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64. 폴름스 전투, 셋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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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히 살아남았다.
평생을 자이트리츠 전쟁관의 참모가 되기위해 공부하고, 소년 시절부터 보좌 참모로 전장에 나섰던 만프레트였다.
그 경력의 대부분을 승리로 이끌었던 그가 이 정도로 몰린 건 처음이었다.
20분에서 30분 정도의 짧은 교전을 예상했건만, 예성보다 더 빠른 15분 정도만에 하마터면 주군을 잃을 뻔 했으니까.
게다가 어쩌면 평생 단 한 번 있을지도 모르는, 숨겨온 기프트를 기습적으로 사용하는 기회까지 날려버렸다.
물론 그러한 절망적인 상황을 만들지 말아야겠지만···.
최악의 날이라 생각하며 우선 디오보르크 공작의 안전을 확인한 후, 나머지 병력을 수습했다.
천만다행인 점은, 그래도 정예 병력을 추려 만들었던 작은 전장이기에 공작이 전장을 이탈한 상황에서도 나름 질서있게 퇴각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더 추격을 해도 의미는 없다 생각한 것인지, 엘랑키아 군 역시 전과 확대에 욕심은 없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중앙부로 집결하며 무언가를 지키는 듯한 진형을 취하는 것을 보면, 저기 진짜로 엘랑키아 국왕이 있었던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설마··· 마지막에 디오보르크 공작을 추격해온 소수의 별동대에 국왕이 있지는 않았겠지.
아무리 저돌적인 군주라도 설마 그런 미친 짓을 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어쨌든 간신히 병력을 수습한다. 짧은 교전 치고 사상자가 적지는 않았다.
원래 우익군 지휘관인 펠쿠트 벨톤 폰 비덴누벨 백작에게 방어전을 인계했다.
젊고 유능한 지휘관인 펠쿠트 백작은 영혼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명령을 받았다.
그렇게 총명해 보이던 사람이 저런 꼴을 하게 되다니, 연이은 패배가 그의 마음을 갉아 먹은 것 같았다. 만프레트 자신의 책임이 크다고 느껴졌다.
그렇게 간신히 본진의 총사령부로 돌아온다. 그렇게 긴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니건만, 마치 하루 종일 나가있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런데 충실하게 총사령부를 지키고 있던 보좌 참모가 사색을 하며 새로운 정보를 전달한다.
“서, 선배님··· 아니, 만프레트 경! 좌익군이 무너졌습니다. 현재 대열이 완전히 무너져 전방 연대들이 제각각 후퇴하고 있습니다.”
“좌익이··· 지휘관 레트폴레 후작에게서는 연락이 없나?”
“후위대를 이끌고 퇴각중인 전방 부대를 엄호하겠다는 연락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렇군··· 중앙군의 퇴각을 준비해야겠다.”
“예, 만프레트 경!”
방금의 15분이 너무도 아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큰 문제 없이 싸우고 있지 않았었나? 예비대도 가능한한 투입했을 터인데···.”
다만 갑자기 좌익군이 한계에 도달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당연히 7천에 달하는 엘랑키아 기사 대군의 습격을 기습적으로 받은 만큼, 좌익군이 고생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허나 그만큼 가용한 거의 모든 예비대를 밀어준 것도 사실이다. 그만큼 중요한 전선이었고, 레트폴레 후작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사령부가 활용할 수 있는 예비대가 거의 고갈되고 막대한 희생을 지불하기는 했으나, 엘랑키아 기사들을 묶어둘 수 있는 ‘늪’을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성공이었고.
그런데 그게 갑자기 흔들린 이유는 무엇일까.
만프레트의 질문을 들은 보좌참모는 여전히 사색인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호펜로이테 마을을 우회하여··· 새로운 부대가 측방을 기습했습니다. 아마도 이게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군.”
결국은 또 남부 전선에서 올라온 적 병력이 있었던 모양이다.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한숨이 나왔다.
남부 전선에는 충분한 병력을 배정했다고 생각했다. 병력 면에서 압도적 우위에 있는 그룬발트 제국군이 할 수 있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남부 전선이 맡은 임무는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각자 담당 지역을 공격하고, 점령할 필요 까지는 없이 적을 묶어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결전은 누가 뭐래도 북부전선이다.
남부의 전술적 거점들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나, 결국 주력이 격돌하는 북부 전선에서 승부가 나면 이기는 것이다.
하물며 오늘 하루만에 무슨 일이 있어도 승리를 쟁취해야 하는 상황도 아니었다.
