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9. 폴름스 전투, 임시 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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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포성이 멈추고 얼마나 지났지?”
“엿새가 지났습니다, 전하.”
“그런데 어째서··· 서로 싸우지 않고 눈치만 보고 있는 것인가?”
폴름스의 선제후, 네프셀시엔은 못마땅한 말투로 말했고, 궁정의 측근들은 뭐라 답하지 못한 채 그저 서로 눈치만 볼 뿐이다.
이미 장대한 연리목 세계수의 도시가 포위당한지 한 달이 훌쩍 넘었다.
외부와의 연락은 완전히 차단되었으며, 최근 성문이 열렸던 적은 실패했던 돌파 공격을제외하면 ‘공식적으로는’ 없다.
결국 네프셀시엔이 부하들로부터 보고 받는 외부 정보는 감시 망루에서 확인한 전황, 병력의 움직임 정도가 전부였다.
“아마도 최근의 격렬한 전투 직후, 서로 소강상태에 이른 것이 아닌가··· 추측합니다.”
“엘랑키아 군의 배를 넘는 대군이라 하지 않았나? 그룬발트의 선제후 중 여섯이 힘을 모아 보낸 병력인데 어째서 여태껏 눈치만 보는가?”
“....”
답답하기로는 선제후나 그 측근 신하들이나 다를 바가 없다. 서로 정보를 얻을 길은 없는 상황이니까.
지난 전투 이후, 폴름스 성내에서는 소요사태가 몇 차례 발생했다.
‘외부에서 도착한 지원군이 패배했다’
‘오히려 격퇴당해 전멸했다더라’
‘폴름스는 이제 고립무원의 상태가 되었다’
따위의 헛소문이 돌기 시작하면서, 폴름스에는 불분명한 공포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차라리 다시 엘랑키아 군의 공성포가 성벽을 때리고, 성벽을 타고 오르는 적병의 함성소리가 들리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엘랑키아 군의 공격이 ‘다시 시작될 지 모른다’ 라는 공포는 실제 공격당하는 공포보다 훨씬 공포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출처 모를 공포는 식료품 등 생필품 가격을 천정부지로 치솟게 만들었다.
문제는 딱히 물자가 부족한 상황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부족한 것은 주민들의 이성과 참을성 뿐이었으니까.
그냥 폴름스 거주민들도 문제였지만, 성내에 주둔하고 있던 용병들이 휘말리면서 상황은 일촉즉발에 가깝게 흘러 버렸다.
천 명 이상의 부하들을 먹여야 하는 용병대 보급관들이 서둘러 물자를 확보하려 했던 것이 사건의 시작이었다.
용병들이 엄청난 약의 식량을 주둔지로 옮기는 것을, 불안에 떨던 인근 주민들이 보게 되었고 바닥난 식량을 용병들이 독점하는 것으로 보인 모양이다.
결국 분노한 사람들이 길을 틀어 막고 식량을 나눌 것을 요구했고 당황한 용병들이 무장하면서 상황은 일촉즉발에 이르렀다.
다행히 더 큰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경비대의 중재로 문제는 해결이 되었고, 소요 사태는 해결되었다.
하지만 이런 비슷한 일이 비슷한 시기에 수 차례나 더 발생했고, 잘 마무리 되었다고는 하나 폴름스 구성원들의 마음 속에 큰 상처를 남겼다.
언젠가 물자가 떨어질지도 모른다.
사실은 아군이 패배할지도 모른다.
그런 불안감이 사람들의 마음을 잠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네프셀시엔도 그 신하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통제하고 배급제를 시행하자니, 폴름스는 너무도 거대한 대도시였고 인구도 많아 행정력이 감당이 될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정말로 물자가 부족하고 어려운 상황이라면, 억지로라도 통제에 들어가야 하겠다.
허나 지금이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이냐면, 절대로 그렇지 않았다.
엘랑키아 침공군의 폴름스 포위는 랄렌 강을 넘은 시점에서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것이었고, 전쟁 준비는 완벽하다고는 못해도 충분히 진행됐으니까.
게다가 원래부터 폴름스는 풍족한 도시이다. 넉넉잡는다 하더라도 성내 생필품은 반 년은 넉넉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폴름스 선제후 네프셀시엔이나, 엘랑키아 국왕 다고베르 2세나 반 년 동안이나 포위전을 이어갈 생각은 없을 테고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풍족한 상황에서도 식료품 가격은 널뛰기를 하고 주민들은 벌써부터 배를 곯을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각자 무엇이 문제인지 구체적으로 말도 못하면서 모두가 근심걱정에 시달리게 되는 것은 당연했다.
이는 그 정점, 선제후 네프셀시엔도 마찬가지였고.
“외부로 보낸 전령들에게서는 아무런 소식도 없소?”
“예, 전하. 안타깝지만··· 현실적으로 적의 이중 포위망을 뚫고 전령이 폴름스로 귀환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혈족들이 자랑하는 기프트도 이럴 때는 아무 소용이 없군.”
성에서 내보낸 전령이, 무사히 적진을 돌파해 밖으로 나갔다는 정황 증거는 여럿 있었다.
