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63. 폴름스 전투, 셋째 날
간발의 차이로 삶과 죽음이 갈리는 상황.
어떻게든 따라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단 한 명의 죽음이 몇 만이 격돌하는 전장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극단적인 상황.
마치 그것만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의 상황.
문자 그대로 추격하는 선두 엘랑키아 기사의 칼 끝이 디오보르크 공작의 등 뒤에 닿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양측의 거리는 불과 10미터도 되지 않으며, 그 사이를 가로막은 것은 만프레트를 포함해 얼마 안되는 호위 기사들 뿐.
게다가 그 호위 기사들은 대부분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이대로 두면 추격에 견디지 못해 낙마하거나, 그마저도 아니면 호위를 포기하고 탈주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 때야 말로, 엘랑키아 기사의 칼이 디오보르크 공작에게 닿겠지.
그러나 그 마지막 순간 만프레트는 숨겨두었던 자신의 힘을 해방했다.
후우웅.
어깨를 감싸는 하얀 빛에 이어 가벼운 공기의 울림이 이어졌다.
전장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는 공기의 울림이란, 총탄이 간발의 차이로 근처를 지나갈 때 들린다.
매우 날카롭고도 소름끼치는 진동이다.
허나 이 울림은 짧지만 깊은, 장인이 연주하는 악기의 소리와도 비슷한 진동이다.
“어··· 어?”
“어엇? 뭐야!”
“으아앗! 조심해!”
그리고 그 직후, 주변의 모두는 시각을 빼앗겼다. 도주하던 그룬발트의 기사도, 추격하던 엘랑키아의 기사도.
혹자는 갑자기 밤이 되었다고도, 혹자는 눈이 멀었다고도 생각했다. 이단의 사악한 마법에 휘말렸다 생각하는 이도 있었을지 모른다.
확실한 것은, 생존이든 승리이든 오로지 목적을 위해 활발하게 오감을 사용하다가 하나가 완벽히 차단되는 순간, 당황하지 않을 인간은 없다는 것이다.
좌우도 분간하기 어렵고, 자기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심코 고삐를 당기게 된다.
충성스러운 군마 역시, 평생 느껴보지 못한 당황스러운 현실에서 평소처럼 달릴 수는 없었다.
더 후방에서 뒤따르던 이들 관점에서는 더욱 명확하게 보였다.
거대한 암흑 공간.
안개나 그림자 같은 것이 아니다.
마치 지금 내가 보고있는 광경에서 한 귀퉁이를 국자로 떠 내듯 잘라내 버린 광경.
눈을 의심하게 할 정도로 시야 한 쪽이 검게 물들어버린 특이한 광경.
그것은 겨우 5초를 조금 넘게 지속되었으며, 10초 까지는 되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태양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치열한 전장에 가득한 흙먼지와 화약 연기도 그것을 가리지 못한다.
마치 단체로 마술에라도 걸렸던 듯한 백일몽의 경험.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신성 그룬발트 제국과 엘랑키아 왕국의 가장 뛰어난 기수들조차 갑작스러운 암흑에는 적응하지 못했다.
속도를 늦추거나 방향 감각을 잃고 엉뚱한 방향으로 달렸다.
암흑 공간을 바로 앞에 두었던 추격자들은 이를 피하기 위해 급히 방향을 돌렸으며, 그러지 않았더라도 군마들이 들어가기를 거부했다.
암흑 공간이 사라진 직후의 대혼란이 그 효과를 증명한다.
추격 중 다소 흐트러졌을 지언정 일관된 목적으로 질서있게 늘어섰던 기병 대열이 엉망으로 변했고, 아군과 적군이 마구 뒤섞여 있었다.
직접적으로 암흑에 영향을 받았던 소수의 선두 집단은 더욱 엉망이었다.
엉뚱한 방향으로 말머리를 향하고 있거나, 아군과 적군이 겹쳐 포위 아닌 포위를 하고 있다거나.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속도와 방향을 유지했던 것은 오로지 두 명 뿐.
가장 앞에서 달리고 있어 암흑 현상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디오보르크 공작과 기프트를 발동한 당사자인 만프레트 본인이다.
디오보르크 공작은 등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줄도 모른채 죽어라 달렸을 뿐이고, 만프레트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었으니까.
그 격차는 몇 초 사이 벌어진 상당한 거리로 드러났다.
그다지 길지 않고, 상대가 멈춰있다면 기마로 순식간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이지만···.
그렇지 않기에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거리가 되었다.
“이, 이게 무슨!”
뒤늦게 후방을 바라본 디오보르크 공작은 크게 놀랐다.