비슷하게, 비슷하게만 싸우면 된다. 그럼 자연히 원정군인 엘랑키아 군에 비해 우위에 서게 되며, 전략적인 승리에 한 걸음 다가가게 되는 것이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수적으로 훨씬 불리해야 할 엘랑키아 군은 어디선가 예비대를 자꾸 만들어내는 것일까?
아무리 상호 협력에 유리한 ‘내선의 이점’이라고 한들, 이는 감당하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포위하고 있는 그룬발트 군은 반대편 남부 전선에 전령을 보내려면 전장 자체를 우회해야 한다. 심지어 병력을 보내려면 한세월이 걸리고.
그에 비해서 엘랑키아 군은 짧은 직선거리로 전령이든 병력이든 보낼 수 있으니 말이다.
설마 자신들이 파악하지 못한 기동 예비대가 있었다는 말인가.
그런 것이 설령 있다고 해도 다수는 절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있는 병력을 쪼개서 보내야 했을 텐데···.
남부 전선에 보낸 전쟁관의 참모들은 결코 무능한 자들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경력이 떨어지는 브레세른의 쌍둥이들이야 아쉬운 실수를 했다 쳐도, 그가 가장 신임하는 플로리안은 무엇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답답한 마음이 들지만 화풀이를 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없었다. 애초에 자신이 북부 전선에서 이겼으면 끝났을 일, 결국 여지를 준 것은 자기 책임이다.
좌익군의 레트폴레 후작이 무너진 이상, 전선을 유지할 이유도, 방법도 없었다. 지금은 물러날 때였다.
아니, 30분 전에 물러났으면 더 좋았을지도.
“공작 각하, 오늘은 전장에서 물러설 때가 온 것 같습니다.”
“겨, 경의 뜻대로 하시오.”
방금 괜히 전장에 나섰다가 죽다 살아난 디오보르크 공작의 몰골은 말이 아니다.
마치 그러면 더 안전해지기라도 한다는 듯, 망토를 끌어당겨 온 몸을 감싸고 퀭한 눈으로 불안하게 주위를 살필 뿐이다.
만약 고집을 부린다면 ‘오늘은 물러나지만 전투 자체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더 나은 기회를 위해서이다’ 라는 부연 설명을 준비했지만··· 그럴 필요도 없었다.
주군이 얼마나 못난 인간인가에 앞서, 결국 그런 꼴로 만든 것은 자신의 책임이 컸다.
하지만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가능한 아군을 무사히 퇴각시키는 것 까지가 마무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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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겼다’ 라고 생각하며, 나는 프레니히 드 루블랭 백작의 우익군 사령부로 보낼 전령을 불렀다.
타타탕! 타탕!
타탕! 타타타타탕!
“끄아아악!”
“대열을 갖춰! 도망치지 말라고!”
“으으윽! 으으으···.”
그룬발트 보병들이 비참한 꼴로 물러나고 있었다.
추격에 나선 아군 기병들, 정확히는 드 제브레도뉴 공작가와 트랑카벨 자작가의 기병들이 과감하게 접근해 권총 사격을 퍼붓거나 낙오된 소부대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룬발트 보병들은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그저 상처입은 초식동물처럼 둔하게 안전한 장소로 움직이려 할 뿐이었다.
이는 아군의 기동로를 틀어 막는 역할을 했기에, 적진의 혼란은 갈수록 심해질 것이다.
지금 우리가 찌르고 있는 곳은 지금까지 전투 중, 비교적 안전했던 그룬발트 좌익군의 측후방이다.
반대편은 7천 명의 엘랑키아 기사 대군에 갈려나가는 중이었고, 그 측면은 프레니히 백작이 이끄는 호펜로이테 수비군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으니까.
이미 체력적으로도 지치고 탄약이 고갈된 예비대··· 심하게 말하자면 재편성 없이는 전투가 어려운 ‘재고 병력’들이 모인 장소이다.
그러니 갑자기 안전하다 생각했던 위치에서 적 기병들이 습격해오자 혼비백산한 것도 당연하다.
물론 드 제브레도뉴나 우리 엘랑키아 기병이나 문자 그대로의 ‘엘랑키아 기사’와는 좀 다른 기병대이긴 하지만···.
그래도 ‘말에 탄 엘랑키아 병력’이 습격해 왔다는 사실만 해도, 이미 영혼까지 털릴 지경인 적병들이 두려워하는 것 역시 당연하지.
게다가 전통적인 강자, 중장기병이 아닐 뿐이지 우리 기병들은 결코 호락호락한 존재는 아니었다.
작지만 지구력 강한 말에 올라 지평선 끝까지라도 추격할 기세인 트랑카벨의 추격 기병들은 말 할 필요도 없겠고.
