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8. 폴름스 전투, 열일곱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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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름스 선제후령의 중신들은 오랜만에 도시의 높은 선제후 내궁에 오르느라 가빠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연리목 세계수의 바로 아래쪽, 가장 깊고도 높은 장소로 이르기 위해 밟아야 할 계단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다.
제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황제를 뽑을 권한을 가진, 고대 혈족 엘프들이 지내는 거주구와 직접 연결된 내궁은 따로 허락 없이는 들어올 수 없는 장소이다.
때문에 통상적으로는 들어갈 권리도, 이유도 없었다.
그들이 섬기는 주군, 폴름스의 선제후 네프셀시엔은 주로 더 아래층에 위치한 본궁에 머물렀으며, 알현실도 집무실도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들어, 그들이 주군이 본궁에 내려오는 일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엘랑키아 군이 침공했을 때만 해도 오히려 아예 살림을 옮겨오다시피 하여 하루에도 몇 번 씩이나, 밤낮 없이 보고를 요구했었는데 말이다.
아마도 그 시점은 사흘째 벌어졌던 대격전이 아군의 패배로 끝난 이후, 더나아가 대략 포위가 시작된지 열흘 쯤 되던 날 부터였다.
기묘하게도, 네프셀시엔은 자신이 한가운데에 있는 이 거대한 전쟁에 대해, 더 이상의 관심을 잃은 것 처럼 보였다.
전황에 대해 물어오는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물론 그 후로 제대로 된 교전이 없어 특별히 보고할 일도 없긴 했지만···.
물론 폴름스 운영에 필수적인 업무까지 방치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성격이 급한데다가 까다로운 엘프라 섬기기 힘든 주군이었으나, 최소한 암군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던 것이, 내궁으로 돌아가 며칠 씩 내려오지도 않는 일이 반복되더니 이제는 중신들을 아예 본인의 처소로 부르기에 이르렀다.
그게 부담스럽다거나, 딱히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것은 아니다.
물론 많은 계단을 오르고 까마득하게 굽이지는 성벽길을 따라 걷는 것이 고된 일이기는 하나, 이는 전혀 다른 문제였으니까.
다만 평소의 네프셀시엔이었다면 하지 않았을 행동이다, 라는 점이 중신들의 마음 속 불안감을 키우고 있었을 뿐이다.
그녀는 내궁과 거기에서 이어지는 엘프 거주구에는 아무리 신하라 해도 인간을 들이는 것을 싫어하는 것으로 보였으니까.
이를 증명이라도 하는듯, 중신들을 안내한 이들은 인간 근위병이 아니라 평소에는 보기 드문 무장한 엘프 기사였다.
중신들이 걷고 있는 복도 천장과 벽에 새겨진 아름답고 복잡한 문양들은 도시의 다른 지역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것들이다.
그 장식들은 아마도, 신성 그룬발트 제국이 생기기도 전에 이 땅에 세계수를 심고 가꾸기 시작한 고대 혈족 군주들의 상징이었을지도 모른다.
한참 전쟁 중이라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을 정도로 아름답고 고요한, 비현실적인 장소.
창문이 지나갈 때, 슬쩍 고개를 돌려 아래를 내려다본다.
제국 전체에서도 손꼽히게 거대한 도시인 폴름스 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사람에 따라서는 아찔함을 느낄 수도 있으리라.
얼마나 높은 장소에 올라왔는지가 실감되는 광경이었다.
여러 복도와 방을 지나고 몇 차례나 계단을 오르내린 후, 중신들은 어느 방 앞에 도착했다.
그들을 안내한 엘프 기사들은 말 없이 고개만 꾸벅 숙인 후, 화려하기는 하지만 불필요하게 거대하지는 않은 문을 양쪽으로 열어 들어가기를 권한다.
딱히 설명은 없지만, 이곳이 주군의 내궁 집무실, 혹은 알현실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전황에 대해 보고하시오.”
등원 인사고 뭐고 없었다. 집무실에 들어간 중신들이 고개를 숙이기가 무섭게 네프셀시엔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원래 주군은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그저 고개를 조아리며 최소한의 예의를 표할 뿐, 곧바로 보고를 준비한다.
“최근, 폴름스 성벽에서도 보일 정도로 거대한 화재가 있었다고 들었소. 관련해서 얻은 정보가 있소?”
“외부에서 온 구원군이··· 또 한번 패배한 모양입니다.”
“허···.”
조심스러운 보고에, 네프셀시엔은 기가 차다는 듯 한숨을 내쉰다.
“확실한 정보라 할 수 있겠소?”
중신들은 눈치를 보며 바짝 긴장한다.
현재 폴름스에는 ‘확실한 정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성벽과 감시탑의 경비병들이 직접 눈으로 확인한 정보를 제외하면··· 능동적으로 수집할 수 있는 정보는 없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벌써 열 차례나 넘게, 수십 명이나 되는 전령과 첩보원을 포위망 밖으로 파견했었다.
