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61. 폴름스 전투, 셋째 날
“공작님을 모셔라!”
“맡겨주십시오.”
주군 디오보르크 공작을 호위기사들로 꽁꽁 둘러싼 후, 만프레트는 다가오는 엘랑키아 기사들을 바라본다. 그들의 숫자와 방향, 그리고 의도를 분석해본다.
숫자는 100명에서 200명 사이. 워낙 군마의 덩치가 좋고 완전무장한 기사들의 체구도 당당해 보여 실제보다 조금 더 많아 보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방향으로 보아서는 성급하게 좌측 보병들을 공격했던 엘랑키아 기병대에서 오는 것으로 보였다.
의도··· 보통 전장에서 병력과 방향을 보면 대략적인 의도는 읽히는 법이다.
어디를 공격하려 한다거나.
어디를 지키려 한다거나.
집중하려 한다거나, 전개하려 한다거나.
자신의 이런 의도를 숨기려고 하는 것이 명장의 조건이며, 또한 상대의 의도를 빠르게 읽어 내는 것 또한 명장의 조건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이번에는 만프레트도 명확한 판단이 서지 않는다.
이 정도의 병력으로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방향으로만 따지면 본진을 노리고, 어쩌면 여기 있을 디오보르크 공작을 노리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숫자는 백 수십에 불과하다.
그에 비해서 본진을 지키는 병력은 디오보르크 공작의 개인 호위대를 제외해도 4백 가까이 된다.
아무리 엘랑키아 기사들이 강하다고 한들, 적어도 두 배는 넘는 그룬발트 기사에게 도전해온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것이 여유 병력이라면··· 차라리 우회 공격을 감행해 현재 싸우는 상대를 철저하게 무너뜨리거나, 열세에 처한 자국 보병들을 돕는 게 순서 아닐까?
이게 만약 계획된 여유 병력이라면, 지휘관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만프레트는 결론을 내린다.
이것은 계획된 여유 병력도 아니고, 명확한 지시를 받은 기동도 아니다.
그저 전장에서 자주 발생하는 일, 일선 부대를 지휘하는 하급 지휘관의 폭주이다.
특히나 아직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중대급 부대를 지휘관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법 하지.
‘아군은 위험에 빠져 있으며, 이를 막을 것은 자기 부대 밖에는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소 공격적이고 위험한 선택을 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니 아마도 총사령관인 디오보르크 공작의 본대를 목표로 돌진해오고 있는 것이다.
허나 보통 그런 판단은 당사자의 파멸로 끝난다. 전쟁터에 ‘나 이외에 아무도 보지 못한 특별한 기회’가 존재한다고?
그런 생각 자체가 유치한 자만심의 발로라는 것이다.
만프레트는 그런 잘못된 판단으로, 빛나는 미래를 가졌을지도 모를 아까운 인재들이 빠르게 파멸하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았다.
심지어 배울 만큼 배웠다 생각한 자이트리츠 전쟁관의 참모들조차도 그런 함정에 빠지곤 했으니까.
용감하지만 어리석은 기사들에게는 거기 어울리는 장중한 장례식이 필요하겠지. 만프레트는 명령을 내린다.
“적의 대열은 흐트러진 상태이다. 아마도 통제할 능력이 없을 것이다. 말도 인간도 매우 흥분한 상태일 것이고.”
“저도 그렇게 보입니다, 만프레트 경.”
“아군을 총 3개 중대로 나누어 전투를 시작한다. 2개 중대는 양 측면에서, 마지막 중대는 중앙에서 적을 맞이한다.”
“삼면에서 포위하는 것이군요.”
제대로 통제되지 않는 기병대는 어떻게 행동할지 알 수 없다.
때로는 그냥 적이 가까이 다가오면 미친듯이 돌격하기도 하고, 때로는 주변의 모든 위협을 무시하고 그저 정면을 향해 달리기도 한다.
어처구니가 없는 사실은, 가끔은 이런 광적인 돌격이 실제로 효과를 발휘해 적진을 뚫어 버리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아주 가끔이지만 말이다.
따라서 썩어도 엘랑키아 기사인 만큼, 약간의 보험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만프레트가 준비한 배치는 적이 어떤 상태일지라도 대응 가능하다.
만약 양 측면의 두 중대 중 어느 하나에 돌격한다면 나머지 병력으로 협공.
이를 무시하고 일직선으로 돌격해 온다면, 역으로 이쪽이 양 측면을 공격해 병력을 깎아낸다.
어느 쪽이든, 부대는 흩어지고 찢어져 일관된 충격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디오보르크 공작의 호위대에 적이 닿아서는 안 된다.”
