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5. 야수의 정체 (2)
“죄송합니다만, 저는 더는 못 가겠네요. 이해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약초꾼 사디는 비두킨트 가문의 사유지에 출입하는 걸 거부했다.
한스 징펠만도 딱히 고집을 부리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쌍둥이 도제도 사유지 바깥에서 대기하라고 명했다.
“혹, 무슨 일이 생기면 나와의 관계를 부정하고 너희들끼리 노르드마르크로 돌아가라.”
따뜻한 말 한마디, 격려 한마디 없이 무거운 짐을 지운 채 부려 먹기만 하던 그가 그런 행동을 취하자 루페르트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아주 가혹한 주인만은 아닌 모양이네.’
이제 추적자는 두 명으로 줄었다.
루페르트 가우저와 한스 징펠만은 어둠이 걷히는 숲속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갔다.
한스 징펠만은 앞서 두어 걸음 걷다가 멈춰 서더니 루페르트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갑자기 제복 상의를 열어젖혔다.
루페르트가 흠칫 놀랐으나, 그것도 잠시 곧 그의 눈에 흥미가 떠올랐다.
제복 안엔 네 자루가 넘는 피스톨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바깥에서 볼 때 아무 표도 나지 않았는데 제복의 외피 부분을 흉갑 형태로 만들어 그 안에 수납한 것이다.
실제 한스 징펠만의 상체는 드러난 것보다 호리호리했다. 그래도 수십 킬로그램에 달하는 무장을 들고 나비처럼 훌훌 날아다니는 걸 보면 힘은 결코 약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한스 징펠만은 피스톨 한 자루를 건넸다.
제국 서부 영지들의 기병들이 으레 쓰는 단발 기병총이다. 평범한 피스톨로 보이지만, 불과 철의 형제단 총기답게 어딘가 범상치 않은 기운을 차가운 강철 안에 버무리고 있는 걸로 보였다.
“혹시 모르니 이걸 가지고 있는 게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반동이 매우 강하니, 적이 목전에 이르렀을 때 양손으로 잡고 쏘시면 됩니다.”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고 피스톨을 품 안에 갈무리했다.
다시 추적이 계속됐다.
이제 그들은 마르지 않은, 신선해 보이기까지 한 야수의 핏자국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숲속 너머에서 헐떡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야수 특유의 고약한 체취가 풍겼다.
야수는 가까이 있다.
한스 징펠만은 잎사귀에 이슬과 섞여 흘러내리는 야수의 피를 보며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놈도 이제는 한계인 모양이군요.”
철컥.
한스 징펠만은 허리를 펴고 육중한 총포를 앞에 겨눈 채 느릿한 걸음으로 주변을 경계하며 걸어갔다.
루페르트는 피스톨을 들고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걸었다. 성긴 관목이 목에 건 소라고둥의 줄을 잡아당긴다. 몇 번이고 걸리적거리자, 루페르트는 소라고둥을 풀어 안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타락자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발걸음을 옮기며 한스 징펠만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이교도가 믿는 신에게 축복을 받은 자를 칭하는 거 아닙니까?”
“세간에서는 그렇다고들 하죠.”
스르륵.
수풀 속에서 무언가 튀어나왔다.
루페르트는 기민하게 피스톨을 겨누었지만, 한스 징펠만은 미동도 않고 그것을 노려봤다.
“뀨뀨.”
귀엽게 생긴 다람쥐다.
그 녀석은 루페르트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내 부리나케 일행을 가로질러 갔다.
한스 징펠만은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성소가 곳곳에 있는 테타우 일대와 달리 제국의 변경 곳곳에선 사악한 마신의 기운이 밑바닥 근저에서 창궐하고 있습니다.”
“사악한 마신의 기운?”
“제국 마법 대학 출신의 고명한 마법사들이 그렇게 부르더군요. 끔찍하고 음습한 부정한 기운 정도로 해석하시면 될 듯합니다. 아무튼, 이런 기류에 노출된 변경 지방에선 종종 사람이 변해 버립니다.”
“사람이 변한다고요?”
“하루아침에 사람이 짐승처럼 변해 버리는 일이 일어나지요.”
“그것은……?”
루페르트의 눈앞에 용병을 위협하던 거대한 야수의 형체가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베어볼프. 늑대인간. 타락자. 뭐든 좋습니다.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닌 무언가지요.”
“그럼 메헨부르그의 야수도 타락자라는 겁니까?”
“대부분의 타락자는 변이가 일어나자마자 죽임을 당하죠. 하지만 일각에선 그런 타락자마저도 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걸 키운다고요?”
