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8. 폴름스 전투, 임시 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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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트 경.”
휴전 마지막 날 저녁, 나는 국왕 다고베르 2세의 호출을 받아 아우페브라즈의 사령부를 방문했다.
황금과도 같았던 임시 휴전은 빠른 속도로 흘러갔다.
당연히 그 사이에 고위 장교들 끼리 느긋하게 앉아 대화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전투 직후의 소모된 군대와 재설치가 필요한 요새화 거점들은 끊임없이 지휘관의 ‘관심’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수고가 많으셨소. 자리에 앉으시오.”
“감사합니다, 폐하.”
공기가 잘 통하지 않아 약간 답답한 천막 안은 국왕과 나, 둘 밖에 없다.
한 국가의 주인과 이런 데서 태연하게 마주 앉을 수 있는 것은 전쟁터에서만의 특권이겠지.
목숨이 오고 가는 전장에서는 직위고하와 관계 없는, 경험해본 사람들만 알 수 있는 묘한 유대감이 생기고는 하니까.
국왕과 독대한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색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특히나 이런 애매한 상황에서는 말이다.
오늘따라 다고베르 2세는 고민이 좀 있어 보인다. 그러니 나를 불렀겠지만.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니 얌전히 기다린다. 국왕이 할 법한 질문을 예상해 보면서.
할 이야기는 무척 많았다. 휴전 기간 동안 전장을 돌아보며 제법 많은 데이터를 머리속에 입력했으니까.
마침내 근심으로 가득한 국왕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무래도 이 전쟁, 우리 망한 것 같소.”
“...예?”
···이건 전혀 예상 못했는데.
나는 놀라서 눈만 크게 뜨고 얼굴만 마주본다. 대체 무슨 생각일까.
잠시 기다렸지만 추가 설명은 없다. 게다가 진지하고 시무룩해보이는 국왕의 얼굴은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국왕의 의도를 짐작할 수 없어서,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더니 순간 국왕의 표정이 폭소로 무너져 내린다.
“푸하하하하! 미안하오, 에트 경. 그 반응을 보니, 우리 군은 아직 망한 것은 아닌 것 같소.”
“아니··· 폐하, 그게 무슨···.”
“아니오, 아니오. 귀관을 떠 본 것에 대해서는 사과하겠소. 혹시 놀라게 하면 본심이 나오지는 않으려나 생각했던 것이오. 적적하기도 했고.”
“설마 폐하께서는 제가 이미 아군은 망했다, 라고 생각하고 있으리라 짐작하신 것입니까?”
“하하, 그건 아니오. 아니지만···.”
다고베르 2세의 얼굴에는 특유의 장난기 섞인 웃음이 떠올라 있기는 했지만, 확실히 평소보다 고민이 있는 것으로 보이기는 한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소. 지난 전투와 같은 소모전··· 아군이 몇 번이나 버틸 수 있으리라 생각하시오?”
아, 이걸 묻고 싶었던 것이구나.
나는 중요한 긴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안심했다.
총사령관인 다고베르 2세가 진지하게 전황을 살피고 있기는 하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자칭 군인이나 지휘관을 자칭하는 귀족 나으리들 중에는, 전투와 직결되는 행위 외에는 신경쓰지 않는 자들이 정말 너무도 많다.
실제 전투와 전술 외에는 마치 자신이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듯, 군대를 유지하고 행군을 가능하게 하는 모든 요소는 없는 것처럼 취급한다.
아니, 정확히는 ‘그건 니들이 생각할 일이지’ 정도로 생각한다고 해야 할까?
마치 모든 병력과 자원이 전쟁터까지 최적의 전투력으로 도착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듯이 생각한다는 말이다.
서로 거리가 멀지 않은 이웃 세력이 한나절 싸움으로 승패가 갈리는 상황이라면 맞는 말이겠지.
그러나 보통 하루의 싸움을 위해서는 최소 몇 달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많다.
엘랑키아의 국왕은 적어도 그런 벽창호는 아니라는 사실은 전부터 알고 있긴 했지.
아니, 원래부터 부하들을 진심으로 소중히 여기는 타입이기는 했으니까, 어쩌면 당연한 것일까?
아마 궁정 생활비를 줄여서 왕실군 복지에 쓰는 국왕은 대륙 전체를 뒤져도 이 사람 말고는 없지 싶다.
