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1. 폴름스 전투, 열일곱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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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름스를 둘러싼 이중 전선에서는 크고 작은 전투가 거듭되고 있었다.
외부에서 벌어지는 조우전으로 총소리가 하루도 들리지 않는 날이 없었으며, 성벽을 포위한 대구경 공성포의 포성은 주변 초원을 온통 울릴 정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선 전체적으로 보자면, 역설적이게도 평화롭다.
양측을 합쳐 10만이 넘는 대군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투가 벌어진다 해도 많아야 중대 단위의 교전이다.
적으면 수십 명, 많아도 수백 명.
그 조차도 서로의 숨통을 끊어 놓겠다는 치열한 전투가 아니다.
정찰, 혹은 기세 싸움을 위한 어정쩡한 충돌이 반복될 뿐이었으니 말이다.
교전에 참여하는 전체 인원의 백 명 중 한 명도 되지 않는다. 반대로 말하면 그 나머지는 근처에서 적 얼굴을 볼 일도 없다는 것이다.
특히나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곳은 바로 전체의 동남쪽, 브레세른 전선이었다.
브레세른 마을은 상대적으로 사령부가 자리잡은 아우페브라즈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북쪽에 호수라 불리는 늪지대가 있어서 전선의 다른 부분과 격리된 느낌이 있다.
심지어 포위 중인 그룬발트 입장에서는 브레세른 마을을 함락한다고 한들, 아우페브라즈나 아룬하비크로 진격하려면 도중 방어 진지를 통과해야만 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 지역은 일종의 ‘계륵’처럼 느껴진 모양이다.
게다가 브라우나인 선제후령의 후계자 세두시온이 크게 패배하고 포로로 잡히는 바람에 남부 전선이 뻥 뚫린 영향도 있다.
이미 여러 차례 패하고 절망적인 아룬하비크 전선을 담당하고자 하는 귀족 지휘관이 없었다.
북부에 자리한 본진에서 가장 멀고, 패배가 거듭되어 사기도 바닥난 불안한 전선에서 커리어에 새로운 패배를 적립하고 싶어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급하게 전쟁관의 참모 플로리안 도프 폰 자이트리츠 휘하의 소규모 야전군을 급조하여 파견했을 정도니까.
문제는 이렇다보니 오히려 브레세른 전선은 뒷전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군이 공격한다고 크게 얻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적이 공격해온다고 예상하기도 어려운 지점.
다른 전선에서 이어지는 크고 작은 조우전마저 브레세른 전선에서는 그다지 자주 벌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휴전 이후 열흘이 지나도록 가장 조용한 전선을 꼽자면 브레세른이었다.
쿠우웅···.
멀리서 들리는 은은한 포성이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이 전쟁 중이라는 것도 까먹을 수 있을 고요한 아침이었다.
브레세른 전선을 담당한 지휘관, 그로트 데르젠 폰 리고비츠 백작의 정찰병들은 평소대로 정해진 루트를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휘하 장교들은 적진 정찰은 기병이 담당해야 할 일이라 주장하였으나, 책임자인 그로트 백작은 완강했다.
‘우리 군은 기병이 부족하니 한 명이라도 아껴야 한다. 충분히 먼 거리에서 정찰한다면, 설령 적 기병이 나서더라도 물러설 시간적 여유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도발도 먼저 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전투를 하지 않고 피하겠다는 입장은 아니었다.
다만 불필요한 교전은 피해야 하며, ‘결전의 그 때’가 올 때까지 핵심 전투부대는 무조건 아껴야 하니 내보낼 수 없다는 입장일 뿐이었다.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낮고, 배정된 병력도 중소 영주들의 병력만 집중시킨 상황이라 실제로 브레세른 전선군의 전력이 부족한 것은 맞았다.
게다가 엘랑키아 군은 시도 때도 없이 경기병대를 보내 원거리 강행 정찰인지, 소규모 기습인지 구분이 안 가는 행위를 반복했기에 여기 대응할 병력도 필요하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몸을 숨길 공간도 없는 개활지에서 정찰이랍시고 적진에 접근해야 하는 보병들의 일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하물며 상대는 기병이 강력하기로 이름난 엘랑키아 왕국군.
