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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제-16화 (16/225)

16화 5. 야수의 정체 (3)

다시 어두운 복도로 왔다.

루페르트 가우저는 반딧불처럼 희미한 빛에 이끌려 복도 끝에 이르렀다.

복도를 비추는 빛이 서린 열린 문가 옆엔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노인이 낡은 의자에 앉은 채 어둠과 함께 침식하고 있다.

루페르트가 지나치려 하자, 노인이 입을 열었다.

“빨리도 돌아왔군.”

여전히 힘없고 지친 목소리.

루페르트는 곁눈질로 노인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구해야 할 사람이 있어서 말입니다.”

“구해야 할 사람?”

노인이 어둠 속에서 눈동자에 빛을 발했다.

“연인인가? 아니면 형제인가?”

“신뢰하는 동료입니다.”

“동료라…….”

노인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은 채 의자 안에 파묻히듯 몸을 움츠렸다.

루페르트는 노인 너머 환한 빛 속 너머에 그림처럼 펼쳐진 하켄하임의 정경을 눈에 담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 * *

닫힌 문이 거칠게 열렸다.

화려한 제복을 걸친 장교와 투구를 쓴 병사들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제국의 이름으로 왔소이다!”

루페르트 가우저는 마치 그들을 기다렸다는 태도로 그들을 맞이했다.

‘두 번째 회귀다.’

거짓말처럼 똑같은 상황의 재연.

오랜 시간의 간격이 있던 첫 회귀 때와는 다른 느낌이다. 상황이 너무 똑같다 보니 오히려 위화감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다시 마차를 타고 같은 설명을 듣는 건 그다지 좋은 경험은 아니었다. 젊은 장교의 언변은 어눌했고, 이야기조차 지루했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은 위버하임에 도착했을 때도 재현됐다.

일렬로 줄을 선 피고용인들. 세바스티안을 위시한 인사말.

루페르트는 그 과정에서 미약한 권태와 불편함을 느꼈다.

하지만, 자신이 선택한 일이다.

루페르트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넘기려고 생각했다. 실제로 긍정적인 일도 있었다.

“호오, 하켄하임에 뛰어난 룸어 교사가 있는 모양이군요?”

에르바하 교수와의 첫 만남에서 루페르트는 사람됨은 물론 룸어 실력에서도 강한 인상을 심어 주는 데 성공했다.

‘누구긴 누구야. 당신에게 배웠지.’

다른 과목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회귀함으로써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갔지만, 그에겐 지난 반년간 열과 성을 다해 익힌 노력의 결실이 고스란히 머물고 있다.

같은 루페르트지만, 전생의 루페르트와는 또 다른 존재인 것이다.

교사들의 잇따른 칭찬을 들으며 루페르트는 리프니에의 말을 떠올렸다.

‘이래서 무리할 필요가 없다고 한 건가.’

원하진 않지만 회귀를 계속할 경우, 현재 배우고 있는 학문은 더 이상 배울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게 이전 생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나날이 되풀이됐다.

루페르트는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태도로 하루하루를 수행과 단련으로 이어 나갔다.

지난 생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리프니에 쪽에서 단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는 것이다.

평온 속에서 반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흘렀다.

리프니에의 신전 안에서 루페르트는 통찰의 권능으로 자신의 현재 상태를 확인했다.

< 루페르트 가우저에 관한 보고 >

1. 개요

종족: 인간 - 남부 제국인

분류: 범인

성별: 남성

연령: 18세(누적 33세)

명성: 알려지지 않음

2. 일반 평가

무력: B

마법: F

군략: E-

경영: E-

지식: B-

기예: C+

3. 능력치

- 의미 없음

4. 축복과 가호

- 수레바퀴에 올라선 자

- 아티팩트 “통찰의 만화경”

- 아티팩트 “카드의 군단”

5. 영혼 동맹

- 없음

6. 총평

- 주먹 좀 쓰는 학생.

“……음.”

나쁘지 않은 성장.

수련과 공부를 하면서 느끼는 바지만 같은 능력치 등급 D에서 C를 올리는 것과 C에서 B로 올리는 건 하늘과 땅 차이만큼의 격차가 있었다.

하긴 A등급이라는 게 각 영역에서 마스터를 칭할 수 있는 수준을 말하는 것이니 노력은 물론 재능 또한 겸비해야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지금 루페르트의 검술과 몸놀림은 수준급에 이르렀고, 그의 지식 또한 가정교사들이 긴장하고 가르쳐야 할 수준까지 올라섰다.

특히 가장 중점적으로 노력을 쏟은 룸어는 일취월장해 에르바하 교수와 그 고대의 언어로 자유롭게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메헨부르그의 야수가 본격적으로 살육을 자행한다는 소식이 퍼지기 시작할 무렵 루페르트는 사냥을 준비했다.

전과 마찬가지로 그의 앞길은 빌헬미나라는 하녀가 가로막았다.

루페르트는 전처럼 그녀를 가볍게 물리쳤지만, 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물러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이 녀석. 저택 어딘가에 있긴 한데 마주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

반년 동안 루페르트는 의식적으로 저택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이 의심스런 하녀를 찾으려 했는데 찾지 못했다.

이 하녀, 아니 세작은 저택 내에서 예상보다 높은 권세를 누리는 게 분명하다.

‘언젠가 해결해야 할 문제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루페르트는 빌헬미나를 돌려보내고, 메헨부르그로 즉시 출발했다.

