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532화 (532/556)

48-1. 폴름스 전투, 임시 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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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한 다음날의 분위기는 조금 기묘하다.

아니지, 승리한 다음날 ‘치고’ 기묘하다고 해야 할지.

“브레세른의 루제 공작께서 보내신 보고입니다.”

“음, 고맙네.”

주요 상급 지휘관들이 전장에 나가 텅텅 비어버린 아우페브라즈의 사령부에서, 나는 평소대로 서류 업무를 보고 있었다.

엄청난 격전을 벌인 다음 날, 마냥 이겼다고 좋아할 수는 없다.

전술적으로 승리한 것은 분명하지만, 여전히 길어야 하루 거리에는 그룬발트 대군이 도사리고 있다.

여전히 그룬발트 측이 결전을 결심하면, 우리는 따를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생존자들을 수습하고 재편성해 다시 싸울 수 있는 상태로 만들고, 부상자를 후송하며 포로들 역시 적절히 가두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느라 각 지휘관들은 전장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겠지. 아마 거의 잠도 자지 못하고 고생하고 있을 것이다.

그에 비해 사령부를 지키고 있는 나는 쪽잠이지만 잠은 충분히 잤다.

나 대신 파견나간 첼리스티나나 아룬하비크 마을을 지키고 있는 리타르몽 드 당세르 참모가 고생하고 있겠지.

미안한 일이지만 사령부를 비워 놓을 수 없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브레세른에서 올라온 서류를 살핀다.

루제 드 제브레도뉴 공작이 지켰던 브레세른 전선은 상황이 가장 안정된 전선이었고, 보고서 내용도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사상자는 그다지 많지 않았으며, 각 휘하 제대가 균형있게 싸웠는지 유난히 피해가 커서 전투력을 상실한 연대급 부대도 없는 것 같다.

다시 말하면, 루제 공작 휘하의 야전군은 곧바로 전투를 한 번 더 치룰 수 있는 상태라는 것이겠지.

적어도 그런 전선이 하나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인상깊었던 것은 추격전에 나섰던 기병대의 보고였다.

해가 질 무렵에 추격을 시작했던 기병대는 자정이 넘어 돌아왔다고 하는데, 그 짧은 시간 동안 수십 킬로미터를 돌아 다니며 상당한 전과를 올린 모양이다.

망신창이였던, 패주하고 있는 그룬발트 연대 몇 개를 공격해 흩어 버린것도 큰 전과겠지만 그 와중에 전리품을 상당히 챙겨왔다.

수레 20개 분량의 각종 군수품에 말과 소, 노새와 양을 포함한 각종 가축을 무려 6천 마리나 노획해왔다고 하니 말이다.

아마도 전장에서 퇴각하느라 미처 소식이 전해지지 못했던 그룬발트 군의 물자 집적소 하나를 털어버린 게 아닌가 싶었다.

여러모로 봐도 참 수상할정도로 대단한 전공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대체 6000마리의 가축들을 어떻게 한밤중에 몰면서 폴름스까지 돌아온 건지 모르겠다.

평범하게 길 따라 돌아다니기가 어려운 전투 중 기동 특성상, 야간에는 방향을 잘못 잡기가 쉬운데 말이지.

오죽하면 야간에 행군하다가 기진맥진해서 야영지에 도착, 구석에서 잠을 청했는데 일어나보니 적군 숙영지였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오겠나.

브레세른 전선과 거기 주둔한 루제 공작 휘하 병력은 이렇게 안정적이다 못해 유쾌할 정도의 보고까지 올라왔지만, 나머지 전선은 그렇지 못하다.

나는 탁자 위의 서류를 뒤적거린다.

먼저 북부 전선의 우익군 역할을 했던 프레니히 드 루블랭 백작 휘하의 호펜로이테 수비군은 사상자가 가장 많은 부대였다.

중앙군에 힘을 실어주느라, 상대적으로 부족한 전력으로 북동쪽 돌출부를 지켰던 부대이다.

아마도 그룬발트 군에게 ‘가장 만만한 지점’으로 보였기 때문에 집중 공격의 대상이 되었을 테고.

게다가 병력 교대가 불가능할 정도로 위태한 상황에서 전투를 벌였기 때문에, 몇몇 연대에 심각한 피해가 집중되기도 했다.

