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3. 폴름스 전투, 협정을 위한 암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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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랑키아 왕국과 ‘폴름스 선제후령’ 사이의 비밀 회담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폴름스 포위망 밖의 군대, 디오보르크 공작 휘하의 ‘신성 그룬발트 제국군’ 역시 나름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느 늦은 밤. 전투 부대는 일부 불침번을 제외하면 장교부터 병사까지 단잠에 빠져 있을 시간.
하지만 다음 방침을 세워야 할 최고사령부는 오히려 활발하게 논의를 시작할 시간이다.
정확히는 이 시간이 아니면 사령부 멤버들이 다 모이기가 쉽지 않다. 넓디 넓은 폴름스 포위망에서 각자 전방 지휘관 역할을 하는 이들을 소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회의에서 준비되었던, ‘군사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접근’에 대해서도 무언가 결론이 난 모양이었고 말이다.
“폴름스 선제후령은 이 전쟁에서 빠지는 것으로 감안하고, 새로운 전략을 세우는 것이 옳다 생각합니다.”
이번 전쟁의 본질과 상식을 뒤흔드는 충격적인 말을 한 것은, 아룬하비크 방면을 책임지고 있는 플로리안 도프 폰 자이트리츠였다.
대담한 발언에 놀란 다른 참석자들과 달리, 아무 반응 없이 경청하고 있던 총참모장 만프레트 그로블 폰 자이트리츠는 묵묵히 플로리안의 얼굴이 좋아졌다 생각한다.
아룬하비크 방면 사령관은 전임인 브라우나인의 세두시온 공이 크게 패하고 포로로 잡힌 이후, 아무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세두시온 공의 참모였던 플로리안이 사령관으로 보임하게 된 상황.
아마도 일은 더 많아졌을 것이다. 세두시온 공의 참모 조직을 그대로 사용할 수도 없었을 테고, 거의 절반 밖에 안되는 병력으로 전선을 유지해야 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플로리안은 활기가 넘치는 것 같다.
아무리 유능하고 재기 넘치는 청년 장교라 해도, 무능하고 제멋대로인 상관을 섬기기는 힘든 일이라는 것일지.
혹은, 그 역시 전장에서 적장과 지혜를 겨루며 군을 움직이는 것이 천직인 참모라는 것인지.
아마도 둘 다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지금 아룬하비크 방면은 ‘가장 무탈한’ 전선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 차례에 걸쳐 격전을 벌였던 폴름스 전투 초기를 생각해보면, 현재의 그룬발트 제국군은 ‘더 강하다’라고 단언하기는 어려울지 몰라도 ‘더 효율적이다’라고는 분명히 이야기 할 수 있었다.
사령부의 권위가 군을 구석구석 장악하고 있었고, 하나의 목표를 위해 싸우는 연합군으로서 체계가 갖춰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장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공격 시작 날짜가 정해져 버렸기 때문에, 허겁지겁 미진한 상황으로 공격을 시작했던 사흘 째의 전투가 아쉽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무모한 일정을 강요했던 주군, 디오보르크 공작을 원망할 수도 없었다. 그저 참모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밖에.
아무튼 세두시온 공 휘하에서 앓아 눕기까지 했던 그는, 지금도 밤낮 없이 격무에 시달리고 있을 테지만 훨씬 밝고 또렷한 목소리로 자기 생각을 말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내용은 말투에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울 정도로 극단적이다.
폴름스 선제후령에서 사절을 보내 아군에게 요구한 내용은 ‘이대로 전황이 바뀌지 않는다면 독자적으로 강화하겠다’ 라는 것.
자신들을 위해 제국 전역에서 모여 든 연합군의 뒤통수를 치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었다.
비록 단기간에 포위망을 풀지는 못했으나, 디오보르크 공작 휘하의 연합군 입장에서 보면 분통 터지는 일이다.
단독 강화라고는 하지만, 폴름스 측이 기세 등등했던 엘랑키아와 적당한 선에서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것은 바로 성 밖의 쟁쟁한 대군 덕이 아니던가!
만약 제국의 나머지가 폴름스가 당하건 말건 방치했다면, 막강한 엘랑키아 군의 화력이 벌써 폴름스의 성벽을 무너뜨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폴름스가 엘랑키아와 강화한다면 이는 우리가 더 싸울 명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오?”
조심스럽게 상식론을 말한 것은 슈뵈켄 전선의 펠쿠트 벨톤 폰 비덴누벨 백작이다.
전선 사령관들 중 가장 젊은 그는 힘든 시간을 겪으며 일군을 이끄는 재능을 점점 갈고 닦아가고 있었다.
