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3. 폴름스 전투, 열일곱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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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비토 드 몽파르지에 공작의 명령을 받아 소규모 기병대와 함께 참전한 티테니아 드 몽파르지에는 전투 첫 날, 우베노 연대의 활약을 본 적이 있다 말했다.
그룬발트 군이 첫 공세를 시작한 때, 카렐 드 상포리앙 경과 함께 기병대를 이끌고 브레세른 전선을 지원하러 갔었기 때문이다.
당시 후방에서 적 기병대를 견제했던 티테니아는 우베노 연대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감상을 남겼다.
‘무척 위태로워 보였습니다. 미터스하임 전투에서 트랑카벨 보병대의 움직임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물론 슈뵈켄 전선에서 지빌링엔 반연대의 움직임과도 달랐습니다’
그야, 트랑카벨 영지군을 창설하면서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표준화와 안전성이었으니까···.
게다가 다를 쿠에상 연대장의 부대 운용은 마치 그의 성격처럼, 느긋하고도 견고함 그 자체였으니 티테니아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으리라.
또한 ‘피 흘리는 흑곰’ 지빌링엔 보병들 역시 철저한 기강에서 오는 단단함을 강점으로 하는 용병대이다.
그와 비교하면 자유분방하고 계속 무리를 하는 것 같은, 우베노 연대의 움직임이 낯설게 보였던 것은 당연하겠지.
“루제 공작께 공격을 시작하겠다고 전령을 보내 줘.”
“네에, 콘도티에레!”
브레세른을 기반으로 공격을 개시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루제 드 제브레도뉴 공작을 찾아갔을 때, 그는 의외로 흔쾌히 동의했다.
다만 두 가지 조건이 있었다.
선봉은 드 제브레도뉴 영지군이 맡을 것이며, 작전 입안자인 내가 직접 전투 지휘를 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두 가지 조건 모두 조금 의외였다.
둘 모두 엘랑키아 국왕을 섬기는 대귀족이면서도 용병단 운영자인 루제 공작에게는 껄끄러울 수 있는 내용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첫번째 조건이야 ‘비교적 손쉬운 전투’에서 휘하 병력에게 전공을 몰아주고 싶은 마음으로 생각하더라도···.
휘하 병력의 지휘를 선뜻 남에게 맡겨 버리는 것은··· 한 전선의 책임자이자 야전군 사령관으로서 쉽지 않은 선택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생길 수 있는 지휘계통의 문제를 미리 해결하려는가··· 싶지만 나는 애초에 루제 공작과 지휘권을 다툴 생각이 없었다.
아니, 뭐 욕심을 내려고 해봤자 급이 좀 비슷해야 말이지.
기껏해야 변경 자작령의 대리 사령관에, 직위를 영혼까지 끌어 모아야 중앙군 참모에 불과한 나와, 직할 병력만 1만이 넘는 공작 각하니까.
서열로 보나 세력으로 보나 내가 지휘권 욕심을 낼 상황이 아니라는 이야기지.
어쨌든, 그렇게 내가 전방 지휘를 담당하기로 했는데, 심지어 루제 공작이 선봉에 세우라며 맡긴 2개 보병 연대가 바르키슈와 우베노 연대라는 것을 알고는 많이 놀랐다.
이 두 연대는 용병업을 운영하는 드 제브레도뉴 가문에서도 쌍벽을 이끄는 정예 연대로, 이번 전투에서도 큰 전공을 세우고 있는 도중이었기 때문이다.
이걸 덜컥 내주다니··· 허튼 짓을 하면 가만 안 두겠다는 것으로도 보여 살짝 긴장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자존심 강한 정예 연대가 협력을 거부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반응은 정 반대였다.
다행히도 편협했던 것은 나 혼자 뿐이었던 모양이다.
특히나 같은 용병 출신이고, 시기나 장소는 달라도 주디칼리에서 활동했던 공통점도 있어서 협력 준비는 빠르게 진행될 수 있었다.
그렇게 내가 맡은 전위 병력은 우베노와 바르키슈를 포함한 보병 3개 연대, 그리고 기병 1개 연대이다.
이 중 후반에 고용된 용병들로 이루어진 보병 1개 연대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루제 공작의 직할군이다.
남의 병력이라도, 아니 남의 병력을 빌린 입장이기에 나는 더더욱 정신을 바짝 차렸다.
이들에게 너무 큰 피해를 입어도 안되지만, 최대한 활용하여 전공을 세우게 해 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르키슈와 우베노 두 연대장이 다소 위험해 보이는 공세 계획을 제안했을 때는 좀 고민하기도 했지만···.
전술적으로 합당해 보였기에 승인했다.
