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6. 폴름스 전투, 열일곱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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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관들은 저쪽, 측방 연대를 보강하게.”
“알겠습니다.”
비록 주둔지를 습격당해 쫓겨나오듯 후퇴한 것이기는 하나, 브레세른 전선을 담당한 그룬발트 군은 빠르게 질서를 찾아가고 있었다.
에올로스와 가레트, 자이트리츠 전쟁관 출신의 참모 형제는 병력 전체를 장악하고 배치를 진행했다.
“형님, 병력은 얼마나 집결했습니까?”
“어림잡아 7할 정도는 복귀했다. 예상보다 많지?”
“정말이네요··· 다행입니다.”
최악의 경우, 전군의 절반이라도 살려 새 대열을 만들거나 후퇴시키려고 했던 그룬발트 군이다.
그런데 절반이 아니라 70퍼센트의 생존이라니.
이 정도라면 그냥 지지 않는 경우가 아니라, 대등 그 이상의 싸움도 노려볼 수 있는 상황이다.
적군의 공세는 날카로웠으나, 혼란 와중에도 아군은 생각보다 잘 싸웠고 질서있게 퇴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전선 사령관, 그로트 데르젠 폰 리고비츠 백작의 활약이라고 공을 돌릴 수 밖에 없다.
에올로스도 가레트도 그냥 게으르고 느긋한 성격에, 옛날 전쟁 이야기나 영웅담을 좋아하는 평범한 중소규모 가문의 주인이다··· 라고만 생각했었다.
신성 그룬발트 제국 역사에 남은 여러 위인들이나 그들이 싸웠던 전투 등, 군사적 지식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것 뿐이다.
그 정도는 아직 보좌 참모의 근처에도 도달하지 못한, 자이트리츠 전쟁관 꼬마들도 다 아는 지식이다. 심지어 더 체계적으로 말이다.
오히려 어설픈 관심과 지식이 ‘나는 남들과 달라’라는 과도한 자신감을 준 끝에 오만함과 고집스러움으로 발현되는 케이스는 아니기를 바랐을 정도이다.
하지만 그로트 백작은 그런 상관으로 모시기에 최악인 인물은 아니었다.
게으름이라 생각했던 것은 군사 전문가인 전쟁관의 형제 참모들에게 군사를 위임하는 배려였고.
느긋함이라 생각했던 것은 위기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침착함이었다.
“모두 무사해서 다행이군! 전투 준비는 문제 없나?”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백작님.”
마지막으로 주둔지를 떠난 병사들과 함께 무사히 탈출해온 그로트 백작은 그 짧은 시간 동안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마치 지금껏 게으르게 굴었던 것은 이 때만을 위해서라고 몸으로 웅변하는 것 처럼.
적의 기습이 시작되고 위기가 발생하자 후방 지휘를 부장인 알트브란트 비켈 폰 트롬자이트 후작과 전쟁관 형제들에게 맡겼다.
그리고 본인은 혼란이 소용돌이치는 병력 한 가운데로 향했다.
말릴 틈도 없었고, 말려봤자 듣지 않았을 엄청난 추진력이었다.
물론 전장의 혼란을 수습하고 병력을 재조직하는 능력을 바랄 수는 없었다.
하지만 패배가 목전인 것 같았던 분위기를 되돌리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멸망이 코 앞에 온 듯 공포에 떨며 무너지기 직전인 병사들이 다시 전의를 되찾고 장교들의 지시를 따르기 시작했으니까.
이는 단순히 지휘관이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수준이 아니다. 평소 원수처럼 굴던 지휘관이었다면 그러지 않았겠지.
하지만 그로트 백작은 평소 병사들의 복지에도 신경을 쓰고 부당한 경우를 당하지 않도록 신경쓰던 인물이었다.
예를 들자면, 장교단에서 병사들에게 배정된 식사를 포함한 각종 물자를 착복하는 것은 흔한 경우이다.
하지만 백작은 이를 엄금하고, 실제로 사례가 발생하자 단호하게 처벌하기도 했다.
여타 근무 시간도 공평하게 배분되도록 하는 등, 병사들에게서 너무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았던 공정한 지휘관이었던 그로트 백작의 지휘력은 그렇게 발휘되었다.
실제로 만약 그의 활약이 없었다면, 일단 주둔지를 빠져나온 병사들 상당수가 위험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에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쳤을 것이다.
하지만 먼저 후방에 방어선을 자리잡고 있던 폰 자이트리츠 형제에, 잔존 병력을 최대한 무사히 퇴각시킨 그로트 백작의 활약이 더해졌다.
그 덕분에, 온전하지는 않더라도 전투력을 최대한 온존하는 형태로, 전투의 다음 라운드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새삼, 그룬발트 대군의 총참모장이자 두 형제의 대선배인 만프레트 경의 안목에는 감탄하게 된다.
