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대제-17화 (17/225)

17화 5. 야수의 정체 (4)

“앞으로 가라. 짐승.”

한스 징펠만이 푸주한의 망치를 겨누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짐작대로 야수는 사람의 말을 알아들었다.

야수는 마치 사람처럼 두 손을 들고 앞으로 걸어갔다.

야수를 앞세운 채 두 명의 사냥꾼은 비두킨트 가문의 저택을 향해 걸어갔다.

저택 앞엔 낯익은 복색의 사내들이 지키고 있었다.

제국수렵대 안투안 쿠르스트의 부하들이다.

그들은 메헨부르그의 야수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고, 그 뒤를 따르는 루페르트 일행을 보고 또다시 놀랐다.

“문을 열어라.”

사냥 과정이 한스 징펠만의 독무대였다면, 여기서부터는 루페르트의 무대다.

그는 야수 앞으로 나서며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야수의 손이 슬며시 움직였다. 한스 징펠만이 총기의 방아쇠를 만지작거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동도 하지 마라. 짐승. 다진 고기가 되고 싶지 않다면.”

야수는 흠칫 놀라며 루페르트를 향해 뻗은 손을 바짝 들어 올렸다.

“크릉……!”

한편 제국수렵대의 엽사들은 여전히 공황 상태였다. 그들은 아연실색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야수 하나도 감당하기 어려운 판국에 또 다른 심상찮은 것까지 따라왔으니, 하수인에 불과한 그들이 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 내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루페르트는 그들의 심리를 파악하고 윽박지르듯 말했다.

“당장 문을 열고 너희들의 주인을 불러와라. 우리는 저택 앞 정원에서 기다리겠다.”

그렇게 말하면서 루페르트는 냉정한 태도로 수렵대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제국수렵 대원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문을 열어젖혔다.

한 가지 의혹은 해결됐다.

루페르트는 안주머니 안의 소라고둥을 옷감 너머로 만지작거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제국수렵대는 야수의 정체를 알고 있었군. 그 야수가 비두킨트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또한.’

활짝 열린 대문 너머로 검고 하얀 장미가 흐드러지게 핀 정원의 광경이 펼쳐졌다.

루페르트 일행은 야수와 함께 비두킨트가의 저택 앞으로 당당히 걸어갔다.

그들이 천천히 걷는 동안 주위에선 부산한 움직임이 있었다. 수많은 엽사들이 동분서주하고 저택에 딸린 하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루페르트는 야수를 거느린 채 당당하게 서서 저택의 주인이 나오길 기다렸다.

이윽고 여러 명의 엽사들이 루페르트 가우저의 전면에 등장했다.

그 선두에 선 것은 안투안 쿠르스트.

역사적인 야수의 토벌자다.

“이게 누구신가 했더니, 전에 뵌 그분이군요.”

안투안 쿠르스트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지만, 그 목소리와 눈동자엔 날카로운 뼈가 담겨 있었다.

“그나저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안투안 쿠르스트가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걷어 내며 물었다. 서글서글한 눈매엔 매서운 살기가 감돌았다.

“여기가 감히 어딘지나 알고 오시는 겁니까?”

안투안 쿠르스트는 한스 징펠만에게 말하고 있었다. 필경 이 당돌한 무리를 이끄는 이가 한스 징펠만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일행의 리더는 한스 징펠만이 아니다.

잠자코 있는 한스 징펠만을 뒤로한 채 루페르트 가우저가 전면에 나섰다.

“비두킨트 가문의 저택이라 들었소.”

루페르트는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안투안 쿠르스트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호오?”

“다시 한번 소개하겠소. 토벌대의 대장, 루페르트 가우저라 하오.”

안투안 쿠르스트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들어 올렸다.

철컥. 철컥.

그의 엽사들이 일제히 총기를 루페르트에게 겨누었다.

한스 징펠만의 눈동자가 미약하게 흔들렸다.

야수를 겨눈 무기를 잡은 손가락도 꿈틀거렸다.

반면 루페르트 가우저는 달랐다.

그는 마치 생과 사 따윈 달관한 사람처럼 자신을 겨눈 수많은 총구 앞에서도 의연하기만 했다.

