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541화 (541/556)

48-10. 폴름스 전투, 임시 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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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보르크 휘하의 고급 지휘관이 이렇게나 모이는 것은 오랜만이다··· 라고 펠쿠트 벨톤 폰 비덴누벨 백작은 생각했다.

그룬발트 군 병영 전체, 아니 제국 전체를 찾아봐도 이렇게 큰 막사는 없을 것 같은 사령부 막사를 가득 채운 인물들.

다들 불안한 얼굴로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히려 전투가 시작되기 전보다 숫자가 더 늘어난 것 같다.

이는 펠쿠트 백작의 착각만은 아니다. 실제로도 후속해서 찾아온 귀족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는 얼굴이 있나 주변을 살피던 그의 눈에, 상석에 앉아있는 붕대 투성이의 남자가 눈에 들어온다.

격전이었던 사흘 째 북부 전선에서 자신의 반대편, 좌익군 지휘를 맡았던 레트폴레 아티오크 폰 벤셀샤프 후작이었다.

펠쿠트 본인도 엘랑키아 군의 기상천외한 작전과 어디선가 계속 추가되는 추가 병력에 시달리며 죽을 고생을 했다 생각한다.

하지만 농담으로도, 레트폴레 후작의 좌익군보다 심한 위기에 빠졌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좌익군은 엘랑키아 기사 7천 명의 돌격을 정면으로 받아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자 그대로 갈려서 사라졌다.

엘랑키아 기사들은 사람을 잡기 위해 만들어진 정교한 기계나 다름없었다.

덕택에 예비대도 그쪽으로 모조리 사라지면서, 대군이 가지는 전술적 우위도 함께 사라져 버렸었다.

원래 배치 상이라면 펠쿠트 백작의 군이 받아냈어야 할 가공할 돌격이었다. 실제로 각오도 했었고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이 그 싸움을 하지 않아도 되어 정말로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다.

“펠쿠트 백작님, 이쪽입니다.”

“알겠네.”

그 와중, 보좌 참모의 안내에 따라 더 안쪽으로 이동한다. 지나가면서 보니, 레트폴레 후작 역시 종자들의 부축을 받아 이동하고 있었다.

더 안쪽에서 다른 회의를 하려는 것인가.

지나가는 길에 다른 귀족들의 시선이 다소 따갑게 느껴진다.

내부에서 핵심 정보를 먼저 알게 된다는 것을 질시하는 듯한 눈초리.

하지만 이런 ‘특별 대우’에 우쭐해하거나 묘한 쾌감을 느끼기에는 몸도 마음도 너무 닳아버렸다.

안내되어 도착한 내실에는 전군의 총사령관이자 유력한 다음 황제 후보자, 디오보르크 공작이 근심 가득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근처에는 총참모장인 만프레트가 평소의 감정 없는 표정으로 묵묵히 앉아있다.

결국 최종적으로 실내에 들어온 것은 세 명의 귀족 지휘관과 네 명의 자이트리츠 전쟁관 참모, 마지막으로 또 한 명으로 총 여덟 명의 인간이다.

총사령관인 디오보르크 루프트 폰 제블링 공작.

지난 전투에서 좌익군 지휘를 맡았던 레트폴레 아티오크 폰 벤셀샤프 후작.

지난 전투에서 우익군 지휘를 맡았던 펠쿠트 벨톤 폰 비덴누벨 백작.

총참모장 만프레트 그로블 폰 자이트리츠.

인사와 병참을 담당한 플로리안 도프 폰 자이트리츠.

지난 전투에서 레트폴레 후작을 보좌했던 뮤에르니히 빌팍스 폰 자이트리츠.

지난 전투에서 펠쿠트 백작을 보좌했던 타를라 니케 폰 자이트리츠.

모두가 이번 폴름스를 둘렀나 공방전, 특히나 지난 전투에서 핵심 멤버에 속했던 인물들이다.

그리고 마지막 한 명. 충혈된 눈에 초췌한 모습이지만, 어쩐지 그 눈매와 단단히 닫힌 입가에서는 어딘가 품위와 결연함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입은 옷은 방금 세탁한 듯 청결해 보이지만 어울리지 않게 보이는 하급 기사의 전투복이었다.

대체 이 사람은 누구일까? 라는 생각으로 방금 불려온 이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저는 에펜슈타인 남작가의 바스클라프라고 합니다. 폴름스의 선제후, 네프셀시엔 전하의 호위기사입니다.”

이 말에 몇 명은 놀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대부분은 아무런 반응 없이 듣기만 한다.

