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60. 폴름스 전투, 셋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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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전 와중, 급조 창병 부대의 중대장 야로스 발렌켄드는 문득 전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해졌다.
지금까지는 정면만 막아가며 잘 싸우고 있었지만 혹시라도 측면이나 배후가 뚫린다면 큰일이다.
경험이 부족해 방향 전환 따위는 절대 불가능한 급조 창병 부대가 대응할 방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흐얏, 흐아압!”
“죽여!”
“으으으···.”
주변에서는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생각보다 잘 버티고 있었다. 확실히 어깨를 맞대고 싸우는 창병 밀집 대형의 안정감이 체감되고 있었다.
문득, 자신이 다른 전선 상황에 궁금증을 느꼈다는 것 부터가 전황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방증임을 깨달았다.
주변을 둘러보면 선두 전열은 대부분 창을 버린지 오래였다. 애초에 그렇게 될 것이라 예상했던 일이다.
하지만 후열은 굳건하게 창을 들고 선두 전열을 지원하고 있었으며, 이 탓에 여전히 그룬발트 기사들은 접근에 애를 먹고 있었다.
최소한 중장기병의 충격력에 대열이 쓸려 나가거나, 피해를 각오한 몸통 박치기에 당할 위험은 줄어들고 있었다.
인간보다 몇 배나 무거운데다, 위에 완전무장한 기사까지 태운 군마에 치이면 쇄골이나 갈비뼈가 나가는 건 당연한 일이고 전투 중에 넘어지면 목숨까지 위험하니까.
이런 위험에서 피할 수 있다는 점만 해도 상당한 가치가 있었다.
그러한 급조 야로스 부대의 치열한 저항은 전황을 새로운 국면으로 끌고 들어갔다.
“아, 저 놈들 말에서 내린다···.”
“어··· 어떡하죠?”
“어떡하기는, 평소랑 똑같이 해야지. 말에서 내린다고 갑자기 강해 지는 건 아니잖아.”
기병으로 공격하다 어설픈 창벽에 반복해서 막히자, 그룬발트 기사들은 말에서 내려 다가오기 시작했다.
갑주로 온 몸을 감싸고 값비싼 무기로 무장한 중기병들은 말에서 내리더라도 훌륭한 전투원은 분명했다.
게다가 말에 비해 사람은 부피가 훨씬 작으므로, 더 밀도있는 전투가 가능해졌다.
하지만 그들을 말에서 내리게 만든 것 부터가 상당한 소득이다.
만약에 여기서 돌파당한다고 하더라도 적의 기동력이나 충격력은 크게 줄어들었을 것이다.
이대로 백병전 외에는 큰 강점이 없는 애매한 보병 부대로 돌아다니거나, 일단 전투를 멈추고 후방으로 돌아가 내렸던 말에 다시 오르는 것이나 적에게는 손해일 테니까.
“조금만 더 버티자!”
“재장전! 저 새끼들 오기 전에 한 방 날려 줘!”
야로스는 이를 굳이 주변에 알리지 않았고, 알릴 필요도 없다 생각했다.
하지만 병사들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기사들이 말에서 내리기 싫었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었기 때문일까.
적이 싫어하는 일을 한다, 적이 싫어하는 일을 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다.
그게 전술의 기본이니까.
탕! 타당! 탕! 타탕!
“윽!”
“아악! 마,맞았어···.”
잠시 거리가 멀어진 사이, 양측이 보유한 화기는 다시 장전이 완료되었다.
거리도 애매하고 밀도도 낮은 산발적 화력 교환이지만, 그렇다고 안 쏠 수도 없고 사상자가 나오지 않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제와서 그 정도로 기가 질리기에는 서로 너무 많은 피가 흘렀다.
“신성 그룬발트 제국을 위하여!”
“디오보르크 공작께 제관을 바치자!”
낯선 억양으로 낯선 군주의 이름을 외친다. 다음 황제가 될 귀족이 적장이라더니, 그 자의 이름일까.
뭐 다른 나라 황제도 아니고, 황제 후보자의 이름까지 알기에는 세상이 너무 혼란스럽다. 딱히 뭐 알아봤자 존중해줄 것도 아니고.
“엘랑키아!”
“엘랑키아아아!”
그에 대응하듯, 급조 창병 대열의 아군 병사들도 함성을 지른다. 쩌렁쩌렁한 고함이 사방을 흔든다.
야로스는 용병은 이럴 때 좀 애매하다는 것을 느낀다. 뭐, 고용주는 계약이 유효한 동안은 섬기는 주군이나 다름 없으니까, 이럴 때 이름 정도는 불러 줄 수도···.
라고 생각하니 불현듯 떠올랐다.