전생과 비슷한 흐름은 메헨부르그에서도 이어졌다.

공고를 내고 사람을 모으고 선제후의 아들과 다시 한번 부딪치기도 했다.

마침내 한스 징펠만과 재회했다.

그런데 루페르트는 딱히 큰 감회를 느끼지 못했다. 만연한 기시감이 뜨거워야 할 감정을 식혀 버리고 만 것이다.

똑같은 조건으로 한스 징펠만과 계약했고 사냥에 나섰다.

사냥을 떠나기 전날 밤, 두 번째 회귀를 한 지 처음으로 리프니에가 말을 걸었다.

[ 어머, 루페르트 가우저. 어쩔 셈이죠? 저 사람을 자신의 편으로 만든다기에 특별한 방법이 있는 줄 알았는데. 이런 흐름으로 가면 전과 똑같은 상황만 재현하는 게 아닐까요? ]

그녀의 물음에 루페르트는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반년이라는 시간 동안 루페르트가 가만히 있었던 건 아니다.

영감을 제공한 건 지난 생의 마지막 나날들이었다.

한스 징펠만이 안투안 쿠르스트 패거리에 사살당한 직후 루페르트는 위버하임에 돌아와 다가올 상황에 대비했었다.

상대방은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비두킨트 가문.

한스 징펠만의 고용인 따위야 하수인 몇 명을 풀면 금방 알 수 있을 테고 곧 루페르트에게 손길을 뻗쳐 올 테니까.

그런데 비두킨트 가문은 그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막강한 선제후의 아들도 아니고 그저 타의로 황위 계승권자 후보에 오른 루페르트 따위야 가볍게 끌어내리고도 남았을 것인데 그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조용히 넘어간 것이다.

루페르트는 제한된 상황 속에서 비두킨트 가문에 일어난 일에 대해 조사했다.

특별히 밖으로 드러난 일은 없었다.

가문의 대표자이자, 차기 황위 계승자였던 룸왕 막시밀리안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이후 비두킨트 가문은 막시밀리안을 추모하기 위해 오랜 기간 칩거에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루페르트는 잘 알고 있다.

소위 명문가라는 강력한 가문의 행동 양식을.

비두킨트 가문 정도나 되는 강력한 가문이 가만히 있는 건 단순한 추모나 슬픔을 기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필경 더 큰 문제에 봉착했을 것이다.

그 강력한 가문이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심대한 문제가 말이다.

메헨부르그의 야수는 어쩌면 그 문제의 핵심에 근접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막연한 추측과 강한 확신을 가지고 루페르트는 다시 메헨부르그를 찾은 것이다.

모든 상황은 전처럼 흘러갔다.

인간의 탈을 쓴 야수들이 미끼로 서고 한스 징펠만이 그들을 해치려는 야수를 응징한다.

루페르트는 한스 징펠만에게 야수의 심장을 노려 격발할 것을 주문해 상황의 변화를 이끌어 보려 했지만, 야수에게 주어진 운명은 여기가 야수의 무덤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야수는 피와 울부짖음을 남긴 채 숲속으로 달아났다.

지리한 추격전이 이어졌고, 마침내 루페르트 일행은 비두킨트 가문의 사유지에 발을 들여놓았다.

길앞잡이 사디가 뒤로 빠졌고, 한스 징펠만의 도제들도 사유지의 입구에서 대기했다.

운명의 시간.

같은 장면은 반복됐다.

이번에도 루페르트는 목에 건 소라고둥이 관목 가지에 걸리는 걸 느끼고, 안주머니 깊숙한 곳에 그걸 집어넣었다.

잠시 후 한스 징펠만이 과거에 한 말을 반복했다.

루페르트는 그의 음성이 꿈결처럼 들리는 걸 느꼈다.

그리고 또 하나.

야수의 느낌이 다르다.

분명 전처럼 섬뜩하고 이형적이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흉측한 몰골이지만 처음에 느꼈던, 숨을 옥죄는 것 같은 강렬한 기운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야수의 핵을 이루는 중요한 무언가가 빠진 것 같은 기운이랄까.

‘기분 탓이겠지.’

루페르트는 나무에 매미처럼 붙어 선 메헨부르그의 야수를 흔들림 없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어떻게 할까요?”

한스 징펠만의 시선이 루페르트를 향했다.

루페르트 가우저는 야수로부터 시선을 돌리며 야수 너머 우뚝 선 저택을 노려보았다.

“비두킨트 가문의 저택으로 갑시다. 저 야수를 끌고.”

그 말을 들은 야수가 커다란 몸을 가볍게 흔들었다.

핏빛으로 얼룩진 커다란 눈동자는 휘둥그레 커져 있었다.

놀라기는 한스 징펠만도 마찬가지다.

그는 그답지 않은 격한 어조로 루페르트에게 말했다.

“아니, 지금 뭐라고 말씀하신 겁니까? 저 저택에서 자랐을지도 모를 야수를 저택에 데리고 간다고요?”

“네.”

루페르트 가우저는 청량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의 탈을 쓴 야수도 야수의 탈을 쓴 인간도 좋지만, 권력을 쥔 야수만큼 제 심금을 울리는 건 없는 것 같습니다.”

“상대방은 비두킨트 가문입니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든다는 겁니다.”

터럭만큼의 주저도 없이 루페르트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비두킨트.

제국 최강의 슈발츠마인 선제후 가문을 향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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