오히려 루페르트는 꾸짖듯이 안투안 쿠르스트를 노려보며 똑똑히 말했다.

“당신에게 개인적인 악감정은 없다. 나는 단지 당신을 고용한 사람을 만나러 왔을 뿐이다.”

수많은 총구가 겨누고 있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루페르트는 보면서 안투안 쿠르스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뭐지? 이 친구는? 나이는 어린데 배짱이 보통이 아니군.’

놀라움도 잠시, 안투안 쿠르스트는 특유의 미소를 머금으며 넌지시 말했다.

그는 꿈에도 모르겠지만 루페르트는 배짱을 부리고 있는 게 아니다. 그의 배짱은 두둑한 편이지만 타고난 사냥꾼인 한스 징펠만에 비할 바는 아니다.

루페르트의 의연함, 그것은 철저한 계산에 기반하고 있었다.

안투안 쿠르스트의 부하들이 야수를 보고 문을 열어 줬을 때부터 그는 자신의 생각에 대한 확신을 얻었고, 그 생각이 그에게 바위와 같은 무게를 선사해 준 것이다.

‘이 야수가 우리의 수중에 있는 한, 저들은 우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상황은 루페르트의 뜻대로 흘러갔다.

비록 여러 정의 총기가 그를 겨누고 있지만 단지 겨누고 있을 뿐이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루페르트 가우저는 작지만, 위엄 있는 어조로 말했다.

“그대의 고용인에게 전하라. 비록 그쪽이 제국을 좌지우지하는 명문가라고 하나, 지금 그쪽의 저택을 방문한 이는 그대가 터 잡은 제국의 황제가 될 사람이라고.”

그 한마디는 주변의 공기를 한 번에 변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모든 사내들의 표정이 싹 변했다.

한 엽사가 흐릿한 기억 속에서 한 가지 사건을 떠올리고 그의 상관인 안투안 쿠르스트에게 다가가 귀띔했다.

안투안 쿠르스트의 눈이 번쩍 떠졌다.

“뭐라고?”

안투안 쿠르스트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루페르트에게 말했다.

“잠시 기다리시오. 내 한번 여쭤보고 오리다.”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알고 있었다.

하급자에겐 하급자만의 책임이 있다는걸.

자신의 책임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반드시 자기가 처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필경 불호령을 살 테니까.

반면 그들의 책임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사안이 나타난다면 그들은 기꺼이 그 책임을 상급자에게 이관한다. 그것은 누를 끼치는 게 아니다. 반드시 해야 할 절차의 문제다.

루페르트가 황위 계승자 후보를 언급한 건, 그 책임의 무게를 안투안 쿠르스트에게 알려 주기 위해서였고, 안투안 쿠르스트는 루페르트의 예상대로 움직였다.

검고 하얀 장미가 흐드러지게 핀 정원엔 삭막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여전히 총구를 겨눈 엽사들, 입을 가린 채 놀란 눈으로 야수를 두려운 눈으로 응시하는 고용인들, 그리고 손을 든 채 고개를 숙인 야수와 그 야수를 겨누는 야수 사냥꾼.

그 모든 사람들은 빠져나올 수 없는 침묵 속에 잠겨 있는 것으로 보였다.

영겁처럼 느껴지는 긴 침묵은 멀리서 들려오는 청량한 종소리와 함께 걷히기 시작했다.

저택의 입구에서 한 무리의 사람이 나타났다.

루페르트는 안투안 쿠르스트가 앞에서 수행하는 수수께끼의 인물을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보았다.

여자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눈을 가리는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여자다.

멀리서 나이를 가늠하기 쉽지 않았지만, 곧 루페르트는 그 여성이 상당히 나이가 많은 노부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보석 박힌 지팡이를 든 주름진 손은 세월의 무게를 여실하게 드러내고 있었으니.

그건 그렇다 쳐도 엄청난 위압감이다.

루페르트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몸을 옥죄는 강렬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마법이나 요술 따위 요사스런 장난이 아니다.

저 여성이라는 인간의 품격 그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위엄이다.

‘대체 누구지? 이 노부인은?’

