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533화 (533/556)

48-2. 폴름스 전투, 임시 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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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랑카벨 영지군 의무대는 대륙 전체의 어떤 군사조직을 찾아도 비슷한 집단을 찾기 어렵다.

애초에 전장의 군인들을 위한 전담 군의관과 의무병이 존재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필수’라고 생각하는 인식이 별로 없었다.

나름 형편이 좋은 연대급 부대 정도는 되어야, 군의관과 그 조수 정도를 상시 배치할 수 있는 정도이다.

그런데 그 군의관과 그 조수가 실제로 ‘의사 자격’이 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실제로 의료의 최첨단을 달리는 주요 도시의 의과 대학을 졸업한 재원이라면 아주 운이 좋은 것이다.

어느 지역을 가든 몇 명 정도는 있는, 전통과 경험에 의해 약을 쓰고 상처를 치료하는 지역 의사의 제자만 되어도 상당히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최악의 경우,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부상병의 상처를 막을 임무를 받은 의사가 지난 달 까지는 의료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돌팔이 사기꾼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어차피 의대 졸업장이나 의사 자격증이라고 해 봐야 대학과 병원이 있는 도시와 그 지역 정도에서 통용 될 뿐이지···.

무언가 도장과 봉인이 여러개 찍히고 수상한 글이 쓰여 있는, 어디서 발급했는지도 알 수 없는 괴상한 종이 쪼가리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다.

그게 도둑질로 얻은 것인지, 전혀 다른 목적으로 발급된 것에 글자만 몇 자 고친 것인지, 아니면 아예 그럴듯하게 만든 아무 의미 없는 물건인지 알 수 없으니까.

심지어 그저 혓바닥으로 풀어 놓은 화려한 커리어 외에는 증명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자들도 ‘군의관’ 직함을 달고는 한다.

이런 비슷한 경력 사기가 용병들 사이에서도 횡행하지만, 그래도 용병 사이에서는 오가는 정보 커넥션이 있어 완전히 속이기는 어렵다.

설령 거짓으로 고용되거나 임관했다고 해도, 어딘가 허점이 발견되어 들통나는 경우가 흔히 있다.

문제는 의사들은 숫자도 워낙 적은 데다가, 출신이나 방식에 따라 동질감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많아 레퍼런스 체크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좋지 않은 경험을 많이 한 숙련병 중에서는 군의관을 불신하는 풍조도 생기고, 아예 손재주 좋은 병사 중 하나가 그 역할을 전담하기도 한다.

벌어진 상처도 꿰매고, 어긋난 뼈도 맞추고 하다보면 어느새 모두가 인정하는 전문성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아무튼 이런 ‘몰상식한’ 일이 일반적인 세상에, 의사와 간호사를 합쳐 수백 명 단위의 의무대를 설립하고 운영하는 트랑카벨 가문은 분명 특이했다.

특이하다는 것은, 단순히 의료인의 숫자가 많다··· 에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트랑카벨 의무대의 업무는 표준화, 전문화되어 있으며 군의관들은 서로의 임상 경험을 공유하며 더 나은 방법과 도구를 개발한다.

간호사들 역시 단순히 시키는 일을 할 뿐은 아니다.

수술 보조, 약재 관리 및 투약, 붕대 드레싱 등 하나 이상의 분야에 대해 고도화된 교육을 받아 전문적으로 현장을 보조하는 체계를 갖춘 것이다.

이는 개개인의 손재주와 경험에 의존하는 지역 의사들과 다르게, 의료의 질을 높이고 혼란을 줄이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경험이 적은 햇병아리 의사가, 베테랑 의사에 준하는 지식을 가지고 진료에 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궁극적으로 부상병들의 생존과 전장 복귀 비율을 극적으로 높인 것은 물론이다.

물론 그 뒤에는 그만큼 가혹한 수련 기간과, 전장에서 끝 없이 쏟아지는 중상자들과 부대끼며 임상 경험을 원 없이 쌓을 수 있었다는 이면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심지어 고용주이면서 의무대장인 아쥬흐 트랑카벨은 상당히 부지런했으며, 그녀 자신이 의사였기에 대충 넘어가는 것도 용납되지 않았다.

그렇게 초반에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이 특수한 의료 조직은 이제는 제법 잘 굴러가고 있었다.

물론 이들은 오로지 군무를 전담하는 것은 아니며, 평소에는 블랑독의 주요 도시나 주둔지 주변 주민들에게도 의료 지원을 베푼다.