“물론입니다, 만프레트 경.”
어리지만 유능한 전쟁관의 보좌 참모들에 의해 명령이 전달되고, 세 개로 나뉜 기병 중대가 엘랑키아 기사들을 맞이한다.
무턱대고 달려오느라 마치 뱀처럼 늘어졌던 엘랑키아 기사들의 대열이 조금 변한다. 완전히 맹목적으로 달려오고 있는 것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하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질서를 되찾거나 일관된 움직임을 한다는 것은 아니다.
선두가 속도를 줄이고 후속하던 기사들이 계속 밀고 오면서, 전체가 대략 타원형에 가까운 모습이 된다.
그러면서 속도가 다소 늦춰진다. 공격을 하겠다는 것도, 방어를 하겠다는 것도 아닌 애매한 진형.
역시 적은 통제되지 않고 있었다.
그에 비해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독수리의 두 날개처럼, 좌우로 펼쳐져 이를 습격하기 위해 펼쳐진 그룬발트 기사들의 기동은 질서정연하고 아름답다.
아마 이대로 접근하면 늦어도 1분 후에는 그룬발트 기사들이 양 측면을 협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틈바구니를 빠져 나온다고 한들, 아무리 엘랑키아 기사가 강하다고 한들 몇이나 살아서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겠나.
게다가 마치 그들을 포위할 마지막 그물처럼, 세 번째 중대가 횡대로 늘어서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포위망은 완성된 것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그 포위망을 구성하는 세 부대 하나 하나가 수적으로 적과 호각일 정도이다.
적을 앞두고 어설프게 속도를 늦추고, 그 결과로 대열을 무너뜨리다니. 적 지휘관은 큰 실수를 한 것이다. 물론 통제가 되지 않았···.
“적이··· 갑자기?”
엘랑키아 기사들이 이해되지 않는 움직임을 시작했다. 애매한 진형 그대로 가속을 시작한 것이다.
“갑자기 속도를 올렸습니다!”
탕! 타당! 타타탕!
타앙! 탕탕!
총성이 울린다. 권총 사격이 시작되었을 만큼 양측이 가까이 붙었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포위망이 닫히기 직전, 간발의 차로 엘랑키아 기사대는 빠져 나갔다. 진행 방향 그대로 말이다.
분명 적을 양쪽에서 포위할 계획이었고, 10초 전 까지만 해도 계획대로 잘 되고 있었을 텐데.
갑자기 눈 앞에서 적이 사라진 양익 포위망의 그룬발트 기사들은 반대편 아군의 얼굴을 보며 잠시 어리둥절한 것 같았다.
그 사이, 엘랑키아 기사들은 이미 훌쩍 달려나가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가속, 그것도 부대 전체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최고 속도로 올리는 기묘한 가속.
“아··· 이런!”
그제서야 만프레트는 깨달았다. 부대 전체가 ‘동시에’ 가속했다는 시점에서, 이미 속은 것이다.
적은 통제가 안 되는 게 아니다.
언제라도 할 수 있는 통제를 하지 않았을 뿐이다.
“막아라! 적이 온다!”
엘랑키아 기사들이 거대한 은빛 창이 되어 질주를 시작하고, 표적을 한 번 놓친 양익의 그룬발트 기사들은 뒤늦게 추격을 시작하나 이미 늦었다.
그 앞을 횡대 대열로 기다리고 있던 중대는 허겁지겁 무기를 꺼낸다. 눈 앞의 엘랑키아 기사들이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된다. 전투에서 이런 전력질주로 달리다니···.
말도 엄연히 생물이다. 심지어 매우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운 생물이다.
아무리 훈련받고 관리받았다고 한들, 군마의 체력은 유한하고 전투는 적어도 말이 최고 속도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보다는 오래 끌리게 마련이다.
게다가 체력이 충분하다고 한들, 저 속도로 질주하는 기병대가 대열을 유지할 수 있을리가 없다.
통제도 되지 않고 빠르기만 한 기병대는 어떤 전술적 가치도 가지지 못한다.
심지어 포병이나 총병에게 노려지는 상황에서도 무리한 가속은 피하는 법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적은 굳이 그런 가속을 그것도 포위 당하기 직전에 시작했으며, 단순한 종심 대열이긴 하지만 무너지지도 않았다.
그렇게 일시적이지만 추격까지 뿌리치며 무섭게 돌진해오는 것이다.
지금 만프레트와 엘랑키아 기사들로 이루어진 종대 사이에는 아주 얕은 횡대를 한 그룬발트 기사들이 있을 뿐이었다.
탕탕! 탕! 타아앙!
