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5. 폴름스 전투, 협정을 위한 암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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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금을 지급금으로 달라고? 엘랑크 인들의 요구가 그러한가?”
엘랑키아 왕국과 폴름스 선제후령 사이에 수 차례 사절들이 오가면서 서로의 조건과 요구사항을 주고 받았다.
마침내 첫 협의 내용이 정리되어 폴름스의 선제후 네프셀시엔 앞에 당도한 것이다.
“그렇습니다, 전하. 엘랑키아··· 엘랑크의 군주는 강화 협정을 위한 금액의 일부를 요정금으로 달라 하였습니다.”
“하!”
네프셀시엔은 어이없어하며 기묘하게 웃는다.
“참으로 어리석고도 불쾌한자로다. 감히 고대 혈족의 유산에 손을 대려 하는가···.”
“그렇습니다, 전하! 참으로 무엄하기 짝이 없는 어리석은 요구가 아니겠습니까? 바로 거절 의사를···.”
“...허나 적절한 가격을 책정해 준다면 넘기지 못할 것도 없겠지.”
“저, 전하? 외람되오나 무슨 의미로 하신 말씀인지 이해가 잘···.”
네프셀시엔은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 보는 인간 신하의 땀에 젖은 얼굴을 경멸 어린 시선으로 노려본다.
“요정금은 우리 혈족이 가진, 폴름스가 가진 수많은 자산 중 하나일 뿐이오. 귀중한 물건이라고는 하나 내주지 못할 것은 없다고 한 것이오.”
“하오면··· 상대방의 요구대로, 지급금의 일부를 요정금으로 내 주어도 괜찮다 하시는 것입니까?”
“내가 한 말을 듣기는 한 거요? ‘적절한 가격’이라면 내 줄 수 있다 한 것이오. 평범한 금과 동등한 가치로 내줄 수야 없지.”
“아하··· 이해했습니다, 전하.”
오늘날에는 만들 수 있는 제련 기술이 남아있지 않고, 그 자체로 훌륭한 공예품이라 한들 어차피 금을 저장하기 위한 한가지 수단이었을 뿐이다.
선제후 간의 거래에 담보로 사용되고는 하므로 모조리 풀어 버리면 곤란하겠으나, 이는 양을 조절하면 될 일이다.
물론 네프셀시엔도 호락호락하게 넘길 생각은 없었다. 엘랑크의 왕이 어떤 이유로든 이를 원한다는 것은, 오히려 ‘평범한 금’을 아낄 수 있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기프트를 통해 가공된 고대의 비밀스러운 금괴라는 상징성, 현대 어떤 국가의 조폐창에서도 만들 수 없는 절대적으로 높은 순도.
높은 가격을 책정할 구실은 얼마든지 있었다.
“엘랑크 인이 요구한 양을 환산하면 어느 정도나 되오?”
“외람되오나··· 폴름스 선제후령이 보유한 요정금의 십 분의 일에 해당하는 것으로 아옵니다.”
“십 분의 일···.”
‘무려’ 십 분의 일 일 수도 있고, ‘겨우’ 십 분의 일 일 수도 있다.
네프셀시엔은 부담되는 양은 아니라 판단했다.
선제후령의 금고 외에도, 고대 혈족만이 출입할 수 있는 내궁의 비밀스러운 금고에도 상당량의 요정금은 보유하고 있으니까.
바닥을 기는 버러지나 다름 없는 어리석은 인간들, 그들의 지혜는 짧게 타고난 자신들의 명줄 만큼이나 보잘 것 없었다.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고대 아란 제국의 적통을 이은 고대 혈족이 얼마나 부유한 지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고대 혈족이 인간 황제 위에 군림하며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제국을 통치하는 것은 그들이 단순히 고귀하게 태어났기 때문이 아님을 알지 못할 것이다.
경제적으로 제국의 경제를 쥐고 있고, 황실을 포함하여 우호적인 인간 귀족 가문에서 필요할 경우 배후에서 지원 가능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천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폴름스의 역대 선제후들은 수많은 인간 영주들에게 통치 자금을 빌려주고 있다.
그 중 일부는 상환되었으나, 일부는 여전히 양 가문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설령 인간들이 잊었다 한들, 가문이 망해 다른 가문에 흡수되었다 한들, 도시와 요새, 경작지와 광산에 걸린 담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때가 되면, 선제후령에서 파견한 징수꾼들이 도시와 요새, 경작지와 광산의 새 주인을 찾아가 청구서를 내미는 것이다.
아마 다른 선제후령들도 마찬가지로 돌아가고 있겠지.
이게 바로, 수적으로 얼마 안되는 고대 혈족들이 인접한 인간 영주들을 직접 통치하지 않으면서도 권력을 유지하는 방편이었다.
