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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제-2화 (2/225)

2화 1. 황제의 회귀 (2)

저택에 들어서자 저택을 관리하는 집사를 필두로 한 하인들이 일렬로 늘어서 저택의 새 주인을 반겼다.

어제까지 번듯한 집 한 채 없이 공동주택에서 살던 루페르트는 이제 황위 계승권자 후보 자격으로 공석인 위버하임 남작 대우로 취급받음과 동시에 장원의 주인이 된 것이다.

“저는 이 집의 관리인을 맡은 세바스티안 브톤입니다. 앞으로 아무쪼록 잘 부탁드리고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언제든 기탄없이 불러 주시길 바랍니다.”

저택엔 세바스티안을 포함해 여섯 명의 하인이 있었다.

집사 세바스티안와 정원사 막스를 제외하면 모두 하녀로 하녀장 마르그리트의 지휘를 받아 집안의 관리, 가사 전반을 전담하는 사람들이다.

전생에서 루페르트는 이들과 그다지 친하게 지내지 못했다. 그들은 대체로 친절했지만, 선을 긋고 거리를 두려고 했다.

친절하지만 자기편이 아닌 사람들로 둘러싸인 곳.

루페르트가 이 저택을 감옥이라 부른 이유다.

‘그나저나 여전히 예쁘네.’

고개를 숙인 하녀 중 유독 눈에 띄는 여성이 있었다.

불꽃을 연상케 하는 붉은색 머리칼과 굴곡 있는 몸매, 고양이처럼 큰 눈을 지닌 아름다운 소녀였다.

나이는 루페르트 가우저와 비슷한 또래.

회귀 전, 한창때의 나이였던 루페르트는 그녀에게 관심이 있었다. 우연을 빙자해 말을 걸어 보려는 수작을 건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철벽이었다. 무엇보다 루페르트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기운을 노골적으로 풍겼다.

그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은 그녀가 피리스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다는 게 전부.

소문에 따르면 마법 학교로 진학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알지 못했다.

아마 잘되지 않았을 것이다.

마법 학교라는 곳은 아주 재능이 특출나거나, 집안이 유복하지 않으면 수료하기 어려운 곳이므로.

그런데 지나치게 오랫동안 옛 추억에 잠겨 있던 모양이다.

“피리스. 저분 너에게 반했나 봐?”

루페르트가 한참 동안 피리스를 보고 있자 다른 하녀들이 킥킥거리며 말을 주고받았다.

당사자인 피리스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루페르트를 곁눈질로 힐끗 응시했다.

14년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빨려들 것 같은 푸른 눈동자.

그런데 루페르트는 미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시선의 온도가 다르다.

전생에서 루페르트를 바라보던 피리스의 눈빛은 차가운 경멸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영락없이 꾸밈없는 소녀의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이 녀석, 날 처음부터 싫어한 게 아니었어?’

조금은 마음이 설렌다.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건 루페르트 본인도 알고 있다.

살짝 둥글어진 마음 너머로 불타는 제도의 광경이 서늘하게 비쳤다.

“…….”

루페르트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고 옆에서 집사 세바스티안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주인님. 긴 여정에 피로하셨나 봅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 여장을 푸시지요.”

루페르트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침대와 서재가 딸린 넓은 방.

전에 살던 방보다 다섯 배는 큰 방이었다.

침대 위에 누워 있던 검은 고양이가 루페르트를 보더니 입이 찢어지라 하품을 한다.

“이 녀석도 있었잖아?”

하녀들이 귀여워하던 녀석이다.

그 녀석은 루페르트가 침대 가장자리에 앉자 도도하게 몸을 일으키고는 열린 창밖으로 훌쩍 몸을 날린다.

루페르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푹신한 침대에 몸을 뉘었다. 하켄하임의 침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안락감. 하지만 그에 반비례하여 루페르트의 마음은 무거워졌다.

‘이제, 뭘 해야 하지?’

과거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모든 것은 불투명하다.

무엇보다 자기에 대한 자신이 없다.

황제직을 10년 동안 수행했지만, 그의 경험은 모래알 같은 허상이었다.