금방이라도 등 뒤를 찔릴 것처럼 몸과 마음을 졸이게 만들던 말발굽 소리가 좀 멀어졌다 싶더니, 총참모장 빼고는 모두 멀리 떨어져 있었으니까.
“이제··· 이제 괜찮습니다, 공작님.”
“그대가! 그대가 한 일이오, 만프레트 경?”
“잔재주를 부렸을 뿐입니다. 속도를 늦춰서는 안 됩니다.”
유난히 지친듯 숨을 몰아쉬는 생명의 은인을 보며, 디오보르크 공작은 다시 화들짝 놀라 몸을 안장에 바짝 붙인다.
하지만 이미 거리는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로 벌어졌다.
하지만 ‘상대는 엘랑키아 기사다’라는 공포심이 마지막까지 방심할 수 없게 만들었다.
“후우우···.”
만프레트는 길게 숨을 내쉰다. 거의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아주 오랜만의 기프트 사용. 익숙하지 않았던 터라 힘을 조절하지 못했다. 삼 분의 이 정도의 힘만 사용했어도 충분했을 터인데.
뒤를 돌아보니, 적 만큼이나 혼란에 빠진 그룬발트 군 호위 기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거나, 적에게 포위 당해 항복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참으로 미안한 일이지만 도저히 사용 전에 알릴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사전에 알렸더라면, 반드시 외부로 말이 나갔을 것이고 지금과 같은 성과는 얻지 못했으리라.
만프레트가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가족이나 다름없는 자이트리츠 전쟁관 내부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하다.
스스로 거의 말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미 소년 시절 이후로 남들 앞에서 사용한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특별한 힘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된 직후의 짧은 흥분 후, 자신의 힘을 좀처럼 써먹을 수 없다 판단을 내린 것은 다름아닌 소년 만프레트였다.
세간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기프트는 야금술이나 세공술 등 제조업에 직접 활용 가능한 아키텍티 계통이었다.
4대 원소와 자연현상을 다루는 엘리멘탈리 역시, 고위층을 대상으로 한 봉사직으로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만프레트와 같이 인간의 영혼과 신체, 빛과 그림자를 다루는 스피리티 계열이 받는 대우는 ‘경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경외는 남들과 다르다는 인식으로, 조금만 어긋나도 배척과 경멸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물며 몇 초 동안 주변을 암흑으로 가득 채울 뿐인 능력이다.
총명했던 소년 시절의 만프레트는 주변에 자신의 능력을 자랑해 봤자 변변한 꼴을 보지 못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덕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마치 기프트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지내며, 자신의 다른 능력을 갈고 닦고 커리어를 쌓아갔다.
성인이 된 이후, 남들 앞에서 이 능력을 사용했던 것은 단 한 번 이었고··· 보여주고자 했던 상대는 놀라기는 커녕 별다른 관심도 가지지 않았었다.
그런 이유도 있어 절대 남에게 공개하지 않은 능력이었다.
물론 드러내 사용하지 않았을 뿐, 기프트를 잊거나 버린 것은 아니었다.
가끔이지만, 전쟁관의 외딴 별실에서 소수의 협력자와 함께 힘의 형태와 경향을 확인했으며,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파악했다.
결론은 나름의 유용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유용성은 역설적이지만 ‘가급적 사용하지 않아야’ 발휘되는 형태였다.
그 평생의 단 한 번이 될지 모르는 때가 지금이었다.
주군을, 신성 그룬발트 제국의 다음 황제를 살려낼 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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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격 중지!”
“멈춰라!”
한편, 다 잡은 적국의 다음 황제 후보자를 놓친 엘랑키아 기사들은 말을 멈추고 대열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빛에서는 아쉬움과 분노로 시퍼런 불꽃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추격 전 와중 사로잡힌 소수의 포로들이 움찔거릴 정도의 살기였다.
“아쉬운 것은 안다. 나도 죽도록 아쉽다. 하지만 오늘은 여기서 돌아가도록 하자.”
그들의 한 가운데에서 기사들을 다독거리고 있는 이는, 다름아닌 엘랑키아 국왕, 다고베르 2세였다.
왕위를 잇기 전인 왕자 시절부터, 그가 무엇보다도 좋아했던 것은 말이었다.
승용마라는 용도로서가 아니라, 말이라는 생물 자체로 좋아했고 오랜 시간을 같이 보냈다.
차츰 자라면서, 왕실의 말을 키우는 감목관들과 친하게 지냈으며 학문적으로 말을 교배하고, 육성하고, 다루는 법에 대해 공부를 하기도 했다.
