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555화 (555/556)

50-4. 폴름스 전투, 협정을 위한 암투

플로리안은 최근 급하게 베껴 쓴 것이 분명한 문서를 내밀었다.

일군의 최고 간부들이 모인 회의실에서 공개되기에는 다소 민망할 정도로 휘갈겨쓴 문장에, 때때로 대충 선을 그어 지우고 새로 쓴 모습도 보이는 그런 문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 내놓았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다는 반증이겠다.

“이건 상인들의 거래 기록을 베껴 놓은 것입니다. 엘랑키아 측에서는 말에 아주 높은 가격을 책정하고 있던 것이 확인됐습니다.”

그가 언급한 ‘매우 높은 가격대’의 상품은 다름아닌 군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축, 말이었다.

“전쟁터에서 바가지를 씌우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니겠소?”

“하지만 보십시오. 전시 가격이라 해도 정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평범한 짐말도 전시 가격의 2배인데, 군마는 3배에서 5배, 심지어 8배에 팔려 나간 기록까지 있습니다.”

“호오···.”

이런 전장에서 상인들이 취급하는 군마라고 해 봤자, 간신히 ‘군마’ 카테고리에 들어갈 정도로 썩 자질이 뛰어난 종류는 아니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말에 까다로운 엘랑키아가 아니던가. 그럼에도 ‘이 가격’에 군마를 매입하고 있었다.

실제로 평소라면 오히려 평균가보다도 싸게 거래될, 단점 있는 군마라는 점도 고려하면 그 가격 차이는 열 배 이상이 될 것이었다.

문자 그대로 부르는 게 값이었다.

그건 구매력이 있는 집단, 즉 엘랑키아 귀족 계급이 간절하게 군마를 사고 싶어한다는 반증이었다.

“저는 한가지 결론을 내렸습니다. 엘랑키아 군은 심각한 군마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플로리안에 말에 조용하던 회의실 내부가 잠시 시끄러워진다. 전장에서 모든 게 부족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예상보다 더 심한 정도일지도 모른다.

사실 플로리안으로서는 ‘병력 부족을 기동력으로 해결’하고 있던 엘랑키아 기병대가 큰 피해를 감수하고 있으리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다.

기수가 무사히 귀환해도 부상 입은 군마는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었으며, 확인 할 방법도 없었다.

만에 하나 이를 확인하기 위해 그룬발트 기병대를 대규모로 동원했다가 사실이 아니기라도 하면, 문자 그대로 끔찍한 결과가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형편없는 군마가 엘랑키아 진영에서 전시가의 8배, 평시의 10배가 넘는 가격에 팔리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전투에서 애마를 잃은 엘랑키아 기사들이, 절박하게 다음 전투에서 탈 말을 사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숫자가 결코 적지 않기에, 이런 말도 안되는 가격에도 물건이 팔려 나가고 있는 것이겠지.

“엘랑키아 군은 여전히 강하지만, 우리 예상보다는 강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플로리안은 마지막까지 신중했다. 절대로 ‘적이 예상보다 약하다’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래도 그룬발트 군이 가장 무서워하는 대상이 그 이름 높은 엘랑키아 기사대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확실히 이전에 비해서는 할만해졌다, 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 두렵던 엘랑키아 기사대가 이미 상당한 피해를 입은 지금··· 더욱 출혈을 강요해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엘랑키아 군’의 약화 뿐 아니라, ‘엘랑키아 왕국’ 자체에 타격을 입힐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엘랑키아 왕국 자체에 대한 타격이라고 함은 무슨 의미요?”

“엘랑키아 왕실군 기사대는 국왕이 특별히 선발한 정예일 뿐 아니라, 충성스러운 측근들이기도 하다 합니다. 즉, 안정된 엘랑키아 왕권을 수호하는 세력이기도 하다는 말이지요.”

“오호···.”

“즉, 전장에서 입은 엘랑키아 왕실군 기사의 손실은 국왕의 권력 자체를 타격하는 일이 됩니다. 이는 단순히 걸출한 기마 전사를 잃은 것 이상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공교롭게도, 플로리안이 주장하는 ‘적에게 회복 불가능의 타격을 입혀 군사력 자체를 약화시켜야 한다’는 논리는 다고베르 2세의 논리와도 많이 닮아 있었다.

다만 다고베르 2세의 경우, 병력의 절대량 자체를 줄여서 대군 동원 능력에 타격을 주겠다는 것.

플로리안의 경우는 중앙군의 기사대에 집중적으로 타격을 입혀 국왕의 권력을 줄이겠다는 미묘한 차이는 있었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국가를 장악한 강력한 군주인 다고베르 2세와 달리, 디오보르크 공작은 아직 제위에조차 오르지 못한 기반 없는 군주이기 때문에 나온 차이였다.

다만, 기반이 없다고 해서 잃을 것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철저하게 저희 총사령관이신 디오보르크 공작 전하의 ‘신하’로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내 입장에서? 좋소, 말해보시오.”