“이번 전쟁의 시작은 엘랑키아 왕국의 폴름스 선제후령 침공이 맞습니다만, 현 상황에서는 신성 그룬발트 제국 전체가 당사자가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일을 이렇게 크게 벌려 놓고, 자기들끼리 화해했다고 쏙 빠져버리는 꼴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겠소.”
플로리안의 단호한 해석에 맞장구를 친 것은 호펜로이테 전선의 레트폴레 아티오크 폰 벤셀샤프 후작이다.
사흘 째 격전에서 엘랑키아 기사 대군을 맞아 전멸 위기에 몰리도록 싸우다가 본인까지 부상을 입었던 노장의 눈에서는 시퍼런 분노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실제로도 전쟁의 관례상, 폴름스가 화해했다면 이는 폴름스와 엘랑키아의 화해일 뿐이다.
그룬발트의 나머지 참전자들과 엘랑키아 사이의 문제는 따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게 협상이 되든 전투가 되든지 간에.
“그건 그렇고 나도 묻고싶소. 플로리안 경, 그럼 폴름스와 엘랑키아 사이의 강화가 성립될 때 까지 우리는 손을 놓고 있자는 것이오?”
“아닙니다, 레트폴레 후작님. 좋은 기회가 생긴다면 언제든 이를 살리면 됩니다. 다만, 폴름스의 강화를 막겠다는 생각으로 시간이 쫓겨 무모하게 전투를 서두르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흐음··· 알겠소이다.”
플로리안의 설명에, 레트폴레 후작은 납득했는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프레트는 혹시라도 플로리안의 발언, 특히 ‘시간에 쫓겨 무모하게 전투를 서두른’ 부분이 디오보르크 공작을 불쾌하게 하지는 않을까 조금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아는지 모르는지,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이 자리의 모두는 기본적으로 플로리안의 의견에 공감하고 있었다.
딱히 전투를 하기 싫어서 대치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도무지 공격을 할 상황이 보이지 않았다.
현재 그룬발트 군은 장교 병사 할 것 없이 매우 지쳐있었다. 신체적으로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말이다.
두 차례의 대규모 공세, 거기에 브레세른에서 당했던 중규모 반격, 더해서 수많은 소규모 조우전까지.
그렇게 패배, 혹은 열세가 누적되면서 말 그대로 정신적으로 찌들어 버린 상태였다.
지금이야 크게 표출되지는 않고 있지만, 그나마 남아있는 승리에 대한 기대까지 사라진다면 하나의 군세로서 성립되기도 어려운 상황이 올 테지.
차라리 엘랑키아 군이 적극적으로 공격이라도 해 주면, 이를 받아치거나 역공하면서 분위기 반전이라도 노릴 수 있겠지만···.
엘랑키아 군은 좀처럼 먼저 움직이려 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소규모 조우전에서부터 차근차근 전과를 쌓아가며 반전을 노리는 것도 시도해 보았지만···.
이 또한 어렵다. 엘랑키아 군은 소위 말하는 ‘흘리는 병력’이 거의 없다.
그만큼 병력 통제가 잘 되고 있었고, 신중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도저히 지난 전투에서 좌익을 거의 비워 버리면서 기사대를 한 지점에 집결시켰던 극단적인 전술을 썼던 인물이 지휘관인 군대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승리를 위해 그만한 위험을 뒤집어 쓸 과감한 인물이 대치 상황에서는 이처럼 냉정할 수 있다니.
그런 적을 앞에 두고 전술가로서 먼저 움직이는 것이 꺼려지는 것은 인지상정이었다.
“강화가 이루어진 후, 적이 폴름스 포위를 풀고 귀국하는 때를 노리겠다··· 플로리안 경의 생각은 이것이라 봐도 되겠소?”
“정확히 그렇습니다, 만프레트 경.”
자이트리츠 전쟁관의 선후배 관계인 만프레트와 플로리안은 그렇게 시선을 교환하며 의견을 확인한다.
딱히 두 사람이 사전에 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명석한 두뇌가 효율적이고 현실적인 답을 찾다 유사한 결론을 내렸다는 것은 특별한 일은 아니다.
오히려 나름 각자의 판단에 강한 확신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고 말이다.
물론 추격전은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엘랑키아 군 역시 그에 상응하는 준비를 갖추고 있겠지.
하지만 적어도 요새화 된 마을을 거점으로 단단히 지키고 있는 엘랑키아 군의 방어 진지에 정면 공격을 하는 것 보다는 나으리라.
“그럼··· 만약에 그 상황을 기다린다면 아군의 전략적 목표는 무엇이 되는 거요? 나는 병사들에게 무엇을 위해 싸우라고 말하면 되겠소?”
