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550화 (550/556)

49-7. 폴름스 전투, 열일곱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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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둔지를 휩쓸었던 화염은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금방이라도 엄습할 것으로 예상되던 엘랑키아 군의 공격은 없었다.

‘의외의 리더쉽’을 발휘한 그로트 데르젠 폰 리고비츠 백작과 그 참모들이 열심히 무너진 병력을 재건하고 전투를 준비하던 시기.

엘랑키아 군은 공격을 준비하는 대신, 기습으로 점거한 주둔지에 불을 놓고 철수해 버렸다.

당연히 적이 공격을 준비중이라 생각했던 그룬발트 군으로서는, 주둔지를 휩쓴 화염이 시작될 무렵에야 이를 알게 되었다.

결국, 태울 것을 다 태운 후에야 불이 꺼졌을 때, 숯덩이가 된 외부 방벽을 지나 주둔지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이건··· 계획적으로 주둔지 전체를 불태우기 위해 불을 놓았군.”

일순간에 잿더미가 되어 버린 진영을 돌아보고 있던 그로트 백작이 망연자실하여 중얼거리듯 말한다.

마치 다른 세계로 와 버린 듯한 착각이 드는 잿더미 사이에서는 자신의 지휘부와 개인 천막이 있던 위치가 어디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일부러 타기 좋은 재료들을 원형으로 쌓아두고 불을 놓은 것이 분명합니다.”

무척 당황한 전쟁관의 참모, 에올로스 베르젠 폰 자이트리츠가 힘 없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것은 누가 봐도 확실했다. 만약 단순히 철수하면서 여기저기 불을 놓았다면, 이처럼 진영지 전체로 불이 퍼지지는 못했으리라.

이건 분명히 의도한 것이다. 그리고 의도에는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

천막과 목재를 비롯한 가연성의 물건들은 매우 무겁고, 불은 위험하다. 상당한 숫자의 병력이 투입되어 준비해야 가능한 일이다.

엘랑키아 군은 전투를 준비해도 부족할 시간과 노력을 여기에 쏟아 넣은 것이다.

전술을 다루는 참모로서, 에올로스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만약, 방화 준비에 분주하던 그 때 아군이 공격했다면?

전투 이외의 목적으로 분산되어 있던 엘랑키아 군은 무척 당황했을 것이고, 오히려 한 번 점령했던 주둔지를 도로 빼앗았을 것이다.

아무리 불을 놓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할지라도 아군 적군이 뒤섞인 상황에서 함부로 불을 지르기도 어렵다.

자칫하면 함께 타죽을 테고, 화약으로 무장한 병력이 절반 가까이 되는 이런 상황에서 불을 지르는 것은 같이 죽자는 일이니까.

하지만 곧 다르게 생각한다.

당시 아군은 만에 하나라도 공격할 계획이 없었다. 정확히는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다.

물론 엘랑키아 군이 습격해 온다면 그 공세를 막을 준비야 되어 있었지만, 공격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황급히 주둔지를 빠져나온 병사들은 한계까지 몰려 있었다. 놀란데다 지치고 모든 것이 부족했다. 하다못해 아침도 못 먹은 상태였으니 말이다.

적은 이런 상황을 100퍼센트 알고 있지야 않았겠으나, 어느 정도는 확신하고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 점까지 다 고려해서 공격 타이밍을 잡지는 않았겠지··· 설마··· 그렇게까지 상대를 높이 평가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크게 한 방 당한 것만은 사실이다. 이건 절대 잊지 않고 갚아 줘야 할 일이다.

“형님, 뭔가 이상합니다.”

“이상하다고? 뭐가?”

쌍둥이 동생인 가레트가 에올로스에게 이상함을 말하자 무언가 섬뜩함이 느껴진다.

함께 자이트리츠 전쟁관의 강도 높은 교육을 수료한 입장이지만, 가레트의 직감에는 특출난 점이 있었다.

“완전히 타지 않은 흔적을 봤을 때··· 적은 가져갈 수 있는 물자를 먼저 챙긴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뭐? 불을 지르기 전에 주둔지를 먼저 털어 버렸다는 말인가?”

“예···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가레트는 찌푸린 얼굴로 말을 이어간다.

쪼그려 앉더니, 기형이 있어 제 구실을 거의 못하는 왼팔로 균형을 잡으며 오른팔로 바닥의 잿더미를 뒤집는다.

“여기는 아군 식량 창고가 있던 자리입니다. 곡식이나 고기가 불에 타고 나면 특별한 흔적이 남습니다. 아까 일어났던 불이 숯덩이 외형도 남기지 않을 만큼 강하고 오래 탄 불은 아니었지 않습니까?”

“맞아, 그렇지···. 게다가 기름기가 있는 냄새도 심하게 나지 않는군.”

역시 가레트의 관찰력은 대단했다. 이 잿더미 한 가운데에서도 침착하게 특이한 점을 찾아낸다.

