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1. 황제의 회귀 (1)
전임 황제 클라우데 2세가 붕어한 지 4년이 흘렀다. 그동안 제도 테타우에서는 갖은 모략과 정치 공작이 기승을 부렸다.
우여곡절 끝에 4년 만에 새로운 황제가 선출됐다.
루페르트 가우저라는 클라우데 2세의 먼 친척뻘인 젊은이였다.
그는 분명 젊고 혈기 왕성했지만, 그가 황위에 올랐을 때 제도 테타우의 궁정에서 그가 황제직을 제대로 수행하리라고 기대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황제에 오른 것이 아닌, 선제후들의 치열한 정치 공작 속에서 일어난 타협의 산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이 예상한 것처럼 그는 아무것도 몰랐고 아무 능력도 없었다. 그가 잘하는 건 공놀이와 플루트 연주가 전부였다.
사람들은 그를 허수아비 황제라고 불렀다.
허수아비 황제의 치세는 갖은 불명예와 재앙으로 얼룩졌다.
제국은 쇠락했고 종교 갈등이 일으킨 내전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실권도, 힘도, 지식도, 제국을 지킬 군대도, 조언해 줄 신하도, 가르침을 줄 스승도, 마음을 터놓을 벗도 아무것도 없는 루페르트 가우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황제직에 선출된 지 10년째.
제도는 함락됐고 황궁은 불탔다.
제국은 멸망했다.
근위대에게마저 버림당한 황제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거기까진 감내할 수 있었다.
자신의 부덕의 소치이니.
제위를 거절했어야 했다.
누가 뭐라고 했건.
하지만 백성들은 무슨 죄인가?
테타우를 함락시킨 용병대장 융커스 베샤문트의 병사들은 제도의 백성을 능욕하고 학살했다. 도처에서 처참한 절규와 신을 찾는 외침이 울려 퍼졌다.
무력감 속에서 그리고 절망 속에서 죽어 가던 황제는 난생처음으로 기도라는 것을 했다.
제국과 제국의 백성들을 살릴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노라고.
눈앞이 어둠으로 잠식되는 순간, 루페르트 가우저 앞에 소라고둥 하나가 초현실적인 형태로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것은……?’
루페르트 가우저는 눈을 부릅떴다.
한 달 전 황궁 안에서 소란을 피운 엉터리 예언자가 놔두고 간 물건이다.
놀랍게도 소라고둥 안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그 목소리는 빛으로 된 문자로 실체화되어 루페르트 가우저 앞을 가로막은 어둠을 밝혔다.
[ 정말 무엇이든지 하겠습니까? ]
루페르트는 그 음성이 신의 목소리인지 악마의 목소리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에게 선택지는 없다.
제국의 폐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또 다른 문자가 눈앞에 나타났다.
[ 당신은 회귀의 수레바퀴 위에 올라섰습니다. ]
빛나는 문자가 흩어지는 순간, 루페르트는 보았다.
자신을 비롯한 세상의 모든 것들이 소라고둥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 * *
루페르트 가우저는 어두운 복도에 있었다.
그곳에서는 황궁에서 들려오는 비명도 모든 걸 집어삼키는 불도, 폐부와 옆구리에 느껴지는 불로 지진 듯한 통증도 없었다.
그곳은 그가 알지 못하는 다른 세계였다.
복도 너머 살짝 열린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 없었다면, 복도 안은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으리라.
루페르트 가우저는 천천히 낯선 복도를 따라 걸었다.
살짝 열린 문 옆엔 두건을 뒤집어쓴 노인이 낡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노인은 루페르트 가우저가 다가오자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랫동안 기다린 손님이 왔군. 6년? 7년? 아니 어쩌면 10년이 넘었을지도 모르지. 날을 세는 건 오래전에 그만뒀으니.”
노쇠하고 지친 목소리. 주의를 기울여서 듣지 않으면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흐릿한 발음이다.
루페르트 가우저는 노인의 발치 아래 빽빽하게 새겨진 숫자를 세는 기호가 새겨진 걸 발견했다.