제대로 아는 게 없었기에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고 긍정적인 경험으로 승화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기껏해야 궁중의 시시콜콜한 예법과 몸가짐, 위엄 있는 목소리로 좌우로 명하는 것 정도가 그가 제위에 있으면서 익힌 것들이다.

그래도 전보다 사정이 낫다.

이 전생에서 루페르트 앞에 놓인 미래가 지도도 등불도 없이 암초로 가득 찬 해역을 항해하는 것이었다면 적어도 지금은 대강의 지도라도 손에 쥐고 있다.

그는 미래를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루페르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이 뭘 해야 할지 알게 된 것이다.

‘나의 능력을 키울 때다. 진정한 황제에 어울리는.’

곧 가정 교사들이 방문할 것이다.

황실에서 뽑은 실력자들이다.

전생에서 루페르트는 그들의 수업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당시 그는 철이 없었고 황제가 되겠다는 의지도 없었으며 수업의 난이도도 지나치게 높았다.

간신히 글줄이나 읽을 줄 알던 루페르트에게 당대 내로라하는 석학들의 수업은 따라가기 벅찬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늦은 오후, 집사 세바스티안이 가정 교사의 내방을 알렸다.

루페르트는 그의 이름을 물었다.

“테타우 제국대학의 에르바하 교수님입니다. 룸어(語)의 권위자시죠.”

“에르바하라.”

깐깐하고 꼬장꼬장한 늙은이.

첫 대면은 아직도 기억난다. 고리타분한 원리 원칙주의자가 그렇듯 그는 첫인상과 외관으로 상대방을 평가하는 사람이다.

전생에서 그는 루페르트의 단정치 못한 옷차림과 얼빠진 태도를 보고 루페르트의 기분이 나쁘지 않을 정도로 지적한 후 다음 수업부턴 자신의 제자를 후임으로 보냈다.

후임은 젊은 청년 학자로 수업에 적극적으로 임하기보다는 루페르트의 비위를 맞춰 주는 부드러운 남자였다.

루페르트는 엄격한 가정 교사 중 그 젊은 학자를 제일 좋아했지만, 결과적으로 그에게 배운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룸어는 제국이 들어서기 전 대륙 전체에 영향력을 미치던 고대의 강국, 룸 제국의 언어다.

비록 룸 제국은 멸망했으나 그들의 찬란했던 예술과 문화는 여전히 살아남아 그들의 문자로 전해지고 있다.

이런 문화의 근간이 되는 룸의 언어를 모른다는 건 상류층 사이에서 근본 없는 인물로 치부되는 가장 좋은 구실이다.

루페르트 가우저는 제위 내내 룸어로 자기 이름도 못 쓰는 무식한 인간이라고 뒤에서 조롱받았다.

루페르트도 뒤늦게 룸어를 배우려고 시도했지만, 고대의 언어는 대단히 어려운 언어다.

룸어를 문법적 오류 없이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은 어릴 때부터 가장 고도의 교육을 받은 자만이 구사할 수 있는 배운 자의 특권이자 상징이다.

‘작은 것부터 바꾸자.’

변화란 거창한 게 아니다.

루페르트는 제위 내내 단 한 번도 자신 있게 구사할 수 없었던 룸어를 정복하고자 마음먹었다.

에르바하 교수는 그를 위한 최적의 스승이다.

루페르트는 거울 앞에서 구석구석 자신의 옷차림을 살피며 의관을 단정히 했다.

긴장되는 첫 만남.

응접실의 소파에 하얀 수염을 드리운 날카로운 인상의 노학자가 눈을 반쯤 감은 채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에르바하 교수를 보자 루페르트는 문득 자신도 모르는 강점 하나가 부지불식간에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금도 긴장되지 않는다.

14년 전에는 제국대학 교수의 기백에 눌려 제대로 말도 못 했는데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비록 허수아비 황제라고 하나 루페르트 가우저는 제국 권력의 최상층에서 내로라하는 당대의 인물들을 두루 만났다.

하물며 일개 제국 대학교수 정도야.

긴장감이 사라지자 루페르트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그는 세련된 몸가짐으로 교수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제가 루페르트 가우저입니다.”