콰지직, 콰앙! 펑!
타탕! 탕! 탕탕! 탕!
워낙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돌격 속도가 상상을 초월했던 탓에 대부분의 권총 사격이 너무 이르게, 혹은 늦게 이루어졌다.
기병전에서 권총은 다소 멀다 싶은 거리에서 사격하거나, 반대로 기다리가 완전히 가까운 거리에서 사격한다.
이는 지휘관 혹은 사용자의 경험 및 판단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일이다.
충분한 거리를 두고 사격하는 이유는 권총 사격을 마치고, 여유를 가지고 근접 무기로 대응하기 위해서이다.
반대로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사격하는 이유는 무기 전환을 포기하는 대신, 불안한 마상 사격의 단점을 상쇄하고 정확한 사격을 하기 위해서이다.
게다가 권총은 화약의 폭발을 견디기 위해 철과 나무로 견고하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제한적인 백병전 무기로 충분히 활용할 수 있기도 하고 말이다.
문제는, 엘랑키아 기사대의 평소와 다른 미친듯한 질주가 감각에 혼란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평소라면 충분했을 거리가 충분하지 못했고, 준비되지 못한 근거리 사격의 상당수는 허공으로, 혹은 땅으로 박힌다.
전투가 아니라 충돌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것처럼 돌진해오는 광기 어린 기세에 휘말리기라도 한 것처럼.
카앙, 까가각!
“허으윽!”
백병전을 앞두고도 속도를 줄이지 않은 엘랑키아 기사의 창 끝이 그룬발트 기사의 흉갑에 명중하자 창대가 산산히 깨져 나간다.
거리에 따라서는 총알도 막아내는 명품 흉갑이라지만, 날카로운 창끝에 실린 마상돌격의 기세는 일그러진 납탄 이상의 충격력을 보장한다.
그리고 아마도, 관통 당하지는 않았더라도 낙마를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거의 말 위에서 2미터나 밀려난 기사는 후열의 동료와 부딪치며 나동그라진다.
평소라면 양측이 격돌한 순간 돌진을 멈췄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다. 가로막는 적 기병을 쓰러뜨리고, 밀어내고, 피해가며 그대로 적의 배후로 돌파해 나간다.
가로로 길고 세로가 좁은 그룬발트의 방어진.
가로가 좁고 세로로 긴 엘랑키아의 돌격진.
“뚫었다! 뚫었다아!”
“가라! 그룬발트 우두머리를 박살내 버려라아!”
최선두에서 그룬발트 방어진을 갈아버린 엘랑키아 기사가 기진맥진한 자신의 군마를 옆으로 비키게 하며 후속하는 동료들에게 외친다.
기사도, 애마도 여러 발의 총탄에 명중당한 상태였다. 그 중 몇 발은 아마 맞은 줄도 몰랐을 것이다.
자신의 역할은 다 했다는 듯, 격렬한 충돌로 끝이 깨져 나간 데다가 적의 피로 젖은 기사검이 손에서 떨어져 내린다.
잠시 균형을 잃은 듯 했던 기사의 몸이 비명도 없이 낙마하고는 움직이지도 않는다.
잠시 후, 주인을 잃은 군마 역시 구슬프게 한 번 울더니 털썩 주저 앉는다. 그리고 주인의 시체 옆에 눕는다.
선봉의 이런 희생을 애도할 틈은 없었다. 그들은 자기 역할을 다 했다. 다음은 뒤 이은 기사들의 활약에 달렸다.
아니, 선두가 낸 길을 따라 돌격하는 행동 자체가 가장 확실한 애도일지도 모른다.
이제 그 애도는 절반 쯤 완성되었다.
디오보르크 공작과의 본대와의 거리가 절반 정도까지 좁혀졌기 때문이다.
만프레트는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지금 주군의 목을 따기 위해 돌진해오는 엘랑키아 기사들이 상식 밖의 존재라는 것을 인정했다.
수적으로 이쪽에 세 배 가까이 우세했던 전력비는, 엘랑키아 기사들이 방어선을 뚫고 돌진해 오면서 오히려 역전되었다.
이제 디오보르크 공작을 지키는 것은 개인 호위대 50여 명 뿐이다.
물론 1분, 아니 몇십 초만 버티면 배후에서 추격중인 그룬발트 기사들이 몰려올 것이다.
그런데 그 몇십 초를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퇴각이다! 퇴각하면서 공작 각하를 지켜라!”
가장 먼저 만프레트 본인이 말머리를 돌린다. 디오보르크 공작은 이미 저 앞에서 근접 호위 몇 명만 데리고 달리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