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62. 폴름스 전투, 셋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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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아아아아악!”
또 한 명이 낙마한다. 비명소리가 점점 멀어져가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캉! 카앙! 쾅!
퍼억! 터엉! 카각!
10만을 넘는 신성 그룬발트 제국군을 이끄는 총사령관, 디오보르크 루프트 폰 제블링 공작은 온 힘을 다해 말을 달리고 있었다.
죽음과 공포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였다.
말발굽 소리에 섞여 들리는 소리는 도저히 사람이 내는 소리라고 하기가 힘들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벽에 철판을 걸어 놓고 돌을 던지면 저런 소리가 날까 싶다고나 할지.
하지만 그건 분명 사람이 내는 소리였고, 사람이 맞아서 나는 소리였다.
“나오지 못하게 해!”
“막아라! 으읏, 뭔 힘이 이 자식들!”
“크으읏, 크악!”
이미 한참을 전속력으로 달려온 주제에, 엘랑키아 기사들은 속도를 늦추지도 않는다.
악착같이 따라붙고, 디오보르크 공작의 호위병들이 필사적으로 떼어내려 노력해도 오히려 이쪽이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뒤를 흘금 돌아보니, 호위 기사들의 수가 이미 삼 분의 일 정도로 떨어져 있었다.
이건 그를 지킨다기 보다도, 그냥 같이 도망갈 뿐이지 않은가!
“으으으으으으!”
초조한 마음이 입으로부터 괴상한 신음소리가 되어 나온다.
직속 호위병을 뽑을 때, 실력이 아니라 가문이나 기여도, 친밀도를 따져 뽑았던 자신의 과거가 너무도 저주스러웠다.
물론 최저한의 기준도 없었던 것은 아니고, 나름 한가닥 하는 젊은 기사들이긴 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직접 위험에 노출될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하물며 이렇게 직접 쫓기게 될 줄 알았다면···.
분명 제국 전역에서 모여든 수만 명의 기사들 중, 가장 뛰어난 실력자들만 골라 뽑아 호위 기사로 배치했겠지.
아니··· 그런다고 상황이 나아졌을까?
“아윽, 허어어억!”
또 한 명이 말에서 떨어져 사라진다.
엘랑키아 기사는 두려운 존재라고 말로만 들었었다.
전투에서 싸우고 돌아온 이들이 하나같이 그렇게 말하고, 총참모장 만프레트 역시 같은 숫자로는 절대 싸우지 말라고 말하는 것을 귀가 아프도록 들었으니까.
그런데 가까이에서 만나보니 실로 괴물같은, 아니 괴물 그 자체였다.
장전된 권총이 있어 화력을 주고 받을 때는 이 정도의 격차인지 몰랐다.
오히려 무모하게 추격해오는 엘랑키아 기사들을 몇 명이나 말에서 떨어뜨리며 승리를 자신하기도 했다.
약간의 위화감이 느껴지기는 했다. 어떻게 저렇게 상대가 겨눈 총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기세를 전혀 늦추지 않고 추격해올 수 있는지 말이다.
문제는 장전된 권총을 모두 써버린 이후였다. 수가 갑자기 많아진 것 같은 엘랑키아 기사들이 빠르게 따라잡기 시작했다.
이제 백병전으로 저지하기 위해 나름 실력에 자신감을 가진 디오보르크 공작의 호위병들이 말을 나란히 하기 시작했을 때···.
말 그대로 재앙이 시작되었다.
콰앙!
“허어억!”
무서운 기세로 휘둘러진 장검이 뒤처진 호위 기사의 갑옷 옆구리 부분을 후려쳤다.
물론 이 정도로 철갑옷, 그것도 유력한 귀족 자제가 입을 정도로 견고하게 만들어진 명품 갑옷이 부서지거나 찢겨 나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갑옷을 때린 검의 칼날이 나가는 무모한 짓이다.
하지만 상관하지 않는다. 마치 철퇴이기라도 한 것처럼 기사검은 무지막지하게 휘둘러졌고,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한 피해자는 말에서 떨어질 듯 휘청였으니까.
캉, 카각!
무기로 맞상대하려 하지만 소용이 없다. 빗겨내기는 커녕 무기를 손에서 떨구지 않는게 고작일 정도로, 어른과 아이 정도의 기량 격차가 생긴다.
“으어억!”
결국 몇 번이고 목표를 노리던 엘랑키아 기사의 검은 뒤에서 볼 때 갑주로 보호받지 못하는 부분, 허벅지 뒤편을 찌르고야 만다.
찢어지는 비명 소리와 함께 기사의 검이 손에서 떨어져 흙먼지 속으로 사라진다.