명백하게도 브레세른 전선의 지휘관으로는 어설프게 유능한 인물보다, 이런 침착하고 책임감 있는 인물이 걸맞았을 것이다.
에올로스와 가레트 형제는 전선으로 눈을 돌려 상황을 파악한다.
장교들의 고함소리도 슬슬 잦아들고 있었다. 어느정도 계획대로 배치가 마무리 된 것이다.
병력이 충분한 덕에 새로운 전선은 구색을 갖출 수 있었으며, 많지는 않지만 포병과 기병도 거의 손해 없이 집결시킬 수 있었다.
좌우 두 군데로 나뉘어져 상호 보완이 가능한 포병대, 철저하게 공들인 양 측면 방어, 후방의 예비전력으로서 기병대까지.
엘랑키아 군이 주둔지를 통과해서 오든, 우회해서 오든 크게 상관은 없다.
확실한 것은, 이미 함락당한 주둔지 외부에 전투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엘랑키아 군은 선택을 강요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그대로 공격한다면, 초전과는 정 반대로 준비된 그룬발트 군과 그렇지 못한 엘랑키아 군의 구도가 될 것이며···.
새로운 공격을 위해 대열을 정돈한다면, 이미 준비를 하고 기다리는 그룬발트 포병의 정면에서 이를 준비해야 한다.
아무리 공격해온 엘랑키아 군의 장기가 빠른 진형 결집이라 할지라도 포격을 뒤집어 쓰며 대열을 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엘랑키아 군이 아니라 어느 군대일지라도 마찬가지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절대 명령 없이 사격하지 않는다!”
“알겠습니다!”
전투를 각오한 장교들의 외침이 더더욱 또렷하게 들린다.
적은 이미 이겼다고 생각하겠지만, 전과를 확장하려면, 이미 준비된 아군의 방어선을 정면 공격하는 수 밖에 없다.
거기 일격을 가해 역공할 수 있다면, 주도권을 되찾아 오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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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통에 병력을 수습하고 대열을 갖춰 전투를 준비했다.
···하지만 적이 공격해오지 않는다. 벌써 반 시간 정도가 지났다.
“어째서 적이 가만히 있는 것이지?”
“...정면 공격을 하기에는 두려운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휘관인 그로트 백작의 질문에, 참모로서 가레트는 애매한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단숨에 돌파를 시도해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기세의 엘랑키아 군은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주둔지 외벽에 고개를 내밀어 이쪽을 살피거나, 멀리 측방으로 기병을 돌려 정찰을 시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주력부대는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적이 후속 병력과 합류해서 수적으로는 아군과 호각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있군요.”
“정찰대를 보내면 어떨까요?”
“지금은 억지로 접근하다가는 바로 적에게 견제 당할 것입니다.”
나름 괜찮은 지휘관임을 알게 된 그로트 백작의 최대 실책은, 기병을 온존하겠다며 정찰대를 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 때문에, 이번 공격에 초동 대응을 실패하고 말았으니까.
‘아군에게 위협적일 정도의 대병력이 움직이는 것을 확인해도 대응에는 늦지 않는다’
라고 느슨하게 생각했었으나, 상상도 못한 속도로 거리를 좁혀온 적군 때문에 결국 초전에서 패배했고 주둔지를 잃고 말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정찰 목적으로 기병을 보내기도 어려운 것이, 엘랑키아 기병들이 이미 넓게 퍼져 있다는 것이다.
이는 엘랑키아 군이 주변을 감시하는 정보망이면서, 아군의 정찰을 틀어 막는 포위망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견제를 뿌리칠 만한 규모로 위력 정찰을 하기에는 위험도가 너무 크다. 일단 양군의 거리가 너무 가깝고.
아군 대열에서 맨 눈으로 살피기에는 ‘아군’ 주둔지 외벽과 천막들이 시야를 가려서 정보 획득에 한계가 있다.
보병을 위력 정찰이라고 보내는 것은··· 그 이상으로 자살행위겠지.
“에올로스 경, 가레트 경.”
“예, 백작님?”
갑자기 그로트 백작이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건다.
마치 누군가의 눈치라도 본다는 모습인데, 현재 전선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누구 눈치를 본다는 것일까.
“병사들이 지쳐가고 있네. 돌아가며 휴식을 시켜도 되지 않겠나?”
“그것은···.”
그로트 백작은 하는 ‘척’이 아니라, 정말로 병사들을 생각하는 지휘관이 분명했다.
참모로서는 그만큼 ‘적’에게도 관심을 가져주었다면···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는 것을 알았으니 모자란 부분은 참모로서 보완하면 그만이다.
어쨌든 병사들의 컨디션에 대해서는 에올로스와 가레트 형제 역시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적의 기습은 단순히 전술적인 우위를 빼앗긴 점에서 끝난 게 아니다.
갑자기 아침에 불려 나온 병사들은 눈에 띄게 복장이 부족했다.