그게, ‘현재’에 이르렀고 말이다.
무리해서 행군해온 드 제브레도뉴 보병들이 전선의 좌측과 우측에서 빠른 속도로 대열을 만들며 숨을 골랐다.
그리고 천천히 전진을 시작한다.
“앞으로!”
“전군 앞으로오!”
“간다! 모두 정신 똑바로 차려!”
“자리를 벗어나지 마!”
창병과 총병이 뒤섞인 밀집 대형, 전장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자리를 지키고 적을 죽이기 위한 거대한 집단이 움직이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 걷는 것 보다도 느릿한 속도지만, 목표를 이루기 전까지는 결코 멈추지도 않고 방향을 바꾸지도 않는다.
무수히 많은 전술가가, 군대가, 용사가 다른 방법으로 이 전투 대형에 대처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 어떤 시도도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동등한 숫자와 화력을 가진 동등한 전법으로 상대하는 것 말고는.
“저기··· 저 상태로 싸울 수 있을까요?”
“네에, 그러게요오··· 연대장께서 너무 성급하신 것 같네요···.”
티테니아와 첼레스티나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한다. 진심으로 걱정이 가득 담긴 말투였다.
그녀의 말대로, 현재 두 보병 연대의 배치 상태는 그다지 좋지 않다.
적과 접하는 전방 부분은 그럭저럭 구색을 갖추고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만, 뒤따르는 후방 부분은 미흡한 부분이 많다.
보병 밀집 대형의 생명은 철통과도 같은 병력 배치에서 오는 단단함, 그리고 질량이다.
실제 후열의 무게가 전방에 전달되는 물리적인 질량은 아니지만, 충분히 깊은 대열을 갖춘 보병 진형과 부딪쳐 보면 이를 왜 ‘질량’이라 부르는지 알게 된다.
그런 만큼, 적과 직접 접하는 전열 외에 이를 지원하는 후열도 중요하다는 것인데 지금은 누가 봐도 엉망이다.
불과 2분에서 3분 후에는 선두가 적과 교전을 시작할 판국인데 이제와서 후방을 채우는 형국이라니.
당연히, 절대로 용납 가능한 상황이 아니고 제자리에 멈춰서 전투 준비를 갖추라고 닥달해야 할 상황이겠지.
평소라면 말이다.
하지만 우베노와 바르키슈, 두 연대를 대표해 나를 만나러 온 피락스 우베노 연대장은 정확히 ‘이런 상황’이 올 것을 나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행하겠다 주장하며 나를 설득했던 것이다.
이제 실제로 전투를 앞둔 상황에서 어째서 이런 비상식적인 공격 계획이 수립되었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분명 드 제브레도뉴 공작가를 섬기는 용병들은 부적절한 진형으로 공격 중이다.
그런데 이들과 맞서는 그룬발트 군은 그런 어설픈 진형조차도 준비를 못한 상태라는 것이다.
심지어 아직 상당수의 병력이 막사와 창고 시설로 가득한 주둔지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있었다.
서둘러 뛰쳐 나온 그룬발트 보병들은 복장은 커녕 방어구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황으로, 창병과 총병이 한데 뒤섞여 우왕좌왕하고 있다.
장교들이 그 사이를 돌아다니며 고래고래 악을 쓰고는 있었으나, 일단 중대 단위로 집결조차 못한 병사들을 배치할 수 있을리가 없다.
아쉬운대로 총병으로 선을 긋고 그 뒤에 창병을 배치하는 급조 방어선을 만들어 보려고는 하지만···.
흉흉한 기운을 내뿜으며, 오로지 자신들을 눌러 죽이기 위한 목적으로 밀고 들어오는 엘랑키아 보병들이 눈 앞에 있는 상황.
겁에 질린 그룬발트 총병들이 슬금슬금 물러나는 통에 대열 구성이 더더욱 어그러진다.
적의 정보 전달이 늘어지는 애매한 아침 시각, 전군이 아침 식사를 준비하느라 분주했을 상황.
그 타이밍을 맞춘 것은 분명 나와 참모들이 계획하고 만들어낸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타이밍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어떤 보병 부대라 해도 불가능할 기동력으로 거리를 좁힌 것은 분명 우베노와 바르키슈 두 연대의 선택이었다.
마침내, ‘준비되지 않은’ 두 전투 대열이 교전에 들어간다.
타타타탕! 타타탕!
타앙! 타타탕!
“크으윽!”
“전진! 절대 멈추지 마!”
“으아아악!”
“쏴라! 기다리지 말고 쏴버려!”
언제나처럼, 양측 보병 대열 사이에 뿌연 화약 연기가 연달아 피어 오른다.
