위버하임에 도착한 건 그로부터 일주일 뒤였다.

그는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선명한 황색의 제복에 허옇게 분칠한 얼굴, 옷과 대비되는 푸른빛이 도는 검은 색의 이각모를 쓰고 자신만큼이나 인상적인 쌍둥이를 이끌고 위버하임 장원에 도착했다.

“나…… 남작님. 행색이 수상한 사람이 남작님을 찾고 있습니다.”

집사 세바스티안이 떨리는 얼굴로 루페르트에게 사냥꾼의 내방을 알렸다.

루페르트는 빙긋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아, 그분은 저의 식객입니다.”

“식객요? 실례지만 어떤 연유로 그분을 들이시는지 물어봐도 될는지요?”

세바스티안은 바로 난색을 표했다. 루페르트는 세바스티안의 태도에 짜증이 솟구치는 걸 느꼈지만, 온화한 표정을 유지하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잠깐 들렀다 가실 분입니다. 그는 저와 함께 메헨부르그의 야수를 사냥한 인연이 있죠. 그래서 초대를 한 겁니다.”

“아, 메헨부르그의 야수 말입니까?”

루페르트 가우저가 메헨부르그의 야수를 처치한 사실은 널리 공표됐다. 제국 전체에 루페르트 가우저란 이름이 알려진 것이다.

하지만 대중이란 뭐든 금방 잊는 법이다. 제국을 떠들썩하게 한 메헨부르그의 야수도 루페르트의 이름도 금세 세간에서 잊혀졌다.

그래도 공적은 공적이다.

“설마 위버하임의 장원이 목숨을 건 사냥의 동료를 손님으로 초대하는 것조차 안 되는 건 아니겠지요?”

루페르트는 부드럽지만 뼈가 담긴 질문을 세바스티안에게 던졌다.

세바스티안으로서는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아닙니다. 누구든 남작님의 뜻대로 손님으로 초대할 수 있습니다. 다만, 검증되지 않은 위험한 사람이 장원에 오는 것을 막기 위해 주제넘게 질문을 던진 것뿐입니다.”

고개를 숙이며 물러나는 세바스티안 너머로 한 하녀가 복도 가장자리에 서서 한쪽 눈만을 빼꼼 내밀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빌헬미나다.

루페르트는 그녀의 존재를 눈치챘지만, 짐짓 모른 척했다.

‘저 여자는 역시 집사 위에 있군. 하지만 기다려라. 곧 네 녀석의 정체는 물론 그 배후도 까발려 줄 테니까.’

그를 위한 가장 강력한 도구이자 동맹인 한스 징펠만이 응접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깜짝 놀랐습니다. 메헨부르그에서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저를 불러 주시다니 말입니다.”

한스 징펠만은 자신의 자리에 앉으면서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어음이었다.

“일단 이걸 받아 주시지요.”

한스 징펠만이 탁자 위에 올린 어음을 루페르트 쪽을 향해 밀었다.

“이건 뭡니까?”

루페르트는 어음을 받아들며 어음에 적힌 금액을 확인했다.

‘이건?’

5만 탈러.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루페르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어음에 적힌 지급인을 확인했다.

야스푸거 상회.

아이젠쉴트 상회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제국 굴지의 상인 가문이다.

따라서 이 어음은 부도날 일이 없다.

완전한 환금가치를 지닌 증서인 것이다.

“이건 어떻게 된 연유입니까?”

루페르트가 어음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때마침 다과를 내온 피리스가 탁자 위에 찻잔과 주전자를 내려놓았는데, 탁자 위에 올린 어음을 보고 화들짝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한스 징펠만은 피리스가 내온 쿠키 하나를 손으로 집어 들고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저기, 아름다운 아가씨. 혹시 우유는 없나요?”

“우유요?”

“네. 진하고 신선한 녀석이 좋겠군요.”

피리스가 자리를 떠난 후, 한스 징펠만은 콧수염을 매만지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얼굴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몇 년 전부터 노르드마르크엔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이한 역병이 들고 있습니다. 발병 원인도 전염 경로도 알 수 없는 도대체가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인데 일단 한 번 걸리면 의사가 손을 쓰기도 전에 죽고 마는 무시무시한 병입니다.”

그 말을 들은 루페르트는 전생의 기억을 무심코 끄집어냈다.

제도 테타우를 강타한 무시무시한 역병이었다.

역병의 그림자가 휩쓸고 간 제도 테타우엔 3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제도 인구의 30%에 달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손실이었다.