간신히 말에서 떨어지는 것만은 피했으나, 속도를 낼 수 없으니 의미가 없다. 그다지 깊게 찔린 것도 아니지만, 피가 철철 흘러 안장을 온통 적신다.
그렇게 호위 또 한 명을 탈락시킨 엘랑키아 기사들은 더더욱 기세를 올려 따라붙는다.
그걸 막아야 할 호위 기사들은 이미 전의를 잃었다.
무슨 짓을 해도 더 빠르게 쫓아오고, 막으면 막는대로 갑옷 째로 두들겨서 부숴 버리는 괴물들을 상대로 어떻게 싸우라는 말인가.
‘절대 같은 숫자로는 싸우지 말라’
총참모장 만프레트의 말을 들으며 ‘설마 나도 그럴까?’라고 한번 쯤 생각해 보았을 그들은 가장 안좋은 형태로 자신의 의문을 해결하던 참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사태의 중심에 있는 디오보르크 공작이 호위 기사들보다 나은 점이라고는, 가장 먼저 출발해서 남들보다 앞서 있다는 것 밖에 없었다.
그리고 타고있는 말이 엘프 선제후로부터 선물 받은, 제국 전체에서 손꼽힐 법한 명마라서 아직은 체력에 여유가 있다 정도.
하지만 계속 뒤를 돌아보느라 속도를 충분히 못내고 있었다.
“공작 각하, 멈추지 마십시오! 앞만 보고 달리십시오!”
참다 못한 만프레트가 그렇게 외칠 정도였다.
“아, 알겠소!”
상체를 바짝 숙인 디오보르크 공작은 오로지 살기 위해 달렸다. 이렇게 전력으로 말을 타는 게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았다.
원래 그는 이렇게 무관심하고 나태하며 허영심만 있는 성격은 아니었다.
허영심이야 원래 있었다지만, 나름 견실한 젊은 기사로서 전장에 나서던 시절도 있었다.
고평가된 작위가 워낙 많아서 그룬발트 제국에서는 흔한, ‘작위만 높고 세력은 그저 그런’ 애매한 중간 규모 귀족으로 가병들을 이끌고 전장에 나서곤 했었으니까.
운 좋게 여러 차례 이겼고, 나름 외교 재능이 있었는지 주변의 다른 귀족들과 관계도 잘 맺으면서 작은 파벌을 만들 수 있었다.
결국 유력한 귀족 중 하나로 부각될 수 있었다. 다음 황제 후보자를 찾는 선제후들의 눈에 띌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때까지는, 정말로 평범하게 노력해서 이룬 결과였다.
작지만 값진 승리, 미약하나 소중한 지지를 하나 하나 모아 결국 황제위에 가장 가까운 남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
소극적이고 게으른 성격이 되어 주지육림에 빠지게 되었고, 어차피 황제위는 자신에게 굴러 들어올 것처럼 행동했다.
여전히 말쑥한 얼굴 생김은 그대로고, 막강한 배경까지 생겼기에 귀족들은 자신을 더욱 좋아해 주었다. 여자들도 마찬가지였고.
그렇게 나태하게 굴다 보니, 한창 나이지만 허리와 허벅지에 살이 찌는건 자신도 느끼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말을 좀 더 잘 탈 수 있었을까.
“흐아아압!”
바로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온 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뒤를 돌아보니, 투구 아래로 그림자 진 얼굴이 온통 일그러져 악마처럼 보이는 엘랑키아 기사가 무기를 잔뜩 치켜들고 있었다.
검일까, 도끼일까, 철퇴일까.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무기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상태로는 맞서 싸우는 것도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대로 죽는 것을 기다려야만 하는지.
디오보르크 공작은 무력감에 시달리며 그저 박차를 가할 뿐이었다.
제발 벗어날 수 있기를, 공격을 받는다면 빗나가기를.
빗나가지 않는다면 차라리 고통이라도 없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등에 돋는 소름이, 척추를 검으로 잘려 고통조차도 못 느끼는 상태인 것은 아닌가 하는 무시무시한 생각이 엄습할 무렵.
카앙!
등 뒤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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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앙!
익숙하지 않은 검놀림에 만프레트의 팔이 부러질 듯 아파왔다.
하지만 목적한 역할은 다 할 수 있었다. 주군 디오보르크 공작을 노리던 엘랑키아 기사의 검은 튕겨 나갔고, ‘몇 미터’ 정도 더 벌 수 있었다.
이 몇 미터는 문자 그대로 황금같은 거리, 적어도 주군의 목숨을 몇십 초 정도는 더 이어갈 수 있는 거리였다.
“크윽!”
온 힘을 기울인 공격이 튕겨나가는 바람에, 엘랑키아 기사의 몸 역시 반대편으로 기울었다.
