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3. 메헨부르그의 야수 (1)
그 야수가 나타난 것은 어느 초가을의 청명한 날이었다.
다섯 명에서 일곱 명 사이가 되는 사람들이 번듯하게 닦인 도시의 길거리를 걷고 있었다.
저녁 무렵이긴 했지만 해는 지지 않아 세상은 밝음 속에 있었고 권태로울 정도의 평화감에 도시는 젖어 있었다.
길을 걷던 다섯 명에서 일곱 명 사이의 사람들은 저녁 메뉴 혹은 저녁에 즐길 유흥에 대해 중구난방으로 떠들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작은 말다툼이 일어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친한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허용 가능한 다툼에 불과했다.
사람들의 중재 속에 말싸움이 흐지부지 끝나고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 무렵, 일행 중에서 말수가 적은 사내가 대단히 거칠고 음습한 숨소리를 들었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 순간, 그의 몸은 얼어붙었다.
성벽으로 보호받는 도시의 석조포도(石造鋪道) 위에 있어서는 안 될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마리 야수였다.
그것이 늑대인지, 곰인지 아니면 다른 흉악한 마물인지 의견이 분분하긴 하지만 그 야수가 대낮에 다수의 사람들 앞에 나타나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을 살해하고 그 자리에서 포식한 건 이견이 없는 사실이다.
앞으로 메헨부르그의 야수라 불릴 식인귀는 그렇게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드디어 때가 왔네요.”
조촐한 신전. 제단 위에 모신 소라고둥 안에서 점잖고 기품 있는 여성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루페르트 가우저의 눈앞에 빛나는 문자가 떠올랐다.
[ 균형의 여신 리프니에의 퀘스트 ]
[ 그 두 번째 ]
[ 메헨부르그의 야수는 북방에 서식하는 마물인 다이어 울프의 변종이라고 알려졌지만, 글쎄요. 이 여신의 눈엔 좀 더 다른 사정이 숨겨져 있는 것처럼 보인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도 있듯 직접 그 괴물을 사냥해 정체를 밝힌다면 저의 호기심도 해소되지 않을까요? ]
여신의 퀘스트: 메헨부르그의 야수를 사냥하라.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는 게 좋아요. 제 예상이 맞다면 그 야수는 평범한 야수와는 궤를 달리할 테니까요.”
루페르트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준비는 해뒀다.
거울 앞에서 그는 통찰의 만화경으로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 루페르트 가우저에 관한 보고 >
1. 개요
종족: 인간 - 남부 제국인
분류: 범인
성별: 남성
연령: 18세(누적 32세)
명성: 알려지지 않음
2. 일반 평가
무력: C+
마법: F
군략: E-
경영: E-
지식: D+
기예: C+
3. 능력치
- 의미 없음
4. 축복과 가호
- 수레바퀴에 올라선 자
- 아티팩트 “통찰의 만화경”
5. 영혼 동맹
- 없음
5. 총평
- 졸병
반년간 몸져누워 있을 때를 제외하면 하루도 고된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결과가 일목요연하게 눈앞에 드러났다.
총평도 벌레에서 사람으로 격상됐다.
루페르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다른 항목을 보며 질문을 던졌다.
“저기 리프니에 님. 전부터 궁금하던 게 하나 있는데. 질문드려도 될까요?”
리프니에는 질문을 받지 않는다.
루페르트도 리프니에에 대한 질문은 최대한 삼갔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이 신장된 지금은 리프니에도 기분이 좋아 보여 조심스레 질문을 던진 것이다.
“전에도 말했듯이 저는 질문에 답하는 주의는 아니지만. 뭐, 물어보는 건 자유니 말씀하셔요.”
여전히 까칠한 여신. 루페르트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질문을 마저 던졌다.
“……저에 관한 보고 중에 다른 건 알겠는데 능력치와 영혼 동맹은 뭘 말하는 거죠?”
이에 제단 위에 똑바로 직립한 소라고둥에게서 얕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능력치는 현재의 당신으로선 아무 의미도 없는 항목이에요. 아직 범인, 다시 말해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당신이 신경 쓸 부분이 아니라는 거죠. 인내하고 착실히 저의 퀘스트를 수행하세요. 그리하면 언젠가 그 항목이 유의미해질 날도 올 테니까요.”
“그렇군요.”
“그리고 지금의 당신에게 보다 의미 있는 건 능력치가 아니라 영혼 동맹 부분일 거예요.”
“영혼 동맹은 어떤 것입니까?”
루페르트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이에 리프니에는 짓궂지만 기품을 간직한 웃음소리를 내더니 언제나처럼의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이번 퀘스트를 해결하면 알 수 있을지도 몰라요.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영혼 동맹은 당신이 회귀를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에 필수 불가결한 것이라는 사실이죠.”