방어선 외곽을 따라 ‘미리 약속된 숫자의’ 기병이 ‘미리 약속된 색깔의 깃발을 달고’ 움직인다거나, 밤에 불빛으로 신호를 한다거나.
문제는 그들이 성 밖에서 디오보르크 공작을 중심으로 한 지원군 사령부와 만났다고는 해도 소식을 안으로 전달할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애초에 내부와 외부의 감시자 모두에게 들키지 않고 성벽을 오를 방법이 있다고 하면, 당장 엘랑키아 침입자들이 성벽을 넘고 있었겠지.
이 때문에 네프셀시엔을 비롯한 선제후령의 엘프들은 구성원들 중, 장거리 의사소통이 가능한 기프트들을 연구해 보았으나 모두 현실적이지 않았다.
과거에는 수백 킬로미터를 뛰어 넘어 머리에서 머리로 ‘생각’을 전달할 수 있는 기프트도 존재했었다고 한다.
뭐, 기프트의 힘 만으로 산을 움직였다던 전설 시대의 이야기일 뿐, 현재 남아있는 기프트 중에는 그런 비슷한 것도 없었다.
결국, 현실적으로 외부와의 의사소통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네프셀시엔 역시 더 이상 희망을 가지지는 않는다.
그러니 외부 세력에게 더더욱 화가 치미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그 건’에 대해서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소?”
“그 건이라 하시면···.”
“성문 앞의 사망자들을 수습하고 생존자들을 귀가시키는 협상 말이오.”
“아! 예, 전하. 이전 보고 이후 아직 특별한 진전은 없습니다···.”
이렇게 된 상황에서, 외부와의 유일한 통로는 이것 밖에 없었다.
공식적으로는 포위망 돌파 작전의 실패 이후, 다섯 성문 외부에 방치된 전사자들의 시신을 수습할 수 있도록 협상하고 부상자들 또한 귀가할 수 있도록 협상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담당자가 ‘독단적으로’ 그 이상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이는 모두 선제후 네프셀시엔에게 보고되고 있었고, 일부 답변에는 그녀의 의사가 반영되기도 했다.
즉, 모양상으로는 비공식적인 독단 행위지만, 실질적으로는 폴름스 선제후령과 엘랑키아 왕국 사이의 유일한 공식 의견 통로였다는 말이다.
“다음 회합은 언제 가지기로 하였소?”
“이틀 후 입니다. 마지막 협의 이후 매 일주일마다 만나서 포로 처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기로 하였습니다.”
“그럼 그때··· 물어보도록 하시오.”
“물론입니다, 전하. 그런데 무엇을 물어볼까요?”
“엘랑크의 왕이··· 무엇을 바라는지, 우리 폴름스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 오시오.”
그 말을 들은, 협상 담당 측근의 눈가가 조금 흔들렸다.
지금까지의 협상은, 비교적 ‘덜 중요한 회담’으로 위장할 정도로 비공식적이었다.
그 이유는 바로, 그들의 주군인 선제후가 엘랑키아 왕국을 극도로 증오했기 때문이었다.
엘랑키아 국왕이나 그 군대가 화두에 나오기만 해도 견디지 못할 정도로 분노를 뿜어댔기 때문에, 주변에서는 일부러 조심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직접 ‘엘랑크의 왕’을 입에 담으며 그 의도를 알아오라고 한다.
지금까지는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대사건이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혹시 달리 뜻하신 바가 있으시온지···.”
“그건 엘랑크 인들의 의중을 들은 후에 결정하겠소!”
“오, 온당하신 말씀입니다.”
평소와 달리, 원치 않은 행동을 했다는 불쾌감 때문인지, 네프셀시엔은 버럭 화를 내며 자신의 의도를 숨겼다.
네프셀시엔은 성격이 급하고 심기를 거스르는 이들에게 가혹한 군주였지만, 그렇다고 멍청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기만과 배신이 판을 치는 신성 그룬발트 제국의 선제후들 사이에서, 수백 년 동안이나 세력을 유지해온 능력있는 가문의 주인이다.
그러니 분명, 이번에도 올바른 판단을 할 것이고 폴름스는 살아 남을 것이다.
불안함을 감추지는 못하나, 그 충성심에는 한 점 의심도 없는 측근 신하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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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흘로 약정되었던 양군 사이의 휴전이 끝나고 닷새가 추가로 흘렀다.
하지만 폴름스를 둘러싼 전장에서는 전투가 다시 시작되지 않는다.
사흘 째의 대격전이 있던 장소라는 것이 상상도 가지 않을 정도로, 그후로 열흘이 흐른 현재 양측은 숨 죽이고 서로를 노려보기만 할 뿐, 어느 쪽도 공격에 나서지 않는 것이다.
물론 양측의 교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슈뵈켄의 북쪽에서, 브레세른의 동쪽에서, 가끔은 폴름스를 둘러싼 이중 포위망의 외부에서.
몇 차례 신성 그룬발트 제국군의 크고 작은 공격이 이루어 지긴 했다.