엘랑키아 군이 겹겹이 둘러싼 폴름스에서 전령이 뚫고 나온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기는 하지만, 이렇게 찾아온 전령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전에도 세 명, 전령이 포위망을 뚫고 디오보르크 공작의 사령부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다만 그 셋 중 둘은 ‘대체 지원군은 언제 공격을 시작하느냐’라는 재촉을 했을 뿐이며, 나머지 하나는 중상을 입고 고열에 시달리다가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죽었었다.

그 외에 대체 얼마나 많은 전령들이 목숨을 걸고 포위망을 벗어나려고 했는지, 그리고 실패했는지는 외부에서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워낙 중간에 죽거나 사로잡혀 소지품을 검사당하거나 심문 당할 위험성이 높아 공식적인 문서나 대단한 정보를 가져오지 못하는 낮은 신분의 전령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선제후 본인의 호위기사라면, 평범한 전령이 아니라 ‘사절’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여기 계신 분들의 반응을 보니, 저보다 먼저 떠났던 동료들은 성공하지 못했던 모양이군요.”

“음··· 마지막으로 도착했던 전령이 엿새 전이었고, 부상에 시달리다 사망했었소.”

총참모장 만프레트가 대답한다.

“그렇군요. 동료들의 명복을 빌 시간이 없어서 아쉽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오. 바스클라프 경, 미안하지만 아까 이야기했던 네프셀시엔 전하의 전언을 다시 말씀해 주시겠소?”

“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폴름스 선제후령은 엘랑키아 왕국과 정전 협정을 맺을 예정입니다.”

바스클라프는 뭔가 더 이야기할 것이 남았던 모양이지만, 노장의 격한 외침이 그것을 막았다.

“그게 무슨 소리요. 성 밖에서 우리가 피를 흘리고 있는 동안, 폴름스는 자신들이 초래한 침략군과 작당을 했다는 말이오?”

그 외침은 레트폴레 후작의 것이었다.

지난 전투에서 특히나 가장 어려운 전선을 담당했던 지휘관이며, 직할 병력도 가장 큰 피해를 입고 본인까지 부상을 입은 노장.

침착하고 말이 많지 않은 인물로 알려져 있었고 지금도 목소리는 결코 높지 않다.

하지만 부르르 떨리는 입가는 그 분노까지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오라···.”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이오? 알아듣게 설명해 보시오. 비록 선제후와 우리 제국 귀족들 사이에 지위고하의 차이는 있으나, 제국을 섬기는 입장에서는 모두가 동등하오.”

레트폴레 후작의 목소리는 낮고 느렸으나, 말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은 박력이 느껴졌다.

‘제국을 섬기는 입장에서는 모두가 동등하다’ 라는 것은, 감히 제국에 반하는 입장에 선다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협박이기도 했다.

즉, 폴름스 구원을 위해 집결한 10만 대군의 다음 목표가 폴름스 자체가 될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심지어 이번 연합군의 배후에는 여섯 선제후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지금으로서는 폴름스를 지원하는 입장이나, 폴름스를 무너뜨릴 수 있는 명분을 가지게 되었을 때 어떻게 행동할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진정하시오, 레트폴레 공.”

이번에 말을 막은 것은, 의외로 디오보르크 공작이었다.

세상 근심은 모두 끌어안고 있다는 듯 고통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던 그는 의외로 진중한 목소리로 레트폴레 후작을 설득한다.

“분노하시는 것도 이해하고. 나 역시도 이런 대군을 성 밖에 불러다 놓고 본인만 쏙 빠져 나가겠다는 태도에 분노를 느끼고 있소.”

“공작님···.”

“하지만 적어도 폴름스의 전언을 모두 들어보고 결정하시는 게 어떻겠소?”

“...맞습니다, 공작님. 제가 성급하게 행동했습니다.”

그 말은 이치에 합당하다. 하물며 디오보르크 공작 본인이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 좋은 의미로 충격을 준 모양이었다.

“네프셀시엔 전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현재의 대치상황이 계속된다면 양군은 물론, 신성 그룬발트 제국이 피폐해질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말에는 펠쿠트 백작도 화가 났다. 이 무슨 뻔뻔함이라는 말인가.

이번 전쟁은 엘랑키아 국왕이 직접 군을 이끌고 국경을 넘으며 시작되었지만, 그 이전에 앞장서서 도발 행위를 한 것은 분명 폴름스였다.