어설픈 기수였다면, 여기서 떨어지거나 균형이 무너지는 바람에 말의 스텝이 꼬쳤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기사도 군마도 너무도 훌륭했기에 그런 일은 없었다. 다만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원래 위치에서는 벗어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천천히 멀어져간다. 방금 몇 초 동안, 군마가 체력을 거의 소모한 것이었다.
적의 시선이 오로지 주군에게 쏠린 사이 엘랑키아 기사들의 움직임을 지켜본 결과, 예상했던 것과 일치했다.
엘랑키아 기사들은 로테이션으로 집단을 이끄는 것과 추격하는 것을 교대로 하고 있었다.
말의 체력을 아끼면서 아군의 뒤를 따르다가, 선두가 체력이 다 해 옆으로 떨어져 나가면 뒤에서 남은 체력을 폭발시켜 따라잡는 것이다.
대단히 효율적인 추격법이었다. 아무리 승마술이 뛰어난 ‘그 엘랑키아 기사’라 할지라도 말의 체력을 무한으로 만드는 마술을 쓸 수는 없을 테니까.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일지라도 찬찬히 살펴보면 이유가 나오는 법이다.
문제는 현상을 이해했지만 대응 방법이 딱히 보이지를 않는다는 것이었다.
“모두 각하를 구하라! 혼자 도망칠 생각이오?”
“아, 알겠습니다!”
뿔뿔이 흩어져 있던 디오보르크 공작의 호위 기사들이 다시 주군을 구하기 위해 모여든다. 다시 조금은 시간을 벌었다.
아마 엘랑키아 기사들은 이미 여기까지 오느라 체력을 많이 소모했을 것이다. 이런 식의 로테이션 추격전도 조만간 한계에 달하겠지.
하지만 그 때가 언제인지 모른다. 공작이 따라잡힌 후가 되지 않을까 하는 불길한 예상이 들었다.
갑자기 큰 충격이 오는 바람에 근육이 따끔거리는 오른 팔을 몇 번 빙빙 돌린다. 정면으로 부딪치면 적의 공격을 몇 합이나 걷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젊었을 때는 문무겸비, 완벽한 군인이자 전략가, 사령관이 되기 위해 노력했었다.
특히나 만프레트가 존경하고 따르고자 했던 스승, 암월 검희를 삶의 모범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몇만의 대군을 승리로 이끄는 위대한 전술가이면서, 필요하다면 호위대를 이끌고 전장을 휩쓰는 선봉장이기도 했던 세델레네 스승이 그의 목표였으니까.
하지만 기량을 쌓을 거의 무한한 시간을 가진 엘프와 지극히 제한된 인간은 달랐다. 평생을 노력해도 어느 한 분야의 한계까지 이르는 것도 쉽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재능의 문제도 발목을 잡았다. 수련 시절 상당한 노력을 했다고는 하지만, ‘제법 괜찮은 젊은 기사’ 수준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승마술 중상. 맨손격투 중. 검술 중상. 사격술 중. 한 번 주어진 성적표는 어지간한 노력으로는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결국 인정했다. 만프레트는 인간이다. 재능과 시간이 제한된 인간.
그렇게 자신이 좀 더 잘 할 수 있는 분야를 이루고자 선택과 집중을 했다. 그렇게 현재의 자신이 있었다.
그렇다고는 하나··· 감을 잃지 않는 정도로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면 방금 디오보르크 공작을 구해내지도 못했으리라.
오늘은 정말 길고도 힘든 날이다. 살면서 이렇게 힘든 날이 없었다.
단순히 적이 강해서, 위험에 처해서는 아니었다. 거듭해서 이해할 수 없는 일만 일어났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렇게 힘들었던 날은··· 스승 세델레네가 말도 없이 전쟁관에서 훌쩍 떠났던 때가 마지막이었던가.
“막아! 따라잡히면 안 돼!”
“뒤, 뒤를 조심, 으으윽!”
돌아온 호위 기사들이 아우성을 치며 적의 추격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미 사기가 많이 떨어진 것을 듣기만 해도 알 수있었다.
오늘 많은 일이 있었다. 이렇게나 적을 읽고 전장을 통제하는 데 실패한 것은 평생 처음 있는 일인 것 같았다.
하지만 실패만 남긴 채로 끝낼 수는 없었다.
마상 검술만큼이나 오래된 기억, 자신이 가지고 있기는 했으나 좀처럼 쓰지 않았던 재능이 필요할 때였다.
“흐으음···.”
다행히 쓰는 법을 잊지는 않았다 .만프레트의 어깨 위에서 하얀 빛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기프트 발동의 신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