신의 회초리라고 불릴 정도로.

‘설마 지금 노르드마르크에 유행한다는 역병이 그 신의 회초리는 아니겠지.’

그건 아닐 것이다. 신의 회초리는 루페르트가 제위에 오른 지 5년이 지난 뒤에 본격적으로 제국 내에 유행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놓고 보면 무려 8년 뒤에나 일어날 일이다.

이윽고 한스 징펠만의 어두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 처와 아들도 그 역병에 희생됐습니다. 운이 없었죠. 그런데 그 악운이 루돌프의 유가족에게도 똑같이 찾아온 모양입니다.”

“이 어음은 설마 메헨부르그의 야수에 붙은 현상금입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수령인이 없어진 이상 제게는 필요 없는 물건이죠. 따라서 현상금을 남작님께 돌려 드리려고 하는 겁니다.”

“당치도 않은 소리입니다. 계약 조건상 현상금은 그쪽에서 가져가기로 정하지 않았습니까?”

때마침 피리스가 우유를 한 잔 내왔다.

한스 징펠만은 크게 기뻐하며 우유를 단숨에 들이켰다.

“이제야 살 것 같군요.”

어린애처럼 거뭇거뭇한 수염에 우유를 묻힌 사내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에겐 필요 없는 물건입니다. 오히려 위험한 물건이죠. 5만 탈러라는 돈은 저의 삶의 방식 자체를 바꿀 수도 있는 금액이니 말입니다.”

“돈 걱정 없이 편하게 사는 것도 좋지 않습니까?”

“어떤 물고기는 수조 안에 넣어 두어도 잘살지만, 어떤 물고기는 수조에 넣자마자 죽어 버린다고 하더군요. 제가 생각하기에 저는 후자에 속한 부류 같습니다. 게다가 제가 생각하기에 이 돈은 남작님께서 보다 이롭게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스 징펠만은 어음을 루페르트에게 재차 권했다. 루페르트는 한스 징펠만의 눈동자에 의미심장한 빛이 서린 걸 알아챘다.

순간적으로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내, 나에 대한 조사도 끝낸 건가.’

발붙일 곳 하나 없이 그저 권력자들이 협잡으로 황위 계승자 후보에 오른 허수아비.

5만 탈러란 금액은 어떤 이에겐 용돈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지만, 루페르트에겐 천금 같은 금액이다.

루페르트는 한스 징펠만에게 감사를 표하며 어음을 받아 들었다.

그는 세바스티안에게 어음을 맡겼다.

“이걸 부탁하지.”

그 어마어마한 금액에 세바스티안은 물론 주변 하녀들도 깜짝 놀라 어음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잠깐의 혼란한 틈을 타 루페르트는 작은 목소리로 한스 징펠만에게 말했다.

“염치없지만 긴히 드릴 이야기가 있습니다.”

* * *

리프니에의 신전.

이곳에 누군가를 데리고 오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신전 바깥엔 정원사 막스가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뭐라도 엿들어 볼 게 없을까 어슬렁거렸다.

한스 징펠만은 막스가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버릇없는 종자군요.”

그는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불쾌한 어조로 말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원래 저런 사람이니까요.”

“저런 인간을 놔두고 용케도 참으셨습니다.”

“참는 덴 이골이 났죠.”

왜 루페르트라고 해서 화가 나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그는 섣부른 행동은 오히려 자신에게 독이 될 수 있음을 뼈저린 경험을 통해 몇 번이고 경험했다.

힘도 수단도 없는 상태에서 움직이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다.

경거망동하지 않는 것. 그것은 루페르트가 전생의 경험을 통해 익힌 어쩌면 그의 가장 큰 자산일지도 모른다.

루페르트는 자신이 처한 현재 상황을 간략하게 한스 징펠만에게 설명했다.

이야기가 끝난 후 한스 징펠만은 수염을 매만지며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니까 이 저택은 남작님을 감시하기 위한 일종의 감옥이라는 이야기군요.”

“빌헬미나라는 여자가 총책이라는 심증은 있지만, 정확한 건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렇군요.”

한스 징펠만은 이각모를 고쳐 썼다.

“자초지종을 알아보죠. 대략 한 달 정도의 시간이 소요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정말 염치가 없군요. 거액의 현상금을 받은 것도 모자라, 어려운 부탁까지 하게 되다니…….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황제가 되시면 그때 갚으면 됩니다.”

한스 징펠만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물론 제가 원하는 건 돈이나 지위가 아닌 짜릿한 모험입니다.”

