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536화 (536/556)

48-5. 폴름스 전투, 임시 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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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사흘 째, 자이트리츠 전쟁관의 두 참모가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였다.

참모들 중 최고 선배이자, 총참모장 역할을 하고 있는 만프레트 그로블 폰 자이트리츠.

그리고 그가 가장 신임하는 후배, 플로리안 도프 폰 자이트리츠.

늦은 시간, 간신히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었던 소중한 기회였다.

“...큰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만프레트 경. 전쟁관의 참모로서 변명할 수 없는 잘못입니다.”

어두운 표정의 플로리안이 고개를 깊게 숙인다.

그는 격전이었던, 사흘 째의 치열한 전투에서 남부 전선의 아룬하비크 공격군을 담당했다.

바로 그 브라우나인 선제후령의 후계자, 세두시온 공을 보좌하며 숲을 통과해, 요새화된 마을을 공격하는 군에 속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세두시온 공은 이 충실하고도 유능한 전쟁관의 참모를 신뢰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지휘를 방해하는 존재로 생각해서 본인이 직접 주력군을 맡았으며, 플로리안에게는 후방 예비대와 보급을 맡겼던 것이다.

물론 디오보르크 공작 휘하 대군 전체의 보급을 맡은 플로리안이란 점에서 적합한 인선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이는 지휘에서 배제 시켰을 뿐이었다.

그 결과는 누구나 알지만 전투의 승패로 나왔다.

자신들이 ‘숲을 통과해 적을 습격한다’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던 세두시온의 생각과 달리, 적은 그들의 공격을 완벽히 예상하고 있었다.

지휘관의 닥달에 제대로 된 공격 계획조차 없이 숲을 뛰쳐나간 브라우나인 군은 손쉬운 표적이 되었다.

완벽하게 공격 지점을 예상해 조준까지 맞춰두었는지, 쏟아지는 화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전위 보병대가 순식간에 갈려나가는 그 순간까지도, 후위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몰랐다.

울부짖으며 도망치는 생존자들과 카펫처럼 깔린 시체 더미를 본 후에야 현실을 파악했던 것이다.

보병들을 지원하기 위해 기병들이 뛰쳐나가 보았지만, 너무 후방에 밀려 있었기 때문에 제 시간에 맞출 수 없었다.

브라우나인이 자랑하는, 총기로 중무장한 정예 기병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엘랑키아 기병의 요격에 뿔뿔이 흩어질 수 밖에 없었다.

무모함으로 지속된 공세는 세두시온의 야전군에 남아있었던 실낱같은 희망조차 말살시켰다.

퇴각이 가능한 한계선까지 넘어버린 병력은 완전히 붕괴, 도망치기 시작했다.

적의 역습에 사령관인 세두시온까지 포로로 붙잡히고 말았으니, 그 난맥상은 굳이 플로리안이 입으로 표현할 필요도 없었다.

뒤늦게라도 플로리안이 나서 잔존병력을 중심으로 수습하지 않았다면, 정말 야전군 전체가 사라졌을지도 모를 끔찍한 패배였다.

문제는 이 때, 플로리안이 정상적인 판단이 어려울 정도로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다시 아룬하비크 공격을 시도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야전군의 참모로서 공황에 빠진 병사들을 두고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도망친 것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행동했다는 기억을 남기고 싶었습니다.”

만프레트의 질문에 플로리안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한다.

고열로 간혹 이성이 끊기는 상황에서도, 플로리안이 생각했던 것은 이 병력을 어떻게든 살려서 전력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 정도의 대승리를 그것도 초전에 거두었으니 아룬하비크 수비군이 방심하고 있으리라는 예상도 없지 않았다.

무모했던 세두시온과 달리, 망신창이 병력의 지휘를 이어 받은 플로리안은 정찰병을 보내 장시간 아룬하비크를 관찰했다.

적지 않은 병력이 외부 지원을 위해서인지 떠나가고, 또 남으 병력의 일부가 휴식을 위해서 후방으로 이동하는 것을 확인했다.

그 후에야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내며 재공격의 기회를 보았으나···.

엘랑키아 수비군은 조금도 방심하고 있지 않다는 것만 확인하게 되었다.

세두시온의 첫 공세가 뚫지 못했던 마을 외곽의 방어선에 갑자기 활기가 돌아왔으며, 마을 측방의 기병 대열이 다시 정돈되는 데는 3분도 걸리지 않았다.