그리고 적어도 그 중 일부는 무사히 적진을 통과해 빠져나갔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확인하기도 했었다.
사전에 약속된 발광 신호나, 다른 특정한 신호를 통해서 무사히 밖으로 나간 것 자체는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가는 데 성공했을 뿐, 도시로 돌아온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정보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 내부에서는 정말 엄청나게 많은 헛소문이 돌고 있었다.
초반에는 유난히 ‘외부 정보’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자들을 붙잡아다가 심문해 보기도 했다.
불확실한 정보를 퍼뜨린 것을 처벌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혹시라도 외부로 통하는 연락망이 정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허풍쟁이이며, 남의 관심을 받으며 우쭐대기를 좋아하는 얼간이일 뿐이었다.
결국 그 외에 외부로 통하는 정보의 통로라고는···.
“...외람되오나, 엘랑키아 왕국에서 보낸 사자가 전해준 정보이옵니다.”
“하···.”
또 한 번, 네프셀시엔의 깊은 한숨 소리가 긴장한 채로 주군의 분노를 감당할 걱정 중인 중신들의 머리 위로 퍼져간다.
하지만 다행히도 불호령은 떨어지지 않는다.
“그럼 귀경들에게 묻겠소. 그 외부 정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오?”
“...상당 부분 사실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하. 감시병들이 실제로 군사 행동을 관측했고, 불이 난 곳이 아군 진영이 있던 곳이라 하옵니다···.”
“그것 뿐이오?”
“그리고··· 엘랑키아 왕국의 사자가 증거라면서 명령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명령서?”
“디오보르크 공작 명의로 발령된··· 브레세른 마을을 포위 공격하라는 명령서입니다. 주둔지를 불태우기 전, 엘랑키아 병사들에게 노획되었다고 합니다.”
심하게 구겨지고 검댕과 흙이 묻어 더럽혀진 종이는 시종의 손을 통해 선제후의 손으로 전달되었다.
심하게 구겨지고 검댕과 흙자국이 남았으며, 화약 냄새까지 물씬 나는 문서는 그럼에도 일군의 사령관이 사용할 법한 멋진 격식을 갖추고 있었다.
장인이 만든 얇고 질기며 매끄러운 종이에 금박을 섞은 멋들어진 글자는 정작 대단한 내용을 다루지는 않는다.
제대로 된 작전 지령서라기 보다는, 전선의 권한을 위임하는 임명장에 가까운, 그렇기에 더 큰 의미가 있는 문서였다.
네프셀시엔은 지저분한 문서가 불쾌한지, 눈살을 찌푸리며 손가락 끝으로 이리저리 만지더니 관심없다는 듯, 다시 시종에게 넘긴다.
어차피 여기서 문서의 진위를 살피는 것은 어려우며, 굳이 그럴 이유도 없다는 판단이겠다 싶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모인 정보를 바탕으로 내릴 판단이리라.
“이런 말을 하기는 위대한 조상들께 맹세코 정말 죽기보다 싫지만···.”
그러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제서야 중신들은, 폴름스의 여선제후가 평소와는 다른 간소한 옷차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언제나 화려하면서도 장중하게 엘프 군주로서 격식을 차리던 그녀는 오늘은 별다른 장식이 없어 보인다.
언제나 단정하게 틀어 올려 세계수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진 옛 엘프 장인이 만든 황금 관으로 고정했던 긴 머리카락은 자연스럽게 늘어뜨려져 어깨 근처와 등 뒤에서 찰랑거린다.
주로 흰색 옷을 입은 다른 고대 혈족들과 달리, 붉은색이나 검은색의 짙은 색 정복을 겹겹이 껴 입었던 그녀였다.
하지만 오늘은 남들처럼 간소한 하늘비단 원피스를 입었다. ‘주신에게서 사랑받는 종족’의 드러난 정강이가 눈부시게 느껴졌다.
달빛을 모아 직조한다는 하늘비단의 고급 원단은 성 하나를 살 정도로 값비싸다는 소문이 있기는 하지만, 평소에 비하면 간소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복장 탓인지 평소와 같은 압박감도 느껴지지는 않는다.
확실히, 이 폴름스의 통치자는 평소와 다른 것 같다.
지친 것인지, 관심을 잃은 것인지.
“...엘랑크 인이 우리 제국의 인간들보다 더 유능한 모양이군.”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전하.”
“10만 대군 15만 대군 이야기 하기에 금방이라도 포위가 풀릴 것으로 생각했다. 내가 어리석었군."
그녀는 잠시 혀를 차더니 중신들을 향해 몸을 돌린다.