가령, 카르카냑에 있는 의무대 본부는 아마도 엘랑키아 남부에서 가장 크고 발전된 병원일 것이다.

멀리서, 심지어 라솔에서도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방문객이 있을 정도였으니.

이런 사회적인 이점이 있다 하더라도, 의무대 조직을 유지하는 데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런 비용으로 대규모 의무대를 갖추느니 영지군 전력에 투자하자는 인식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책임자인 아쥬흐 트랑카벨이나, 그녀의 조언자이자 대리 사령관인 콘도티에레 에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공들여 양성한 의무대는 이번 파견에도 상당한 숫자가 차출되었다.

의사와 간호사를 합치면 100명에 가까울 정도였으니, 애초부터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은 생뢰르반 파견대만을 위한 인원은 아니었다.

이정도 대규모 인원을 파견한 아쥬흐의 의도는 단순히 인도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준비 다 했나? 베인 상처가 많을테니 지혈대에 붕대도 충분히 챙겨야 해.”

“여분을 최대한 실어 두었습니다.”

“음··· 그럼 먼저 출발하게. 나는 마무리 할 일이 있어 후발대와 함께 가도록 하겠네.”

“알겠습니다.”

군의관 알체스테 델 나르코는 이번 파견군에 속한 의무대를 책임지고 있었다.

주디칼리에서 바다를 건너 온 풋내기 의사였던 그는 어느새 의무대 전체에서 임상 경험이 가장 많은, 다시 말하면 실전 경험이 가장 많은 군의관이었다.

아룬하비크에서 발생한 부상자들에 대한 처치를 전부 마무리 했기에, 손이 빈 의무대를 다른 거점으로 보내는 것이다.

특히나 북부 전선은 이미 의무대 일부가 파견되어 부상병들을 보살피고 있었지만, 예상대로 부상자 숫자가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에 지원을 가게 된 것이다.

하지만 북쪽으로 향하기에 앞서, 알체스테는 만날 사람이 있었다. 발걸음을 빨리 해 주둔지 중앙의 천막 중 한 군데를 들어간다.

“...미안하지만 들어가겠습니다.”

천막 주인의 의사도 묻지 않은 불시 방문이다.

당연히 무례한 행동임은 당연히 알고도 남음이지만 그렇게 행동한 이유가 있었다.

어두컴컴한 내부에서는 억지로 억누르는 듯한 기침 소리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친 숨소리가 이어진다.

“군의관님··· 쿨럭!”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지휘부에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싶었더니··· 기침이 악화 된 거군요.”

“아뇨, 아닙니다. 크흠, 그냥··· 자주 쉬라는 군의관님의, 콜록, 말씀을 따르려··· 크흠, 큼.”

“후우··· 밤을 홀딱 새우고서··· 이제 와서 쉬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나무라는 내용이기는 했지만, 알체스테의 말투는 퉁명스러우면서도 평소보다 부드러운 부분이 없지 않았다.

그는 이 어두운 안색을 한 제18 보병 연대의 작전 참모, 리타르몽 드 당세르가 도저히 지휘부를 비울 수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책임자인 콘도티에레나, 그 부관인 첼레스티나는 더 중요한 다른 전선을 맡기 위해 떠나야만 했다.

그리고 리타르몽을 제외한 다른 중견 지휘관들은 각자 담당한 부대라면 모를까, 아룬하비크 전체 방어를 지휘할 수는 없었다.

가뜩이나 전투도 끝났는데, 저녁에 갑자기 숲 속에서 적이 모습을 드러내는 일도 발생하지 않았던가.

그 때는 알체스테 역시 꼼짝없이 2차 전투가 시작되는구나 싶어서 긴장했었다. 다행히도 적은 전투 없이 그대로 물러갔지만.

그렇다고 아룬하비크 수비군이 ‘이제 적이 물러갔으니 안전하다’ 라며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병사들에게 최대한 휴식을 취하게 하는 한편, 교대로 마을 주변을 지키고 순찰을 돌았으며 새벽녘에는 남쪽 숲을 이 잡듯 뒤져 적이 없음을 확인했다.

그러니 방어를 책임져야 하는 리타르몽 참모로서는 도저히 쉴 틈을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쪽잠이라도 좀 잤으면 싶었지만.

그리고 아니나다를까, 부상병 수용과 병력 재배치까지 완료하고 나서야 임무를 인계하고 자기 막사에 틀어박혀 이 꼴을 하고 있는 것이다.

리타르몽은 빈말로도 건강이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아마도 태어날 때 부터 그를 괴롭혔을 질병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생명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질병이 그렇겠지만, 특히 리타르몽이 시달리는 질병에 과로는 독이나 다름 없었다.