자신은 용병인가? 용병이라면 엘랑키아 국왕의 신하이라고 할 수 있나?
애초에··· 어쩌다보니 랄렌 강 인근에서 간첩으로 조사 받다 풀려나고, 당장 호구지책을 위해 품팔이 일꾼으로 고용되었다가···.
어영부영 공병대를 따라서 폴름스까지 왔다가, 공성 포위 진지 짓는데 협력하다가···.
어쩌다 옛 상관인 첼레스티나 선임 중대장을 만나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인데.
아니 이게···.
갑자기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심지어 지금 그는 용병 계약은 커녕 원래 역할인 품팔이 봉급조차 못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 무슨 전쟁 자원봉사라는 말인가.
그것도 자신과는 하등 상관 없는 전쟁터에서.
나우데사야 피붙이 한 명 없더라도 이론상 고향이기라도 하지, 엘랑키아도 그룬발트도 일절 상관없는 나라의 전쟁일 뿐인데.
“적이 온다! 다리에 힘 꽉 줘!”
“엘랑키아 왕국을 위하여!”
“다고베르 2세 폐하 만세!”
“엘랑키아아아아!”
적이 공격해오는 바람에 야로스의 생각은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억울한 마음은 들지만 여기서 빠질 수도 없는 게 현실이니, 일단은 살아 남고 봐야지.
그래도 전투가 끝나면 첼레스티나와 처우 문제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야기를 해 보긴 해야겠다.
애초에 이 난전 한 가운데에 막중한 책임과 함께 몰아넣은 것도 그녀가 아니었던가! ···물론 절반 정도는 어영부영 휘말린 자기 책임도 크긴 하겠지만.
“흐아아아아압!”
유난히 키가 큰 그룬발트 기사가 돌진해온다. 갑옷 때문인지 덩치도 보통이 아닌 것 같다.
“하압!”
총병은 뭐하나, 이런 놈 가까이 다가오기 전에 쏴 죽이지 않고.
카앙!
검으로 빗겨내려 했는데, 기세와 힘이 너무 크다보니 맘대로 잘 되지 않았다.
“크윽!”
“흐아압! 죽어라!”
다시 몇 번 무기가 부딪친다. 난전 중에 뒤로 물러설 공간도 없으니 모두 막아내는 수 밖에 없었다.
굉장한 힘이었다. 손목이 얼얼했다. 코등이의 황동 코팅이 떨어져나가 안쪽의 강철 부분이 보인다.
“네놈··· 그 무기!”
“...뭐?”
갑자기 적 기사가 공격을 멈추더니 말을 멈춘다.
“확실하군! 그 무기, 장검은 나의 사촌, 보타르의 무기이다! 폰 뤼티거 가문의 가보가 아니더냐!”
아마도 야로스가 들고있는 무기에 대해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검의 원래 주인 따위는 모른다. 슈뵈켄 마을의 포병 진지에서 혈전을 벌이던 와중, 참호 바닥에 굴러다니던 무기를 주웠을 뿐이니까.
“글쎄, 전투에서 주운 무기라서 잘 모르겠군.”
“보타르는 뛰어난 기사이다! 네 녀석 따위에게 죽임을 당했을 리가 없다. 분명 비겁한 수를 썼겠지! 더러운 엘랑키아 용병 놈!”
그 말에 이상하게 발끈하게 되는 야로스였다. 이 전투 직전에 했던 생각 때문일지.
아마도 보타르인가 하는 그 기사는 아마 총이나 대포에 맞아 죽었을 가능성이 높겠지만.
금방이라도 덤벼올 것 같던 상대는 계속해서 말을 걸어온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뭐?”
“돈에 명예를 파는 용병놈일지라도 이름 정도는 있을 게 아니냐!”
“야로스 발렌켄드다. 지금은 중대장 일을 맡고있다.”
“이 헤어브롬의 남작 라우센! 야노스 발렌켄트를 쓰러뜨리고 폰 뤼티거의 보검을 되찾아 사촌의 영전에 바치겠다!”
“...가져가 보거라.”
평생 전장에서 통성명을 하고 결투를 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상대는 이름도 틀리게 불렀지만 정정해주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아무튼 왠지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한 마디 해주자 라우센 남작이라는 기사는 엄청난 기세로 무기를 휘두른다.
평범한 상단 공격이지만, 속도나 힘이 예사롭지 않았다. 어설프게 막았다가는 검이 부러지거나, 막은 그대로 투구까지 쪼갤 기세였다.
캉! 까앙!
오히려 반 걸음 앞으로 나서며 공격을 빗겨낸다. 검을 양손으로 붙잡고 휘두르던 상대는 갑자기 거리를 좁히자 당황한 듯 자세가 흐트러진다.