"이전에 마지막으로 보냈던 전령은 적진 돌파를 확인되었던 것이 아니로?"
"맞습니다, 전하."
확실히 밤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세 개의 모닥불을 피우는 것으로 확인했었다. 그도 결국 돌아오지는 못했지만.
"그럼 폴름스의 의사가 외부군, 디오보르크 공에게 전달된 것은 확실하겠고?"
"예, 전하."
"흠··· 하지만 별 움직임은 없고 정작 역공이나 당한 꼴이라···.
네프셀시엔은 정말 화가 나는 듯, 주먹을 틀어 쥐더니 눈가의 하냔 피부가 상기된다.
말하기가 망설여지는지 몇 번이나 입을 벌렸다가 입술을 깨무는 것을 반복한다.
"...엘랑크 인의 우두머리에게 의향을 전달하시오."
"의향이라 하시면···."
"무얼 주면 저 흉한 포위망을 거두고 저주받을 엘랑크 땅으로 돌아갈지를 물어보란 말이오!"
"아, 알겠습니다, 전하.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몸을 돌려 내실로 들어가려던 듯한 네프셀시엔은 멈춰서서 말을 꺼낸 중신을 바라본다.
"성 밖의 아군··· 디오보르크 공에게 진행 상황을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흐음···."
이전에 보냈던 전령은 정보 전달 보다는 경고가 목적이었다. 포위를 서둘러 풀지 않으면 독자적으로 강화에 나선다는 경고 말이다.
"이미 ‘통보’는 끝났고. 그럴 필요는 없겠지."
"하오나, 전하···."
"보고는 끝이오. 이제 물러가시오."
잠시나마 잊고 있었던 주군의 종잡기 어려운 분노를 두려워하며, 중신들은 고개를 조아리며 집무실에서 나온다.
지금까지는 공식적으로 철수나 조건을 논의한 적은 없었다.
모든 의사소통은 간접적으로, 비유적으로 이어졌으며 공표되지도 않았다.
이는 엘랑키아 왕국 자체를 증오하는 선제후 네프셀시엔의 의향이 매우 강하게 반영된 결과이기도 했다.
오히려, ‘방임’ 상태이기는 해도 엘랑키아 왕국의 사절과 만남을 용인했다는 것 자체가 그녀로서는 최대한 참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제 공식적인 허락이 떨어졌다. 중신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한다.
바빠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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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째 날, 브레세른 마을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는 전장 전체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다른 대규모 작전이나 연쇄적인 전과 확대에 이르지도 못했으며, 그렇다고 그룬발트 측에서 반격 작전을 시작한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엘랑키아 군이 언제라도 뛰쳐나올지 모른다’ 라는 인식을 그룬발트 군 전체에 전달하게 되어 방어 준비를 더 진행하게 하고 피로도를 올리는 영향이 있었다.
그렇다고 그로트 백작이 이끄는 브레세른 방면군이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냐고 하면 그렇지도 않다.
자칫 완전히 붕괴될뻔 한 최악의 상황은 벗어났으며, 전투가 끝나고 흩어졌던 장병들이 속속 복귀했다.
결과적으로 사상자는 1천 명 미만으로, 특히 최중요 전력인 기병과 포병 전력은 보존함으로서 병력 규모에 큰 타격을 입었다고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는 ‘전술적’ 차원의 문제로, 전략적으로 입은 타격은 단순히 숫자로는 계산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우선 1개 야전군을 몇 달은 유지할 수 있는 각종 식량과 전투 물자, 그들이 거주할 야전 시설까지 모든 것이 한순간에 잿더미가 된 것이 심각한 문제였다.
부랴부랴 주변에서 예비 물자를 빌려주고, 디오보르크 공작의 사령부에서도 어떻게든 물자를 융통해 전군이 쫄쫄 굶으며 노숙을 하는 최악의 사태만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그로트 백작으로부터 일개 병사에 이르기까지 심대한 자존감과 자신감에 지울 수 없는 큰 타격을 준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간신히 호구지책을 구했을 뿐, 이전처럼 최소한의 방호를 제공하는 시설을 건설할 수 없었다.
결국 브레세른 방면군은 몇 킬로미터 후퇴하는 수 밖에 없었으며, 원래부터 느슨했던 이중 포위망은 이제 포위망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에 이른다.
그리고 전례없이 거대한 대군을 먹여 살리느라 한계에 봉착한 보급부에 과중한 부담을 주게 되는 것도 문제였다.
무엇보다··· 이 패배는 순전히 엘랑키아 기사가 아니라 보병들에게 당한 것도 불안 요인이 되었고.
결국 총사령부는, 이 전투를 ‘엘랑키아 군에게 습격당해 일시적으로 위기에 처했으나, 격퇴하고 거점을 되찾았다’ 라는 반쯤 거짓이 섞인 내용으로 발표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