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4. 폴름스 전투, 임시 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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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마무리한 휴전 협의에 따라, 나흘의 시간이 생겼다. 이제 하루.
당일 저녁부터 생각하면 하루 반이라고 할까. 야전군끼리 대치한 전장에서 이런 긴 휴전을 가지는 것은 처음인 것 같다.
병사들에게 휴식을 주고 힘을 비축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지휘관들로서는 절대로 허송세월할 수 없는 황금과도 같은 시간이다.
왜냐하면 적군 역시 그 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전투 직후, 혹은 전투 도중에도 매우 중요한 재편성은 전쟁을 실제로 해 본 적 없는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가령, 게임에서는 부대의 통합과 분리, 증원이 자유롭다 보니 병사나 부대가 수치로 환산되는 데 거리낌이 없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900명짜리 부대와, 300명짜리 부대 3개가 가지는 입장은 상당히 다르다.
또한 정원 1000명인 부대 두 개가 각각 50퍼센트의 피해를 입어 절반만 남았다고, 두 부대를 하나로 통합한다?
맹세코 절반만 남은 두 부대가 따로 싸우는 것 만큼의 전투력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각 연대가 가지는 전통이란 중요한 것이고, 구성원들은 이질적이다. 뭐 훈련이나 전투 방식까지 가면 말 할 것도 없고.
트랑카벨 가문에서 영지군을 창설하며, 가급적 모든 연대를 표준화 시키고 동등한 부대를 만들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각 연대마다 개성이 생기고, 전통이 생기고 장단점이 생기지 않던가?
이는 마치 테세우스의 배 역설처럼, 시간이 흐르고 구성원들이 대부분 바뀌더라도 마치 마법처럼 ‘연대의 전통’이라는 형태로 남게 된다.
그나마 전원이 블랑독 출신에, 비슷한 시기에 훈련을 받아 임관한 장교와 병사들로 이루어진 부대끼리도 이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출신이 전혀 다르고, 서로 존재조차 몰랐던 다른 부대들을 그저 지휘와 통제 편의를 위해 하나로 묶는다고 한 부대가 될 수 있을리 만무하다.
또한 부대를 구성하는 것은 인간이다. 그냥 데이터상 표시되는 숫자 1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상자를 많이 발생한 부대의 병사들은 삶과 죽음이 갈리는 공포감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고, 많은 동료를 잃은 슬픔과 그럼에도 이겨내고 살아남았다는 자부심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냉정한 이야기지만, 그들을 위로하고 또한 인정하면서 다음 전투에 망설임 없이 나설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지휘관의 중요한 역할이다.
전투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위험한 일이고, 병사들은 자신이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싸운다.
하지만 ‘반드시 죽는다’거나 ‘개죽음이다’ 라는 생각을 한다면 결코 힘껏 싸울 수 없으리라.
이런 점들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재편성이란 그냥 서류상으로 처리하기는 좀 어려워진다.
당연히 사령부 단에서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이를 맡아서 수행할 중견 지휘관이나 참모진을 평소에 신경쓰는 것이고···.
병사들을 끔찍이도 아끼는 다고베르 2세 덕택에 엘랑키아 군, 적어도 왕실군은 비교적 이런 부분이 잘 되어 있는 편이다.
병사들과 고위 장교들 사이에 신뢰도 있고 말이다.
그렇게 상처입은 부대들을 복구하는 한편, 사령부에서 더 중요하게 신경써야 하는 부분은 보급이다.
굶은 병사가 잘 싸울 수 없는 건 물론이거니와, 현재 가장 심각하게 여겨지는 건 화약이다.
사흘 째의 격전에서··· 이미 우리군은 화약 소모량은 예상을 훌쩍 뛰어 넘었다.
어느 정도냐면, 하루 동안의 전투에서 예상했던 최대 소모량의 거의 두 배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수적으로 열세에 처한 병사들에게 화약을 아껴 쓰면서 싸우라고 할 수도 없다.
급히 파견된 티테니아와 첼레스티나가 자칫 무너질 뻔 한 좌측을 구원했던 것도 우세한 화력을 아낌없이 활용했기 때문이 아니던가.
결정적인 국면에는 항상 기병들이 활약했지만, 그들이 활약할 수 있도록 빈 자리를 채워 주었던 것은 바로 보병과 포병의 화력이다.
“그래서 공성부대에는 포격 제한령이 내려졌습니다.”
“그렇군요···.”
“화약을 아끼는 게 아니라, 계획적인 포격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이것도 한계가 있겠지만요.”
“참 고생이십니다.”
아우페브라즈의 사령부로 찾아와 내 앞에 앉아 고충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공성공병대를 지휘하며 폴름스 포위망을 책임지고 있는 에티엔 드 크레이 공작이다.
