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548화 (548/556)

49-5. 폴름스 전투, 열일곱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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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둔지를 버리고 이 위치, 후방에 새로운 방어선을 설정합니다.”

전쟁관의 참모, 가레트 토브루 폰 자이트리츠가 침착하게 새로운 방어 계획을 설명한다.

이를 진지하게 듣고 있는 것은 친형인 에올로스 베르젠 폰 자이트리츠와 브레세른 전선의 부장인 알트브란트 비켈 폰 트롬자이트 후작이다.

“그, 그런데 주둔지에서는 아직 전투가 계속되고 있지 않소? 주둔지를 지킬 방법은 없겠소?”

후위부대를 맡고 있었던 부장, 알트브란트 후작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그는 전쟁 경험도 적고, 직속 병력의 숫자도 그다지 많지 않아 ‘떠넘기기’ 느낌으로 주장인 그로트 백작과 함께 전선을 맡게 된 이였다.

실질적인 전력이나 유능한 군사 경력을 가진 영주들을 다른 전선에 배치하고, 전선 유지만 하면 되는 덜 중요한 지점.

브레세른 전선이 그룬발트 군 전체에 가지는 위치는 그 정도였던 것이다.

전투 경험도 적고 이렇다 할 지휘 교육도 받지 못한 알트브란트 후작으로서는 아직 병력이 남아 있는 주둔지를 포기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게다가 주둔지 외곽에는 허술하나마 나무로 지은 방벽도 있었다.

여기 의존해서 공격해오는 적을 맞이하고 싶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물론 당장 무너지고 있는 전선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사전 준비가 필요하겠지만.

그런 사실을 알기에, 참모로서 가레트는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쌍둥이 형인 에올로스와 똑같은 얼굴이지만, 타고난 기형으로 주름지고 왜곡된 좌반신에 유난히 그림자가 진다.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처음부터 계획했다면 모를까, 이미 출전했다가 쫓겨온 상황에서 질서를 회복하기는 어렵다 생각합니다.”

좁아터진 주둔지 입구를 통과하다가 압사 사고가 생겼을 정도였고, 여전히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막사와 막사 사이의 좁은 통로들은 병사들로 가득 차 있었고, 통제가 되지 않고 있었기에 방향 잃은 병사들은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대로 방치하면 공격해오는 적에게 야금야금 잡아먹히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게다가 굳이 화약을 포함하지 않더라도 온갖 불에 타는 물건으로 가득한 주둔지이다.

출입구가 공격해온 적에게 봉쇄된 상태에서 불이라도 난다면···.

주둔지를 지키는 게 문제가 아니다. 문자 그대로 역사에 남을 끔찍한 결과로 끝날지도 모른다.

그걸 피하기 위해서 급선무로 우선 통제를 회복해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공간과 시간이 필요했다.

“다행히 공격해온 적의 숫자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게다가 말도 안되는 급속 행군으로 전장을 가로질러 왔기 때문에 그들 역시 통제가 잘 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음···.”

천 명을 훌쩍 넘는 규모의 보병 부대이다. 기초부터 차근차근 쌓아나가지 않은 진형은 결국 약점이 나올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마도 오랜 전장 경험에서 온 숙련도와 장병들간의 유대를 통해 약점을 숨기고 있는 것이리라.

···안타깝게도 현재 그룬발트 군에는 둘 다 부족한 것이었다.

게다가 어처구니 없는 새벽 기습에 놀라서 이 모양이 되었지만, 적의 규모는 기병 보병을 합쳐봤자 1만을 넘는 아군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

후방에서는 적의 증원 병력이 접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선두 속도가 워낙 빨랐기에 합류하는 것은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그러니 개활지로 전장을 끌어내야 할 새로운 이유가 된다. 서로의 병력이 훤히 드러나는 전장에서, 병력이 열세인 쪽이 부릴 수 있는 마술은 한계가 있으니까.

“주둔지 안팎의 혼란 때문에 전군을 수습할 수는 없겠지만, 대략 절반의 병력만 집결시킬 수 있어도 적과 같은 수 입니다. 새로운 전장에서 적어도 반반 싸움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럴 수가··· 아군 병력 절반을 잃게 놔 둔다는 말이오?”