특히 격전에 계속 노출된 몇몇 연대를 보면··· 용케도 붕괴되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는 감탄이 나올 정도였으니까.

노장 프레니히 백작 직속 연대들이 피해가 크고, 중견 장교들도 사상자가 많다. 연대장 중에서도 중상자가 한 명 나왔고.

만약 아르밀 공작의 기사 대군이 지원가지 않았다면 결국 버텨내지 못했겠지.

마을을 지키던 방어 시설도 파괴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현재 다고베르 2세 폐하도 이쪽에서 병사들을 격려하고 있다고 들었다.

급히 지원과 재편성이 필요해 보인다.

그리고 본래는 좌익군으로 배치 되었으나, 전장을 가로질러 반대편에서 싸운 아르밀 드 브라뇰 공작의 부대.

슈뵈켄을 지키며 지연전을 펼친 수비군과 기습적으로 전장 반대편을 타격한 기사 대군으로 나뉘어 싸웠다.

전체적으로 보면, 그룬발트 군을 ‘가장 많이 죽인’ 부대이다.

특히나 7천의 기사대는, 앞을 가로막는 그룬발트 군을 기병이고 보병이고 가리지 않고 문자 그대로 갈아 버렸다.

나도 전투 마지막 단계에 눈으로 보았지만, 여기서 싸운 그룬발트 군 중에 멀쩡히 돌아간 연대급 부대가 단 하나도 없었을 정도이다.

역시 고삐 풀린 그룬발트 기사들은 공포스러운 존재이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 눈으로 보니 경악할 정도였다.

심지어 예상보다 사상자가 적을 정도였다.

전투가 끝난 후, 부대 별로 집결해 인원을 체크하는데 격전 도중에 말을 잃은 생존자들이 계속 돌아왔다 하던가.

중장기병은 가장 단단한 갑옷과 투구를 장비하기에, 의외로 생존성이 상당히 높다.

실제로도 탈진한 기사가 여러 보병들에게 포위당해 한참동안 일방적으로 공격당하고도 살아남았던 전설적인 이야기가 있다.

당연히 온 몸이 상처투성이였고 갑옷에는 총에 맞은 자국도 두 군데나 있었지만, 그 중에 치명상은 하나도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아마 여기서도 그런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낙마하거나 총에 맞거나, 심지어 말에 짓밟히는 등 충격을 받아 전투 능력은 상실해도 살아남아 통증을 참으며 어기적 어기적 돌아오는 기사들의 모습이 상상된다.

어쨌든 예상보다도 사상자가 적은, 모범적인 케이스로 생각하기 쉽지만···.

이는 서류상으로 언듯 보았을 때의 일이고, 상황은 좀 더 심각했다.

격렬한 백병전에 휘말리고, 반복적으로 돌격하는 와중. 갑주로 보호받는 기사들은 많이 살아남았지만 군마들은 그렇지 못했다.

7천기의 기사대는 거의 절반 이상의 말을 잃었다.

물론 여기에는 치료와 휴식을 통해 회복될 수 있는 말도 포함되어 있기야 하겠지만, 당장 기병대로서의 전력은 절반으로 줄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래 전투에서는 기수보다 말이 훨씬 많이 죽는 법이지만,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군마 피해가 큰 경우는 또 처음이다.

그만큼 엘랑키아 기사들이 앞뒤 가리지 않고 덤벼들었다는 말도 되겠지만 말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현재 전투력 복구를 위해 가장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부대가 이 부대이다.

심지어 전장 좌측, 슈뵈켄 인근에 남아 지연전을 계속했던 디타레 드 카울 경의 경기병 부대도 상태가 좋지는 않았다.

몇 배나 되는 적의 공격을 지연하면서, 티테니아의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고립무원의 상태로 싸울 수 밖에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북부 전선의 핵심, 중앙군은 생각보다 큰 문제는 없었다.

양 측방, 두 왕실군 원수의 분전 덕에 중앙군에 큰 부하가 걸리지 않은 덕분이라고도 하겠다.

하지만 여기서도 불안 요소는 왕실군 직할, 베르마유와 그 부근에서 편성된 베테랑 연대들의 피해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전열을 편성할 때는 구성하는 장교나 병사나 평균에 가까운 능력을 발휘할 수록 안정적이 된다.