하지만 전투 초반처럼 사생결단을 내려는 듯한 기세는 아니었으며, 대체로 한 시간이 지나기 전에 철수로 끝나곤 했다.
수비하는 엘랑키아 측 역시 적극적으로 반격을 가하거나 추격전을 전개하지는 않았다. 오로지 몸을 웅크리고 단단히 지키기만 할 뿐이다.
그 후로도 양측이 보낸 소규모 정찰대가 조우전을 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이 또한 본격적인 백병전으로 확대되는 경우는 잘 없다.
마치 두 차례에 걸쳐 접전을 한 후, 터무니없이 많이 발생한 사상자의 숫자에 놀라 더 이상의 전투를 두려워 하는 것처럼.
약속이라도 한 듯, 어느 쪽도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쿵, 쿠웅! 쾅!
퍼어엉! 꽈광!
그나마 포성이 들리는 곳은 폴름스를 공격하는 공성포대의 진지 뿐이다.
하지만 포위 초창기와 같이, 하루 종일 수십 차례 반복되는 집요한 포격은 아니다.
몇 시간에 한 번씩, 띄엄 띄엄 들리는 포성은 엘랑키아 공성군도 전력을 다해 포격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대신 그 한 발 한 발이 집요할 정도로 철저하게 준비되고 계산된 포탄이기는 했다.
다만 이 정도 연사속도로는 수비군 측이 충분히 대응할 시간이 되기 때문에 치명타를 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룬발트 측의 중심, 디오보르크 공작의 사령부에서는 매일, 하루에 두 번 정도 회의가 이어지고 있었다.
“타를라 경?”
“앗, 펠쿠트 백작님···.”
펠쿠트 벨톤 폰 비델누벤 백작은 디오보르크 공작의 사령부를 방문했다가, 셋째 날 전투에서 함께했던 참모, 타를라 니케 폰 자이트리츠를 만났다.
“마침 잘 만났소. 사령부에서는 아직 아무런 지시가 없는 거요?”
“...저도 아직 다른 지시를 받지 못했습니다, 백작님.”
펠쿠트 백작의 말투에서는 진한 짜증이 묻어난다.
지금 그가 사령부를 찾아온 것은, 계속 기다리라는 지시만 내리는 사령부의 태도에 폭발해서 제대로 계획을 알려주지 않으면 고향으로 돌아가 버리겠다는 말을 하러 온 것이었다.
물론 펠쿠트 백작의 군대는 첫째 날과 셋째 날 전투 모두에서 크게 패했다. 그것도 더 숫자가 적은 상대에게 말이다.
그래서 한동안 병사들 사이에서, 이대로는 엘랑키아 상대로 이기기는 커녕 대등하게 싸울 수도 없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있었던 점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정적인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충분히 휴식을 취한 지금, 충분히 전투에 나설 준비는 되어 있다.
오히려 아무런 지시가 내려오지 않다보니 사기가 떨어질 지경인 것이다.
물론 신중하게 다음 행보를 고심하는 사령부의 입장은 이해한다. 더 이상 패배하면 안 되니까, 철저하게 준비한 공격을 하고 싶겠지.
하지만 휴전 기간을 포함해 벌써 열흘 째,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저앉아 있는 것은 큰 문제였다.
중견 장교들 사이에서는 ‘엘랑키아 군이 말라 죽을 때까지 포위망을 유지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부분이 크고 작은 영지를 경영하는 영주인 그들이 그렇게 오랜 시간이나 고향을 떠나 있을 수는 없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펠쿠트 백작 자신도 엘랑키아와의 전투는 금방 끝날 것이다, 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한 차례 싸움을 확실하게 이겨, 전공을 세우고 고향으로 돌아가면 된다 생각했던 것이다.
디오보르크 공작을 새로운 황제로 만들었다는 영광, 그리고 거기 딸린 이권과 함께 말이다.
하지만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는 않았고, 앞으로도 한 두 차례 싸움으로 전쟁을 끝내기는 물 건너간 것 같았다.
좋다, 여기에 죽치고 앉는 것이 전략이라면 기다려 주겠다. 하지만 디오보르크 공작과, 그 검은 늑대라는 총참모장의 속내를 들어라도 봐야겠다.
라는 생각에 사령부를 찾아 온 것이다.
“타를라 경, 타를라 경!”
그 때, 누군가가 타를라를 찾아왔다. 사령부에서 근무 중인 자이트리츠 전쟁관 보좌 참모 중 하나였다.
“지금 만프레트 경께서 부르십니다. 서둘러 사령부로 와 주세요. 앗··· 혹시 펠쿠트 백작님이십니까?”
“그렇다. 만프레트 경은 사령부에 계신가?”
“예, 그렇습니다. 펠쿠트 백작님의 지휘부에도 전령을 파견한 상태입니다. 괜찮으시면 지금 사령부로 함께 가시겠습니까?”
“좋네, 같이 가서 무슨 이야기를 하나 들어보도록 하지.”
펠쿠트는 어색한 표정의 보좌 참모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인가?”
“그게··· 폴름스에서 새로운 소식을 가진 전령이 도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