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6. 청소 (1)
메헨부르그에서 위버하임으로 돌아온 날, 루페르트는 전생의 꿈을 꿨다. 그에게 있어 전생의 꿈이란 것은 악몽을 의미한다.
오늘 그가 꾼 악몽은 전생의 황후 울피아나와 관한 것이었다.
처음 본 순간, 온몸에 전율이 흐를 정도의 미인이었다. 살면서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황후는 루페르트를 배우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입맞춤은커녕 손을 맞잡아 본 일도 없었고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눈 적조차 없었다.
그녀는 단지 법률상의 아내에 불과했다.
언젠가 루페르트가 울피아나에게 지나가는 말로 서운함을 표시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이혼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루페르트는 그 경멸에 가득 찬 싸늘한 눈빛을 잊지 못한다.
“…….”
루페르트는 조용히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온 이마는 물론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는 소매로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 내며 창가를 응시했다.
아직 미명조차 없는 심야.
제대로 잠을 설친 모양이다.
루페르트는 다시 베개에 몸을 뉘며 중얼거렸다.
“하필이면 그 여자 꿈을 꾸다니.”
그녀는 순진하고 나약했던 루페르트에게 너무나 많은 상처를 안겨 줬다.
다시 루페르트가 황제가 된다고 해도 루페르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울피아나 만큼은 황후로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 끔찍한 여자의 꿈을…….”
잠시 침대에 걸터앉은 채 이마에 흐르던 땀을 닦아 내던 중이었다.
리프니에의 음성이 들려왔다.
[ 신전으로 오세요. ]
오랜만의 호출.
아마도 이번 생에선 처음 있는 호출이리라.
‘여신님. 기분이 많이 나빴던 거 같은데.’
루페르트가 한스 징펠만을 위해 회귀를 결심했을 때 리프니에는 그걸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오랜 기간 침묵을 지켰다.
그래도 일도 잘 풀리고 한스 징펠만이라는 뛰어난 인재도 얻었으니, 리프니에도 만족하는 모양이다.
루페르트는 이번 기회에 리프니에의 마음을 풀어 주리라 생각하며 잠옷 위에 얇은 코트만을 걸친 채 방문을 나섰다.
아직 바깥은 컴컴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계단을 내려오던 차에 루페르트는 어둠 속에 희끄무레한 인형이 있는 걸 발견하고 나지막한 음성으로 물었다.
“누구냐?”
최악의 경우, 암살자일지도 모른다.
어둠 너머를 노려보는 루페르트의 눈동자에 매서운 빛이 떠올랐다.
곧 어둠 속에서 젊은 여성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저예요. 남작님.”
누군가 했더니 피리스다.
그녀는 유등에 불을 켜 주위를 밝히며 명랑한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어디 가시는 건가요?”
“잠시, 사당에.”
“아. 그런가요? 바깥이 어두운데 입구까지 배웅해 드릴까요?”
흔치 않은 서비스.
루페르트는 흔쾌히 승낙했다.
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루페르트의 옷자락을 거칠게 뒤흔들었다.
피리스가 앞장서서 낙엽이 진 오솔길을 밝혔고 루페르트는 그녀와 함께 저택 뒤에 지은 리프니에의 신전을 향해 걸어갔다.
“악몽이라도 꾸신 건가요?”
피리스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갑자기 그건 왜 묻지?”
“안색이 안 좋아 보여서요. 땀도 흘리신 거 같고.”
“예전에 알던 여자 꿈을 꿨어.”
그 말을 들은 피리스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묻는다. 제법 놀란 모양이다.
“혹시 전에 교제하시던 분인가요?”
“교제라고 해야 하나, 악연이라고 해야 하나. 뭐, 다른 사람 눈엔 교제로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다지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야.”
어느새 루페르트와 피리스는 신전 앞에 다다랐다.
“아마 오랫동안 기도를 할 것 같으니 먼저 들어가 있어. 날씨도 추우니까.”