이 또한 왕자로서 익혀야 할 본분의 일부를 빼먹은 행동이기는 했으나, 선대 국왕은 이 또한 왕의 자질 중 하나라 생각했는지 크게 혼내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현재 다고베르 2세는 말에 관해서라면 엘랑키아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전문가 중 하나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간혹 측근들에게 ‘말의 얼굴만 보아도 녀석의 재능을 알 수 있지. 아마 이게 짐의 기프트인 모양이오’ 라고 농담을 할 정도였으니까.
말의 외형과 체구만 보아도, 달리는 동작만 보아도 그 잠재력은 물론 타고 있는 기수의 기량까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디까지 속력을 낼 수 있는지, 얼마나 유지할 수 있는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직관적으로 아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이는 그를 천재적인 기병 지휘관으로 만들었으며, 타고난 재능에 경험까지 쌓인 이후로 더욱 꽃피었다.
‘무적의 엘랑키아 기사에 대한 전설’을 실시간으로 쌓아 올리게 만들었다는 말이다.
이번의 도박이나 다름없는 추격전 역시, 국왕이자 지휘관으로서 즉관적으로 수립하고 실행한 작전이다.
당연히 주변에서는 모두가 말렸다.
모두가 주군의 목숨을 지키는 것을 지상 과제로 여기는 근위대이다. 찬성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하지만 이는 ‘국왕에게 너무 위험하다’라는 생각 때문이지, 그 판단을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은 절대로 아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국왕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으로 기병으로서 경험을 쌓아 올린 근위기사들 또한 시도해 볼 법한 작전이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국왕의 기병대를 이끄는 기량을 대신할 만한 자신이 아무도 없었다.
평범한 기병대장으로는 충분 그 이상의 기량을 갖춘 이들은 많이 있었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래서 아예 실행하지 않으면 모를까, 국왕이 세운 계획을 다른 사람이 맡아서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작정한 다고베르 2세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엘랑키아에 아무도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엘랑키아 왕실의 최고 어른이라 할 수 있는 재상 뮈르텔 정도일까.
그리고 뮈르텔이 여기서 멀리 떨어져 있는 왕도 메르마유의 집무실에서 일에 파묻혀 있는 이상, 다고베르 2세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계획은 완벽했다. 지휘도 완벽했을 뿐더러, 수족이 되어 이를 실행하는 엘랑키아 기사들의 능력은 완벽 그 이상이었다.
생각보다도 빠르게 한 덩어리가 되어 돌진했으며, 생각보다도 빠르게 당황한 그룬발트 기사들의 방어를 돌파했다.
마지막 순간에··· 그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상 현상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되든 안되든 끝까지 쫓아가보고 싶을 정도로 아쉽고 분했지만, 이를 표출하는 것은 젊은 근위기사들의 몫으로 남겨놓는다.
국왕 자신은 차분하게 다음을 준비한다. 총사령관인 자신도, 강력한 기병 전력인 부하들도 결코 잃어서는 안되는 귀중한 존재이다.
그런데 무리한 추격전 와중에서 대열도 엉망이 되었고, 말을 혹사시켜 한계에 이른 상황이다.
심지어 단순히 돌파하여 속도로 따돌렸을 뿐이지, 자신들의 주군이 안전함을 깨달은 그룬발트 기사들이 뭉쳐서 포위해온다면 위기가···.
라고 생각하기도 했으나 다행히 그런 일은 없을 모양이다.
이미 기가 꺾인 데다가, 총사령관의 도주까지 확인한 그룬발트 기사들은 슬금슬금 거리를 두며 물러서고 있었으니까.
다행스러운 일이고, 굳이 막을 이유도 없었다.
그들이 퍼뜨리는 패배의 소식과 공포는 차츰 적진을 좀먹어 갈 테니까.
이제 엘랑키아 기사들의 앞을 가로막는 이는 없었다. 조심조심 국왕을 호위해 본대로 돌아간다.
“전령! 전령입니다, 폐하!”
“이 적진 한가운데까지 짐을 찾으러 왔던가··· 포상이라도 내려야겠군. 그래, 무슨 내용인가?”
“전장 반대편에서, 적 좌익군이 무너지고 있다고 합니다. 중앙 및 우익군 역시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이에 대응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다. 확연히 지친 모습이던 근위대의 젊은 기사들 또한 분위기가 밝아진다.
“드디어! 아르밀 공작의 돌격이 드디어 적을 박살낸 것인가?”
“그게··· 추가적인 증원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증원? 우리가 증원할 만한 예비 병력이 있었던가?”
“전령을 보낸 자가 남부 전선을 담당하고 있던 트랑카벨의 에트 경 명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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