듣고만 있던 디오보르크 공작이 의외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외람되오나, 공작 전하께서 성공적으로 그룬발트의 황위를 이어 받으시려면 반드시 승리가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갑자기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이는 단순히 전쟁에서 이기고 지고를 논하는 것 이상으로 무거운 이야기였다.

때문에 플로리안은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엘랑키아 군을 몰아내고 폴름스를 해방한다’는 전쟁 목표 자체는,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이루어 질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라도 폴름스의 선제후가 이는 강화 조약을 통해 스스로 해결한 것이지, 디오보르크 공작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며 억지를 쓴다면 어쩔 것인가?

이럴 때, ‘확실한 승리’라는 카드를 가지고 있다면, 변덕이 심하고 성격도 좋지 않기로 유명한 폴름스의 선제후라 할지라도 다른 생각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게다가 정말 오랜만에 새로운 황제가 등극하는 것이다.

엘랑키아 군을 격멸한 전쟁 영웅이라는 타이틀은, 모든 게 새로운 신황제 치하의 제국에서 기틀을 잡아갈 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역시 위험한 발언이다··· 라고 만프레트는 생각했다.

오랜 전투와 불확실한 전황에 지쳐 있던 것 같았던 디오보르크 공작은, 잠시 잊고 있었던 것 같았던 제위에 대한 강한 욕망이 생각난 듯, 눈을 반짝거린다.

아마도 전쟁관의 후배 플로리안은 단순히 디오보르크 공작에게 잘 보이려고, 혹은 제국의 신규 통치자에게 한자리 얻으려고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제국의 다음 10년, 혹은 그 이상을 전략적으로 보고 한 발언일 가능성이 높았다.

다만 이는 디오보르크 공작 본인이나, 그 측근이 아닌 귀족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미지수였다.

예를 들자면, 이 자리에 있는 레트폴레 후작이나 펠쿠트 백작에게도 말이다. 일말의 불안감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동의하는 바이오. 본인 역시 이미 시작된 전쟁을 여기서 멈추는 것을 바라지 않으며, ‘다음 황제’의 통치가 안정되게 시작하기를 바라고 있으니.”

다행히도 레트폴레 후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고 나섰다.

타고난 무인인 그에게 새로운 제국에서의 권력에 대한 욕심이 전혀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제위가 공백이라 발생하는 많은 문제를 두고만 볼 수 없다는 것은 큰 문제였던 모양이다.

“저도 후작 각하와 같은 생각입니다. 무엇보다, 엘랑키아 놈들이 이기고 돌아가는 꼴은 절대로 못 보겠으니···.”

펠쿠트 백작 역시 선선히 동의한다.

그에게는 역시, 지난 전투에서 다양한 수단을 시도했으나 그 어떤 것도 먹히지 못하고 결국 퇴각해야 했던 굴욕이 깊은 상처로 남은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 생각은, 이번 전쟁에 참전한 귀족들이 전반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내용이기도 했고.

“너그러이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엘랑키아 군의 철퇴 순간’을 노리는 계획에 대해서 논의를 해 보려고 합니다···.”

다소 도전적으로 던진 수가 유효함을 확인한 플로리안은 조금은 편해진 얼굴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만프레트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상당히 기쁘고 마음이 놓였다.

왜냐하면 이는 단순히 주요 사령관급 인사들과 의견을 공유했을 뿐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이트리츠 전쟁관의 참모들이 세운 전략 기조가 주요 사령관에게 먹혀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었으니까.

물론 이를 통해 군사권을 장악한다거나, 수뇌부에 불필요한 영향력을 끼치고자 하는 것은 절대로, 결단코 절대로 아니다.

단지 앞으로 이 거대한 군대는 좀 더 일관된 움직임을 보이게 될 것, 효율적으로 싸울 수 있을 것이라는 철저하게 참모다운 목적 때문이었다.

다만.

만프레트와 플로리안은, 이번 회의를 위해 정보를 수집한 ‘변칙적인 작전’이 이상한 후폭풍을 가져 올 것이라는 것은 아직 깨닫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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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세른 전선을 책임지고 있는, 그로트 데르젠 폰 리고비츠 백작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얼마 전, 총사령관 디오보르크 공작이 각 전선의 사령관들을 소집해 회의를 진행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로트 백작 역시 엄연히 일군의 사령관이며 브레세른 전선을 책임지고 있었으나, 회의 참여 요청을 받지 못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은 아니었다. 자신이나 부장인 알트브란트 후작은 분명히 말하지만 ‘격’이 떨어진다.

그룬발트의 장군이라고 하면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레트폴레 후작이나, 남동부 변경 영주들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젊은 신성 펠쿠트 백작과 비교하면 이름값도 실적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역사와 군사에 대해 관심이 많은 그로트 백작 자신이기에 누구보다도 잘 안다. 객관적으로 말이다.