그 연기가 짙어질 수록, 적군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쓰러지는 병사들의 수는 늘어만 가고 있겠지.
하지만 누구나 알고 있다.
그 정도 화력으로 작정하고 달려드는 보병들을 완전히 막아낼 수는 없다는 것을.
“이야아아아아!”
“밀어붙여! 가자아!”
“하아아! 하아아! 하아앗!”
좌측의 바르키슈 연대가 화약 연기 속을 성큼성큼 나아가서는 미세하게 빠르게 적진을 들이 받는다.
불과 몇 초 후, 우측의 우베노 연대 역시 격돌을 시작한다.
특별히 지휘부에서 시각을 지정한 것도 아니고 서로 전령이 오갔던 것도 아닌데, 양측이 동시에 전투에 돌입했다는 것 부터가 양측의 높은 숙련도를 짐작하게 하는 행동이다.
“우와아아아아!”
“밀어버려!”
처음, 양측의 창대가 마구 뒤얽히고, 느리지만 매서운 기세로 돌진하던 창병 대열이 탁 하고 정지한다.
그리고 문자 그대로 빽빽하게 늘어서 ‘그늘이 생길 정도’인 창대가 마구 격돌하는 전장이 만들어진다.
단단하지만 탄력있는 창대가 부딪치는 소리는 귀가 먹먹할 정도이며, 어떻게든 적진을 뚫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병사들의 고함소리가 울려퍼진다.
이런 창병 대열 사이의 전투는 쉽게 승패가 갈리지 않는다.
장창이라는 것이 애초부터 공격 무기라기 보다는 방어에 적합한 무기이다.
심지어 그게 수십 수백 자루가 모여 한가지 역할을 위해 뭉치면 지키기는 쉬우나 나아가기 어려운 국면이 만들어진다.
무모한 반 걸음은 창병의 목숨을 너무도 쉽게 앗아가 버리며, 그렇게 대열에 뚫린 구멍은 오히려 역공의 빌미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어지간히 기량의 차이가 나지 않는 한은 한 번 얽힌 창병끼리의 충돌은 쉽사리 풀리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한 번 멈췄던 엘랑키아 창병들이 느리지만 다시 전진을 시작한다.
그룬발트 군은 견디지 못하고 여기저기서 문자 그대로 무너지기 시작한다.
재빠르게 대열 전체가 후퇴하며 질서를 유지했으면 다행이지만, 낯선 상황에서 손발이 맞지 않은 탓에 뒤로 나동그라지는 병사들도 생긴다.
이는 결국, 그룬발트 군이 급조한 창병 대열이 견뎌내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황급히 어설프게나마 방어 대열을 만들어내기는 했지만, 말 그대로 폭을 맞춰 선을 그었을 뿐 연대급 전투를 수행할 ‘깊이’를 갖추지 못했다.
그에 비해서 드 제브레도뉴의 보병들은 ‘진군하면서 대열을 완성하는’ 신기를 보여주었다.
어처구니 없지만, 전투가 시작된 지금 시점에서 공격 중이던 보병 연대의 완성도는 더 높아졌다고 해야 할까.
여전히 대열이 완벽하지는 못하지만, 워낙에 빠른 속도로 적이 대응할 시간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적의 대열은 더 엉망이다.
마치··· ‘완벽할 필요는 없다. 상대보다만 나으면 된다’라고 하는 듯, 변칙적인 전법이다.
당연히 완벽함을 추구해야 보통이라도 가게 된다는 군사학의 상식에는 크게 어긋나는 상황.
그러나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하지 않던가. 지금 실제로 아군은 ‘상대적으로 유리’했고 적을 밀어 붙이고 있었다.
세상에는 이런 싸움 방식도 있구나··· 라고 생각하게 된다.
아무튼 무리해서 선두로 나선 두 연대가 ‘묘기’나 다름없는 활약을 해 주고 있으니, 나는 내 역할을 해야지.
“첼레스티나, 후위의 루제 공작 각하께 전령을!”
“네에, 콘도티에레! 어떤 내용으로 보낼까요?”
“아군, 기습 성공! 전위는 일제 공격 예정이니 지원을 요청한다, 이상!”
“네에. 아군, 기습 성공! 전위는 일제 공격 예정이니 지원을 요청한다!”
“그래, 그대로 부탁해.”
일관되고 엄밀한 작전 대신, 다소 서툴고 혼란스럽더라도 빠르기에만 신경 쓴 모험적인 작전으로 시작한 전투이다.
그리고 그걸 승인한 것은 나니까, 이게 ‘모험’으로 끝나게 하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빈 구멍을 매우면서 따라가는 수 밖에.
정말 오랜만에 시작된 우리 측, 엘랑키아 군의 공격이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