“절반의 병력만 챙긴다는 것이 나머지가 사망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혼란에 빠져 당장 전력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혼란이 해소되면 하나 둘 돌아올 것입니다.”

“으으으··· 그렇군.”

“하지만 전선이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면, 영영 재집결 할 수 없이 브레세른 야전군 자체가 소멸할 것입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알겠소, 그 말대로 합시다.”

그제서야 설득된 알트브란트 후작은 참모의 건의를 받아들인다.

급박한 와중 불필요한 시간 낭비일 수 있지만, 전투는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다.

지휘체계를 따라 조리있게 명령이 전달되려면 지휘부가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고, 의견 개진을 통해 검증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에올로스 형님, 명령을 전달해 주십시오.”

“알았어. 후방은 맡길게.”

전쟁관에서 수행을 할 때도, 보좌 참모 역할을 할 때도, 에올로스와 가레트 형제는 두 사람이 한 사람처럼 행동했다.

종종 기분나쁘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두 사람은 특별히 상관하지 않는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게 자신들의 방식이고 이기는 방법일 뿐인데.

“나는··· 나는 무엇을 하면 되겠소?”

“알트브란트 후작께서는 사령관이신 그로트 백작님께 직접 상황을 설명드리고 함께 퇴각 준비를 해 주시겠습니까?”

“아아, 알겠네. 그로트 백작님께서는 아직 전선에 계시니 바로 출발하겠네.”

그로트 백작도, 알트브란트 후작도 결코 지휘관으로서 나쁜 사람은 아니다. 특별히 무능한 것도, 고집이 센 것도 아니며 그저 경험이 부족할 뿐이다.

적어도 전쟁관 참모들의 의견을 경청해주는 것만 해도, 그룬발트 귀족 세 명 중 두 명에게서는 찾기 어려운 자질이니까.

처음부터 전선 지휘관을 배정할 때, 이런 점을 고려해서 배치했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특히나 그로트 백작은··· 그냥 옛날 전쟁 이야기 좋아하는 한량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불리한 전투가 시작되고 위기가 찾아오자, 갑자기 성실성에 불이 붙었는지 지휘를 에올로스, 가레트 형제에게 맡기고 최전선으로 달려갔다.

자칫 지리멸렬할 수 있었던 최전방을 지탱한 것은, 팔할은 그로트 백작의 공이었다.

이런 점만 보아도, 현재 상황이 비관적이기만 하지는 않다 하겠다.

“자 이동! 새로운 전선을 만든다!”

“모두 서둘러!”

알트브란트 후작의 휘하에 있었던, 아직 상태가 멀쩡한 보병 연대가 이동을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며 참모 가레트는 다시 한 번 전장 전체를 점검한다.

여전히 불리한 상황이지만 당장 전선이 무너지지는 않을 것 같다.

엘랑키아 군의 작전을 세운 이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정말로 대담하고 틀에 박하지 않은 사고를 하는 이였다.

이 정도의 급속 행군에 이은 습격이라니··· 그것도 한 밤중 야습이 아닌 해가 뜬 이후에!

오히려 새벽이라 눈으로 보이기에, 그렇게 무모하고도 빠르게 ‘보병으로’ 공격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조금만 어긋났다면, 준비하고 기다리는 그룬발트 군의 방어선에 기진맥진한 상태로 들이박는 최악의 수가 될 상황이었다.

아니··· 만약 그런 조짐이 보였다면 즉시 병력을 물려 불리한 상황을 피했겠지.

이건 확실한 계획 하에 진행된 작전이다. 결코 공격 일변도로 병사들을 무모하게 밀어붙인 끝에, 어쩌다 행운타가 터진 것은 아니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적장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계획을 세웠을지, 기회가 된다면 한 번 이야기를 나누며 배워보고 싶을 정도였다.

현재 전황은 당연하지만 불리하다.

하지만 엘랑키아 군은 한 가지 불안 요소를 가지고 있다.

바로 기습을 위해 상식을 벗어난 고속 행군을 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최초의 교전에 이어, 이제는 그룬발트 군이 내보낸 기병대에게 견제를 받으며 또 체력을 소모하고 있었다.