폴름스 포위망은 전투 초기에는 아주 중요한 포위망이었으나, 그룬발트 지원군이 도착해 주 전선이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곳이 되었다.
병력도 무기도 화약도 야전군으로 차출되고, 현재는 오히려 부족한 병력으로 도시 전체를 감싼 긴 포위망을 유지하느라 고생하고 있겠지.
“고생은요, 오히려 할 일이 줄어서 좋죠. 처음부터 포격만으로 저 커다란 폴름스의 성벽을 전부 무너뜨리고 함락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까?”
하지만 이 국왕의 동생, 에티엔 공작은 무척 긍정적인 모습으로, 자신의 처지에 불만은 없는 모양이다.
나와 에티엔 공작은 악연이라면 악연이다. 정확히는 트랑카벨 가문과 악연이라고 해야 할지.
일단 이단을 토벌하겠다며 국왕이 주도한 성전군이 블랑독을 침공하였을 때, 사령관을 맡았던 인물이다.
또한 트랑카벨 가문 최고의 재원이자 ‘실세’인 아쥬흐 트랑카벨에게 청혼의 뜻을 밝힌 적도 있었지. 주디칼리에 유학하던 시절 같이 학교를 다니다 한 눈에 반했었다나.
물론 이 모든 것은 전쟁을 피하고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에티엔 공작의 진심어린 호의에서 나온 행동이긴 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쟁을 앞두고, 막강한 중앙 정부의 세력을 등에 지고 한 행동이라 생각하면 참 복잡해진다.
그런데 그런 과거와는 무관하게, 에티엔 공작은 좀처럼 미워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샹다메리 전투에서 패전한 후, 책임을 지기 위해서 공직을 내려놓고 꽤 오랫동안 칩거 생활을 했던 모양인데.
그 후 맡은 일은 전혀 화려하다고 할 수 없는, 오히려 국왕의 사촌 동생인 공작 각하가 하기에는 ‘천한’ 일일 수 있는 공병감 일이다.
본인이 진심으로 마음에 드는 것인지, 형님 폐하의 일이니 열성적으로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천직임은 확실해 보였다.
실제로 짧은 기간에 엘랑키아 왕실군의 공성공병은 아주 훌륭한 수준에 올랐다.
아무래도 엘랑키아라는 강국의 군주가 전폭적인 지원을 해 주어 그렇겠지만, 공성전과 진지전이 일상인 주디칼리에서도 이런 전문적인 공병대는 본 적 없으니까.
아무튼 다소 어색하기는 하지만 결코 불쾌하지는 않은 상대인 이 사람이 갑자기 나를 찾아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형님 폐하께서··· 폴름스와의 협상에 대해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협상이요? 함락이 아니라 협상이라 하셨습니까?”
“예, 협상이 분명합니다.”
나는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아서 깜짝 놀랐다.
내가 공성전 전문가는 아니지만 전술 이론적으로야 조언은 할 수 있다. 다른 전문가도 소개시켜 줄 수 있고.
하지만 협상이라니··· 폴름스는 아직 성문을 굳게 닫고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게다가 전투가 아닌 협상에 내가 무슨 조언을 하겠는가!
“설마 폴름스 측과 협상을 이미 진행하고 계신 겁니까? 폴름스의 선제후는··· 상당히 완강하고 엘랑키아 왕국을 미워하는 엘프로 알고 있었는데요.”
“아직 공표할 단계는 아닙니다만, 저희 쪽도 어제 실무자 사이에 접촉이 있었습니다.”
“어제요? 휴전 협의가 진행되던 동안 말씀이십니까? 아니, 그보다 공표할 단계가 아닌데 제가 알아도 되는 문제인가요?”
“예. 형님 폐하께서 에트 경에게 조언을 청해 진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아··· 네.”
···그런 일이 있었구나.
현재 국왕 다고베르 2세는 모든 진영을 다 돌아볼 생각인지, 폴름스 주변 방어선을 돌아보고 있었다.
방어선을 살피는 의미도 있겠으나, 힘든 전투를 겪은 병사들을 격려하는 게 주 목적일 것이다.
그런 와중, 비밀리에 폴름스 안쪽에서도 나름의 외교전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말이겠지.
“말씀하신대로 폴름스의 선제후는 우리 엘랑키아 왕국을 매우 증오하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어제 실무자단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쪽에서 먼저 청한 것인가요?”
“성문이 열리더니, 백기를 든 사자가 찾아왔습니다. 명목상으로는 포로 석방과 전사자 시신의 수습에 대한 협상이었습니다만.”
폴름스 외부에서의 전투가 한창 진행되는 동안, 도시 쪽에서도 몇 차례 전투가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아니, 출성공격이 너무 뻔하게 예상되었기에 미리 병력을 배치해서 최대한 단시간에 전투를 끝내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기로 지시한 게 나였으니까.
무리한 공격 때문에 사상자도 많이 생기고 포로로 잡은 자들도 많다고 들었다.