“그 말대로입니다, 형님. 적은 불을 지르기 전에 단순히 시설을 파괴한 것이 아니라, 쓸 수 있는 물건들은 챙겨서 빠져 나갔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알뜰한 녀석들이군.”

“게다가 우리가 전투를 준비하며 밖에서 지켜볼 때, 화약이 폭발하는 것을 보지도 못했지 않습니까?”

“아··· 그건 확실히 그렇네. 화약을 방치해둔 상태로 불을 질렀다면, 유폭되는 소리가 밖에서도 들렸겠지.”

당연하지만, 그룬발트 병사들은 기습 당한 와중에 물자는 커녕 장비와 복장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빠져나가는 수 밖에 없었다.

아니, 그랬기에 간신히 완전 붕괴는 피하고 전투 준비라도 갖출 수 있었겠지.

허나 뭔가 더욱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아무리 아군이 주둔지를 버리고 떠났다고는 해도··· 적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렇게 여유있지만은 않았을 텐데.”

“그렇겠지. 기껏해야 30분에서 40분 정도이려나?”

주둔지 하나를 통째로 소개하는 데는 빠듯한 시간이다.

심지어 그 주둔지가 아군의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만약 그게 가능하려면 주둔지를 점령한 시점부터, 적은 진격을 고려하거나 후속 병력을 기다리지도 않고 물자부터 공출했을 텐데.

이게 상식적으로 가능할 일이냐··· 라는 것에 생각이 미친다.

방금 그룬발트 군이 그러했듯, 결국 지휘관은 안정을 먼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초전에 이겨 쫓아냈다고는 해도, 지척거리에 만 명 단위의 병력이 재집결해 이쪽을 위협하고 있는데··· 그 앞에서 태연하게 병력을 분산시켜 물자를 옮긴다?

아무리 정예병이라 할지라도 무기를 놓고 다른 짐을 짊어진 순간, 그건 단순한 노무 인력이 된다.

이해할 수 없다. 그렇기에 분석할 수 없었다.

에올로스와 가레트 형제는 서로 제대로 된 의견을 내지 못하고 당황한 표정으로 마주보는 수 밖에 없었다.

“에올로스 공, 가레트 공.”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무진 노력을 하고 있던 형제들을 부른 것은 전선 사령관 그로트 백작이었다.

그 역시 고뇌 가득한 표정을 하고 있다. 나란히 선 부장, 알트브란트 후작도 마찬가지였고.

“당장 지금부터 우리 병사들에게 무엇을 먹여야 하오?”

“....”

그 걱정 가득한 말에는 아무도 대답할 수 없었다.

엘랑키아 군이 미리 준비해서 챙겨갔는지, 그냥 방치해서 화염에 휩쓸렸는지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1개 야전군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매일 막대한 물자가 소요된다.

당장 전투 도중 다급하게 빠져나간 병사들이 대다수다 보니, 총병의 경우 휴대 탄약포 숫자를 채운 경우가 많지 않았다.

애초부터 탄약 없이 총만 덜렁 들고 나온 병사들도 많았고···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뛰쳐나온 와중에 그들을 나무랄 수도 없었고.

포병들도 혼란 와중에 무거운 포를 챙겨 나온 것만 해도 다행이니 화약이 충분하길 바라는 것은 무리였고, 소모하는 화약 분량이 많은 만큼, 고갈도 빠를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여전히 1만 명이 넘는 브레세른 전선군과 거기 딸린 보조 인력, 가축들까지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것이다.

벌써 정오가 되어 간다.

“...최대한 빨리 해결해야겠군요. 사령부의 만프레트 총참모장에게 전령을 보내겠습니다.”

“가능한 빨리 플로리안 경에게도 전령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당장 사용할 물자라도 구해 보겠습니다.”

“물··· 물이 필요하오. 근처에 우물이나 샘을 찾아보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정찰대를 파견하도록 하겠습니다.”

병력 온존을 위해 정보 우위를 포기하면서까지 아껴 두었던 경기병들을 풀어야 했다.

그래도 하는 수 없었다. 보급이 유지되지 못하면 전략도 전술도 의미가 없을 테니까.

당장 오늘 내로 해결하지 못하면 브레세른 방면군 전체가 기아 상태에 시달릴 것이며, 덮을 것도 없이 노숙해야 할 것이다.

어지간한 직접 공격보다, 훨씬 큰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이 점점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루라도 배급이 늦어지는 것은 전투력 유지에 치명적이다. 하루라도 굶어 본 병사는 앞으로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게 되니까.

하필이면 유난히 화창하고 건조한 날씨와 지독한 탄내가 공복감을 자극한다.

다른 전선군이 겪어보지 못한 위기에, 그로트 백작과 참모들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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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출전해 승리를 거두고 브레세른으로 귀환한 드 제브레도뉴 공작가의 군대는 축제 분위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사상자가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예상보다도 훨씬 가벼웠고 막대한 노획 물자를 얻었기 때문이다.

“정말 수고하셨소, 에트 경.”