거기에 병사들이 체력을 회복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고, 지난 전투의 기세조차 아직 남아있다.

혹시라도 첫 공세가 적의 세력을 약화시켰기를 바랬으나, 오히려 더 강해진 것 같았다.

플로리안은 진심으로 적장에게 감탄했다.

아무리 요새화된 아룬하비크 마을이라는 방어 진지에 의존했다고는 해도, 세 배에 가까운 세두시온의 공격을 완전히 분쇄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설령 요새 없이, 평지에서 싸웠다고 한들 아군이 승리할 수 있었을까? 플로리안은 그 조차도 부정적이었다.

이미 브라우나인의 병사들은 오늘 충분한 희생을 치루었다.

그렇게 생각한 플로리안은 공격을 포기하고 병력을 되돌렸다.

그리고 마지막 후미 부대까지 전투 없이 안전하게 퇴각했음을 확인한 플로리안은···.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정확한 판단이 서지 않을 정도로 펄펄 끓는 고열 상태에서 부대를 수습하기 위해 최후의 최후까지 뇌를 혹사한 대가였다.

만약 주변에서 장교와 병사들이 받아주지 않았다면, 움직이는 말에서 떨어져 크게 다쳤을지도 몰랐다고 한다.

“...정말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면목 없습니다. 중요한 퇴각 지휘 도중에 지휘부를 떠난 것이나 다름 없으니···.”

“보고는 받았네. 기절하기 직전에 퇴각로에 대한 지시를 마쳐 놓았기 때문에, 그 후로 무사히 전장을 이탈할 수 있었다고 하더군.”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런 지시를 내렸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얼떨떨한 모양인지, 플로리안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본래 브라우나인 선제후군의 장교도 아니니, 만약 병사들에게 밉보였다면 그대로 버려졌겠지. 귀관이 그들에게 신뢰받았다는 증거일세.”

만프레트는 딱딱한 말투지만, 플로리안을 인정하는 말을 했다.

실제로 지휘부에 갑자기 들어온 격인 고용 참모는, 군대가 패배하는 경우 그 책임을 죄다 뒤집어 쓰는 경우가 있다.

쫓겨나는 경우는 다반사이며, 심지어 분노한 병사들을 진정시키기 위한 희생물로 던져주는 경우까지 있다.

하지만 플로리안의 경우, 전투에서 처참하게 패배했는데도 병사들이 일부러 챙겨서 돌아왔다는 것은 그만큼 인정받았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이렇게나 자기 관리에 실패한 것은 처음입니다.”

“아직 아무 준비도 되지 않은 10만 대군의 편성과 보급을 맡았으니··· 내가 과도하게 일을 맡긴 탓이기도 하네.”

그 후로도 거의 48시간 동안, 플로리안은 고열과 싸우며 의식불명상태에 빠져있었다.

그러다 열이 내리고 깨어난 직후, 다행히 휴전이 성립되어 전황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심했던게 바로 얼마 전 일이다.

“지금 몸 상태는 어떤가?”

“이제 다 나았습니다. 본의 아니게 몇 년치 잠을 몰아서 잔 느낌이군요.”

“그래, 다행이군. 막 자리에서 일어난 상황에서 미안하지만, 총사령부로 돌아오도록 하게. 할 일이 많군.”

“알겠습니다. 재편성 업무입니까?”

사흘째의 격전에서 그룬발트 제국군이 얻은 게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용으로 보면 완전한 패배였다.

패배에 대한 불만으로, 전쟁관 참모들의 입지 또한 흔들리고 있었다.

명성 높은 자이트리츠의 명 참모들을 고용해 지휘권까지 맡겼는데, 신성 그룬발트 제국의 대군을 패배로 몰아넣었다··· 라는 말이다.

허나 신기한 것은, 그런 일방적인 책임론만이 대세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에 만만치 않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관 참모들이 아니었으면 엘랑키아 군과 호각으로 싸울 수는 있었을까?’라는 반성론도 존재했다.

제국을 섬기는 기사로서 군사적 소양을 교육받은 기사들이고,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나름 전장을 살피는 능력을 가진 자들이니까.

평균적으로 엘랑키아 군과 그룬발트 군 사이의 기량에는 격차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심지어 어쩔 수 없는 상대라 생각했던 기병 전력의 격차 뿐 아니라, 보병 전력에서도 격차가 느껴졌다.

엘랑키아 군은 국왕을 중심으로 아주 오랫동안 이번 원정을 준비해 왔다.