“선제후가 허락한 사항이 확실한가요?”
“묵인 하에 진행되는 일입니다. 거기 아마 실무자의 독단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래서 자존심만 센 엘프들이 질색이다. 폴름스의 선제후인 회색 마녀인가 뭔가 하는 엘프야 엘랑키아에 대한 증오를 숨기지도 않기로 유명했다.
원래 엘랑키아 북부를 영지로 삼았던 가문이라고 하고, 최근에도 전쟁에서 져서 팔스부르 요새와 랄렌 강 유역을 빼앗겼으니 증오할 만도 하지.
하지만 엘랑키아 북부 상실은 벌써 천 년도 지난 일인데, 아무리 수명이 긴 엘프라고 해도 여전히 증오심을 가지고 있다니···.
그런 와중에도 협상의 끈을 연결하는 것을 묵인하긴 했다니 최소한의 현실 감각은 있는 모양이다.
“그럼 협상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엘랑키아 왕국과 폴름스 선제후령 사이의 평화 조약입니다.”
폴름스를 구원하기 위해 야심차게 몰려온 디오보르크 공작의 군세가 미덥지 못하다고 판단한 것일까.
실무자단에서 논의를 한다는 이야기는 공식적으로 양측의 상위 결정권자까지 개입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구실일 뿐, 공표를 하지 않을 뿐이지 양측 결정권자들은 도중 상황을 보고 받으며, 지시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이 ‘실무자 논의’가 공식화 되는 것은 폴름스의 선제후가 도저히 아군을 믿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겠지.
비겁한 것 같지만 현실적인 판단이다.
왜냐하면 외부 지원군이 패배하여 선택지가 최후의 항전 혹은 항복밖에 남지 않는 때가 오면 훨씬 가혹한 조건으로 논의가 시작될 테니까.
적어도 같은 주군을 섬기는 관계라면 배신 행위라고 매도라도 하겠지만, 폴름스는 폴름스대로 변명이 있다.
이적행위를 하는 게 아닌 선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게 당연하니까.
아마 외부의 어느 누구도 선제후령이 폐허가 되도록 최후까지 싸워 줄 것이라 기대 하지도 않겠지.
“평화조약은 엘랑키아가 유리한 상황에서 진행하는 것이겠죠. 그럼 조건은 무엇이 될까요?”
“물론 아직은 직접적으로 이야기가 나오지는 않았습니다만···.”
에티엔 공작은 잠시 뜸을 들인다.
중요한 사항을 숨기려 하거나, 혹은 일부러 극적인 분위기를 잡으려는 모습은 아니다.
다만 이 젊고 충성스러운 공작은 만약에라도 자신이 함부로 말했다가 큰 일을 그르칠까봐 걱정이 되는 듯한 태도였다.
“...이전 전쟁에서 엘랑키아가 차지하여 분쟁과 불만의 대상이 되는 랄렌강 유역에 대한 완전한 권리 포기입니다.”
“선제후 양반이 큰 결심을 하셨군요.”
“물론 어디까지나 ‘저희 생각’일 뿐이지만요.”
영토란 예민한 문제이다. 설령 그게 별 가치 없는 황무지에 불과하더라도 목숨이 오고 갈 정도로 큰 분쟁이 생기는데.
팔스부르 요새와 랄렌 강 유역은 그냥 풍족한 지방 정도가 아니다.
양국이 접경한 전략적 요충지에, 상류와 하류를 잇는 무역의 중심지이기까지 하니까.
실제로도 이번 전쟁이 발생하면서 물류를 통제하자마자, 상류 쪽 그룬발트 영지들이 난리가 났으니 말이다.
지난 전쟁에서 엘랑키아가 승리하여 영토를 뜯어내기는 했지만, 관례상 폴름스 선제후 측의 권리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직은 해당 지역을 되찾기 위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명분’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만약 다른 전쟁에서 엘랑키아가 패배하여 해당 지역이 ‘매물’로 나온다면, 폴름스 선제후령이 우선권을 가진다. 봉건 제도의 영토 관계라는 것이 원래 그렇다.
그런데 공식적으로 해당 지역에 대한 권리를 포기한다고 하면···.
앞으로 해당 지역을 돌려받기 위해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다.
심지어 엘랑키아가 전쟁에서 패배하여 해당 지역을 포기하게 된다면, 그 새 주인은 다른 국가, 혹은 가문이 될 수 있다.
폴름스는 권리를 포기했으니까!
엘랑키아 입장에서야, 해당 지역이 더 이상 분쟁지역이 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이점이 되는 것이고.
···단순히 도시의 포위를 푸느냐 마느냐를 넘어 선 일이 되어 버렸잖아.
“그래서 사절단은 언제 만나기로 하였습니까?”
“이틀 후, 휴전 사흘 째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