지금이야 가까스로 몸을 컨트롤하고 있지만, 엄청나게 괴로울 것이다.

원래 키만 크고 온 몸이 비쩍 말라 송장처럼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왠지 살이 더 빠져버린 것 같았다.

“여기 약을 가져 왔으니, 하루 두 번 물에 개어서 드시지요. 절대로 거르면 안 됩니다.”

“감사합니다. 약이 많이 쓴가요?”

“죽도록 씁니다. 놀라서 기침도 들어가 버릴 정도로.”

알체스테의 퉁명스러운 농담에 리타르몽의 시체와도 같은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피었으나, 이내 터져 나오는 기침에 지워지고 만다.

“크흠, 쿨럭. 큼. 의무대는 북쪽으로 가십니까?”

“예. 아마도 아쥬흐 선배··· 의무대장님의 의도는 국왕 나으리의 기사들에게 의술을 보여주며 생색을 내라는 것 같으니, 부지런히 생색을 내러 가야죠. 그것도 다 외교라나? 하여간 참, 바라는 것도 많아.”

“그래요. 트랑카벨을 위해 힘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알체스테 군의관님.”

“나야 돈 받고 일하다 떠날 인간이지만, 참모님은 몸 관리좀 하세요. 쓰러지면 충성이고 의무고 소용 없지 않습니까?”

“하핫, 그래야지요. 크흠!”

침상에 반쯤 기대 누운 리타르몽은 정말 힘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가뜩이나 음울한 표정에 어두운 안색이 더해져 정말 시체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런 피골이 상접한 인간이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전선 하나를 지탱하면서 수천의 병력을 이끌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저는 국왕 나으리의 기사님들에게 의료 장사를 하러 갑니다. 오늘은 꼼짝 말고 쉬도록 하세요.”

아마도 그 권고는 지켜지지 않을 것 같았지만, 알체스테는 힘 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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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호출을 받고 서둘러 북부 전선으로 향했다.

중앙군 사령부가 있던 장소에는 천막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리고 국왕을 호위하는 근위 기사들이 천막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둥글게 늘어선 모습이 특이했다.

당연히 주군을 지키는 본인들의 임무를 하고 있는 게 아니냐고 하기에는 정말로 특이한 점이 있었다.

바로 ‘지켜야 할 대상’인 국왕 다고베르 2세가 천막 밖에 나와있었기 때문이다.

“오! 마침 잘 왔소, 에트 경.”

“건강하신 모습을 뵙게 되어 다행입니다, 폐하.”

“나도 그렇소이다. 어제 수 많은 용맹한 신하들이 유명을 달리한 와중에 에트 경이 무사한 것을 보니 원래 없던 신앙심이지만 기도라도 좀 드려야 겠다는 생각이 드오.”

다고베르 2세는 피곤해 보였지만 평소의 서글서글한 미소를 보여주며 농담섞인 인사를 한다.

“귀관을 호출한 이유는, 지금 저 천막에 그룬발트 제국에서 보낸 사자가 와 있기 때문이요.”

“그룬발트의··· 사자가요?”

“그렇소. 디오보르크 공작이 보낸 사자요. 어제 미꾸라지처럼 잘도 도망쳤던 적장 말이오.”

어제 싸웠는데 오늘 바로 도착한 사자라··· 그렇다면 정전을 위한 사자는 아닐 테고··· 항복을 위한 사자는 더더욱 아니겠지.

아직 어제 싸운 전장의 화약 냄새도 가시지 않았는데 도발을 하기에도 애매한 시기이고···.

“용건이 무엇인지, 제가 들어도 되겠습니까?”

“당연하지, 그걸 논의하려고 불렀으니까. 전장에서 부상자와 시신을 찾아가고 싶다 하더이다.”

“흐음···.”

그야, 격식과 인연, 가문을 중시하는 귀족들 입장에서는 가족이나 친지들의 시체가 전장에 버려진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부상병들은 이미 수습할 수 있는 경우는 수습해서 치료를 할 예정이라 알고 있다.

그보다 지난 밤 동안 살아남은 사람들은 적절한 치료를 하면 앞으로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사람들이니, 포로로 잡히기 전에 찾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있겠지.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냥 인도적 차원에서 협의해도 될 문제 같지만···.

국왕의 얼굴을 보니 그렇게 단순하게 처리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상대가 원하는 게 있다는 것은, 이쪽이 원하는 것을 요구할 기회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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