“알겠어요. 남작님.”
피리스는 뭔가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떠났다.
루페르트는 그런 피리스의 뒷모습을 곁눈질로 보며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신전 안에 들어가자마자 리프니에의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소라고둥 안에서 울려 퍼졌다.
“어머, 죄 많은 남자 루페르트 가우저. 또 순진한 여성을 홀린 것 같네요.”
“홀리다니요. 무슨 말씀입니까?”
“방금, 그 하녀. 누가 봐도 당신에게 마음이 있는 것처럼 굴었는데요.”
“그런가요?”
눈치채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다른 부분에 주목하고 있었다.
바로 피리스가 자신을 감시하는 첩자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야밤의 우연한 만남은 그럴 만한 개연성이 충분히 있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신경 쓸 문제가 아니다.
“뭐, 메헨부르그의 야수를 처치한 자에게 따르는 숨겨진 보상일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요.”
오랜만에 리프니에는 그녀다운 떠들썩하고 활기찬 목소리로 신전 안엔 뜨겁게 달구고 있지 않은가?
이제야 리프니에가 리프니에처럼 행동하는 기분이다. 루페르트는 제단 위에 의기양양하게 선 소라고둥을 감회에 찬 눈으로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윽고 리프니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솔직히 이번 회귀, 마음에 안 들었어요.”
가벼운 질책이 섞인 음성.
“그런 것 같았습니다.”
루페르트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하지만, 결과가 좋으면 되는 일이죠. 루페르트 가우저. 당신은 제가 기대한 이상의 일을 해냈어요.”
“감사합니다.”
“감사하긴요, 당신의 능력이 이루어 낸 일이니까요. 감사는 당신한테 해야지요.”
“…….”
“아무튼, 루페르트 가우저. 제가 오늘 당신을 호출한 건 두 가지 용무가 있어서예요.”
“두 가지 용무요?”
“네.”
그중 하나는 루페르트가 새롭게 얻은 아티팩트인 카드의 군단의 쓰임새다.
“카드의 군단의 첫 번째 기능은 영혼 동맹이에요.”
“영혼 동맹 말입니까?”
회귀를 반복해도 끊어지지 않는 인연.
설명을 들어 알고 있지만 루페르트는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리프니에는 루페르트의 의문을 알기라도 한 듯 부드러운 음성으로 풀어서 설명했다.
“영혼 동맹을 맺은 사람은 당신과 함께했던 과거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어떤 운명적인 이끌림을 느끼게 되죠. 전에는 목숨 걸고 포섭해야 했던 상대방도 짧은 말 몇 마디로 당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이야기예요. 그것이 인연의 실이라는 거죠.”
“그건 훌륭하군요.”
한스 징펠만이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고 하나 그를 위해 매번 목숨을 걸고 대황후 같은 거물을 상대하는 건 사양이다.
“다음 회귀에도 그 사냥꾼은 당신의 편이 되겠지요. 하지만 카드의 군단의 기능은 그것만이 아니랍니다. 루페르트 가우저. 카드를 들고 초상화를 가만히 응시해 보세요.”
리프니에가 시키는 대로 하자 곧 재밌는 일이 나타났다.
루페르트의 눈앞에 한스 징펠만이라는 사내의 가치가 통찰의 만화경과는 다른 형태로 떠오른 것이다.
[ ‘고독한 총사’ 한스 징펠만 ]
- 등급
A+
- 특징
가공할 만한 총사 A+
빙해의 야수 사냥꾼 A+
교활한 첩자 A
- 영혼 동맹 효과
위기 감지 A
.
.
.
“이것은……?”
루페르트가 흥미로운 눈으로 한스 징펠만의 설명을 보며 입을 열었다.
“특징의 각 항목을 선택해 보세요.”
리프니에가 즐거워하며 말했다.
‘특징이라.’
일단 가공할 만한 총사 항목을 선택했다.