나우데사에 자금과 병력을 지원해 어수선한 분위기로 만든 것은 명백하게도 엘랑키아를 자극한 행위니까 말이다.

이 난리를 쳐 놓고, 무엇 하나 개운하지 않은 상태에서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통보하다니.

물론 이성적으로는 ‘폴름스를 구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였으니 어떤 형태로든 목적을 달성한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생각이 복잡했다. 전투를 피하고 싶으나, 전투를 원하는 모순적 마음은 쉽게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단은 계속 들어보자. 그 ‘회색 마녀’가 무슨 생각으로 증오하는 엘랑키아와 협정을 맺을 생각을 했는지.

“정전이 성립되면, 엘랑키아 군은 폴름스를 떠나야 됩니다. 전쟁 상태가 아닌 폴름스의 영내에 군대를 주둔하는 것은 협정 위반이니까요.”

너무도 당연한 소리였다. 아마도 이 역사에 남을 전무후무한 대군의 싸움은 이대로 흐지부지 끝나게 될 것이다.

잠깐, 이대로 끝나는 게 맞나?

왜 이 폴름스의 전령은 당연한 이야기를 빙빙 돌려서 말하지? 펠쿠트는 이상하게 느껴졌다.

무언가 자신이 읽지 못한 행간, 또 다른 의도가 있었다. 심지어 그 의도는 결코 선의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우리 폴름스 선제후령’은 ‘독단적으로’ 엘랑키아 왕국과 협정을 맺으려 합니다.”

위화감을 깨달은 펠쿠트 백작이 질문한다.

“하나 확인하고 싶소. ‘독단적으로 맺어진 협정’의 주체가 대체 누구요?”

“저희 폴름스 선제후 네프셀시엔 전하, 그리고 엘랑키아 국왕 다고베르 2세 입니다.”

“그럼··· 우리는? 디오보르크 공작 전하를 비롯한 성 밖의 지원군들 말이오.”

“여러가지 사정으로··· 협정에는 참여시지 못한 것으로 압니다.”

빙빙 돌려 말하는 이유가 있었다.

지금 지원군이 수적 우세를 충분히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엘랑키아 군의 전투력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것이다.

동등한 숫자로는 절대 상대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법칙’이 되어버린 엘랑키아 기사야 그렇다 쳐도, 보병이나 포병 전력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다음으로는 엘랑키아 군이 미리 자리잡은 폴름스 주변 방어선이 문제였다.

측면이 보호되는 두터운 방어선에, 요새화되어 단 하나도 탈환하지 못한 다섯 개의 마을까지.

그리고 그로 인한 내선의 이점은 엘랑키아 군은 효율적이고 선제적인 싸움을 가능하게 했고, 그룬발트 군은 여기 끌려다닐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유야 어떻든, 엘랑키아 군은 협정이 발효되면 방어 진지를 떠나야만 하므로, 더 이상 방어의 이점을 살릴 수 없게 된다.

정확한 협정의 내용이 어떻든, 엘랑키아와 폴름스는 더 이상 전쟁 상태가 아니게 되니까.

하지만 이 평화 협정은 엘랑키아와 그룬발트 사이에 맺어진 것이 아니다.

즉, 디오보르크 휘하의 그룬발트 연합군은 여전히 엘랑키아와 교전 상태라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엘랑키아 측에서 받아들였소이까?”

“저는 그냥 선제후 전하의 뜻을 전달하는 전령일 뿐이라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하께서 저를 보내신 까닭은 여러분께서 더욱 잘 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흐음···.”

그 후로 몇 차례 질문이 오고갔으나, 의문을 확실하게 해결할 만한 것은 없었다.

바스클라프라는 이름의 호위기사는 정말로 전령 역할만을 맡은 모양이었다. 너무 많은 것을 지니거나 알면 포로로 잡혔을 때 골치가 아파질 수 있었을 테니까.

“또한, 네프셀시엔 전하께서 디오보르크 공작께 전달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말해보시오.”

“만약 ‘이번 전쟁’이 잘 마무리 된다면, 다음 선제후 회의에서는 디오보르크 공작님을 확고하게 지지하신다는 내용입니다.”

“흐음··· 정말 뻔뻔한 엘프로군, 귀경의 주군이란 사람은.”

결론은 이것이었다.

폴름스의 선제후는 전쟁의 구도를 바꿀 생각이었다.

엘랑키아 침공군과 디오보르크 공작의 연합군만 판 위에 올려놓고, 자신은 빠져나가는 형태로 말이다.

회의에 참여한 모두의 머리가 각자 다른 계산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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