날마다 노인이 새겨 둔 흔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 기다림에도 끝이 왔군.”
어둠의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루페르트에게 내밀었다.
하나의 물건이 노인의 앙상한 손바닥 위에 떠올라 있었다.
신비로운 색채를 머금고 은과 황금으로 세공된 목에 걸 수 있게 줄을 덧대 만든 소라고둥이다.
“받아 들게.”
루페르트는 소라고둥을 받아 들었다.
소라고둥이 손에 들어가자마자 그의 눈앞에 빛으로 이루어진 문자가 떠올랐다.
[ 영겁의 파도 ]
- 균형의 여신 리프니에의 성스러운 유물
- 소라고둥을 불면 세상의 시간이 멈추고 당신은 과거로 회귀할 수 있다.
- 당신은 아래의 것을 가지고 회귀할 수 있다.
1. 기억
2. 소지품
3. 축복
4. 인연의 조각
- 현재 당신의 능력은 형편없습니다.
- 이 상태라면 과거로 돌아가도 똑같은, 아니 더 처참한 미래에 직면하겠지요.
거기까지 읽어 나가던 루페르트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한치의 틀림도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빛나는 문자는 계속해서 나타났다.
- 구제 불능인 당신이라도 균형의 여신 리프니에의 퀘스트를 수행한다면 초월적인 능력과 아티팩트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겁니다.
- 여신의 퀘스트는 예기치 못한 때 발생하는 경우가 많고 시기를 지나면 실패로 간주되는 것도 있으니 이 점 유념하시길 바랍니다.
-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당신이 뜻한 바를 이루고 싶다면 다른 어떤 것보다 여신의 퀘스트를 우선해야 한다는 것을.
- 경고의 말. 회귀는 당신의 유희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 당부의 말. 소라고둥을 부는 순간, 수많은 환영이 당신 옆을 지나갈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환영에 시선을 뺏기는 일은 삼가세요.
- 격려의 말. 부디 초심을 잃지 않도록.
소라고둥에서 흘러나온 문자는 이내 모래처럼 스러져 사라졌다.
루페르트는 자신의 목에 걸린 소라고둥을 들어 올려 바라보았다.
‘균형의 여신 리프니에?’
듣지 못한 신이다.
그런 신이 있다는 것은 들은 적이 없다.
아마도 사교 집단에서 숭배하는 신이거나 잊힌 고대의 신일지도 모른다.
“문을 열고 나가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네.”
노인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루페르트 가우저는 노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시오?”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첫눈에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노인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어둠과 동화가 된 것처럼 안락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댄 채 입술을 다물었다.
“…….”
루페르트 가우저는 노인을 남겨 둔 채 살짝 열린 문을 열어젖혔다.
문 너머에 있는 풍경은 어떤 아름다운 산골 마을의 풍경이었다.
루페르트 가우저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커졌다.
‘여기는?’
어떻게 잊겠는가. 그가 나고 자란 고향을.
하켄하임.
황실에서 보낸 사자들이 그를 황위 계승자랍시고 테타우로 데려가기 전까지 유년기를 보낸 곳이었다.
그의 길지 않은 인생 중 가장 행복했던 때다.
망설일 게 없다. 루페르트 가우저는 성큼 앞으로 열린 문 너머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그런데 그가 문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노인의 흐릿한 목소리가 갈고리처럼 그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문 너머에 뭐가 보이나?”
노인이 물었다.
루페르트는 자신을 기다리는 낙원 앞에서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이상향으로 가는 문이 보입니다.”
“이상향이라…….”
덥수룩한 흰 수염 너머 노인의 야릇한 미소가 언뜻 비쳤다.
루페르트는 그런 노인을 가만히 보다가 열린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맨바닥에서 잔 것처럼 허리가 아프다.
루페르트는 딱딱한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퀴퀴한 냄새와 보잘것없는 실내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루페르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곳은……?!”
기억에 있는 방이다.
그렇다.
그가 황위 계승자 후보로 선택당해 제도 테타우로 끌려가기 전 유년기를 보냈던 하켄하임의 공동주택의 방이다.
