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3. 폴름스 전투, 임시 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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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에서 마주한 양군은 서로가 상대방의 목숨을 빼앗고 타도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쟁 기간 내내 서로를 증오하고 저주하며 삶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 불태우는 복수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마 그런 식으로 살다가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전장에서 죽기 전에 신경이 먼저 타 버릴 것이고.
물론 고향이 불타고 가족이 학살당했다거나, 동료들이 비무장한 상태로 살해당했다거나 하는 개인적인 원한이 있다면 좀 다르겠지만.
결국 전쟁이란 인간과 인간이 만나서 하는 것인지라, 상대를 마음 속 깊이 증오하는 것은 쉽지 않다. 원래 무언가를 미워하는 것도 피곤한 일이기도 하고.
오히려 전장에 나선 장교와 병사들은 의외겠지만, 대체로 전쟁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는 사람들이다.
말이 국왕을 모시고 왕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라고들 하지만 이게 생각해보면 쉽지 않다.
대부분의 하급 귀족들과 평민들에게 국왕이란 주군의 주군, 혹은 주군의 주군의 주군 정도로 별로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 윗사람에 불과하다.
심지어 의무에 따라 끌려온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전쟁터··· 설령 여기서 패배한다고 해도 고향에까지 전화가 미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주군, 그리고 충성과 명예를 외치는 높으신 분들보다는 비슷하게 꾀죄죄한 몰골은 한 적군 병사들에게 더 동질감을 느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물며 대를 이어온 주종관계로 엮인 것도 아닌, 금화 몇 푼과 계약서로 이어진 용병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전장에 나서 서로가 서로를 죽이려 할 때야 어쩔 수 없겠지만, 그 외의 경우는 상대를 증오하거나 최후까지 추격해 죽이려 드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런 이유로,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 기간에는 장교나 병사들이나, 상대를 발견한다고 해도 죽고 죽이는 혈전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오히려 중립지대에서 만나면 잡담을 나누거나, 부족한 보급품을 교환하거나, 심지어 정보를 주고 받는 경우까지도 생긴다.
나는 그룬발트의 디오보르크 공작이 보냈다는 사자가 있는 회의실 막사를 바라보면서, 그런 쓸데 없는 생각을 했다.
근위 기사들이 막사 주변을 지키고 있는 이유는 혹시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까 두려워서겠지만, 굳이 복수를 하겠다고 달려드는 아군은 없는 것 같다.
기껏해야 무언가 벌어지고 있다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멀리서 바라보는 이들이 좀 있는 정도일까.
“그룬발트 측은 휴전을 제의하려고 하는 듯 하오. 짐이 에트 경을 부른 이유는, 휴전을 받아들여야 할지, 받아들인다면 어느 정도의 기간으로 정해야 할지 논의하고 싶었기 때문이오.”
“아주 중요한 문제겠군요···.”
“물론, 그 외에도 다른 요구가 오고 갈 것이 분명하겠지. 또한 우리가 필요한 내용도 요구해야 하오.”
다고베르 2세가 진지한 얼굴로 말한다. 말투가 다소 급해보인다.
아마도 이미 디오보르크 공작이 보낸 사자는 도착했고, 너무 오래 방치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나를 부른것으로 보인다.
사람을 불러놓고 방치하며 기싸움을 거는 전략은 물론 유효하다.
하지만 그것도 계획적으로 해야지 무턱대고 방치하면 이쪽이 대책 없다는 것을 들키게 되니까, 서둘러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혹시 폐하께서, 현재 아군이 필요로 하시는 게 있으십니까?”
우리는 무엇을 요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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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에서 적진으로 포탄을 쏘고 돌파를 위해 병력을 보내는 것 역시, 적절한 규모와 타이밍을 계산해야 하는 것 처럼.
적과의 대화 역시 마찬가지로 전략적으로 해야 한다.
전쟁터처럼 오고 가는 말 한마디에 당장 피가 터지고 목숨을 잃는 경우는 없지만, 향후 어떤 파급 효과를 불러올지 모르니까.
신성 그룬발트 제국, 디오보르크 공작이 보내온 전령은 예의바르고 품위있지만 입이 무거운 남자였다.
반드시 필요한 말이 아니면 입을 잘열지 않았기 때문에, 교섭 자리에서 어려움이 많았다.
상대쪽에서 끈질기게 원했던 것은 폴름스 성채도시 내부와의 소통이었다.
우리 포위망을 통해 사절을 보내, 폴름스의 선제후와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미리 예상했던 제안이고, 우리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다.
현재도 폴름스에서 나오거나, 들어가려는 첩자들이 종종 붙잡히고 있었다. 그만큼 서로 절박하다는 이야기이다.
아마 폴름스에서 외부로 나가는 비밀 전령은 완벽하게 차단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특히나 경비 병력을 줄여버린 현재는.
하지만 아마도 밖에서 폴름스로 들어가는 것은 철저하게 막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거대한 성채도시에서 밖으로 빠져 나오는 것을 완전 차단하긴 어렵지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다른 문제니까.