“흐음!”
“억!”
상대는 놀랍게도 검을 바짝 당겨 상체를 보호하는 자세 그대로, 오른발을 들어 발꿈치로 야로스의 발을 밟았다.
미리 눈치채고 간발의 차로 발을 빼지 않았다면 발등이 으스러졌을 것이다.
고리타분한 기사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실전에 익숙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거, ‘기사’라면 좀 비겁한 방식 아닌가?
“제법이군! 여러 전장을 떠돌면서 싸웠지만 이걸 피하는 놈은 처음이다.”
“전장을 떠돌아? 그럼 너도 용병이란 말 아니야?”
“다르다! 명예와 영광을 찾아 편력했을 뿐, 금전은 부차적인 문제일··· 윽!”
이번에는 이쪽이 비겁할 차례엿다.
상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칼날을 짧게 쥐고 찌른다기보다 후려치듯 휘두른다.
“비겁한··· 역시 비겁한 용병 놈과 통성명 따위를···.”
타앙!
“컥!”
찡그러진 얼굴로 욕지거리를 하려던 듯한 상대, 라우센 남작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의 흉갑에는 큼직한 구멍이 뚫려있었다. 야로스가 방금 공격으로 거리를 벌린 사이, 바로 옆에서 장전을 마친 총병이 근거리 사격으로 명중시켰기 때문이다.
“비··· 겁···.”
그 말을 유언으로 덩치가 큰 기사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무너지듯 쓰러진다.
“후우···.”
야로스는 기사를 쓰러뜨린 동료 총병과 눈 인사를 나눈다.
그걸로 끝이었다. 악수 따위를 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야로스는 다음 상대를 찾고 총병은 재장전을 시작한다.
원래 전장은 그런 법이니까.
강적을 하나 쓰러뜨리기는 했지만, 공격을 계속하는 그룬발트 군의 기세는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앞으로가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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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우리가 완전히 이기고 있는 게 아니오?”
전령들의 보고를 받으며, 디오보르크 공작은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여기에는 만프레트도 어느정도 동감한다.
비록 작은 전장이었지만, 상황은 원하는 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좌측 불리한 전장은 적을 확실하게 묶어두고 있었으며···.
우측 호각인 전장은 조금씩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적 기병은 분명 이미 격렬한 전투를 치룬 이후가 분명했다. 적 군마들의 다리가 떨리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중앙은 완벽한 우위에 있었다. 보병과 기병의 협공, 적 보병은 완전히 수세에 몰렸고, 대열 중앙이 끊기기 직전이다.
이대로 싸운다면, 분명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기 전에 토막낼 수 있겠지.
“더욱 밀어붙여서 적을 격멸하는 게 어떻겠소!”
디오보르크 공작의 흥분은 이해할 만 했다.
하지만 이 작은 전장은 말하자면 전체 전투의 부록과 같았다. 여기서 이긴다고 북부 전선 자체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기에는 이미 늦었으니까.
빠른 시간 내에, 그리고 안전하게 병력을 후퇴시켜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 없었다.
이 작은 승리의 기세는 그러기에 좋은 구실을 마련해 줄 것이었다.
“무엇보다··· 엘랑키아 국왕은 이 전장에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공작님.”
“이런··· 군주 된 자로서 나를 도발해 놓고 이리 농락을 한단 말이오?”
“하지만 공작께서는 ‘엘랑키아 국왕을 패퇴시킨 자’가 되시지 않았습니까?”
“흐으음···.”
디오보르크 공작은 다소 실망한 듯 하였으나, 만프레트의 말이 위안이 된 모양이었다.
만프레트도 디오보르크도, 이 ‘도발’의 끝에 엘랑키아 국왕이 반드시 있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하지만 만프레트 조차도, 만약 진실이라면 ‘엘랑키아 군의 총사령관’을 붙잡아 불리한 전황을 뒤집을 중요한 카드로 생각했기 때문에 도발에 응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흐지부지 끝난다고 하더라도, 도발해놓고 몸을 피한 엘랑키아 국왕에 대한 소문은 빠르게 퍼지게 되리라.
아군에게도, 적군에게도. 이는 분명 장기적으로 이득이 될 일이었다.
그러니 이 기묘한 촌극은 결코 무의미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제는 빨리, 그리고 안전하게 병력을 후퇴시키고 다음 단계를 생각해야···.
“좌전방! 좌전방을 봐 주십시오!”
“뭐?”
“일단의 기병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엘랑키아 기사대입니다!”
“공작 각하를 지켜라!”
다소 느슨해져있던 그룬발트 최후열 기사들이 긴장하고 움직이기 시작한다.