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2. 폴름스 전투, 협정을 위한 암투
‘요정금이란 엘프들, 즉 고대 혈족의 야금 기술로 제련한 순수한 금, 그리고 그걸로 만든 금괴를 의미합니다.’
다고베르 2세가 참모인 에트 경에게 들은 이야기는 이러했다.
정확히 어떤 과정을 통해 제련되는지는 알지 못한다고 한다.
다만 여러개의 기프트가 동시에 중복사용되는 것은 분명한 것으로 보이며, 때문에 한 명은 단 하나의 기프트밖에 가지지 못하는 인간은 절대로 만들 수 없다.
심지어 엘프 사회에서도 요정금을 가공하는 기술은 실전된 것으로 보인다 한다.
엘프 중에 대장장이를 직업으로 삼는 자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 수는 매우 적고 그나마 있다 해도 일부 무기나 장식품, 제의 용품에 집중한다고 하니 말이다.
통상 집단을 구성하는 인원 수가 줄어들고, 지식과 기술이 끊어지기 시작하면 비실용적인 기술부터 사라질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엘프 사회는 반대인 모양이다.
사실 엘프들은 일종의 고위 자문역이나 제사장 집단을 이루니, 그게 그들에게는 가장 실용적인 기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요정금은 문자 그대로 극도로 순수한 것이 특징이다.
고대 혈족이 아닌 어떤 종족도, 인간은 물론 심지어 야금술에는 최고라 하는 드워프 조차도 이처럼 순수하게 금만 뽑아 낼 수는 없었다.
요정금이 특별한 것은, 단지 순수한 금이기 때문은 아니다.
단지 그것 뿐이라면, 무수한 노력과 연구를 통해서 적어도 비슷하게 만들어 낼 수는 있을 테니까 말이다.
결코 따라하지 못하는 비전은 그 다음 단계에 있다.
지금은 실전된 고대의 방식에 의해 순수한 금을 뽑아낸 엘프 대장장이는, 여기에 마찬가지로 실전된 기프트로 ‘순수성 보존령’ 이라는 제약을 건다.
이를 통해 희미한 붉은 광택이 금괴를 감싸게 된다.
이는 이 금괴가 오로지 요정금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제조된 후 결코 훼손되거나 변형된 적 없음을 증명하는 주술적인 보증이다.
‘순수성 보존령’은 금괴에 가해지는 가벼운 충격이나 훼손 시도, 자연적인 풍화작용을 막아준다.
즉, 통상적인 금괴의 무게와 순도를 인증해주는 권력기관의 보증서와 본질적으로는 같다.
다만 다른 점. 보증서는 위조될 수 있고, 처음부터 거짓일 수 있다.
하지만 순수성 보존령은 결코 조작될 수 없으며 새로 만들어 낼 수 없다.
즉, 요정금은 역사적 유물이나 골동품이라는 측면에서도 가치가 있고, 특유의 붉은 광택은 보기에도 아름다우며, 고대 아란 제국이나 엘프 지배 계급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매우 값진 물건이다.
이런 중요한 점을, 어째서 다고베르 2세나 엘랑키아의 귀족들은 알지 못했을까.
‘사실은 알고 계실 겁니다. 고대에 엘프들의 손에 의해 벼려진 순수한 금에 대한 전설은 동화 형태로 엘랑키아에도 많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확실히 에트 경의 말대로 였다.
엘랑키아에는 수행을 떠난 기사가 요정금으로 된 성배를 되찾는 이야기가, 주디칼리에는 파산한 상인이 요정금화가 가득한 주머니를 찾는 이야기가 있다 한다.
다만 그게 존재하는 물건에 대한 은유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고, 그게 실제로 엘프들이 특이하게 가공한 금괴일 것은 더더욱 몰랐지.
어쨌든, 요정금이 무척 값지고 의미 있는 물건이라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폴름스와의 협정에서 이것을 왜 요구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좀 더 설명이 필요했다.
단순히 보기 좋고, 예쁘기만 한 금덩이라면 엘랑키아 왕실 입장에서는 평범한 금괴와 크게 다른 점은 없지 않던가?
‘요정금은··· 그룬발트의 모든 선제후 가문이 보유하고 있는 귀중한 자산입니다. 그리고 일부 고위 명문가도요.’
‘그렇다 해도 프리미엄이 붙었을 뿐, 그냥 금덩이가 아닌가?’
‘이는 가문 간의 거래, 자금 결제에도 사용됩니다. 당연히,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여기서 자금 결제란, 단순히 금화와 금괴를 주고 받는 의미의 결제가 아니다.