그게 진심으로 병사들을 사랑하는 것일지, 병사들이 쟁취해올 승리를 사랑해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병사들이 목숨 바쳐 싸울 이유가 되는 것은 확실하니까.
그리고 분명히 말하자면, 나도 국왕과 비슷한 불안함을 느끼며 병력과 보급물자의 상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 소모전은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긴 하겠습니다. 앞으로 한 번 정도는 그렇게 싸울 수 있겠지만··· 두 번은 어렵다 생각합니다.”
“두 번째 싸움은 진다는 것인가, 에트 경의 생각은?”
“아닙니다, 폐하. 아마 이길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승리는 패배하는 것만 못한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흐음···.”
세상에는 이길 수 없는 싸움이 있고, 이겨서는 안될 싸움도 있다.
그리고 이겨도 소용없는 싸움도 있는 법이지.
현재 엘랑키아 군에게 필수적인 사항은, 이기는 것도 좋지만, 핵심 전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외람된 질문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폐하. 혹시 농담이실지라도 ‘망했다’ 라고 생각하신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거야··· 우리 기사들이, 아니 기사대가 입은 피해 때문이오.”
“기사대가 입은 피해라고 하시면···.”
“군마 말이오.”
역시, 다고베르 2세의 말은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다시 경험해 보았어도 엘랑키아 기사들은 최강이다. 같은 숫자로 정면 싸움에서 막을 수 있는 부대가 대륙에 얼마나 있을까.
특히 직접 눈으로 본 첼레스티나의 보고를 들어보자면, 국왕 직속 근위대의 경우 정면 싸움으로 호각 이상으로 싸우는 게 가능은 할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지난 전투, 전장의 좌측과 우측 모두에서 엘랑키아 기사들의 활약은 무서울 정도였다.
7천기가 넘는 중기병을 몰아 넣었던 전장 우측에서, 엘랑키아 기사의 돌격이 돈좌되기는 했지만 이는 적이 터무니 없는 규모의 예비대를 털어 넣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 순간이, 전장 전체에 걸친 엘랑키아 군의 수적 열세를 지워 버린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 사건 이후, 그룬발트 군 역시 예비대 고갈로 허덕이게 되어 이렇다 할 전술 개입을 못했으니까.
심지어, 엘랑키아 기사들은 앞을 가로막는 그룬발트 군을 보병 기병 할 것 없이 말 그대로 갈아버렸다.
물론 우익군의 중심은 왕실군 원수, 프레니히 드 루블랭 백작이 이끄는 보병 전력이기에 우익의 전과가 오롯이 엘랑키아 기사의 것이라 하기는 어렵다.
다만 불리한 전력으로도 끝까지 마을과 방어선을 지켜낸 것이 프레니히 백작 휘하 우익군의 전공이라고 한다면···.
적군의 전력 자체를 분쇄해 버린 것은 역시 대부분 엘랑키아 기사의 전공이라고 하겠다.
심지어 이건 엘랑키아 기사만의 장점은 아니지만, 중장기병들은 잘 죽지도 않는다.
유난히 튼튼한 갑주를 입은 덕분인지, 창에 찔려 낙마하거나 총에 맞아 기절해 죽은 줄 알았던 이들이 전투가 끝나고 절룩거리며 부대로 돌아오는 것은 낯선 광경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사대의 피해가 무시해도 좋을 수준일아는 것은 아니다.
분명 엘랑키아 기사 중 사망자는 그렇게 많지 않다.
그렇지만 기사대의 전력은 크게 저하되었다.
첫번째는 심각한 군마의 상실, 다음으로는 상당히 많은 부상자가 그 이유이다.
화약 무기와 장창 밀집 대열이 전장을 지배하게 되면서, 군마에게 전쟁터는 몇 배나 위험한 장소가 되었다.
총알에 맞을 면적도 훨씬 넓은 뿐더러, 마갑을 거의 쓰지 않게 되었기에 빽빽한 창벽에 대한 돌격은 말을 잃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불가능할 정도이다.
오죽하면 엘랑키아 기사들의 강점을 이야기 할때, 말을 잃더라도 도보 상태로 싸움을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 있을 정도일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전장 우측 중장기병대의 사망자 수는 15퍼센트 정도이나 군마의 사망률은 50퍼센트나 되었다.