그는 창가로 가서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를 돌봐 주었던 공동주택의 관리인 아주머니가 긴 빨랫줄 옆에서 빨래를 널고 있었고 그 옆에서 그녀가 키우는 커다란 개 한 마리가 몸을 둥글게 말고 잠을 자고 있었다.
그들은 과거의 인물들이다. 하켄하임은 루페르트의 치세 중 오크 약탈자에게 파괴되었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한 가지 사실을 의미한다.
“과거로 돌아온 건가?”
루페르트 가우저는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한 폭의 그림이 액자에 담겨 있었다.
아직 젊어 보이는 남성과 여성의 초상화.
‘아버지. 어머니.’
그의 양친은 일찍이 그의 곁을 떠났고 남은 건 초상화 한 점과 따뜻한 온기가 남은 흐릿한 추억뿐이다.
루페르트는 황제가 된 이후 사라져 버려 영영 찾지 못했던 추억 속의 액자를 뚫어지도록 응시했다.
묘한 일이다. 이미 잊어버렸을 거라 생각했던 얼굴들이 이토록 친숙한 것이었을 줄이야.
루페르트는 액자를 두 손으로 안은 채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한동안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18세의 루페르트 가우저.
낯익으면서도 낯선 모습이다.
문득 목에 걸고 있는 소라고둥이 눈에 들어왔다.
균형의 여신 리프니에의 선물이다.
그 소라고둥을 보는 순간 루페르트는 불타는 황궁과 잔혹한 용병에게 학살당하는 자신의 백성, 멸망하는 제국의 모습을 눈에 떠올렸다.
빠드득.
이가 갈렸다.
두 눈엔 불꽃이 튀었다.
‘두 번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
자신에게 다짐하듯 속으로 되뇔 때였다.
닫힌 문이 거칠게 열리면서 알록달록한 화려한 색상의 제복을 걸친 장교와 투구를 쓴 병사들이 방안으로 물밀듯이 밀고 들어왔다.
“제국의 이름으로 왔소이다!”
선두에 선 장교가 긴 두루마리 양피지를 아래로 늘어뜨리며 루페르트에게 말했다.
“당신이 루페르트 가우저입니까?”
루페르트는 그를 노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교는 이어 말했다.
“외람되오나 루페르트 가우저 님. 당신은 황위 계승권자 후보에 지명됐습니다. 자세한 사정은 마차에서 말씀드릴 테니 일단은 저희와 동행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14년 전.
루페르트 가우저는 이들의 동행 요구를 거절하고 쓸데없는 소란을 피웠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루페르트는 말없이 낯선 병사들을 따라나섰다.
마차 안에서 루페르트는 이름 모를 장교에게 자신이 왜 황위 계승권자 후보가 되었고 왜 제도 테타우로 향하게 되는지 대한 설명을 들었다.
요약하자면 사정은 이렇다.
철혈대제라 불리던 선제 클라우데 2세가 붕어한 이후 룸 왕 막시밀리안이 차기 황제로 등극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막시밀리안의 갑작스러운 지병으로 인해 급사로, 후사가 끊겨 버리고 말았다.
자연스레 선제후들은 황제직을 두고 치열한 눈치 싸움을 벌였는데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선제후들은 젊은 황제 후보를 몇 명 둔 후 그중 가장 적임자를 황제로 옹립하기로 합의를 봤으며 그 후보 중 하나가 루페르트라는 것이다.
지난 생에서 루페르트 가우저는 황제로 선출됐다.
이유는 알지 못했다. 경쟁 후보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기에 왜 자신이 황제로 선출됐는지 비교할 방법도 없었고 황제가 된 이후엔 정신없는 일정을 소화하느라 과거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루페르트가 회상에 잠겨 있는 동안 그를 태운 마차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멀리 제도 테타우의 거대 성벽이 보이는 한적하고 평화로운 시골에 자리 잡은 2층짜리 저택이었다.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면서도 그 옛 됨이 보기 좋게 익어 있는 모습.
위버하임 장원.
모든 것이 시작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