엘랑키아의 대귀족이기에 앞서 용병대장인 루제 드 제브레도뉴 공작의 기병대 역시 지극히 실전적인 특화 기병이었다.
단단한 밀집 대형을 깨뜨리는 충격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 물렁물렁해진 적의 약점을 찌르는 이런 상황에서는 어쩌면 전형적인 기사대보다 더 나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그렇다. 대열을 지킬 병력이 평소보다 부족해서인지, 보병들의 체력이 따라가지 못해서인지 느슨해진 방어선을 발견하자마자 달려들어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창병들이 미처 준비를 갖추기도 전에, 총병과 뒤섞인 상태에서 기병 돌격을 맞자 우르르 무너져 내린다.
“적 연대가 무너졌습니다, 콘도티에레!”
“너무 깊게 추격하지 말라고 전해라. 적 동선을 막는 게 더 중요하니까.”
“옛! 알겠습니다.”
아무튼 사실 이 두 가문의 기병들은 브레세른과 아룬하비크, 남부 전선의 거점들을 지키고 있어야 할 부대들이었다.
이들이 여기 있는 이유는 뭐··· 내가 불러왔으니까지.
티테니아와 첼레스티나에게 급조 병력을 보내고 아룬하비크 전선을 정돈하고 나니 남은 게 없었다.
애초에 없는 병력을 쪼개서 이리저리 보낸 상황이고, 브레세른으로 통하는 도로를 지키는 포대까지 지켜야 하다보니 여유가 없었다.
기껏 예비대랍시고 여유가 생긴 병력은 제32 델레망드 정찰 반연대의 추격 기병 중대들이 있었지만···.
그나마도 절반인 용기병들은 이미 티테니아에게 딸려 보낸 상태이고, 추격 기병들은 숲을 돌아다닌 정찰과 추격전에 지친 상태였다.
이들을 데리고 티테니아의 중대를 구하러 가 봐야··· 무얼 할 수 있겠는가 라는 생각이 우선 들었다.
전력적 열세인 상황에서 단 한 번의 천재적인 지시와 기동으로 승패를 뒤집는다? 나는 그런 환상은 믿지 않는다.
그룬발트 군의 포위망은 나름의 체계를 갖추고 일관된 전술지휘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다소 삐걱대는 부분은 보이지만 이는 각자 출신이 다른 대군을 한데 끌어 모으다보니 생기는 일이겠지.
최소한 적의 대군이 폴름스 부근에 도착하기 전에 교전했던 적들과는 전혀 달랐다. 아마도 유능한 사령부가 늦게라도 체계를 잡고 있다는 것이겠지.
이런 상황에서는 이미 개인의 아이디어 하나로 전세를 뒤집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실질적인 병력이 필요했다.
게다가 첼레스티나의 보고에 의하면, 급조된 우리 지원군은 최초의 전투에서 승리해 위기에 처했던 슈뵈켄을 구원하는 데 성공한 모양이다.
또한 중앙군의 다고베르 2세 폐하 역시, 측익의 위기를 알고 지원군을 보내겠다는 전령을 보내왔다.
안심된다··· 까지는 아니지만, 티테니아와 첼레스티나의 분전이 천금과도 같은 시간을 벌어다 준 것은 분명했다.
잠시 후 내가 선택한 것은, 남부 전선의 다른 거점인 브레세른을 지키고 있는 루제 공작에게 병력을 빌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직접 찾아가기로 했다. 눈으로 확인한 브레세른 전선은, 현재 폴름스를 둘러싼 어떤 전장보다도 안정적인 상태였다.
그룬발트 군은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으나 결코 무리한 공격은 하지 않았다.
병력 우위를 최대한 활용이라도 하듯, 그 공세는 정면을 가득 채우고 수비군에 압박을 주는 정도였다.
하지만 무리를 하지 않으니 빈 틈도 보이지 않는다.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지지 않는 지휘. 마치 전투를 지속하는 것만이 목적인 충실함.
음, 만약 아룬하비크를 공격했던 적 역시, 숲이 많은 지형을 이용해 시간을 끌었다면 나도 여전히 마주앉아서 수 싸움이나 하고 있지 않았을까?
···쉬운 상대가 걸려서 정말 다행이었다.
주 전선을 따로 둔 보조 전선의 지휘관이라면 완벽한 지휘라고나 할까. 마치 쉬운 것처럼 말했지만, 수비하는 측에서 받는 압박은 만만한 게 아닐 것이다.
팽팽한 균형이라는 것은, 적절하게 받아주지 않았다가는 이쪽이 약점을 드러내게 되니까.
나는 그 팽팽한 전선에서 병력을 빼 달라고 부탁하러 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