“필수 불가결한……?!”
“뭐, 지금은 그 정도로 알고 있으면 돼요. 그보다 지금 당신에게 중요한 건 보상이 아니라 퀘스트 자체를 성공시키는 것이겠죠.”
리프니에는 다시 한번 강조했다.
“이번 퀘스트는 결코 쉽지 않을 거예요. 어중간한 각오로 나섰다간 제국을 구하기도 전에 당신이 먼저 끝날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하세요.”
루페르트는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으로 돌아온 루페르트는 사냥 준비를 시작했다. 가장 핵심적인 준비물은 돈이다.
신화시대도 아니고 루페르트가 직접 메헨부르그의 야수를 사냥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는 지역의 전문 사냥꾼을 고용해 야수를 사냥할 생각이었다.
그는 집사 세바스티안에게 임시 영주로서 자신의 몫을 요구했다.
비록 임시직이라고 하나 루페르트는 위버하임 영지의 영주.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요구하지 않았지만, 그에겐 영지 소득의 일정 부분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세바스티안은 기다렸다는 듯 루페르트의 요구에 대처했다.
“제국 궁내부에서 루페르트 님의 몫으로 책정한 수입은 연 2만 탈러입니다만, 아직 루페르트 님께서 이곳에 오신지 1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올해분을 전부 요구하신다면 전부 내어 드릴 용의는 있습니다.”
“2만 탈러라.”
소시민 기준으론 고소득자에 속하는 금액이지만 제국의 상위 귀족 기준으론 연회 한 번에 써 버릴 수 있는 금액이기도 하다.
한편, 루페르트가 황제 시절 고정적으로 지급받던 기본 수입만 5백만 탈러였다.
하지만 지금은 황제 시절의 수익을 생각해선 안 된다.
들판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농사일에 힘쓰는 농부의 연 수입이 1천 탈러를 간신히 넘길까 말까 한 수준이라는 걸 생각하면 2만 탈러도 충분히 큰돈이다. 루페르트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편리한 방식으로 지급을 요구했다.
“2천 탈러는 현금으로, 나머지는 믿을 만한 상회를 지급인으로 한 어음으로 부탁해.”
“하스 상회는 어떨까요?”
“메헨부르그에 지점이 있어?”
“메헨부르그라. 어두운 숲 쪽에 있는 도시 말이죠? 아마 있을 겁니다. 하스 상회는 대륙 곳곳에 지점이 있고 지점이 없는 곳이라도 다른 곳에서 합리적인 가격으로 할인받을 수 있으니까요.”
하스 상회.
그다지 들어 보지 못한 이름이다.
‘아이젠쉴트나 야스푸거 급은 아닌 모양이다.’
아이젠쉴트와 야스푸거는 제국은 물론이고 제국을 둘러 싼 소위 다섯 개의 왕관이라 불리는 주요 국가에 지점을 갖춘 강력한 상회다. 특히 야스푸거 가문은 전시대에는 황제의 목줄을 쥐고 전 대륙을 전쟁판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비난을 가질 정도로 거대한 영향력을 누렸다.
이 둘에 비하면 하스 상회의 규모는 한미한 수준이지만 세바스티안이 자신 있게 추천하는 걸로 봐서는 큰 문제가 없는 곳으로 보인다.
“그럼 하스 상회에 다녀오겠습니다. 반나절 정도 걸릴 예정입니다.”
세바스티안이 돈과 어음을 찾으러 오는 동안 루페르트는 피리스에게 부탁해 여행에 필요한 간단한 옷가지와 짐을 챙겨 줄 것을 부탁했고 자신은 가정 교사들에게 당분간 수업을 미루겠다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작성했다.
미리 벼르고 있었던 일이라 그런지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루페르트는 오랜만에 가슴이 시원하게 뚫리는 청량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하녀 한 명이 갑자기 루페르트의 방에 찾아와 딴지를 건 것이다.
“저기. 죄송합니다만, 루페르트 가우저 님은 영지 안에 머무셔야 합니다.”
골격이 크고 사나워 보이는 관상의 여자였다.
그런데 그 하녀를 보던 루페르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누구지?’
못 보던 얼굴이다.
분명 입고 있는 하녀 복은 위버하임 장원의 하녀들이 입는 옷인데 얼굴은 전혀 기억에 없는 얼굴이다.
“너는 누구냐?”
루페르트가 당돌한 하녀를 향해 물었다.
“저는 빌헬미나라고 합니다.”
당돌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하녀를 보며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런 하녀가 있었나.’