새로운 적에 맞서기 위해 진형을 바꾸는 일.

그리고 언제 습격할지 모르는 적을 견제하며 긴장의 끈을 놓지않는 일.

모두 굉장히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시간을 벌어 아군의 병력을 수습할 기회가 생기는 것은 물론이고 말이다.

전투는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한다···.

엘랑키아 군의 여전히 꺾이지 않은 기세를 볼 때마다 그렇게 느끼게 된다.

엘랑키아 군의 체력 소모는 승기가 꺾이는 순간 폭발할 화약 더미와도 같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역시 그룬발트 군도 비슷한 폭탄을 안고 있다.

아까 알트브란트 후작에게는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건 바로 병사들이 아침을 먹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른 아침의 공복 상태는, 막 전투가 시작되어 긴장하고 눈 앞의 전투에 집중하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전투가 길어지고 상황이 반복될수록 무겁게 다가올 것이다. 분명 발을 지면에 묶어두는 족쇄가 되고, 생각을 방해하는 안개가 되면서 말이다.

하필이면, 하필이면 아침을 준비하는 그 타이밍에 오다니.

만약 기습이 조금만 일렀다면 비상식을 지급하고 나왔을 수도 있으며, 조금만 늦었다면 적어도 일부라도 아침 식사를 마무리했겠지.

그런데 하필 그 시간에 오다니.

지금까지 전황으로 미루어 보면, 엘랑키아 측 지휘관은 단순히 감이나 운으로 싸우는 타입은 아닌 것 같았다.

분명 자신들이 적에 대해 알고 있는 것 보다, 이쪽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기병대를 묶어두고 정찰을 허용하지 않았던 그로트 백작에게 다소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아무튼 준비 안된 기습에 공복이라는 상황은, 시간이 흐를수록 무겁게 다가오리라.

마치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모를 도화선에 불이 붙은 채, 땅 속에서 조용히 타들어가는 지뢰처럼 말이다.

“거기 길 좀 비켜주겠나?”

“말뚝 충분히 가지고 따라오게!”

“예, 지금 갑니다!”

이번에는 참모 가레트의 앞으로 육중한 화포를 밀고 당기며 포병대가 지나간다.

이런 저런 위험요소에도 불구하고 개활지에서 새로운 전선을 열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바로 이 포병이었다.

엘랑키아 군은 당연하지만 포병이 없다.

중무장을 하고 저게 가능한가 싶을 정도로, 아니 왜 저러나 싶을 정도로 급속 행군해온 상황이다.

포병은 고사하고 탄약 수레 하나 끌고 올 여유가 있을리가 만무했다.

자꾸 지휘관을 원망해서는 안되지만, 조심성이 너무 심한 그로트 백작이 기병만큼이나 소중한 포병을 꼭꼭 숨겨 놓은 탓에 첫 교전에서 전혀 사용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걸 잘 활용한다면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었다.

지금이야 주둔지 안팎에 아군과 적군이 너무 뒤섞여 있어서 사용할 수 없지만, 개활지에 새로운 전선을 열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미리 강력한 화망을 구성해놓고, 적이 공격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은 모든 전술가의 꿈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빠르게 주둔지를 벗어나 새로운 전선을 설정해야 한다.

잘만 준비 한다면 싸움은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난 반반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손해를 단숨에 만회하는 역전을 노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 만들어야 했다. 전쟁관의 참모가 지배하는 전장이 어떤지를 보여주려면 말이다.

어릴때부터 명석하다는 소리는 들었으나, 좌반신이 흉한 기형으로 태어난 가레트였다.

정말 힘들고 괴로웠던 것은 ‘저주받은 자식’이라며 자신을 못살게 구는 주변 사람들 보다, 자진해서 그 고통을 공유하는 에올로스 형님이었다.

그런 형제에게 기회를 주고, 있을 자리를 마련해준 자이트리츠 전쟁관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 전투에서야말로, 전쟁관의 힘을 보여줄 수 있으리라 본다. 아니, 그렇게 만들 것이다.

전투는 후반을 향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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