생각나는 이는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슈발츠마인 선제후인 비두킨트 가문은 루페르트가 황위에 오르기 전부터 일절 활동을 하지 않았으니까.

깊은 생각에 사로잡힌 루페르트를 향해 안투안 쿠르스트가 맑은 목소리로 선언하듯 말했다.

“예를 표하시오. 여기 전무후무한 제국의 수호자 클라우데 2세의 현명하고 지혜로운 배우자이신 안젤리나 대황후께서 행차하셨으니.”

그 어떤 권세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았던 루페르트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파르르 눈자위를 떨 정도의 충격에 사로잡혔다.

‘저 노부인이 그…… 안젤리나 대황후라고……?’

제국을 전성기에 올려놓은 철혈대제의 아내.

안젤리나 대황후.

상정한 범위 이상의 거물이 나타났다.

마음이 흔들렸고 초조와 불안이 흔들림이 일으킨 공백에 침투하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라.”

대황후가 말했다.

철혈대제의 배우자에 걸맞은, 실로 강철과 같은 차가움과 단단함이 깃든 음성이었다.

‘설마하니 전생에서도 만나지 못했던 대황후를 만나게 될 줄이야.’

대황후는 루페르트의 치세 전에 병사했다고 알려졌다. 따라서 만날 일은 없었다. 다만, 대황후는 철혈대제에 어울리는 천상의 배필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뿐이다.

루페르트는 안주머니 안에 든 소라고둥의 무게감을 느끼며 간신히 마음을 수습하고, 흔들림 없는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면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가면을 쓴 대황후의 눈과 루페르트 가우저의 눈이 마주쳤다.

대황후의 눈을 본 순간, 루페르트는 자신의 구석구석이 대황후의 눈으로 들여 보이는 듯한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이것이 일세를 풍미한 자의 경륜이라는 건가?’

날고 긴다는 선제후와 외국의 왕들도 이 정도의 기백을 뿜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루페르트는 의연함을 잃지 않고 대황후의 시선을 받아 냈다.

질식할 것 같은 시간이 흐르고 대황후가 고개를 돌렸다.

“보기 흉하구나. 누가 저 아이의 얼굴을 가리고 이쪽으로 데리고 오너라.”

대황후가 좌우의 시종에게 명했다.

그러자 그녀의 시종이 하얀 천을 들고와 루페르트 일행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야수를 향해 하얀 천을 씌우려 했다.

한스 징펠만이 푸주한의 망치를 겨누자, 루페르트는 한스 징펠만을 돌아보며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이자에겐 대항해서는 안 된다.’

철혈대제는 제국 그 자체와 동일시된 인물이다.

황위 계승자도 아닌 그 후보에 불과한 루페르트에 대한 위해가 제국에 대한 반역으로 취급되는 판국에, 그 철혈대제를 평생 보필한 대황후에 대한 반역이 어떤 취급을 받을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것은 반역 이상의 죄로 처분받을 것이다.

일개 도시의 파괴 따위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루페르트의 뜻은 눈빛만으로 한스 징펠만에 전해졌다.

한스 징펠만은 푸주한의 망치를 내려놓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 고개를 숙였다.

야수의 흉측한 모습 위로 하얀 천이 뒤덮어졌다.

야수는 마치 수인처럼 양손을 모아 앞으로 내밀었다.

철컥. 철컥.

육중한 쇠사슬이 야수의 양팔을 묶었고, 야수는 시종들에게 인도되어 대황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옆에 우두커니 섰다.

“황제가 될 사람이라고 했다지?”

대황후가 차디찬 음성으로 물었다.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낭랑한 음성으로 답했다.

“너는 내가 누군지 알고 있느냐?”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감히 비두킨트 가문의 땅에 흙발로 들어왔다는 거냐? 일개 황위 계승권자 후보 따위가 겁도 없이 말이다.”

대황후의 목소리는 끝으로 갈수록 매섭고 차가워져 말미엔 마치 혹한의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것 같은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 눈보라의 중심에 선 루페르트는 마치 한 그루 우뚝 선 소나무와 같았다.

루페르트 가우저가 말했다.

“제국민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라고 한다면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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