가문이 가진 요정금은 금고 밖으로 나오지 않으며, 이에 기반한 신용거래의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즉, 담보이자 기준이 되며 요정금괴 X개 만큼의 가치를 가지는 물건을 구매하면 향후 그만큼의 가치를 가지는 물건으로 돌려준다는 것.
당연하지만, 이런 특별한 방식과 통화로 주고 받는 거래가 평범한 물건일 리는 없었다.
에트 경은 여기에 대해서는 자세히 이야기 하지는 않았으나, 다고베르 2세는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다.
‘요정금은 대부분 선제후 가문의 차지이지만, 그렇다고 선제후의 금고 밖으로는 전혀 나가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가문들도 가지고는 있다는 말이오? 인간들도?’
‘그렇습니다. 그룬발트의 역사는 매우 오래 되었으니까요. 가문과 가문의 신뢰나 포상의 상징, 급박한 상황에서의 금전 거래 등등. 유통되는 요정금도 적지는 않습니다.’
‘짐으로 하여금 그걸 모아라··· 라는 것이로군.’
소량일지라도 차근차근 모으면 언젠가 미래에, 어쩌면 다고베르 2세 본인이 아니더라도 후대의 엘랑키아 국왕에게 유용하게 쓰일 날이 올지도 모른다.
지금도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물건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어쩐지 설득력있게 느껴졌다.
숫자가 제한되어 더 이상 세상에 늘어날 리 없는, 특유의 가치가 있는 ‘재화’로서의 요정금이라.
뭐, 용도가 애매하다고 한들 최소한 ‘귀금속’의 가치는 있겠지. 어쨌거나 엘프 장인이 주물럭거린 황금 덩어리가 아니던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다고베르 2세는 한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에트 경은 엘랑키아 국왕을 섬기는··· 정확히는 봉신의 봉신이지만, 아무튼 트랑카벨 자작의 대리 사령관으로서 정작 본인은 엘랑키아와 아무 관련 없는 사람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의 충성심이나 역할을 의심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엘랑키아 전통 귀족들의 눈치를 봐서 띄워주지 못할 뿐, 이번 전쟁의 최고 공신은 에트 경이 아닐까··· 라는 생각까지도 들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런 조언까지 해주는 것은 좋은 의미로 선을 넘었다 생각되었다.
아니, 어째서 이렇게까지 충언을 해 주는가? 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이다.
솔직하게 속내를 터놓고 물어보자, 에트 경은 조금 망설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순순히 대답한다.
‘그룬발트 제국의 선제후 제도는 없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이다.
어떤 물음에도, 시간이 필요할 지언정 언제나 명쾌한 대답을 돌려주는 에트 경이다.
그런데 그가 이처럼 자신의 주관을 이야기하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
항상 에트 겨이 말해온 것은 대체로 질문에 대한 답, 그리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었지.
그런 에트 경이 말한 내용인 만큼, 평소에도 생각해 오던 중요한 주관일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아마도··· 옳으냐 그르냐 라고 하면 옳은 쪽이리라. 에트 경에게도, 엘랑키아 왕국에게도 말이다.
다고베르 2세는 또 한 가지 허심탄회한 질문을 했었다.
바로 주군인 트랑카벨 가문에도 같은 조언을 했느냐··· 라는 질문이다.
나름 허를 찌른 질문인지, 에트 경은 조금 놀란 듯 보였으나 역시 선선히 대답한다.
‘트랑카벨 가문에게도 똑같은 조언을 한 바 있습니다. 다만 선제후 가문을 통하지 않고서는 대량으로 구하는 것은 어렵기에, 시장에 풀린 요정금을 소량 보유하고 있을 뿐입니다.’
대충 예상대로였다.
역시 빈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이었다. 오히려 더욱 믿음이 간다.
아마 완전히 속내를 털어 놓은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숨긴 부분이, 악의를 가지고 국왕 자신과 엘랑키아 왕실을 속이려는 것은 아니리라는 강한 확신 또한 들었다.
그룬발트 선제후들 외에, 요정금을 유의미하게 대량으로 보유한 집단이 엘랑키아 왕국과, 그 신하인 트랑카벨 뿐이라면 이는 긍정적인 일이다.
굳이 한쪽으로 몰아 줄 필요도 없었다. 언젠가 가치를 가지게 된다면, 그저 서로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 만으로도 좋았다.
특별한 자들이 특별한 거래를 위해 사용하는 특별한 재화.
그런데 당사자들 외에, 그 재화를 대량으로 그것도 비밀리에 보유한 누군가가 있다···.
그 사실이 언젠가 폭로하게 된다면, 그 가치는 분명 요동치리라.
이를 평범한 국가 경제의 부침이나, 특정 물품 가격의 오르내림으로 설명할 수는 없겠지.