전생에서 장원의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저런 이름과 얼굴을 지닌 하녀는 보지 못한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루페르트는 빌헬미나를 노려보며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지금 나더러 여행을 떠나지 말라는 거냐?”
“그런 뜻이 아닙니다. 루페르트 님은 황위에 오를 수도 있는 분, 위버하임 장원에 오신 주요한 이유 중 하나는 안전의 확보입니다. 안전한 장원을 떠나 위험한 야수가 나타난다는 메헨부르그로 가신다는 건 루페르트 님이 이곳에 온 의미를 퇴색시키는 일입니다.”
루페르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팼다.
그가 메헨부르그로 간다는 말은 오로지 세바스티안에게만 말했다.
세바스티안은 곧장 하스 상회로 가겠다고 말했는데 어떻게 저 빌헬미나라는 하녀가 그 이야기를 아는지 궁금하다.
“세바스티안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나?”
루페르트는 즉시 빌헬미나를 추궁했다.
“네. 집사님께 직접 들었어요.”
빌헬미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래?”
순간적으로 루페르트는 이 빌헬미나라는 하녀가 집사인 세바스티안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냈다.
누군가 뒤를 봐주지 않는 이상 일개 하녀가 저렇게까지 고자세로 나올 순 없을 것이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수렴한다.
‘이 녀석이 날 감시하는 무리의 총책인가.’
가능성에 불과하지만, 개연성은 있다.
자신이 감시당한다는 걸 알았을 때 루페르트도 가만 있지 않았다. 그 또한 저택의 주요 인물을 감시했다.
세바스티안과 마르그리트를 주요 용의선상에 놓긴 했지만, 그 둘은 혐의가 희박했다.
루페르트는 빌헬미나라는 이름과 얼굴을 머릿속에 각인하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빌헬미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루페르트가 강하게 나올 걸 예상했지만 이렇게 쉽게 승복하는 모습을 보여 주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듯하다.
이윽고 빌헬미나는 평정을 찾고 답했다.
“제국 궁내부 쪽의 허락을 받아야 할 걸로 보입니다. 루페르트 님을 이곳에 모신 건 제국 궁내부니까요.”
“그래? 제국 궁내부라.”
“네. 제국 궁내부요.”
“그들이 널 고용했나?”
갑작스레 던진 말이다.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 녹아들어 있던 빌헬미나의 얼굴이 눈에 띌 정도로 굳어졌다.
“무…… 무슨 말씀이신가요?”
이에 루페르트는 한 차례 쾌활하게 웃고는 빌헬미나에게 되물었다.
“농담인데 왜 그리 정색해?”
무늬만 상급자로 10년이라는 세월을 살아온 꼭두각시 황제의 지혜라고 할까.
루페르트는 마음대로 말을 막 던질 수 있는 상급자의 위치를 최대한 이용했고 빌헬미나에게 동요를 일으켰다.
‘역시 제국 궁내부와 이 녀석 사이엔 뭔가 있는 모양이군.’
루페르트는 빌헬미나를 노려보며 담담하지만, 힘이 서린 위엄 있는 어조로 말했다.
“비록 임시직이라고 하나 나는 이 위버하임 장원의 법적인 주인이자 위버하임 영지의 정당한 영주이다. 나는 내 권한의 안에서 마음대로 결정할 권리가 있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 권리와 자유에 터 잡아 나는 메헨부르그로 가려고 한다.”
“하…… 하지만.”
“그렇게 걱정되면 제국 궁내부엔 네가 가서 직접 보고해라. 빌헬미나. 결과를 기다리겠다.”
“…….”
루페르트는 빌헬미나와 제국 궁내부라는 이름을 특히 힘주어 말함으로써 그녀에게 압박을 가했다.
이름을 부른 건 책임을 지우기 위해서고 궁내부를 언급한 건, 그녀 뒤에 도사린 흑막을 건드리기 위해서다.
“왜? 대답이 없나?”
궁정 안에 도사리는 교활한 여우 상대로 10여 년을 싸웠다. 그런 루페르트에게 어쭙잖은 기량으로 덤빈다는 건 자살행위와 같다.
“그…… 그건 일개 하녀인 제가 결정할 사안이 아닌 것 같습니다.”
결국 싸움을 걸어온 빌헬미나는 고개를 수그렸다.
루페르트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뒤돌아섰다.
“더 할 말이 없으면 물러가라.”
빌헬미나는 고개를 숙인 채 방을 떠났다.
그녀의 양 귀는 귓불까지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루페르트는 차가운 눈으로 그녀가 사라지는 것을 노려보았다.
‘빌헬미나라고 했나.’
곧 다시 격돌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처리해야 할 문제가 있다.
메헨부르그의 야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