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547화 (547/556)

49-4. 폴름스 전투, 열일곱째 날

###

탕, 타당! 타앙!

타타타탕! 타다당!

어쩔 줄 몰라하며 좁은 장소에 몰려있는 보병들에게 납탄의 폭풍이 휘몰아친다.

“크아아악!”

“멈춰! 멈추라고!”

뒤이어 창대를 가지런히 세운 장창병들이 천천히, 하지만 절대 멈출 수 없는 발걸음으로 나아가자 마치 파도에 밀리는 모래처럼 무너져간다.

방어측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전투가 끝나버릴 지경이다.

그 정도로 엘랑키아 군의 첫 공세는 완벽한 성공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예상하지 못한 위치에 나타나, 예상하지 못한 공격을 퍼부은 2개 연대, 브라키슈와 우베노는 막 주둔지 밖에서 급히 재배치 중이던 그룬발트 보병대를 박살냈다.

수적으로 훨씬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적습을 알게 되자마자 주둔지를 뛰쳐 나갔더니 벌써 공격을 시작하고 있더라는 상황은 강력했다.

어설프게나마 방벽으로 보호되는 주둔지 안쪽으로 다시 돌아가겠다며 우르르 몰려들다가 서로 부딪치고 압사당하는 비극도 일어났다.

이대로 두면 진영 자체가 무너진다.

그런 공포심에 전의를 상실한 보병들은 더더욱 도망치려 들었고, 장교들의 통제는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그렇게 최악의 상황을 눈 앞에 두고 있을 때 문제를 해결한 것은 그룬발트의 기병들이었다.

지휘관인 그로트 데르젠 폰 리고비츠 백작이 애지중지하며 정찰도 내보내지 않았던 덕택에, 전력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었던 그 기병대 말이다.

완전히 무너져 내린 전방 보병들을 구하기 위해, 그룬발트 기병들이 양 측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적 기병 출현 보고가 들어오고 있어요!”

첼레스티나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굳이 전령의 보고 내용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이미 내가 있는 지휘부에서도 잘 보이고 있었으니까.

나는 잠시 고민한다.

적 기병은 단순히 모습을 드러낸 게 아니라, 공격중인 아군 보병들을 측면에서 공격할 기세로 집결하고 있었다.

아무리 급히 공격하느라 대열이 흐트러진 아군이라 할지라도, 첫 공격이 성공해 사기가 왕성한 병력이다.

항상 말하지만, 연대급 보병 부대에 대한 기병의 단독 공격은 반쯤은 자살 행위이다.

보병 대열이 완전히 무너졌거나, 손발이 잘 맞는 아군 보병 혹은 포병의 지원이 있다면 모를까.

적어도 보병 대 보병 싸움에서 양측 대열이 고착화 하여, 능동적인 반격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측후방을 노리면 모를까···.

이런 상황에서 적 기병이 공격을 감행한다는 것은, 무너진 보병들을 구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기병을 상대하려면 천상 보병은 공격을 멈추고 방어 대형을 갖추어야 한다.

따라서 기병이 다소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공격의 기세를 꺾고 시간을 벌자는 판단이다.

적장이 생각보다 냉정한 판단을 내렸다. 지금 무너지고 있는 전방 보병 부대를 제외한 나머지 부대에 대한 통제를 회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첫 기습에 의한 일방적인 기세 프리미엄은 끝났다고 봐야겠지.

우리도 정신 바짝 차리고 냉정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역공 당할지 모른다. 나 역시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첼레스티나, 공세 중인 양 측 연대에 전령을!”

“네에, 콘도티에레!”

“바르키슈 연대는 공격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측면 방어를 준비한다. 그리고 우베노 연대는 그대로 공세를 계속한다.”

“네엣! 앗, 우베노 연대는···.”

“대신, 우베노 연대를 기병으로 지원한다.”

“앗! 네에, 바르키슈 연대는 공격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측면 방어를 준비할 것, 우베노 연대는 그대로 공세 계속, 기병이 지원할 예정!”

“그렇게 전해 줘.”

눈치 빠르게도 내 의도를 즉각 알아챈 첼레스티나가 전령들에게 내 지시를 전달한다.

비록 적의 대응으로 기세는 꺾였지만, 나는 기습 프리미엄을 이대로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티테니아 경.”

“옛? 예엣, 콘도티에레?”

“적 기병의 수가 얼마나 되어 보이지?”

“어, 앗! 적 기병의 숫자는···.”