문자 그대로 ‘나라를 살 수 있을 정도’의 막대한 금액이 요정금의 형태로 담보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말이다.
그 중 십 분의 일, 실상 그보다도 적은 양이라면 내 주어도 아깝지는 않다.
어차피 전쟁이 끝나면 복구를 위해서라도 막대한 비용이 들어간다. 어차피 써버릴 금이라면 조금 다른 형태로 쓴들 무슨 상관일까.
네프셀시엔의 생각은 이미 이번 전쟁이 끝난 후, 새로운 황제가 등극한 이후를 따져보고 있었다.
10년, 혹은 그 이상이 지난 후를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 자존심이 상하고 인정하기 싫은 일이지만, 이번 전쟁은 폴름스의 패배가 분명했다.
그러므로 앞으로 한동안 위축될 것이며, 무너진 성채를 다시 짓고, 황폐화된 영토를 재개발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리라.
허나 이는 10만에 이르는 대군, 정말 답답할 정도로 쓸모 없는 머저리들의 무리를 모으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지출한 여섯 선제후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게다가 돈이 정말로 더 필요한 것은 제위에 오른 다음이다.
제국 통치가 어느정도 궤도에 오르면 상황은 나아지겠지만, 벌써 사반세기 동안이나 황좌가 비어있던 제국 정부가 주인이 생겼다고 갑자기 잘 돌아갈리 만무하니까.
‘자신들의 황제’가 실패하지 않게 하려면 지지 선제후들의 후원이 필수적이게 된다.
이는 예상이나 추측이 아니다. 선제후 중 일원으로서 몇 차례나 ‘경험’했던 일이니까.
한편 이번 전쟁을 관망하고 있는, 디오보르크 공작을 지지하지 않은 다섯 선제후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은 이번 전쟁에서 잃은 것이 없는 대신, 얻는 것도 없으리라.
‘방위 전쟁의 승리’에 참전하지 못했으므로 권위가 떨어질 것이고, 새로 생겨난 절대 권력인 황제를 지지하지 않았으니 그 세력은 더더욱 위태로워지리라.
당연히 그렇다고 ‘선제후 지위’ 자체가 무너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지지 영주들이 이탈 할 것이고, 제국 운영에 필요한 수많은 이권을 잃어버릴 것이며, 영토의 백성들조차 다른 생각을 하게 될지 모른다.
이 또한 네프셀시엔도 수 차례 직접 경험했던 일이다.
결국은 그런 고립과 권위 상실을 묵묵히 견디거나, 뒤늦게라도 황금을 뿌리며 황실에 줄을 대는 방법이 있겠지.
아무튼, 그들의 미래 또한 무탈하지는 못하리라는 것이 그녀의 예상이었다.
결국 엘랑크에 굴복했다는 역겨운 사실만 차치한다면, 폴름스의 처지는 다른 선제후령보다 딱히 어려울 것도 없으리라.
적어도 폴름스는 직할군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으니 국방력은 큰 문제가 없다.
일부 영토가 전장이 되어 황폐해지기는 했으나, 주민들이 학살당하거나 무차별 약탈 당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엘랑크 인들이 수로를 파괴하고 농경지에 소금을 뿌린 것도 아니니, 복구는 그렇게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가장 큰 골칫덩이··· 호전적인 엘랑크 인이라는 국경 밖의 위협이 일시적으로 사라진다.
5년이 될지 10년이 될지, 혹은 30년이 될지 모르겠으나, 네프셀시엔은 평화 기간을 충실히 지킬 생각이었다.
랄렌 강 서안의 권리를 포기해 영영 잃어버리는 것은 뼈아픈 일이지만, 실질적으로 영토를 상실한 것은 벌써 한참 전 일이다.
그리고 탈환할 능력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네프셀시엔은 자존심이 강하지만, 불가능을 가능하다 믿을 정도로 분별이 없지는 않았다.
비록 한시적이기는 하나, 서부 지역에 대한 군사적 긴장의 완화.
긴장 상황이 계속되며 막혀있던 랄렌 강을 통한 수로 무역의 재개.
달갑지만은 않았지만, 북부 늪지대의와 엘랑크 상인들이 다시 거래를 시작한다 생각하면 폴름스의 손실은 금방 복구될 것으로 믿는다.
호전적인 엘랑크 야만족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사실은 폴름스가 지고 있는 질곡이며 태생적인 한계였다.
하지만 이번 조약을 통해 일시적으로나마 그 짐을 내려놓게 된다.
네프셀시엔이 노리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이 얼마간의 시간, 인간으로 따지면 한 세대 정도의 시간은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한 나라, 한 선제후령의 위상을 완전히 바꿀 수도 있는 기간이다.