문자 그대로 군마의 절반을 잃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현재 아군이 보유한 예비 군마의 숫자는 이를 다 채우기에는 심각하게 부족한 실정이다.
“...진영 내에서 개인이 가진 예비 군마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는 말은 들었소.”
“수요가 갑자기 늘었으니까요···.”
군마는 단순한 말이 아니다. 혈통을 관리하고 망아지 시절부터 체계적인 관리 교육을 통해 만들어낸 말 중의 말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 커도 안되고, 너무 작아서도 안되며, 너무 힘만 세도 안되는데, 너무 빠르기만 해도 안된다.
모든 말들은 나름의 쓰임새가 있지만 군마는 그 중에서도 적절한 밸런스가 중요하다.
그런데 그런 말들을 갑자기, 그것도 대량으로 구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각종 군수물자는 대부분 부족함 없이 수급했다 생각하는 트랑카벨 영지군에서도, 군마 만큼은 수급하기 힘들어 고생하지 않았던가.
산악마를 활용한 추격기병이나, 평범한 짐말을 활용한 용기병대를 추가 창설한 것은 수적으로 열세인 중기병대를 보완하기 위한 보조 편성이었으니까.
“짐이 자랑하던 엘랑키아의 기사 전력이 절반으로 줄었소··· 이걸 어쩐단 말이오.”
“군마를 수급하고, 부상자들을 치료하면 회복 될 것입니다.”
“아니··· 뭐 그런 원론적인 대답을 듣고자 했던 것은 아니오만.”
“하지만 생각보다 큰 병력 손해에 놀란 것은 그룬발트 측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폐하. 쉽게 대규모 전투를 도발하지는 못하겠지요.”
“그 사이에 대책을 세워야 하겠군.”
오늘로서 휴전은 마지막이다. 이론상, 자정부터 휴전이 끝나므로 적이 야습을 해올 가능성도 전혀 없지는 않겠다.
그래서 전방 부대에는 대응 명령을 내렸고 충분히 준비된 것도 확인했다.
하지만 적도 당장 공격을 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확신도 있었다.
그러나 내일이 아닐 뿐이지, 언젠가 전투는 재개 될 것이다. 그 때와 규모를 예측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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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당장 공격은 어려울 것으로 생각됩니다, 공작님.”
“아직 병사들이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희들도 말입니다.”
같은 시각, 디오보르크 공작의 사령부에서도 고위 장교들의 논의가 늦게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한마디씩 부정적인 언급을 하는 귀족 군인들의 표정이 좋지 않다.
이들의 대부분은 전투 첫 날만 해도 빠른 공세를 외치며 자신을 선봉에 세워 달라 주장하던 인물들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이렇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들의 얼굴에서 공통적으로 읽히는 감정은 두려움과 수치스러움이었다.
디오보르크 공작은 침울한 표정으로 그들의 건의를 듣고만 있었다. 이는 총참모장 만프레트 역시도 마찬가지였고.
공격을 부르짖지 못하는 자신이 수치스럽다.
그러나 싸우기에는 무섭다.
총참모장으로서 만프레트가 우려하는 것은, 이들이 느끼는 두려움이 패배나 불리함에 대해서가 아니라 엘랑키아 군 자체에 대한 것으로 번지는 것이었다.
아니··· 이미 엘랑키아 기사에 대한 공포는 본능 수준을 넘어 아군 진영에 만연한 전염병 수준이겠지.
이는 만프레트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등 뒤를 스칠 정도로 다가왔던 기사의 칼날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리라.
디오보르크 공작 역시 비슷한 감정을 느꼈는지 그 후로 유난히 말 수가 적어지고 유쾌함이나 적극성도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패배라는 이름의 족쇄.
비록 붕괴에 이르는 전면적 패배는 아니었으나, 한 번 패배를 맛본 군대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패배를 털어 버리고 모두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것이 영웅의 자질이라고 하지만, 디오보르크 공작도 만프레트도 그런 타입은 아니다.
지금으로서는 사령부가 전투를 강요하고 전장으로 밀어 넣더라도, 중견 장교도 병사들도 이를 거부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다행히 전쟁이고 뭐고 때려 치우고 강화나 하자는 의견은 보이지 않아 다행이었다.
천천히, 천천히 군의 체질을 바꿔야 한다. 패배의 색을 떨쳐 버리고, 자신감을 되찾아 다시 싸울 수 있는 상태로 복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작더라도 승리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