결국 브레세른에 접근한 도보 정찰대는 제발 적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기를 기도하며 먼 거리에서 마을과 주변 방어선을 살피고 돌아가게 되었다.
그 거리는 슬금슬금 더 멀어지기 시작했고, 지금은 잘 보이지도 않는 가물가물한 거리에서 적진을 살피고 돌아갈 뿐이다.
어차피 맡은 임무는 적진에 수상한 움직임이 있는지를 살펴 보는 정도이기도 했고, 수상한 움직임은 결국 부대 단위 움직임이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다들 동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에 처음 나오는 신병들이라면 모를까, 전장 경험이 있는 간부들 중에는 불안함을 품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정찰 형태로는, ‘적이 지금 보이는 수상한 움직임’은 잡아낼 수 있지만, 어제와 오늘이 바뀐 부분 등 병력 이동의 징후는 알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적이 방어 진지에 배치한 병력이 어제에 비해 절반으로 줄었다고 한다면···.
그 절반 병력이 어디선가 다른 작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병력이 배치 되었는지는 알 수 있어도, 그 규모까지 세세하게 알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이미 아군 기병은 중기병 경기병 할 것 없이 전투용으로 전용할 것이라는 그로트 백작의 확고한 방침이 나온 이상 방법은 없었다.
그렇다고 목숨을 내놓고 적진 근처까지 가서 살필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결국 그렇게, 오늘도 적당히 방어선 형태와 그 뒤에 배치된 적의 대열만 살피고 정찰을 마무리 한다.
불안한 임무를 어찌됐든 마무리했다는 생각에, 정찰대 지휘자는 귀환을 서두른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뭐가 말인가?”
귀환하려는 데, 병사 하나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어제에 비해서 방벽 뒤에 창대가 비어 보이는 것 같습니다.”
“흐으음···.”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평소에는 좀 더 짙어 보였었나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어제도 그제와 비슷했으니, 오늘도 어제와 비슷하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정찰대장은 확신이 서지 않지 불안해졌다.
확실히 뭔가 이상한 점은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정말로 이상한 것인지 ‘듣고 보니’ 그런 것인지는 애매했다.
하지만 더 가까이 다가기는 더 무서웠다.
그냥 본진에 이상 징후를 보고할까··· 라는 생각도 했지만 그랬다가 진짜로 아무 일도 없으면 어떡하지? 라는 두려움에 망설이게 된다.
“일단 조금만 더 지켜보자.”
결국 내린 결론은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않는 애매한 것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적 부대 규모도 파악하기 어려운 먼 거리이고, 이 거리에서 용을 쓴다 한들 마땅히 잘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저, 저기! 대장님! 대장님!”
“뭔가 또?”
갑자기 눈에 힘을 줄 필요가 없어졌다.
망원경도 필요가 없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확연한 광경이었으니까.
브레세른 마을의 동쪽으로부터 대규모 병력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최소한 연대급 보병 부대였다.
“전령! 전령을 보내!”
“알겠습니다!”
만약을 위해 준비해둔 전령이 본진을 향해 죽어라 달리기 시작했다. 내용은 물론 ‘적진에 이상 발생’이다.
하지만 아무리 튼튼한 다리를 가진 전령이라 해도, 본진까지 한 번에 뛰어가기에는 너무도 먼 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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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트 데르젠 폰 리고비츠 백작이 ‘적진에 이상 발생’ 소식을 들은 것은 막 잠자리에서 일어나 아침을 먹기 직전이었다.
나름 성실한 지휘관이고자 싶었던 그로트 백작은 야전군을 담당한 후, 새벽에 일단 일어나서 보고를 받고 짧은 휴식 후 아침을 먹는 루틴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도 새벽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내용들을 확인 후, 40분 정도 단잠을 자다가 일어난 참이다.
고대 아란 제국부터 현재의 신성 그룬발트 제국까지, 그로트 백작은 영웅들의 전쟁 이야기에 열광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름대로 공부도 열심히 했고, 아는 것도 많았다.
다만 그가 가주로 있는 리고비츠 백작령은 작은 영지였고, 주변 정치적 지리적 상황도 안정되어 있었기에 실제로 전쟁에 참전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특히나 가문의 직할 병력 이외에 다른 영지군으로부터 주어진 만 명 이상의 야전군 하나를 이끄는 것은 처음 해보는 경험이었다.
