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66. 폴름스 전투, 셋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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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를 버려!”
“안 들려? 무기 버리라잖아!”
“뒈지고 싶으면 마저 해 보든가!”
창날과 총구를 들이댄 엘랑키아 보병들이 거칠게 윽박지른다.
“아, 알았소, 항복하겠소.”
“불필요한 사고를 원하지 않소. 자, 모두 무기 내려놔.”
체념한 표정의 그룬발트 보병들이 바닥에 무기를 내려놓는다. 철컥, 철컥 소리를 내며 오늘 하루종일 사용된 무기가 흙바닥 위에 떨어진다.
“밧줄 있나? 저쪽부터 하나로 묶도록 하게.”
“수상한 짓 하면 찔러버려!”
“알겠습니다, 대장.”
이렇게까지 된 상황에서 저항하는 경우는 거의 보기 힘들다.
기껏해야 상대의 지시를 똑바로 이행하지 않고 시간을 끌거나, 반발심 가득한 눈빛을 보내는 소극적인 정도.
그나마도 대부분은 다 포기했다, 졌지만 결과가 나와 속이 시원하다는 듯한 표정이다.
종일 계속된 전투로 양측 모두 몰골은 말이 아니다.
자신과 동료, 적이 흘린 피로 복장과 장비가 모두 젖어 있으며, 얼굴은 화약 연기가 땀과 뒤섞여 시커먼 꼴이 거지떼나 다름없었다.
체력적으로도 방전되어, 전투가 마무리되고 긴장이 풀리자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거나 주저앉는 경우도 생길 정도였다.
그만큼 서로 체력을 아낄 여유도 없이 힘껏 싸웠으며, 간발의 차이로 승패가 갈렸다는 말이다.
어느 쪽 병사가 더 잘 싸웠고, 어느 쪽 병사는 게으르게 싸워 승패가 갈렸다는 문제가 아니다.
개개인마다 기량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각자 충실하게 자신의 의무에 따라 싸웠고, 한편으로는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쳤다.
하지만 승패는 자신들이 감당하거나 인지할 수 있는 범위, 그 바깥에서 정해졌다.
갑자기 퇴각 명령이 내려오고, 어리둥절한 가운데 부대들이 뒤로 빠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운 나쁜 이들은 적진 한 가운데 남겨지기도 하고 말이다.
“자, 모두 끌고가. 마을 뒤편에 포로 집결지를 만들어 놨다 하더군.”
“알겠습니다. 모두 출발!”
“옛! 가자! 일어서!”
일단의 포로들이 엘랑키아 보병들의 감시를 받으며 후방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빈 몸으로 이동하던 장교 하나가 피로로 찌푸려진 눈으로 북쪽을 바라본다.
아군의 본대, 무사히 퇴각을 시작한 그룬발트 군이 천천히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만약 밧줄이 묶인 상황이 아니면, 뛰어가면 금방 합류할 수 있을 것 같은 거리였다.
더 이상의 교전은 없었고, 멀어지는 상대를 향한 사격도 없었다.
이미 화약이 떨어져가고 있던 터라, 혹시 모를 상황을 준비하기 위해서라도 서로 장전을 유지하는 쪽을 선택했기 때문이겠지.
게다가 이제 와서 서로 몇 명씩 사상자를 늘릴 뿐, 전술적으로 아무 의미도 없었다. 대량의 화약을 허공에 태워 버리는 것 이외에는 말이다.
포로로 잡힌 장교는 고개를 원래대로 돌린다. 그리고 엘랑키아 병사들이 시키는대로 줄을 지어 움직이기 시작한다.
무사히 포위망을 벗어난 동료들이 운이 좋은지, 포로로 잡힌 자신이 운이 좋은지는 알 수 없었다.
적어도 그에게는 폴름스 전투는 끝이 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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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 제브레도뉴의 기병대가 적을 추격하겠다는 전갈을 남기고 북쪽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래, 별 일이 없으면 좋겠구만. 루제 공작께 휘하 병력이 추격에 나섰다고 전령을 보내 알려드리게.”
“알겠습니다, 콘도티에레.”
아까 보고를 받기는 했지만, 역시나 전장 정리가 마무리되자 지체없이 뛰쳐 나간 모양이었다.
북부 전선의 양쪽 날개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그룬발트 군은 곧바로 물러서기 시작했고, 지금은 전장에 아군 밖에 남지 않았다.
오늘 문자 그대로 ‘물이 가득한 잔을 넘치게 하는 한 방울’ 역할을 확실하게 해준 드 제브레도뉴 가문의 기병대는 승리가 확정되자 지체없이 추격전에 나섰다.