그렇다고 가문의 세력이 커서 동원할 수 있는 직속 병력이 많은 것도 아니다.

무리를 해야 천 명 단위를 동원 가능하고, 혹시라도 전리품 분배를 받지 못한다면 가문의 미래를 걱정해야 하는 소영주인 자신과는 다르다.

실제로 처음 브레세른 전선을 세두시온 공 대신 담당하게 되었을 때 상당히 제한된 권한만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중요한 사실을, 사후 통보조차 아니고 다른 일을 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다··· 라는 것은 역시 자존심이 상했다.

심지어 그 ‘다른 일’조차, 휘하 병력의 일부를 이웃 전선, 아룬하비크로 차출한다는 썩 기쁘지는 않은 일이었다.

원래 폴름스 선제후령을 섬기는 용병대장이랬던가. 자이트리츠 전쟁관의 쌍둥이 형제가 유능함을 칭찬할 정도의 중견 지휘관이었는데 아쉬운 일이다.

뭐 다행히도 중앙군에서 증원 병력을 약속받아 병력 규모 자체는 크게 바뀌지 않겠지만 그래도 휘하 병력을 빼가는 일에 기쁠 지휘관은 없을 테니까.

아무튼 격이 다름도 인정하고, 자신의 권한이 제한됨도 인정하지만··· 그래도 불만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와중, 그로트 백작을 괴롭히는 새로운 문제가 있었다.

“...이 자가 귀경들의 말을 도둑질했다고?”

“그렇습니다, 백작님. 군마가 벌써 적어도 세 건, 어쩌면 더 많이 훔쳤을지도 모릅니다!”

하급 귀족과 종사들이 뒤섞인 기병들은 화가 나서 얼굴이 시뻘겋다. 전장에서 말을 잃어버렸으니, 단순히 재산상 손해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들이 말 도둑으로 잡아온 이는 평범한 하급 병사였다. 말 주인들에게 많이 얻어 맞았는지, 얼굴에 피멍이 들어 엉망진창이었다.

“어째서 말을 훔쳤는가?”

“나무를 하러 갔을 때 만난 상인이 가, 값을 잘 쳐준다고 하여서··· 죽을 죄를 졌습니다요!”

“훔친 말은 어떻게 했는가?”

“상인 놈에게 팔았습니다요··· 바, 받은 돈은 그대로 가지고 있으니 살려만 주시면 곧바로 다시 사오겠습니다요!”

그로트 백작은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말도둑의 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 부대 기강이 이렇게까지 떨어졌나에 절망했기 때문이다.

“상인은 말 값을 얼마나 쳐 준다고 했나?”

“평소의 네 배를 쳐 준다고 하였습니다···.”

엘랑키아 군이 말을 평소보다 비싼 값으로 사고 있다··· 라는 소문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몰라도 빠른 속도로 퍼지고 있었다.

때문에 말 도둑질이 그룬발트 군 진영 전체에서 횡행하고 있었다.

워낙 대군, 그리고 여러 지역 출신들이 모여있다보니 통제하기가 더 힘들었다. 서로 얼굴이라도 잘 알면 이런 일이 없을 터인데.

그나저나 그로트 백작은 정말로 부하 병사를 가혹하게 처벌하고 싶지 않았다.

전장에 타의로 끌려 오거나, 자의로 왔어도 빚과 의무에 짓눌려 있는 불쌍한 인간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목숨을 거는 온당한 대가를 받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때문에 자기 휘하 병사들이라도 잘 챙겨주고 싶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말을 팔기 전에 적발되었으면 정상참작의 여지라도 있겠으나, 이미 팔아버린 이상 답은 없었다.

“네가 저지른 잘못은 도저히 구제할 방도가 없다.”

“사, 살려주십시오!”

“다만, 살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로트 백작은 참모 장교를 둘러보며 말한다.

“이 자를 데려가 무슨 수를 써서든 말 도둑질을 종용한 상인을 찾아내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백작님.”

마음 같아서는 상인과의 접촉을 금지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폭동이 일어날 것이다. 보급으로 부족한 물건을 대주는 것이 바로 종군 상인들이었으니까.

그렇다면 그들 중, 죄를 저지른 자라도 적발해야 할 것이다.

죄를 공으로 덮는다면, 교수형이 마땅한 말 도둑도 살 길이 생기는 것이겠지.

다만 걱정되는 것은, 앞으로도 엘랑키아 군에 말을 팔고자 위험을 무릅쓰는 상인이 늘어날 것이란 것이다.

이는 단순히 말도둑의 문제가 아니다. 상품이 자체적으로 움직이는 말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식량이든 화약이든 무기든, 다른 상품이라면 무게가 있으니 얼마든지 상인을 적발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어둠에 몸을 숨기고 말을 팔기 위해 잠입하는 상인들을 막을 수 있을지.

벌써부터 다음 전투가 걱정되는 그로트 백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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