티테니아는 자신이 없는 지 떨리는 눈동자로 열심히 적을 살핀다. 5초 쯤 지났을까, 마찬가지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좌측의 적 숫자는 대략 1200에서 1500으로 보입니다! 우측의 규모도 비슷하지만··· 다만 중기병 비율이 높은 우측이 좀 더 강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정확하네, 티테니아 경.”

내 말에, 그녀의 불안하게 굳었던 표정이 풀리며 활짝 웃는다. 그러더니 뭔가 깨달은 표정이 된다.

“아! 그래서··· 그래서 중기병 숫자가 더 많은 우측의 우베노 연대를 아군 기병으로 지원하시려는 것이군요?”

“그렇지. 상황에 따라서는 티테니아 경의 기병대가 지원을 갈 수도 있으니 준비하고 있도록.”

“옛, 콘도티에레!”

한 눈에 병력과 전투력을 파악하는 것은 역시 지난 겨울에 카르카냑에서 했던 교육은 헛되지 않았다.

앙비토 드 몽파르지에 공작이 자신의 여동생과 300기의 기병을 맡긴 것은 단순히 병력 증원 차원의 공헌이 아니다.

사실상 서부를 지배하는 대귀족인 드 몽파르지에 가문이 우리를 후원한다는, 든든한 뒷배와 깊은 신뢰를 보여준 행동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물며 동생을 부탁한다고 전언까지 주었으니, 나로서는 티테니아가 최대한 경험을 쌓아 돌아갈 수 있도록 배려할 뿐이다.

물론 급박한 전투 와중에 이러는 것은 사치일 수 있겠으나···.

나는 지금이 별로 급박한 상황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번 전투에서는 가급적 드 몽파르지에 기병대를 활용하지 않을 생각이기도 하고.

그렇게 전투는 초반을 지나 중반으로 향한다.

###

“허어, 이거 옆구리가 허전한 느낌인데?”

“그럼 역시 예비대를 측면으로 돌릴까요, 연대장?”

“아냐, 아니지. 높은 분들 명령은 들어야지 않겠나? 총병 중대를 배치한 것으로 충분해.”

지휘부에서 내려온 명령을 전달받은 피락스 우베노 연대장은 우는 소리를 하면서도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분명 위에서 내려온 명령은 ‘적 기병이 네 옆구리를 찌르려 하겠지만 상관하지 말고 전진을 계속하라’ 라는 곤란한 내용이다.

통상적인 전장의 상식 대로라면, 여기서 일단 공격을 멈추고 기병 공격에 대응하는게 옳다.

하지만 우베노 연대가 겁이 난다고 그렇게 행동한다면, 지금 완전히 무너져서 도망치는 적 보병들은 부대를 재건할 기회, 시간과 공간을 얻게 된다.

하물며 그 시점에서 적 기병은 1차 목적인 보병의 구원을 달성한 것이 되어 버린다.

그러면 적 기병은 계속해서 우베노 연대를 공격하든, 다른 전술적 목표를 향하던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게 된다.

총 한 방 쏘지 않고 칼 한 번 휘두르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모처럼 기습으로 얻었던 주도권을 상실하는 것은 피락스로서도 사양이었다.

게다가 이 다소 곤란해 보이는 명령이 이리로 내려왔다는 것이 드 제브레도뉴 공작령 최고의 베테랑임을 자부하는 우베노 연대의 자부심 또한 자극했다.

선의의 경쟁자인 바르키슈 연대의 경우, 평균적으로 더 어린 병사들로 이루어져 있어 체력은 더 좋았지만 숙련도는 이쪽이 더 뛰어나다, 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측방을 견제하면서 무너지는 적을 확실하게 추격하는 어려운 임무를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생각이었다.

“계속 전진! ‘어려운 일’은 기병 친구들에게 맡기도록 하자. 우리는 하던 ‘쉬운 일’이나 마저 하자고!”

“알겠습니다, 연대장님!”

게다가 지원 올 기병들은 드 제브레도뉴 가문의 용병대에서 함께 활동하며 손발을 맞추었던 동료들이다.

분명히 가장 성공적으로, 적 입장에서는 가장 까다로운 방식으로 싸워 줄 것이다.

부하 중대장들에게 연대를 맡긴 상태로, 피락스는 적 기병을 지켜본다.

충분히 위협적인 거리에 접근했는데도, 본체만체하며 ‘하던 일’을 계속하는 우베노 연대를 본 적 기병들은 당황한 것 같았다.

전투 대형으로 늘어선 상태에서, 선두에 장교 여럿이 모이고 전령들이 이리저리 달린다.