일단 성벽 위에서 내려다 보고 경비 인원이나 포위망 구조를 외워서 나갈 수 있는 것과 달리, 밖에서는 어떤 구조인지도 모를 포위망을 두 겹이나 뚫어야 한다.
심지어 방어군에게 큰 부담이 되는 성벽과 해자는 몰래 성벽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첩자에게도 부담이 될 것이다.
첩자가 아무때나 성벽을 넘을 수 있다 해도, 수비군 입장에서는 그게 아군의 전령인지 적군의 스파이인지 알 수 없기도 하고 말이다.
아무튼 우리는 폴름스를 철저하게 고립된 상태로 두고자 했다.
이는 기를 쓰고 포위망을 유지하는 입장에서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내용이다.
우리 측의 완고함을 본 그룬발트의 사절은, 아쉬움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이것이 실제로는 아쉽지만 드러내지 않았을 뿐인지, 애초부터 다른 제안을 내놓기 위해 찔러 본 함정 제안인지는 파악할 수 없었다.
최소한 그룬발트 측이 적절한 인물을 사절로 잘 뽑긴 한 것 같다. 도무지 표정을 읽을 수가 없네.
그 다음으로 제시된 요구는 좀 더 온건하고 상식적인 내용이었다.
바로 ‘명예로운 귀족 기사’ 포로의 일부를 석방해 달라는 것이었고, 포로로 잡힌 것으로 추측되는 이들의 명단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이건 우리 쪽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다.
다만 명단이나 규모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를 해 봐야 했기에, 거기에 대해서 한참동안 이야기를 했고.
나는 최대한 무례하거나 공격적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고, 다만 선은 확실히 그으며 이쪽의 의도를 명확하게 했다.
객관적으로 내가 ‘냉철한 외교관’ 스타일은 아니기 때문에 의도를 숨기며 기싸움을 하느니 차라리 의도를 명확히 하는 쪽을 선택한 것이지.
대신 유일하게 의도를 숨긴 것이 있으니, 논의의 베이스가 된 ‘휴전 기간’에 대한 것이었다.
그룬발트 측에서는 전사자와 부상자의 수습을 위한 사흘 간의 휴전을 제의해왔다.
여기에 우리쪽에서는 휴전을 닷새로 하자는 역제안을 했다.
여기서 의도를 숨긴 이유는, 마치 우리가 ‘더 긴 휴전 기간을 원한다’ 라는 생각을 상대가 가지길 원했기 때문이다.
사실 본심을 말하자면 전열을 가다듬고 미래를 계획할 휴전 기간이 필요야 하지만 그렇게 절박한 것은 아니다.
물론 지금 당장 적이 다음 공세를 취한다면 곤란해지겠지만 아군의 본래 목적은 최대한 빠르게 적의 주력을 섬멸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지금 당장 결전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군수품이 절박하게 부족한 것도 아니고···.
한편으로는 시간이 있으면 시간이 있는대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병사들에게 반드시 휴식이 필요하기도 했고.
또한 한가지 시도해보고 싶은 ‘전략’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무튼 우리 기조는 휴전 기간이 얼마이든 상관 없다··· 였지만.
교섭 자리에서는 하루라도 더 긴 휴전을 원하는 것으로 ‘연기’ 했다. 사전에 협의된 내용이었으니까.
이 의도는 제법 잘 먹혀들어간 모양이다. 상대도 휴전 기간에 대해 적극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고, 다른 조건들도 이를 기반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휴전 기간이 표준 화폐가 된 것이다.
그리고 교섭을 하면서 추측하기로는, 그룬발트 측이 가장 신경쓰는 부분은 적절한 휴전 기간에 더해서 고위 포로의 석방인 것 같았다.
이 석방 교섭은 단순히 다음 전투에 활용할 군사력 목적이 아님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지난 전투는 워낙 대규모였기에, 포로로 잡힌 적병의 숫자는 수천 명이나 된다. 아직 몇 군데에 나눠 가둬 두었을 뿐, 정확한 숫자조차 알 수 없을 정도니까.
여기서 소수의 ‘명예로운 귀족 기사’를 석방해봤자 전투력에 극명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원하는 것은, 적의 우두머리인 디오보르크 공작의 ‘정치력’ 때문일 것이다.
적은 갑자기 끌어 모은 10만이 넘는 대군이다.
여러 방면을 통해 확인된 바로는, 이는 원래 디오보르크 공작이 보유한 세력이 아니라 여러 엘프 선제후들이 후원했고 각지의 인간 영주들 역시 지원했기에 집결할 수 있었던 병력이다.
그런데 사흘 간, 두 번 연달아 패배했으니 분위기는 좋지 않겠지.
여기서 중심을 제대로 잡지 않으면 흐지부지 소멸될 수 있는 군사력이다. 만약 한 번 흩어지면 다시는 복구할 수 없는 병력이기도 하겠지.
그러므로 나름 절박한 디오보르크 공작이 찾아낸 ‘민심 달래기’ 방편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바로 귀족 자제와 친척들, 혹은 군을 이끌고 합류한 대귀족 본인을 포로 상태에서 구해내 군 내부에서 발휘할 정치력을 얻고자 하는 것이리라.