아마도 그런 날이 온다면, 요정금의 가치는 오르면 올랐지 결코 내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포포로 잡은 세두시온 공이 브라우나인 선제후령의 후계자였던가. 그의 몸값으로도 요정금을 요구하는 것이 좋다 생각하시오?’
‘금액에 따라서는··· 요구에 응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흐음, 요정금을 모으고 있다 사방팔방 소문을 낼 수는 없으니, 요구를 꺼낼 때는 신중해야 하겠군.’
‘예, 폐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이 에트 경의 조언은 아마도 그룬발트 제국 자체를 타격하는 힘은 되지 못한다.
그렇지만 제국을 사실상 지배하는, 엘프 선제후들이 인간 황제를 뽑는 기묘한 질서를 무너뜨리는 데에는 도움이 될지 모른다.
아직 명확한 활용처가 생각이 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고베르 2세는 폴름스 선제후와의 협상에서 요정금을 만드시 요구하겠다고 결심했다.
무엇보다, 상대가 어떻게 반응할지가 궁금했다.
###
“갑자기 엘랑키아 군 정찰대의 움직임이 늘어났습니다. 약 2시간 전, 호펜로이테 부근에서 조우전이 있었으나··· 아군이 철수했습니다.”
“그렇군. 알겠네.”
상세한 전투 결과는 알아봤자 머리만 아프다. 그래도 철수했다니 치명적인 패배는 아닐 것이다.
만프레트 그로블 폰 자이트리츠는 엘랑키아 군의 다음 행보를 예상하기 위해서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모든 면에서 엘랑키아 군의 공세가 예상되고 있었다.
브레세른 전선에서 있었던 성공적인 공세.
최근 활발해진 정찰대의 움직임.
전방 부대로 이동하는 것으로 추측되는 물자까지.
하지만 또 다른 정보, 폴름스가 단독으로 엘랑키아와 강화를 맺으려 한다는 소식이 발목을 잡는다.
마지막 정보가 목숨 걸고 도시를 빠져나온 전령에 의해 디오보르크 공작에게 전해졌을 때, 굉장히 많은 논의가 있었다.
가장 젊은 사령관인 펠쿠트 백작은 적극적인 공세를 하여 폴름스가 허튼 생각을 못하게 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지난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레트폴레 후작은 폴름스가 위험과 고난을 감수하려 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이유가 없으니 철수하자 주장하였다.
총사령관이자 결정권자인 디오보르크 공작은 생각보다 어려운 전투에 지쳐버린 것 같았으나, ‘황제가 될 기회’를 버리고 싶지는 않아 보였고.
물론 이 정도의 기밀 정보를 외부에 유출할 수는 없었으니, 여기에 대해 알고서 의견을 낼 수 있는 사람의 숫자는 제한되었지만···.
그런 와중에도 의견이 갈리는 것은 기이할 정도였다.
한편으로 현재는 전장 반대편에 있어 활발하게 의견 교환은 할 수 없지만, 만프레트가 누구보다도 신뢰하는 후배 플로리안의 의견이 조금 특이했다.
‘차라리 강화가 맺어지도록 놔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고향으로 돌아가는 엘랑키아 군을 습격하는 것이, 지금 요새화 된 마을에 틀어박힌 것을 상대하는 것 보다 쉬울 것 같습니다.’
확실히 플로리안 다운, 틀에 박히지 않고 자유로운 생각에서 나온 결론이었다.
이미 이겼다는 생각에,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간다며 들뜬 마음을 가진 적이 약해지기는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만프레트 본인의 판단이었다.
모두의 의견이 일리는 있었다. 그리고 상황이 나쁘기만 하지는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 엘랑키아 측이 정말 여유가 있다면 강화라는 어정쩡한 마무리에 응하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으니까.
한편으로는 강화에 응한 현재 상황 자체가 ‘쇼’이며, 혹시라도 그룬발트 측에 ‘준비 안된 공세’를 도발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함도 있었다.
불쾌하고 부끄러운 일이지만, 최근 그룬발트 측은 계속해서 상대방의 심리전에 말려들고 있었으니까.
안타까운 것은, 정찰대를 적극적으로 보내 정보를 수집하려고 한 타이밍에 상대 역시 정보를 차단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제 다시 포위망 안의 엘랑키아 군이 어떤 움직임을 하는지 파악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무언가 숨기려 한다’는 행동 자체도 정보였다.
마치 깊은 호수의 수면을 내려다 보는 것 같았다. 저 잔잔한 표면 아래에는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까.
군사적으로 계속 깨지고 있다면, 군사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접근해보기로 했다.
이것은 잔잔한 수면에 던지는 돌 하나가 될 것이며, 이게 일으킨 파문에 적은 어떤 형태로든 반응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