평온하면서도 점잖은 위엄이 깃든 목소리.

의자에 앉아 있던 교수가 반쯤 뜬 눈을 슬며시 뜨고 루페르트를 바라보았다.

비굴하지 않으면서도 겸손한, 그러면서도 주인의 자리를 잊지 않은 당당한 태도로 선 청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교수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분. 평민에게 거두어져 평민처럼 살았다고 들었는데.’

애당초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는 루페르트 가우저가 선제후들의 협잡으로 황위 계승권자 후보에 오른 ‘자격 없는’ 후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직접 마주한 루페르트는 소문과는 달랐다.

무엇보다 굽히지 않는, 거만하지 않은 당당함이 후광처럼 돋보였다.

에르바하 교수는 태도를 바르게 하고 루페르트를 상대했다.

루페르트와 이야기를 하면서 교수는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이 기품은 하루아침에 몸에 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역시 그의 몸에도 제국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인가.’

인물됨은 확실히 좋다.

지금까지 만난 다른 황위 계승권자 후보들과 비교해도 조금도 꿀림이 없으며 오히려 나은 모습까지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룸어의 지식은 어떨까?

에르바하 교수는 루페르트에게 간단한 테스트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지참한 책을 펼쳐 그중 한 문장을 앙상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이 문장은 어떻게 읽습니까?”

올 것이 왔다.

루페르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에르바하의 테스트에 응했다. 아주 잘하진 못하지만, 재위 기간 틈틈이 익혀둔 지식을 최대한 동원해 대답했다.

그러나, 루페르트의 룸어는 조악했고 특히 기초가 빈약했다.

에르바하의 얼굴에 미세한 경직이 나타났다.

‘사람됨은 괜찮은 것 같으나 교육 수준은 높지 않군. 기본도 안 되어 있다니. 결국 평민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라는 건가.’

자신이 직접 가르칠 만한 인재는 아니다.

에르바하 교수가 그렇게 루페르트를 정의 내릴 때였다.

교수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황위 계승권자 후보 루페르트 가우저가 자신 앞에 서서 머리를 숙인 게 아닌가?

아무리 그가 평민 손에서 자랐건 교육 수준이 낮건 간에 그는 저 철혈대제 클라우데 2세의 핏줄, 황제가 될 수도 있는 사람이다.

일개 제국 대학교수와는 근본이 다르다.

그런데도 저 청년은 자신에게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저의 부족함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배울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교수님이 제국에서 가장 룸어에 정통한 분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어떤 어려운 과제도 좋습니다. 부디 저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가르치는 입장에서 열의에 찬 학생만큼 보람을 느끼게 하는 대상은 없다. 그것도 고귀한 신분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심지어 저 학생은 황제가 될 수도 있는 존재 아닌가?

구제 불능의 인간이라면 모를까, 저렇게까지 열의에 넘치는 황위 계승권자 후보면 가르치는 보람이 있을 것이다.

그것도 지금까지 느꼈던 어떤 보람보다 거대한 지고의 보람을 말이다.

에르바하 교수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루페르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제가 황위에 올랐을 때 룸어도 모르는 황제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비난과 치욕을 떠나, 무식한 자가 제위에 오른다면 제국 전체를 욕보이는 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 거침없는 말에 에르바하 교수의 마음은 굳어졌다.

교수가 일어났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루페르트에게 다가가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검 대신 펜을 쥔 기사, 제국 대학교수들의 서약이다.

“카셀 에르바하. 제국대학의 교수. 기꺼이 남작님을 도와 지식의 빛을 밝히는 데 일조하겠나이다.”

이렇게 루페르트는 제국 내 룸어의 일인자 에르바하를 스승으로 모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일 뿐이다.

루페르트는 잇따라 방문하는 다른 모든 가정 교사들을 자신의 스승으로 붙들어 놓을 수 있었다.

논리학, 역사, 수사학 등등 하나같이 제국에서 일류로 손꼽히는 호화로운 교수진이었다.

그들의 지식을 흡수할 수 있다면 예정된 파국으로 향하는 미래가 조금은 달라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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