마치 단단한 벽을 쌓으려면, 일정한 크기의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야 하는 것과 같다. 만약의 경우 빈 자리가 나도 곧바로 채울 수도 있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데, 특히나 여러 소속, 지역 출신의 대군을 편성할 때가 그렇다.

숙련되고 전의가 높은 연대와 그렇지 않은 연대가 뒤섞이게 마련이고, 전선의 핵심부에 믿을만한 부대를 배치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바로 그런 역할을 해 줘야 할 부대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이는 그룬발트 군의 지휘가 나름 뛰어났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실제로 근위대를 포함한 왕실군의 정예들은 몇 차례 기습적인 돌파를 노렸으나 모조리 실패했다는 보고도 있었고.

이를 종합하면, 중앙군은 여전히 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야전군으로 활동하기에 손색이 없다.

허나, 안정성은 이전에 비해 떨어졌으니, 지휘관 입장에서는 좀 더 신경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남은 것은··· 아룬하비크를 지키고 있던 내 휘하의 병력이다.

드 레뮤즈와 트랑카벨 가문의 병력을 기간으로 한 생뢰르반 군의 파견대와, 여타 소규모 부대를 긁어 모은 부대이다.

자투리라고 표현하니 조금 그렇기는 하지만, 연대급 편성이 애매한 소규모 독립 영주들의 부대나 이후 증강된 용병들이 포함된 말 그대로 오합지졸이다.

원래 배치 장소도 요새화된 아룬하비크 마을과 은근 포대에 분산되어 있었던 데다가···.

결정적으로 북부 전선을 돕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 다녀야 했다.

다행히도 아룬하비크 남쪽에서의 전투는 빠르게 마무리가 되었기 때문에 병력은 대체로 온존하고 있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장거리 행군과 전투를 반복한 부대가 많아, 체력적으로 소모가 크고 빠른 재편성이 필요하다··· 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 때문에 티테니아와 첼레스티나가 본진에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고 말이다.

종합하자면 전군의 절반 가량이 아주 시급한 재편성, 까놓고 말해서 거의 신편성이 가능할 정도로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하겠다.

바로 적이 쳐들어오면 큰 위기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런 걱정은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현재 그룬발트 군의 상황은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새벽, 위험을 무릅쓰고 적진 부근까지 다녀온 정찰대의 말에 의하면 적으니 거의 밤새서 퇴각했던 모양이다.

겁을 먹었으니 퇴각했겠거니 싶긴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퇴각 거리가 길수록 따라가지 못하고 낙오되는 병력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퇴각전이 아주 어려운 이유이다. 병력의 온존을 방해하는 것이 적 뿐이 아니라는 점.

그런 점에서 결국 점령지를 지켜냈고 부상병들도 수습해 치료할 수 있는 아군이 훨씬 유리하다고 할 수 있겠다.

밤새 10킬로미터를 넘게 도망쳤으니 다들 녹초가 되었을 테고, 소속 부대는 마구 뒤섞여 있을 테고, 당장 병사들 먹일 식량 구하는 것도 큰 일일 테고.

적어도 당장 하루만에 공격을 해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설령 아직 전투에 참전하지 않은 새로운 부대가 있다고 해도, 눈 앞에 박살나서 도망온 아군이 있는데 ‘지금이 기회다!’ 하면서 앞장서고 싶은 인간이 어디 있겠나.

새로운 부대··· 이야기를 하니, 정찰대의 보고에 의하면 어제 미처 전장에 도착하지 못했던 증원 병력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물론 여기는 적국의 한 가운데, 병력 증원이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다.

아군은 보충이 불가능하지만, 적군은 언제 얼마나 보충이 될지 모른다. 당장의 승리에 취해 이 점을 잊으면 안된다.

“콘도티에레! 폐하께서 호출하셨습니다! 급히 논의하고 싶으신 게 있다고 하십니다”

“그래? 폐하께서는 지금 어디 계시지?”

“이전 중앙군 주둔지 부근에 계십니다. 저희가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약간의 불안감을 느끼며, 서둘러 급히 보고할 서류를 챙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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