“네, 아무리 짐승의 형상이라고 해도 제 몸에서 나온 것이니 정을 주는 모친이 있기 마련이죠. 그런 일들은 주로 법과 교회의 힘이 미치지 않는 오지에서 발생합니다만, 아주 드물게 권세 있는 집안에서 일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침 햇살이 한스 징펠만의 눈동자에 갈고리처럼 파고들었다. 한스 징펠만은 살짝 눈을 찡그리며 나무 사이로 파고드는 햇살 너머에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형체를 주시했다.
건물이다.
비두킨트 가문의 저택이 육안으로 보일 정도의 거리까지 접근한 것이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철컥.
한스 징펠만이 갑자기 측면으로 돌아 푸주한의 망치로 명명된 소형 화포를 앞쪽에 겨누었다.
옹이가 곳곳에 팬 아름드리나무, 그 거체가 드리운 어두운 영역에 섬뜩한 무언가가 딱 달라붙어 있었다.
루페르트는 어둠 너머에서 번득이는 두 개의 눈빛과 섬뜩한 이빨, 핏빛을 머금은 검은색의 털과 대지를 엉거주춤 딛고 선 갈라진 발굽을 보았다.
우제류의 발굽과 식육목의 이빨을 동시에 가진 자.
메헨부르그의 야수다.
그 야수는 사람처럼 등과 양손은 나무의 어두운 면에 딱 붙인 채 이쪽을 번들거리는 붉은 눈동자로 노려보고 있었다.
한스 징펠만은 푸주한의 망치를 겨눈 채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 녀석이 이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야수가 이빨을 드러냈다.
“크르르르…….”
“이 녀석은 사람 손에서 자랐습니다.”
한스 징펠만이 총구를 야수에게 들이대며 말했다.
그는 나무 사이에 우뚝 선 저택을 눈에 담았다.
“……저 저택 안에서 말이죠.”
이를 드러낸 야수는 붉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그 형상은 분명 인간이 아닌 야수였지만, 그 야수는 겁에 질린 인간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우그르 샤 말릭! 이카!”
야수가 쇳소리 섞인 목소리로 이상한 소리를 냈다.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언어다.
“이교도의 언어입니다. 타락자는 오직 그들이 섬기는 신이 하사한 언어로만 말할 수 있죠.”
“부루타이! 카르 말 샤이 이라카!”
야수는 격한 숨을 내쉬며 알아들을 수 없는 위협적인 단어를 나열했다.
한스 징펠만은 총을 겨눈 채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여기서 총을 격발하면, 아마도 그 총성은 저 저택 안의 사람들에게 들릴 겁니다.”
루페르트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비두킨트가의 사람들, 그들의 호위병들이 일제히 뛰쳐나올 것이다.
안투안 쿠르스트의 얼굴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떻게 할까요?”
한스 징펠만의 시선이 루페르트를 향했다.
‘더 생각할 건 없다. 여기서 끝을 내야 한다.’
루페르트는 안주머니에 있는 소라고둥의 무게를 느끼면서, 그것을 목에 걸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갑자기 야수의 눈이 부릅떠졌다.
겁에 질린 채 매미처럼 나무에 딱 달라붙은 녀석이 갑자기 루페르트에게 손을 뻗치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네이 야둔! 오로메!”
갑작스런 야수의 위협적인 행동에 한스 징펠만은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그의 눈앞에 리프니에의 음성이 문자의 형태로 떠올랐다.
[ 어머. ]
매몰찬 웃음소리도 희미하게 들려왔다.
한편 한스 징펠만은 루페르트가 위기에 처하자 지체 없이 푸주한의 망치를 야수에게 격발했다.
꽈광!
천둥 같은 포성이 울려 퍼지며 총포 안에 담긴 무수한 탄환과 칼날이 폭풍처럼 야수를 덮쳤다.
한줄기 폭풍이 흘러간 직후, 루페르트는 야수의 최후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갈가리 찢긴 채 지면에 쓰러져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 야수는 루페르트를 향해 손을 뻗으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이 야둔…… 오로메 말릭……!”
루페르트를 향해 뻗은 야수의 흉측한 손이 파르르 떨렸다.
한스 징펠만은 쓰러진 야수에 다가가 단검으로 야수의 목을 그으며 야수의 죽음을 행동으로 알렸다.
세상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메헨부르그의 야수는 그렇게 죽었다.
리프니에의 퀘스트가 달성된 것이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곧 빛나는 문자가 루페르트의 눈앞에 떠올랐다.
- 당신은 메헨부르그의 야수를 처치했습니다.
- 균형의 여신은 당신의 노고에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 퀘스트 보상: 아티팩트 카드의 군단
루페르트의 오른손에 딱딱한 질감이 느껴졌다.
그것은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순백색의 카드였다.
곧 또 다른 문자가 그의 눈앞을 덮어 나갔다.
- 당신은 지금부터 영혼 동맹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영혼 동맹……?’