루제 드 제브레도뉴 공작이 활짝 웃으며 나를 맞이한다.

이번 전투의 주력은 순전히 루제 공작이 빌려준 브레세른 전선군이 맡았었으니, 나는 빌려 쓴 입장이고 공작이 물주였다고 하겠다.

승리를 거두고 온 병사들은 남아있던 부대가 미리 준비해둔 밥과 물을 양껏 먹을 수 있었고 약간이지만 술도 배급 받았다.

확실히 ‘엘랑키아 공작의 군대’라기 보다는, 비교적 평등하고 자유로운 분위기인 어느 용병대의 병영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다.

“내 병사들은 어떤 것 같소? 동부 국경을 지키는 데엔 문제가 없어 보였소?”

“대단히 훌륭한 병사들이더군요.”

“하하하핫, 에트 경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은근히 기분이 좋소이다.”

나도 슈토르히 연대라거나, 트랑카벨 영지군의 정규 연대 표준을 구상하면서 병력 구성에 대해서는 조금쯤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 경험에서는 정말 독특하게 기른 병력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는 이렇게 특화시키는 방법도 있구나 라는 생각에 지식이 늘어난 느낌이다.

루제 공작의 직속 병력을 대리해서 이끌면서 두 가지 점에서 놀랐다.

첫번째로는 엄청난 기동력이다.

보통 부대의 기동력이란 단순한 이동속도가 아니다. 훌륭한 각력만 가진 육상선수들만 모은다고 최고의 기동력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듯 말이다.

이동속도도 중요하지만, 그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기동을 끝낸 직후에 ‘교전 가능한 상태’가 되는지가 중요하다.

따라서, 통상적으로는 진형을 유지한 상태로 기동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편이지만···.

이들은 말도 안되는 속도로 목표 지점까지 이동한 후, 말도 안되는 속도로 대열을 형성하는 방법을 택했다.

물론 몇 시간이고 준비해서 공들인 철저한 배치에 비하면 모자란 점이 많고, 구색만 갖춘 건 아닌가 걱정이 가는 배치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이 예상하지 못한 위치에 갑자기 나타나 한 박자 빠른 공격을 시도한다는 것은 굉장한 이점이다.

물론 이미 전투 준비를 끝낸 상대방의 목전에서 이런 기행을 했다가는 오히려 박살이 났을 테지만.

아군의 공격을 인지조차 못한 시점에서 이런 대담한 기동은 분명 배울 점이 있었다.

일단 빠른 압박 자체가 적장의 판단을 어렵게 한 모양이었고, 그래서 수월하게 승리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두번째 장점은··· 이걸 뭐라 표현해야 하나, 물자 수집 능력?

아니, 원래 계획이 있긴 했다. 당연히 적군을 격퇴하는 게 최우선 목표이긴 했지만, 전황이 안정화 되면 점거한 주둔지의 물자를 수집한다는 것.

피락스 우베노 연대장은 일단 적을 주둔지 밖으로 몰아내자, 작전 계획에 따라 물자 수집을 시작하겠다고 보고해왔다.

그리고 내가 다소의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허락하자, 병력을 나눠 절반 정도로 방어를 철저히 하고 우베노와 바르디슈의 몇 개 연대를 차출해 ‘물자 수집 작업’을 시작했다.

여기서 이들의 ‘전문성’이 드러났다. 이동에 방해가 되는 막사들을 철거하고, 물자 집적지의 물건들을 일단 밖으로 꺼냈다.

식량과 무기, 화약류로 나누더니 우선순위를 정해 물자 확보와 이동을 동시에 시작했다.

쓸 수 있는 수레도 노획해서 짐을 옮기기 시작하고, 당장 옮길 수 없는 물자는 쌓아두었다가 후속부대의 수레로 옮겼다.

더 가치 있는 물자가 오면 덜 중요한 물자를 내려놓고 교체하는 것도 일사천리였다.

화약 등 일부 물자는 연대 보급관들이 와서 소분해 나눠가기도 하였고, 일부 질 좋은 막사나 탁자까지 챙겨가는 알뜰한 모습도 보였다.

병사들에게 이런 예를 들면 다소 실례일지 모르겠지만, 마치 기둥에서 먹을 수 있는 부분만 갉아먹어 쓰러뜨리는 흰개미를 보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적 주둔지는, 30분도 지나지 않아 초토화 되었고 ‘물자 획득’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방화준비로 이어갔다.

그렇게 불을 놓는 것으로 전투는 마무리 되었다.

다들 이번 전투의 궁극적 목표, 포위당한 폴름스 측에 보여줄 ‘카드’의 획득을 잊지는 않았던 것이다.

만 명 이상의 인간이 장기간 머물 수 있는 숙영지이다. 여기서 일어난 화염과 연기는 몇 킬로미터 떨어진 폴름스에서도 잘 보였겠지.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했다. 우리가 제공한 카드가 협상 테이블에서 어떻게 쓰일지는··· 기다려 봐야 할 일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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