그에 비해서 자신들은 기세와 세력만 믿고 오만했던 것은 아닐까.

그냥 싸웠다면 오히려 더 큰 패배를 당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진지한 생각이 그룬발트 군 진영 전체에 퍼지고 있었다.

특히나 직접 각 전선을 이끌었던 지휘관과, 그 휘하 중견 장교들의 평가는 호의적인 편이었다.

심지어 총사령부에 의해 무리한 사수 명령을 받았고, 구름처럼 몰려오는 엘랑키아 기사들과 사투를 강요 받았던 좌익군조차 말이다.

휘하 병력이 거의 갈려나가는 참혹한 싸움을 계속했던 레트폴레 아티오크 폰 벤셀샤프 후작은 분노로 몸을 떨면서도 말했다.

‘거기서 우리가 물러났다면 전선 전체가 무너졌을 것이다’

경험 많은 군인으로서, 결국 총참모장 만프레트의 판단이 옳았음을 인정한 것이다.

호기를 부리다가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뻔한 디오보르크 공작이야 말 할 필요도 없었고···.

덕분에, 자이트리츠 전쟁관의 참모들은 한 번 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번에야 말로 그룬발트 대군을 이끌어 엘랑키아 군을 격파해야 했다.

아니, 한 번 더 패배한다면 자리 보전의 문제가 아니라 아마도 디오보르크 공작을 정점으로 한 군세 자체가 유지되지 못할 것이다.

다행히 아직 병력은 ‘충분’ 했다.

“합류하지 못했던 후속 병력이 속속 도착하고 있고, 어제는 나우데사에 파견되었던 용병대도 돌아왔네. 불필요한 병력 분산이었지.”

만프레트는 얼굴을 찡그리며 혀를 찼다.

초반에는 손발이 맞지 않은 선제후들이 제각각 진행한 음모와 전쟁 준비 때문에 병력이 분산되었다.

그리고 엘랑키아 군의 침공이 기정사실화 되고, 디오보르크 공작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이 결성되면서는 성급함이 문제였다.

마침 이 무렵 지휘부에 합류한 전쟁관 참모들로서는, 이미 정해진 타임 라인을 따르는 수 밖에 없었다.

허나 이 타임 라인은 오로지 정치적으로 보여주려는 목적으로, 디오보르크 공작이 정한 것이었으며 군사적으로 어떤 고려도 없었다.

더 큰 활약을 할 수 있었던 플로리안이 과로에 시달리다가 결국 앓아 누웠던 것도 원인은 사실 이것 때문이니까.

만약 며칠, 적어도 일주일 정도만 준비 시간을 더 가질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이제야 합류했거나, 하루 이틀 내로 합류할 예정인 병력이 북부 전선이 개전한 당시 후방에 있었다면···.

이미 전투가 끝난 와중에 만약을 생각하는 건 쓸데 없는 생각이지만, 그래도 아쉽다는 생각을 참을 수는 없었다.

“그럼 다음 전투는 우리가 더 우세한 전력으로 싸울 수 있겠군요.”

“그렇지. 이번에는 피해를 많이 입거나, 전선을 이탈했던 부대들이 많네. 재편성을 맡아 주겠나?”

“물론입니다, 만프레트 경.”

플로리안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병력의 많고 적음이나 강하고 약함을 판단하여 새로이 편성하는 것은 그가 아주 잘 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지난 전투의 사상자 결과를 판단하면서, 의외의 사실이라고 알게 된 점이 적지 않았다.

그런 점들을 잘 고려하면, 오히려 충분히 시간을 두고 싸운다면 유리해질 부분이 한 두개가 아니었다.

심지어 엘랑키아 군이 얼마나 강한지 직접 느낀 귀족 지휘관들은 더욱 협조적으로 나오리라.

“그런데··· 만프레트 경, 개인적으로 궁금한 점을 질문드려도 되겠습니까?”

“개인적인 질문이라고? 무엇이 궁금하지?”

“궁금함 자체는 개인적인 것이지만, 이번 전투와 연관이 있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흐음.”

만프레트는 궁금하다는 듯, 한쪽 눈썹을 세우며 무엇이든 물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플로리안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연다.

“제가 공격했던, 아룬하비크의 방어를 지휘했던 용병 지휘관에 대해서 말입니다.”

“....”

“혹시 그 사람이, 만프레트 경께서 말씀하셨던 옛 동문··· 이 아니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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