급히 무기만 들고 나오느라 투구나 갑옷이 누락된 경우도 있었고, 안타깝게도 맨발인 병사들도 종종 보였다.
게다가 아침을 먹지 못했다.
지금이야 전투를 앞둔 흥분감에서 버티고 있지만, 전투가 늦춰질 수록 이 부담은 무겁게 다가오리라.
본래라면 전투 중에도 배를 채울 수 있도록, 곡식을 기름에 굳힌 비상식을 지급하곤 하지만 이번에는 그조차도 챙길 수 없었으니까.
설마··· 설마 적이 이걸 노리고 시간을 끄는 것은 아니겠지?
“저, 적이다!”
“엘랑키아 기사다! 모두 정신 바짝 차려!”
“불 꺼진 사람 있나?”
교대로 휴식을 취하게 할까 하려던 찰나, 갑자기 전선이 시끄러워진다.
정말 엘랑키아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주둔지 측면에서, 옆으로 길게 늘어선 전형적인 전투 대열이다.
“초전에서 만났던 기병들은 저런 ‘기사’는 아니었었는데!”
“그렇습니다, 형님. 좀 더 무장이 가볍고··· 기사 보다는 용병에 가까운 차림새였습니다.”
아마도, 그룬발트 측이 주둔지를 버리고 퇴각한 이후 합류한 적의 증원군에 엘랑키아 기사가 포함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전략전술을 다루는 참모로서 언듯 이해가 잘 가질 않는다. 엘랑키아의 기사대라면 최강의 전력이 아니던가?
그런데 어째서 선두에 세우지 않고, 이처럼 후속부대로 보내다니.
용병 중심의 선두 부대로 우선 교전 시키고 정예 기사대는 후방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돌입시키려는 것이었을까?
하지만 이는 통상적으로 알고 있던 엘랑키아 군의 전투 방식에는 어긋난다.
“...가레트. 적의 움직임에서 너무 많은 ‘신호’를 읽으려 하지는 마.”
“아, 죄송합니다 형님. 제 나쁜 버릇이라···.”
“나쁜 버릇은 아니지만 이번 경우는 돌진해오면 그걸 두들겨 부술 뿐이지.”
에올로스와 가레트는 쌍둥이 형제이다. 그리고 전장에서는 말을 통하지 않고도 판단이나 정보를 공유하는 듯한 모습으로 유명했다.
때문에 혹자는 ‘쌍둥이만의 생각 동조’라거나 ‘기프트로 타고난 정신 감응’ 등을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그게 아니라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저 오랜시간 함께 지냈고, 관심사와 지식 습득을 통일한 결과 어느새 ‘그냥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주 조금, 동생 쪽이 내향적이고 형 쪽이 외향적이라는 점이 다를 뿐.
그리고 이 차이가 참모로서 두 사람의 이인삼각을 완벽하게 만들었다.
“엘랑키아 기사의 등장은 위협이지만, 여전히 적 보병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군의 포진은 완벽합니다.”
“그렇지. 만약 공격해 준다면 오히려 고마울 정도이다.”
형제가 알기로, 한 세대 전의 엘랑키아 기사들이라면 그런 무모한 짓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대륙 최강의 기사’라는 명성에 스스로 취한 것인지, 새롭게 전장을 지배하는 ‘화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듯한 행동을 여러 차례나 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체를 산처럼 쌓아가면서도 적을 무너뜨리고 이겨버린 전적이 있다는 것이 두려울 뿐이지만.
어쨌든 이번 세대의 엘랑키아 기사, 다고베르 2세가 이끄는 군대는 한 번도 그런 어리석은 짓을 저지른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지금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오히려 공격 의도를 숨기기 위한 목적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다른 목적··· 다른 목적이 무엇일까.
“어? 저거··· 연기 아닌가?”
주둔지 위로 회색 연기가 피어 오른다.
한 줄기가 아니다. 처음에는 서너 줄기의 연기였다가, 이제는 열 개가 넘어 숫자로 세기가 어려울 정도.
“주둔지에 불이 났습니다!”
“어째서? 엘랑키아 놈들이 실수로 불이라도 낸 것인가?”
“그건··· 지금으로선 저희도···.”
지휘관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것은 참모로서 비참한 일이지만,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할 수는 없었다.
방금 점령한 주둔지를 전투도 없이 갑자기 왜 태운다는 말인가?
당연한 말이지만, 그룬발트 군이 주둔지를 빠져 나올 때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때문에 1만 명이 넘는 병사들의 남겨진 장비와 개인 소지품을 포함하여, 식량과 화약 등 예비 물자들도 전부 남겨져 있다.
일부러든 아니든 불이 나면 그게 전부 잿더미가 될 것이다. 그걸 두고만 볼 것인가.
지휘관인 그로트 백작도, 두 전쟁관 형제도 명확한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