전과를 확대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가치 있는 전리품’을 차지하려는 것이겠다.
어찌됐든, 공격력 방어력, 그리고 기동력의 밸런스가 적절한 기병대가 그 임무를 맡아준다는 데 아군 입장에서 나쁠 건 없었다.
적이 전장을 벗어나는 동안 잠시 자리를 지키다가 추격에 나선 것은, 후위 부대와 싸우지 않고 방심시킨 후 약점만을 노리고자 하는 것이다.
아주 정석적인 선택이다. 중무장한 엘랑키아 기사대라면 장거리를 주파해 그런 추격전을 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다행이라 생각하는 이유는··· 그들 말고 추격에 내보낼 수 있는 기병대가 없기 때문이다.
오늘의 전투에서 분명히 승리를 하기는 했다.
하지만 수적으로 불리한 와중 온갖 쓸 수 있는 수단이란 수단은 모조리 써서 간신히 가져온 승리였다.
특히나 자타가 공인하는 최강 전력인 기병은 중기병이고 경기병이고 한계까지 싸워 당장 재편성이 필요한 상황.
막판에 퇴각하는 적에게 한 방 먹이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직접적인 전투를 시키는 대신, 적의 퇴각로를 제한하고 좀 더 여력이 있는 보병들로 포위망을 형성하는 것을 선택했다.
기병을 이용한 포위 섬멸처럼 화끈한 맛은 없겠지만, 그래도 전장에서 벗어나려는 적을 최대한 차단하고 포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미 전투가 격렬하게 진행된 상황이었고, 서로의 진형이 마구 뒤섞인 교착 상태였기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특히나, 이미 엘랑키아 기사대의 강력한 돌격을 정면으로 받아 빈사상태나 다름없었던 적 우익군은 완전 섬멸은 아니지만, 충분한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게 오늘 전장에서, 전술가로서 내 마지막 역할이었다.
붕괴 위기인 연대들을 중심에 두고, 그나마 상태가 나은 연대들을 ‘팔’로 삼아 퇴로를 차단하는 것.
하지만 전장에서 적이 사라졌다고 지휘관의 역할도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콘도티에레, 폐하께서 전령을 보내셨습니다.”
“폐하께서? 설마 아직 전장에 계신가?”
“그렇습니다, 콘도티에레. 좀 더 병사들과 함께 있고 싶으시다고, 라는 내용입니다.”
“...원하시는 대로 하시라고 말씀드리게.”
“옛, 알겠습니다.”
총사령관인 다고베르 2세 국왕이나, 두 왕실군 원수 프레니히 드 루블랭 백작과 아르밀 드 브라뇰 공작이 모두 전방에 나가 있으니···.
급한 일은 참모로서 내가 하는 수 밖에 없겠군.
뭐, 딱히 불만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나도 우리 병사들을 보러 가고 싶다는 것만 빼면.
그런데 그 때, 또 다른 참모 장교가 다급하게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전투가 진행되던 도중과는 달리, 다소 풀어진 분위기였던 사령부와 어울리지 않는 급박함이 느껴진다.
“콘도티에레! 남부 전선, 아룬하비크에서 전령이 왔습니다! 적이 습격해왔다 합니다!”
“아룬하비크라고! 상황은?”
생각도 못한 지명이 나왔다.
내가 수비를 담당했던 마을 이름이며, 선제후의 계승자인 엘프 지휘관 세두시온이 무모하게 공격해온 것을 격퇴해 전투가 가장 먼저 끝난 마을이 아니던가?
그런데 거기서 적의 습격이라니···.
“리타르몽 드 당세르 참모의 전령입니다. 남쪽 숲에서 적어도 수개 연대로 추정되는 적이 출몰, 공세를 준비 중. 반드시 아룬하비크를 지켜내겠음. 이상입니다!”
“이런··· 아직 전투 진행 상황은 알 수 없나···.”
적을 발견하자마자 즉각 전령을 보낸 모양이다. 전황을 실시간으로 알 수가 없으니, 전장이 넓으면 이런 점이 답답하다.
이건 내 책임이 크다.
다른 전선이 급하다는 이유로 급한 방어전이 끝났다 단정하고, 병력을 추려 이리저리 다른 전선으로 파견했으니 말이다.
특히나 부대의 눈과 귀가 되었어야 할 경기병 전력을 모조리 뽑아 북부 전선으로 보냈으니까···.