펠쿠트 백작의 물음은 날카롭고도 본질을 논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야 ‘포위당한 폴름스의 해방’ 정도가 전쟁의 목표라고 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화해든 항복이든, 폴름스가 자체적으로 포위를 풀고 전쟁에서 빠진다고 한다. 그럼 ‘그것’을 목적으로 모인 그룬발트 대군은 어떡해야 할까.
목표가 완수 되었으니, 본국으로 돌아가는 엘랑키아 군을 그저 지켜보고만 있는 것이 답이 아니라는 것은 명확했다.
여기 대답한 것은 역시 플로리안이다. 그는 아마도 저 남동부 전선에 머무는 동안 꽤 많은 생각을 하고 온 것 같았다.
“그 점에서 대해서는 세가지 측면에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우선 첫번째로, 이미 대진하고 일전을 치룬 입장에서 목표를 달성한 엘랑키아 군이 무사히 돌아가는 꼴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동의하지 않을 수 없군.”
“나 역시 마찬가지요.”
이건 현재 그룬발트 군문에 있는 자라면 누구나 할 수 밖에 없는 생각이리라.
“두번째로, 신성 그룬발트 제국 입장에서 ‘엘랑키아의 군사력’ 자체에 타격을 입힐 수 있을 때 입혀 두어야 한다 생각합니다. 가급적이면 치명적이고, 회복이 오래 걸릴 피해를 말입니다.”
“치명적이고 회복이 오래 걸릴 피해라··· 그건 무엇을 말하는 거요?”
“며칠 전, 총사령부에서 계획했던 ‘군사적이지 않은’ 정보 수집 방안을 기억하십니까?”
“물론 기억하오. 하지만 그건··· 적에게만 유리한 일이 아니었나 싶어서 다소 꺼려졌소만.”
플로리안이 말한 정보 수집 방안이란, 바로 상인들을 통과시키는 것이었다.
현재 그룬발트 군이 심혈을 기울여 하고 있는 포위 작전 중 하나가, 허가받지 않은 군수 납품 상인들을 폴름스 주변에 접근하지 못하게 통제하는 것이었다.
이유는 당연히 엘랑키아 군이 ‘안전하게’ 물자를 확보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다.
이미 보유하고 있는 물자가 얼마나 충분한지는 몰라도, 더 이상 물자가 축적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슬그머니 상인들을 못 본 것처럼, 치밀한 계획 하에 포위망 일부를 뚫어 주었다.
그렇게 포위망 내부로 들어간 그룬발트 상인들은 통상적으로 엘랑키아 군과 거래를 마치고 돌아왔다.
그리고 플로리안은 돌아온 상인들을 불러 그들이 가지고 들어온 정보를 수집, 철저하게 분석했다.
적진에서 상인들이 벌어들인 수익은 절대 손을 대지 않겠다고 했기에, 상인들은 성실하게 질문에 대답했다.
플로리안이 바랐던 정보는 상인들이 오가면서 보고 느꼈을 엘랑키아 진영 내의 분위기나 병력 배치 따위가 아니었다.
어차피 전문적으로 훈련받지 않은 상인들이 수집할 수 있는 정보는 한계가 있으며, 엘랑키아도 바보가 아닌 이상 알아서 통제했을 테니까.
다만 플로리안이 철저하게 분석한 것은 상인들이 판매한 상품의 품목과, 그것이 팔려나간 ‘가격’이었다.
예상대로, 일부 품목이 ‘과도한’ 가격에 팔려나간 것을 확인했다.
물론 전쟁터에서 물가가 비싸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흉년이 들면 식량 가격이 오르고, 극심한 한파가 몰아치면 땔감의 가격이 오르듯 수요와 공급에 따라 가격이 바뀌는 것은 당연하다.
하물며 전쟁터는 거대한 군대가 생산적인 행동은 하지 않고 오로지 소비만 하는 장소이며, 목숨이 오가는 위험이 상존하는 곳이다.
게다가 물건을 구입하는 수요자들은 필요량을 채우지 못하면 폭동이 일어날지 모르는 보급관이나, 당장 내일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군인들이다.
그러니 상인들이 어지간히 바가지를 씌운다 한들, 대안이 없는 한 군소리 없이 구매하게 마련이다.
이를 ‘전시 가격’이라고 하며, 평소보다 훨씬 높은 가격대가 형성된다.
하지만 그래도 정도가 있었다. 과도하게 비싼 가격은 군인들의 분노를 일으키기 쉬웠으며, 당장 내일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군인들의 분노를 산 상인의 운명은 뻔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 플로리안은, 수집한 가격 자료에서 유난히 높아 보이는 가격대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을 쾌재를 불렀다.
아마도 이것이, 현재 엘랑키아 측에서 절박하게 필요한 물건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