이를 잘만 활용한다면, 요정금 따위 얼마든지 되찾아 올 수 있으리라. 어쩌면 그 이상도 말이다.
“엘랑크의 사절이 오면 말하시오. 요정금을 내 줄 수는 있으나, 이는 고대 아란 제국의 보물이니 마땅한 가치를 인정해 달라고.”
“그리 하겠습니다, 전하.”
“다른 자세한 사항은··· 특별히 이의는 없소. 다음 협의 후 추가적으로 논의 해 보기로 하지.”
“예, 전하.”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오.”
등을 돌려 내궁으로 돌아가는 주군의 뒤에서, 측근들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지더니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눈치를 살핀다.
당연히 조목조목 따지고 들 것으로 생각했던 자신들의 주군이 별다른 불만 없이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들은 엘랑키아 측에서 제시한 협상안이 생각보다 온건하다 생각은 하고 있었다.
엘랑키아가 원하는 것은 이미 그들이 실질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랄렌 강 서안의 확실한 영유권과, 원래 그 지역에 연고가 있던 그룬발트 가문들의 권리 포기, 그 외에는 약간의 지급금 정도였다.
게다가 용어도 ‘배상금’이 아니라 ‘지급금’이다. 거기 일부를 요정금으로 한다는 조건이 들어있을 뿐.
실질적으로 바뀌는 게 없을지라도 명백히 이쪽의 감정을 배려··· 혹은 쓸 데 없는 것으로 논쟁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의도가 들여다 보인다.
‘승자’로서 점령지 일부 쯤 요구할 수도 있다 생각했고, 군사력 약화 차원에서 무기와 군수품을 요구할 수도 있다 생각했으나···.
그런 조항은 전혀 없었다.
엘랑키아 측에서도 최대한 빠르게 협상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제스쳐를 보냈다··· 는 것이 내용을 검토한 중신 전원의 의견이었다.
···다만 입이 찢어져도 네프셀시엔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할 수는 없어 모두가 조용히 있었을 뿐.
그런데 놀랍게도, 네프셀시엔 또한 비슷한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혹은 무관심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실무자들 입장에서는 기쁘다면 기쁜 일이었다. 중신들은 서둘러 알현실을 나선다.
‘지상’의 선제후관 집무실로 가려면 또 끝도 없는 계단을 지나야만 하니까, 시간을 아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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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름스가 협상안을 받아들였다고요!”
나는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했다가, 내 목소리에 내가 놀라 다급히 입을 가리고, 다시 작은 소리로 말한다.
“폴름스가··· 협상안을 받아들였다고요?”
“허어, 에트 경도 그렇게나 놀라는 경우가 있군. 그처럼 놀랄 정도니 특별한 일이 맞기는 한 모양이야.”
일이 잘 진행되어 기분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내가 놀라서 기분이 좋은 것인지 엘랑키아 국왕 다고베르 2세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폴름스의 선제후는 성격이 더럽··· 나쁜 여자로 유명합니다. 공적인 회담 자리에서도 일부러 상대가 불편해 하는 것을 즐긴다는 소문이 있었거든요.”
“그렇다면 얼굴 맞대고 직접 회담을 진행했다면 물건너 갔을지도 모르겠군. 오히려 실무자들을 통해 진행해서 서로 건조하게 조건만 판단할 수 있었던 모양이네.”
“아마 그렇겠지요.”
···라고 대답하며 혹시 ‘폐하의 성격도 만만치 않습니다’로 들렸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을 했으나 다행히도 그러진 않은 모양이다.
“이제 양측의 마지막 조인만 남았네. 뭐 마지막에 가서 협상을 엎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지만···.”
“설마 그러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단순히 시간 끄는 게 목적이라면 좀 더 세련된 방법을 사용했겠지? 에트 경도 그리 생각하나?”
“그렇습니다.”
역시 다고베르 2세는 상당히 영특한 사람이다.
전장에서 발생한 일을 보고하면 그저 그때그때 단편적으로 인지하는 인간이 있나 하면, 머리속에서 가상의 지도를 그려 상황을 재구성하는 인간도 있다.
다고베르 2세는 명백하게 후자였다. 아마 외교 관계에서도 비슷하게 작용하는 머리를 가지고 있겠지.
요구와 수용 뿐 아니라, 시간과 인물, 발언과 제스쳐 하나까지 모두가 보유한 카드였다.
이게 어떻게 사용되고 받아들여지는지는 나보다 훨씬 잘 알고 있겠지. 아무튼 나는 군사를 담당한 왕실군의 참모일 뿐이니까.
“바뀔 여지는 있지만, 강화 조약이 발효되면 정보 통제는 불가능해지네. 정말로 방을 빼 줘야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지.”
국왕은 전에 없이 심각한, 웃음기는 전혀 없는 얼굴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