“짜릿한 모험?”

“네. 일전에 대황후 안젤리나 님을 대면한 건 제 인생에 있어 둘도 없는 짜릿한 경험이었습니다. 5년 전, 역병에 아내와 자식을 잃고 죽어 버린 줄 알았던 심장이 다시 뛰는 걸 느꼈죠. 아마도 남작님과 함께하다 보면 그런 경험을 종종 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한스 징펠만은 이각모를 고쳐 쓰며 신전을 나섰다.

“그럼 슬슬 움직여야 할 시간이군요. 일단 저는 당분간 혼자 행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제 도제들을 잘 부탁합니다.”

“기와 루 말이죠? 하녀들에게 일러 잘 보살피도록 하겠습니다.”

“곧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신전 밖을 나선 한스 징펠만은 정원사 막스를 힐끗 곁눈질로 쳐다보며 유유히 저택 너머로 사라졌다.

루페르트도 잠시 시간을 두고 신전을 떠나려 했다. 그런데 그가 신전을 나서려는 순간 리프니에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저기 루페르트 가우저.”

“여신님.”

루페르트는 목에 건 소라고둥을 제단 위에 올리며 여신을 반겼다.

“당신 이번에 챙긴 돈이 제법 두둑하죠?”

리프니에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루페르트는 가슴이 뜨끔 하는 걸 느꼈다.

“오랜만에 당신을 위한 새로운 퀘스트를 내려 주겠어요.”

리프니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루페르트 앞에 빛나는 문자가 떠올랐다.

[ 균형의 여신 리프니에의 퀘스트 ]

[ 그 세 번째 ]

[ 지금 이 암울한 시대에 균형의 여신 리프니에를 진정으로 모시는 신도는 한 줌에 불과하고 여신을 기리는 신전도 야만인의 움막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여신의 사도인 당신이 이런 신성모독을 그냥 지켜보면 아니 되겠지요? ]

- 가련한 균형의 여신 리프니에를 위한 신전을 보다 화려하게 증축하라.

“으음…….”

“가능하면 화려하고 웅장하게 짓는 게 좋을 거예요. 테타우에 있는 호라의 대성전 정도로 말이죠.”

“하지만 여신님.”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혹시 불만이라도?”

“아닙니다. 다만 대성전 정도의 규모는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돈이 아까워서요?”

이에 리프니에가 살짝 삐친 목소리로 물었다. 루페르트는 가슴이 뜨끔 하는 걸 느끼며 서둘러 대답했다.

“아니요. 5만 탈러가 적지 않은 돈이긴 하지만 대성전 정도의 건물을 짓기엔 턱없이 부족한 금액입니다.”

“그런가요?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크게 지을 수 없다면 최대한 아름답게 짓도록 하세요.”

“당연한 일이죠. 그런데 여신님 한 가지 걱정이 있습니다.”

“뭐죠? 그 걱정이란 게.”

“지금 저에게 5만 탈러는 적은 돈이 아닙니다. 지금 신전을 짓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만약 제가 다시 회귀를 하게 되면 그 돈을 허투루 날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내색하지 않았지만, 솔직히 아깝다.

5만 탈러 정도면 제국의 요직에 있는 관리에게 뇌물을 먹이거나 아니면 믿을 만한 병사 여러 명을 고용할 수 있는 돈이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만약 새로운 신전이 제 마음에 든다면, 그 신전은 당신의 수레바퀴에 연결할 테니까요.”

“제 수레바퀴에 연결요?”

“네!”

소라고둥이 살포시 움직였다.

“당신이 회귀를 해도 전생에 지은 건물이 그대로 있는 기적을 보게 될 거예요. 그러니 일단은 최대한 빨리 제 새로운 신전을 만들어 주세요!”

“알겠습니다.”

여신의 주문이다.

루페르트는 여신이 한 번 삐치면 얼마나 그 앙금이 오래가는지 이번 생을 통해 뼈저리게 느꼈다.

제국의 성패가 회귀 능력에 달린 이상 그 권능을 자신에게 부여해 주는 리프니에의 마음을 맞춰 주는 건 백 번을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으리라.

위버하임 영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목수 길드의 장인들과 건축 자재가 도착했고 곧 신전의 건설이 시작됐다.

이 신전의 명목상의 용도는 철혈대제 클라우데 2세의 위업을 기리기 위한 사당.

그러나 그 실제 용도는 리프니에를 모시는 신전이자 루페르트의 아지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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