그러자 루페르트의 눈앞에 또 다른 문자가 떠올랐다.
- 이 사람은 총기와 화약에 관해 견줄 바 없는 지식과 숙련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쪽이 다수라면 모를까 일대일 상황에서 이 사람에게 싸움을 거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닙니다.
루페르트는 이번에 교활한 첩자 항목을 선택했다.
- 이 사람은 젊은 시절 노르드마르크 변경백 아래에서 가장 위험한 첩자 임무를 떠맡았습니다. 임무 중에 아내와 자식이 전염병에 걸려 죽은 걸 뒤늦게 안 이후부터 첩자 생활을 그만뒀지만, 과거의 기량은 여전히 남아 있을 겁니다.
“호오?”
루페르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비할 바 없는 전투력과 추적 능력을 지닌 사내가 첩자 역할마저 우수하다니.
하긴 메헨부르그에서 한스 징펠만은 그 싹을 보였다. 어두운 숲 일대를 완벽하게 분석한 정보력, 미끼로 쓸 인간말종들을 선별하고 끌어들이는 능력.
그런 능력은 결코 범상한 이가 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마도 한스 징펠만은 루페르트가 상상한 이상으로 그 역할을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잠깐 즐거운 상상을 하던 루페르트는 한스 징펠만에 관한 마지막 항목으로 눈을 옮겼다.
“……영혼 동맹 효과? 이건 뭐죠?”
이에 리프니에는 기다렸다는 듯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힘차게 말했다.
“단순히 영혼 동맹이 서로 간의 유대를 유지하는 데 그치면 재미없잖아요? 그래서 새로운 능력을 추가해 봤죠. 그게 바로 영혼 동맹 효과예요.”
“그러니까 그게…….”
“영혼 동맹을 맺은 상대방이 지닌 가장 대표적인 능력을 당신의 것으로 만드는 거지요.”
“영혼 동맹의 능력을 제 것으로 만든다고요?”
루페르트는 영혼 동맹 효과를 응시했다.
위기 감지라는 능력이 보인다.
“한스 징펠만의 특징을 볼 때처럼 마음으로 선택해 보세요.”
루페르트는 시키는 대로 했다.
곧 그의 새로운 능력에 대한 설명이 눈앞에 떠올랐다.
- 당신은 가장 우수한 사냥꾼과 같은 직감을 공유합니다. 암습과 기습에 대한 예지력이 상승합니다.
언제나 암살이라는 위협에 노출된 황제에겐 대단히 유용한 능력이다.
루페르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어떤가요? 루페르트 가우저. 영혼 동맹이란 것, 굉장하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여신님이여.”
“전에도 말했다시피 당신이 모든 걸 다 잘할 필요는 없어요. 당신은 지금처럼 가장 우수한 인물들을 하나하나 영혼 동맹으로 수집하면 돼요. 그렇게 되면 그들을 자신의 편으로 하게 됨과 동시에 그들의 능력 또한 당신의 것으로 할 수 있게 될 테니까요.”
“……여신님!”
가슴이 뜨겁다.
회귀라는 능력을 얻었을 때와는 또 다른 열정이 가슴 속에서 꿈틀거렸다.
전자가 막연한 기대에서 비롯된 열정이었다면 이번에는 구체적인 비전에서 비롯된 근거 있는 열정이다. 온도는 전자 쪽이 확연히 뜨겁지만, 보다 기분 좋은 쪽은 현재의 열정이다.
‘놀랍군. 여신님의 권능이란.’
해야 할 일이 가일층 명확해지는 순간이다.
하지만 그 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루페르트는 신전 바깥에서 어슬렁거리는 그림자를 싸늘한 눈으로 노려봤다.
정원사 막스다.
또 말도 안 되는 감시를 해대는 것이다.
전에는 알고도 넘어갔다.
하지만 이제는 아닐 것이다.
단 한 명의 아군도 없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누구보다 든든한 아군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