영지에서 무리해서 병력을 조금이라도 더 동원한 보람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또한 현실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자신이 새로운 신화로 기록될 법한 전설의 영웅이 아니라는 것은 명확하게 인지했다.
게다가 나름 공부를 한 만큼, 어설프게나마 전략전술을 보는 눈이 없는 것도 아니다.
주 전선은 누가 보아도 북부 전선이었고, 부가 되는 남부 전선에서도 브레세른이 홀대 받는 위치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룬발트 군 전체에 다행인 것은, 그로트 백작이 전공을 서두르는 얼치기 전쟁광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대신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병력을 소중히 관리하며 브레세른 전선을 안정시키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를 보좌하는 전쟁관의 형제 참모, 에올로스와 가레트를 신뢰하며 조언은 대부분 받아들였지만 병력을 소모할 위험이 있는 건은 완강히 거절했다.
자신이 맡은 중요한 전선, 소중한 야전군에 조금의 흠집이라도 가면 안 된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 때문에 폴름스 전선 전체가 소극적인 상황이었지만, 특히나 브레세른 전선에서는 어떤 교전도 벌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엘랑키아 군이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그래서 전선은 안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로트 백작은 생애 첫 전선 지휘관으로서 현재 상황이 무척 만족스러웠다.
자신이 영웅이 될 생각은 없었다. 다만 디오보르크 공작이 이끄는 영웅들이 승리할 때, 그 측면에서 조금 도움이 되는 것 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런데 그 평화가, 행복이 깨져 버렸다.
“자세한 상황은 아직 모르는가?”
“예. 에올로스 참모께서 전황 파악을 위해 급히 나가셨습니다. 조만간 보고가 오리라 생각합니다.”
역시 정보 전파 속도가 느리다. 기병대를 전투 병력과 지휘관 호위대로만 전용하기로 한 결정은 조금 실수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브레세른과 본진의 거리는 제법 멀다. 설령 적이 작정하고 공격해 오더라도 대응할 충분한 시간은 있을 것이다.
“병사들이 아침은 먹었나?”
“예? 아, 옛, 아직입니다. 지금 아침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식사 준비를 멈추고 임시로 비상휴대식을 지급할까요?
“흐음···.”
애매한 시각이었다. 그로트 백작은 잠시 고민한다.
적, 브레세른과의 거리는 제법 떨어져 있고 아직 주변에서 포성이나 총성이 들리지도 않고 있다.
그렇다면 아직은 여유가 있다, 라고 결론을 내린다.
“아닐세. 오늘 전투가 시작되다면 든든히 준비하는 편이 좋겠지. 불도 피웠을 테니 아침 준비를 계속하게. 다만, 평소보다는 더 서둘러야 할 테고.”
“그, 그렇군요. 병사들에게 서둘러 식사를 마치도록 전하겠습니다.”
이제 전투가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로트 백작은 몸이 떨렸다.
사실 이미 사흘 째에도 공세를 지휘한 적은 있지만, 그 때와는 조금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문자 그대로 대규모 작전의 한 귀퉁이를 담당했을 뿐이지만, 이번에는 온전하게 ‘자신의 전투’가 될 것이다.
잠시 잊고 있었던 아침 식사가 생각난다. 버터 냄새가 코를 찌르는 빵을 들어 씹기 시작한다.
배가 고픈 병사는 싸울 수 없다. 전설과 역사 속의 영웅들에게 배운 내용이다.
그때, 또다시 밖이 시끄러워졌다.
“전령 전령입니다!”
“아, 아니, 에올로스 경이 직접 오셨습니다!”
얼굴이 창백해진 전쟁관의 참모, 에올로스가 황급히 달려온다. 땀에 젖은 모습이 쉬지 않고 달려온 모양이다.
“즉시 전투를 준비해야 합니다, 백작님!”
“진정하고, 상황을 설명하게.”
“진정할 틈이 없습니다, 백작님. 적 보병의 행군 속도가 예상보다 훨씬 빠릅니다. 지금 바로 대응해야 합니다!”
평소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본 적 없는 전쟁관 참모가 거의 비명에 가깝게 소리를 지른다.
그로토 백작은 그제서야 큰 일이 났다는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