다소 못 미더운 점이 있더라도 적의 마수로부터 아들을 구해주고, 조카를 구해준 공작에게 함부로 등 돌리지는 못할 테니까.
솔직히 조금 고민을 했다. 다고베르 2세 폐하 역시 다소 당혹스러운 모양이었다.
무엇보다 고위 귀족 포로는 사회적, 금전적으로도 엄청난 가치를 가진다.
사령부라고 해서 마음대로 풀어주게 되면, 전장에서 포로로 잡아 권리를 가진 이에게 어떤 형태로든 보상을 해 줘야 하는 문제도 있고.
이를 통해 상대의 결속이 다져지게 된다면, 이 또한 우리로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니까.
가령 선제후의 계승자인 세두시온 같은 경우는 가치가 워낙 어마어마해서, 이런 식으로 풀어주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하지만 여기도 해결책이 있었다.
바로 석방 대상 포로를 ‘부상자’로만 제한하는 것이었다.
지위가 높은 대영주급 포로들은 통상 가문의 친위대에 의해 호위를 받기 때문에, 당사자가 부상을 입은 경우는 적었으니까.
게다가 부상자를 붙잡아 놓았다가 죽기라도 한다면··· 우리 측 치료가 부실해서 죽었다는 욕을 먹기에 딱 좋다.
···우리 군의관들이 얼마나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데, 그런 소리 들으면 억울하지.
게다가 우선 순위에서 소외된 일반 병사들 입장도 생각해보라고.
결국 우리측 제안은 이랬다. 인원을 좀 더 늘리되 부상자로 한정하고, 이쪽에서 명단을 주고 그룬발트 측에서 고르도록 한다.
또한 석방은 시킬 수 없지만, 부상과 무관하게 ‘명예로운 귀족 기사’ 포로 명단을 최대한 빨리 작성해서 전달하기로 했다.
아마 이 명단 자체도 디오보르크 공작에게는 유용한 ‘정치력’이 될 것이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몰랐을 가족의 생존이 확인된 것만 해도 가족들은 기쁠 테니까.
한편으로는 빨리 사지 멀쩡하게 찾아오라는 귀족들의 압박을 받게 되겠지만서도···. 그런 점에서는 일종의 시한폭탄이라고도 하겠다.
다음으로 논의된 두 가지는 서로 별 이견 없이 협의되었다.
먼저 전장에서 사상자를 수습하는 실무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거야 뭐 관례가 있기도 하고, 서로 다퉈서 얻을 게 따로 없다보니 크게 이야기 할 것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진정한 의미의 ‘포로 교환’ 건이 있었다.
아군이 잡은 숫자에 비해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그룬발트 측이 포로로 잡은 엘랑키아 군도 수백 명 가령 되었다.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포로가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이들을 배신자라고 비난하거나 괴롭힐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잘 견디고 돌아와 주면 고마울 뿐이지.
이들은 가급적 같은 숫자와 같은 지위의 포로들로 교환 될 예정이다. 물론 이 역시 서로 이견은 없었다.
그렇게, 서로의 첨예하게 대립하던 양측의 이해관계가 정리되어 휴전이 시작되었다.
우선 첫째, 휴전 기간은 서로가 주장했던 사흘과 닷새의 중간인 나흘로 한다.
대신 그 시작일을 내일로 하기로 했다. 이건 사실상 휴전이 하루 길어지는 효과라고도 할 수 있겠다.
둘째, 엘랑키아 측은 사흘 내로 ‘명예로운 귀족 기사’ 포로의 명단을 제출한다. 이 명단에 속한 부상자 중, 그룬발트 측이 고른 오십 명의 포로는 석방된다.
오십 명은 적은 숫자는 아니지만, 나름 우리의 진심을 보여주고자 하는 수단이었다.
잘 먹혀들었는지는 모르겠다만···.
셋째, 그룬발트 군은 엘랑키아 군의 고정 방어 시설로부터 5킬로미터 이내로 들어오지 않는다. 들어올 경우 엘랑키아 군 담당자의 안내를 따라야 하며 무장을 해제해야 한다.
이건 포로 수습을 위한 당연한 조항이다.
어차피 전장에 널린 게 무기이다 보니 비무장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 싶긴 하지만··· 어차피 이건 상호 신뢰가 필요한 부분이고.
넷째, 휴전 이틀 째, 서로가 보유한 포로를 교환한다. 그룬발트 측이 제시한 포로의 숫자의 신분을 동등하게 맞춰 진행한다.
만약 엘랑키아 군 고위 직군 포로가 있다면 이쪽도 고위 직군을 내줘야 하겠지만, 내가 알기로는 죽거나 부상한 경우는 있어도 포로로 잡힌 경우는 없다.
그러니 아마도 하급 장교나 일반 병사들 사이의 교환이 되겠지.
서로가 만족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큰 이견 없이 항목이 정해지고 서로 악수를 나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