물론 리타르몽 참모가 지휘하는 보병 부대와 카렐 드 상포리앙 경이 지휘하는 드 레뮤즈 중기병들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내가 상황을 너무 낙관한 모양이다. 북부 전선에서 이겼다고 한들, 방어선의 일각이 무너지는 것은 너무도 큰 일이다.
그나저나··· 적 주력을 섬멸하고 지휘관인 세두시온까지 포로로 잡았던 게 아니었나? 다른 병력이 추가로 있었다고?
설마··· 한 번 퇴각했던 병력이 재집결했다고?
“전령을··· 티테니아 경의 파견대와 브레세른의 루제 공작에게 전령을 보낸다.”
“옛!”
나는 서둘러 끝난 줄 알았던 전투를 마무리하기 위해 머리를 짜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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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진 줄 알았던 잿더미에서 다시 불길이 일듯, 새롭게 시작된 전투가 엘랑키아 군의 사령부에 소란을 만들고 있던 무렵.
다시 시작될 뻔 했던 전투는, 실제로는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그 불꽃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여, 여기서 물러나는 것입니까, 참모님?”
“적의 방어는 여전히 견고합니다. 지금 공격해도 실익이 없을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세두시온 전하를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벌써 안전한 곳으로 이송되었을 겁니다. 복수는 다른 날로 미뤄야 하겠죠.”
“크흑···.”
갑작스럽게 알룬하비크 남쪽에 나타난 병력을 지휘했던 것은 세두시온을 모시던 전쟁관의 참모, 플로리안 도프 폰 자이트리츠였다.
주력이 궤멸되고, 총지휘관이 적에게 포로로 잡히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
숲 속을 뛰어다니며 병력을 수습하고, 간신히 다시 싸워볼 수준까지 재편성을 완료하고 나니 지금 시간이었다.
만약 적이 방심하고 있었다면 기습적으로 적의 배후를 노려 볼 생각이었지만··· 적의 방비는 만만치 않았다.
마을 배후에서 병력이 쉬고 있다거나, 이미 이 지역의 전투는 끝났다는 생각에 느슨한 분위기일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적은 숫자는 많지 않았지만, 마을로 통하는 길목을 빈틈없이 방비하고 있었으며, 기병대도 적절한 위치에 대기하고 있었다.
심지어 전투 직후 방어선을 추가했는지 야트막한 임시 바리케이드는 세두시온 공이 공격을 시작할 때 보다도 튼튼하게 보강된 느낌이었다.
이래서는 공격하기 어려웠고, 공격한다 한들 승리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하물며 한 번 패해서 사기가 떨어진 데다가, 숲 속을 돌아다니느라 지친 병사들을 이끌고서는 말이다.
게다가 한참 전부터 포성이 거의 들리지 않는다.
폴름스에서의 셋째 날 전투는 이미 끝나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아룬하비크를 탈환한다고 적 방어선의 일각을 무너뜨린다 한들, 물고 늘어져봤자 큰 의미는 없다.
적은 반드시 되찾아야 하는 거점이니 소모전을 강요하는 효과야 있겠지만···.
지금 플로리안이 대리로 지휘하고 있는 병력, 세두시온 공 휘하의 브라우나인 부대는 오늘 너무도 큰 희생을 강요받았다.
설령 전술적 의미가 있다고 한들, 소모전으로 밀어 넣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도망다니는 병력을 규합하는 동안은 전령을 통해 정볼르 주고 받을 여유가 없었고, 숲 밖의 아군은 플로리안의 위치를 몰랐을 테니까.
위기는 기회라고 하지만, 이번만은 아닌 것 같다.
“남동쪽으로 이동합시다. 브레세른 정면의 아군과 합류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플로리안 경. 그런데··· 괜찮으십니까? 얼굴이 창백하셔서···.”
“그냥 몸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어서 돌아가서, 병사들도 쉬고 저도 쉬어야겠군요.”
본인의 열이 펄펄 끓고 있다는 것은 플로리안도 자각하고 있었다. 하필 이런 날 몸이 아프다니, 참모로서 자격 미달이다.
만약 몸 상태가 멀쩡했다면 세두시온 공의 무모한 공격을 막을 수 있었을까.
아니면 미리 앞질러가서 공격을 측면에서 지원이라도 할 수 있었을까.
이미 후방 예비대 지휘로 밀려난 시점에서 소용없는 이야기겠지만, 살면서 가장 뼈아픈 패배를 당한 와중에는 여러가지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룬발트 군의 셋째 날 마지막 군사 행동이 흐지부지 종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