하지만 이내, 후방에서 모습을 드러낸 아군 기병들을 무찌르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는지 목표를 바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군 기병대는 ‘엘랑키아 공작 가문’ 소속의 기병대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소 초라한 외형의 부대이다.

나름 충실하게 갑주와 무장을 갖추고는 있었으나, 온 몸을 철갑으로 감싼 통상적인 ‘엘랑키아 기사’는 아니다.

아마도 그룬발트 기병대가 전투를 결심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리라.

하지만 피락스를 포함한 우베노 연대의 모두는 알고 있다. 루제 공작의 기병들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타타타탕! 타타탕!

양 측 기병대가 접근하면서 권총 사격이 오간다.

기병간의 사격은 밀도가 낮은 데다가, 백병전 돌입을 위해 거리를 두고 사격하므로 명중률이 상대적으로 낮다.

어느 쪽도 적극적으로 돌격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잠시 서로 거리를 두며 사격이 반복된다.

운 나쁜 기병들이 종종 적탄에 맞아 낙마하는 모습이 보이지만, 그 숫자는 전체로 따지면 많다고는 할 수 없었다.

서로 크게 효과가 없는 사격이 반복되는 가운데, 답답함을 느꼈는지 그룬발트 측의 중기병들이 먼저 거리를 좁힌다.

엘랑키아 기병들도 굳이 피하지 않았기에, 양측이 뒤섞이는 백병전이 시작된다.

탕! 타앙! 타탕!

“커흐윽!”

“밀어 붙여! 대열을 유지하고 밀어 붙여!”

“쏴라!”

기병에게 화약 무기는 오히려 거리가 짧아졌을 때 위력을 발휘한다.

당연하지만, 흔들리는 말 위에서 총열까지 짧은 권총이다보니 거리로 인한 명중률 손실이 더욱 크기 때문이다.

대신 한 방에 쓰러뜨리지 못하면 검이나 창 같은 전문적인 근접 무기에 대응하기 어렵다는 단점 또한 존재한다.

때문에 다양한 무기를 바꿔 들며, 상황에 맞게 대응하는 것은 숙련된 기병만의 강점이다.

그리고 루제 공작 휘하에서 용병으로 경험을 쌓아온 기병대는 그런 쪽에서 대단히 숙련된 기병이었다.

때문에 결연한 각오로 사격 무기를 포기하고 돌진해온 것도 아니며, 질서있게 기병만의 화망을 구성한 것도 아닌 애매한 포지션의 그룬발트 기병들은 당황한 듯 보였다.

그렇게 어느 편도 결정적인 우세를 취하지 못한 상태로 백병전이 이어진다.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적진을 부수고 돌파한다.

혹은 이대로 교전에 전념하며 수적 우세를 이용, 적에게 피해를 누적시킨다.

양측 모두 어떤 분명한 목적 없이, 일단 덮어놓고 전투를 시작하고 보자는 모습인지라 기병전은 마치 표류하듯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시간이 끌린다는 것은 전술적으로 엘랑키아 측이 유리한 상황이 된다.

아껴 놓았던 기병대를 투입한 그룬발트가 원했던 것은 보병을 견제하여 시간과 공간을 벌고자 했던 것인데, 우베노 연대는 여전히 본진을 압박하고 있었기때문이다.

하지만 한 번 달라붙은 그룬발트 기병들은 좀처럼 다른 선택을 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그들이 바로, 사흘 째 격전에서 브레세른 호수의 늪지대를 통과해 북부 전선을 지원갔던 기병대였다.

“후방은 기병에게 완전히 맡겨도 되겠군!”

“그렇네요. 예비대까지 투입해 우회 공격을 시도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아직도 안하고 있었어?”

“하하핫, 지금 곧바로 가겠습니다, 연대장!”

피락스 연대장은 만약의 만약이라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북부 전선에 ‘최후의 일격’을 가했던 루제 공작의 기병대는 적을 한참 추격하더니, 엄청난 양의 보급물자와 가축들을 노획해 돌아왔었다.

피락스는 ‘전쟁하라고 보냈더니 소도둑질을 하고 왔네’라며 놀렸었지만, 거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막대한 노획물이 아니라 그 와중에도 전력을 고스란히 유지했다는 점이었다.

아마 지금 정면으로 싸우고 있는 그룬발트 기병대 지휘관은 공격도 방어도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는, 진창에 빠진 기분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바로 그것이, 우베노 연대와는 조금 다른 기병대의 노련함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