루페르트의 눈동자에 의문부호가 떠오르는 순간 리프니에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떤 사람과 강력한 인연의 끈을 만들 수만 있다면 수레바퀴 위에 올라선 당신은 회귀 이후에도 그 사람과 강한 유대를 이어 나가는 게 가능해요. 그 카드의 군단을 통해서 말이지요. ]
그때, 가까운 곳에서 호각 소리가 들렸다.
“저쪽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군홧발 소리가 들렸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군.”
한스 징펠만은 싸늘한 눈으로 숲 너머에서 달려오는 무리를 노려봤다.
제국수렵대다.
“내 친우, 루돌프 슈미트는 기형아 따위에 죽은 게 아니야.”
그는 푸주한의 망치를 버리고, 제복 안에 숨겨 둔 피스톨을 꺼내 들었다.
“비두킨트 가문의 개들에게 죽은 거지.”
그는 그렇게 읊조리고는 루페르트 앞을 막아섰다.
“달아나시지요. 루페르트 님. 여기서부터는 제가 맡겠습니다.”
“……한스 징펠만 엽사.”
“어차피 저는 이미 오래전에 삶에 대한 의지를 잃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껍데기만 남은 인간이었죠. 그런 찰나에 친우의 죽음이 만들어 낸 호기심이 이곳에 저를 데리고 왔고, 그 호기심은 이렇게 달성했으니 여기서 죽어도 여한은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살아야 합니다.”
철컥.
한스 징펠만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손놀림으로 총탄을 장전하며 총구를 앞으로 겨누었다.
그 순간 루페르트는 볼 수 있었다.
자신의 손에 쥔 카드 위에 한스 징펠만의 초상화가 마술적으로 떠오르는 것을.
“제가 보기에 당신은 그럭저럭 괜찮은 황위 계승자 후보로 보이거든요. 적어도 그 뇌르겐틀링가의 망나니보다는 낫겠지요.”
앞에서 날카로운 구령이 들려왔고 총성이 울려 퍼졌다. 총탄이 바람을 가르는 서늘한 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달아나세요! 어서요!”
한스 징펠만이 총탄을 응사하며 소리쳤다.
수풀 너머에서 외마디 구슬픈 비명이 울려 퍼졌다. 루페르트는 주저했다. 한스 징펠만을 여기서 버리고 간다는 게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리프니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죽으면 끝이에요. 루페르트 가우저. ]
그 말을 듣는 순간 루페르트는 한숨을 내쉬고 마음을 굳혔다.
“미안합니다.”
그는 그대로 숲을 질주해 앞으로 뛰쳐나갔다.
총성은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안전지대로 가자 한스 징펠만의 쌍둥이 도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와 루였나?’
그들은 물끄러미 루페르트를 바라보다 앞으로 뛰쳐나갔다.
“이쪽으로.”
총성과 비명을 뒤로한 채 루페르트는 어두운 숲을 빠져나갔다.
허옇게 분칠한 얼굴에 선명한 황색의 제복을 걸친 기인 한스 징펠만은 사자처럼 싸웠고, 사자처럼 죽었다.
한 달의 시간이 유수처럼 흘렀다.
황실에서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메헨부르그의 야수가 토벌됐음을 세상에 공표했다.
토벌자의 이름은 루페르트의 전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안투안 쿠르스트는 이번에도 커다란 늑대의 사체를 황실에 제출하며 야수를 사냥했다 보고했고, 제국수렵대의 고관대작은 그것을 인정했다.
역사는 바뀌지 않았다.
위버하임의 장원에서 루페르트는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카드의 군단.
한스 징펠만의 마지막 순간, 카드 위에 떠올랐던 초상화는 어느새 깨끗하게 사라졌다.
리프니에는 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 강한 인연의 끈이 만들어질 뻔했지만, 곧 찾아온 죽음이 인연의 끈을 끊어 버렸네요. ]
또 그녀는 이렇게도 말했다.
[ 아까운 인재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희생으로 보여요. 어차피 당신이 다시 사냥할 일은 없을 테니까 이대로 묻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
하지만 루페르트는 다르게 생각했다.
한스 징펠만의 우스꽝스러운 이면에 숨겨진 확고하고 진실한 모습을 바로 곁에서 확인했기 때문이다.
‘과연 이대로 끝내는 게 옳은 일일까?’
그냥 버리기엔 너무나도 아까운 남자다.
루페르트는 그를 데리고 가길 원했다.
자신이 만들어 갈 새로운 제국에 필요한 인재로 말이다.
루페르트 가우저는 목에 걸고 있던 소라고둥을 뚫어지게 응시하다 갑자기 집어 들고 양 볼이 터질 정도로 팽팽하게 바람을 넣어 소라고둥을 불었다.
맑고 청량한 바다 내음 나는 오묘한 음색이 위버하임 장원 위로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